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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6일 일요일

경쟁의 비용 / 사이먼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사이먼(Herbert Simon 1916~2001 )은 이전까지 경제학을 지배해왔던 기계적 합리성이, 경제주체인 인간이 가진 불완전한 정보, 인간의 본성이 내포하고 있는 비합리적인 충동과 비일관성에 의해서 제한받는다는 '제한적 합리성(bounded rationality)'라는 개념을 제시한적이 있다.

언젠가는 내 주변의 인적교류에 관해서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었다. 왜 어떤 사람은 만나면 기분이 안좋은지 곰곰히 생각해봤다. 그러고는 인간관계의 기본 바탕이 남과 비교하는데서 시작된 우월감과 열등감으로 가득찬 지인들과의 교류를 제한하기 시작했다. 짧은 인생인데 주변인들과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철학적인 의도가 있기도 하지만 능률성 문제를 생각해도 썩 좋은 일이 아닌것 같았다.

우선 경쟁과 비교는 협력이 필요한 인간관계를 적대적으로 만들어서 사회비용을 발생하게 하는것 같기도 하고,  마음의 여유를 빼앗아 창조적인 지적행위(知的行爲)를 방해하기도 하는것 같다.

경쟁이란 개념은 원래 인간이 합리적 사고를 한다는 가정으로 탄생한 개념이다. 상당히 '비합리적'이었던 시대를 '과학'이란 이름으로 종식시키던 시절에 탄생한 경제학과 같은 사회과학의 파라다임이기도 하다.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가 호응을 얻은 배경도, 계량적인 비용편익분석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경제학이 탄생한 배경도 '과학적 분위기'에 힘입은 바가 있는것 같다.

그러나 사이먼이 생각하는 것처럼 인간이란 합리성을 추구하는 비합리적인 존재임을 인정할수밖에 없을것 같다. 사이먼은 수학, 심리학, 통계학, 경영학등 다방면에 정통한 통섭형 인간으로서 인간이란 현 존재 또는 인간이 추구하는 것들이 생각보다 다양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학리화(學理化)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

때로는 계량적 합리성이라는 시대정신의 문제점을 이념이나 종교같은 내면적인 관념으로 대체시킬려는 사회적 시도도 보이지만 인간을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이념이나 종교 자체의 문제가 해결 안된 면이 있는듯 하다.

모든 성인들도 말한 바 있지만 경쟁은 자기자신과 해야 되는 일인듯 싶다.

2013년 9월 30일 월요일

공동체의 가치 / 아렌트




부산에서 60대의 여성이 숨진지 5년이 되는 시신으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이다. 기초수급대상도 되지 않아서 사회복지공무원 조차도 찾아갈 일이 없었으니 국가나 사회공동체의 일원들이 모두 책임을 면하지 못할 일인듯 하다.

"보이지 않는 정부가 어두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을 만들어낸다."는 독일의 정치학자 아렌트(Hanna Arendt 1906 - 1975)의 말처럼 정부의 관심이 닿지 않는 곳에서 스러져가는 불운한 삶이 어딘가에 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2차대전이 끝나고 나치의 유태인학살에 대한 사후처리와 전범재판이 이루어지고 있을때 세계는 나치의 만행에 대한 비난과 유태인에 대한 동정의 여론이 크게 확산되고 있었다. 그러나 유태인 출신인 아렌트는 유태인 책임론을 들고나와 수천년동안 국가를 이루지 못한 유태인들의 반성을 촉구했다.

아렌트에 따르면 유태인은 수천년동안 타국의 재정을 관리하면서 부를 축적하는 노하우를 쌓아왔는데, 결국 타민족국가의 권력의 보호를 받으며 성장시킨 부로 인하여 유태인을 사회에 기여하지 않고 부를 탐내는 수전노로 인식되도록 했다는 것이다. 유태인들이 이런 상황을 빨리 인식하고 국가를 결성했더라면 막을 수 있는 참사를 막지 못한것이 유태인의 실수라고 말한다.

아렌트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공동체에 속하여 권리와 의무의 상호작용을 꾸준히 유지하는데 있다고 말한다.

전쟁난민, 불법취업자와 같이 정부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어두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말고도 한 국가공동체의 테두리 안에서도 참사가 일어났다는 사실은 많이 불행한 사태인듯 하다. 아직도 우리세대까지의 시민들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권리나 의무에 관한 인식,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되는 행복이나 불행에 대한 인식보다는 공동체와는 완전히 별개의 개체로서 '나만의 행복', '나만의 승리'를 탐하는것 같다.

공동체와 개인이 서로 관심을 가지는 사회는 좌파적인 사회도 아니고 전체주의나 국가주의 사회도 아님이 시민들에게 인식되어야할 것 같다.

2013년 9월 28일 토요일

한국에서 빈사상태가 된 생산자들


언젠가 공무원인 지인과 사기범죄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세상에 정당한 근로와 거리가 먼 사기가 만연해 있다는 이야기가 오고 가고 있었는데, 대화중 공무원이란 직업의 안정성이 역설적으로 사기범죄와는 거리가 먼 청정구역을 만들었다는 지인의 공무원에 대한 변론이 있었다. 실제로 한때 친했던 공무원인 지인은 나를 포함한 공무원밖의 세상을 자신의 안정된 생활을 침해할 가능성이 있는 존재로 인식하는 바람에 영원히 인연이 끊어진 경우도 있었다.

공무원의 내집단화를 비평하고자 글의 서두를 이렇게 시작한것이 아니다. 실제로 공무원의 안정성은 국민 모두가 지향해야할 '이상적인 삶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생산성의 바탕이 될 수 있다는것은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는 문제다.

니스카넨(W.A. Niskanen)은 비지니스맨들이 수익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투쟁하듯이 관료들은 월급이나 특전, 권력, 권위, 퇴직후의 조건등을 위해서 투쟁한다고 말한다. 이런 조건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관청의 예산을 확장하는 방법으로 권력을 얻어내는데, 이번 정부의 대통령도 임기 초반에 공무원의 협조를  크게 구했을 정도로 단기적인 임기의 정치지도자가 장기적인 임기를 가진 관료들을 통제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것 같다. 언젠가 러시아 황제가 "러시아는 짐이 아니라 1만명의 서기들에 의해서 다스려진다."고 말했을정도로 1차적인 생산성이 아닌 세금을 소비하는 2차적인 생산성을 가진 관료들의 힘은 막강하다.

그렇다고 정치적인 집단이 관료들의 성향과는 반대로 국민에게 이익이 되는 게임만 한다는 보장이 없다는 사실을 한국의 지난 정부의 4대강정책과 같은 예산을 낭비만하고 생산성이 전혀 없는 것으로 입증된 실책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공익과 헌신이라는 정치의 본래 목적을 찾아 복지에 예산을 투입할려고 해도, 이미 정치적 비지니스에 희생된 예산은 시차를 두고 정부를 괴롭히고 있는듯 하다.

복지라는것이 수혜자인 국민의 입장에서는 무척 필요한 것이다. 삶에서 공무원과 같은 안정성을 얻어낸다는것이 개인에게는 무척 소중한것이다. 미래에 대한 확신과 희망이 일터로 나가는 아침공기를 새롭게 해줄것이기 때문이다.

결국은 예산이 필요하다. 쉽게 표현하면 돈이 중요하다. 그 돈은 쾌락적인 소비를 위해서 욕망의 노예를 만드는 타락한 돈이 아니고 건전한 생산성을 통해서 얻어낸 건강한 돈인듯하다. 정부는 어떻게든 복지예산을 만들어내어 국민들의 생활에 이바지해야할 의무가 있지만 예산을 구성하여 재정적자를 이룬들 후대의 세대까지도 건강한 돈을 만들어내야하는 시달림을 받게 될것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가끔은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이 생산성이 있는 일터에서 살고있을까. 어떤 정치지도자는 국가의 예산을 재생산을 전혀 하지 못하는 곳에 투입한 일로 비난받으며 골프를 치러 다니는 장면이 목격 되기도 하였다. 골프장에 캐디도 부가가치를 생산하고, 어제는 인근 골프장에서 경비를 구한다는 생활정보지 광고도 있었다. 낮에 스타벅스에 앉아있다가 밤에 출근하는 국민도 모두 생산의 현장에 있다.

예산이 처음으로 만들어지는 곳을 한강의 근원인 황지연못을 찾아가듯이 찾아가보면 그곳엔 2차산업의 생산현장이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세계에 무역활동이 멈추었을때  무역 의존도가 높은 한국이 타격을 입는다면 생산현장에서 문제는 시작되고, 세계에 식량기근이 왔을때, 한국인이 굶는다면 한국의 농업에서 문제가 시작된다.그러나 생산자들은 무기력하다. 정치적 게임에 몰두하는 사람들을 위해서,권력이나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을 위해서,그 외 3차산업이 발달한 선진경제구조의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증권시장, 부동산중계, 법률서비스등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돈의 원천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한다.

생산현장을 둘러보면 환경의 조악함에 입을 다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대기업 근로환경은 좋은데 안정을 보장받지 못하고, 영원히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돈의 원천인 비정규직이 너무 많다. 대기업의 하청업체나 협력업체인 중소기업은 근로여건이 나쁘고, 국민모두의 꿈인 안정을 보장받지 못한다. 언젠가 없는 살림에 사치품을 하나 샀더니 무척 아쉬워했던 어머니의 마음처럼 이익없이 낭비된 예산이 중소기업의 근로환경이나 근로자의 복지,시설설비에 투자되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정치인들이 얼마나 있을까. 이런 생각이 이념의 문제일까. 저런 조악한 환경에서 근로를 할려니 차라리 정신을 놓고 말겠다는 사람도 많이 보았는데, 어떤 젊은이는 군대가 행복했다고 하더라.   

한국의 성장동력이 멈추고 5년째 세계15위의 경제규모로 머물고 있는 까닭은 돈강(러시아의 돈강이 아니라 돈이 흐르는 강)의 발원지에서 돈이 만들어지지 않은 시차적 결과인듯 하다.


2013년 9월 27일 금요일

허상(虛狀)을 실상(實狀)으로 / 아들러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이자 심리학자였던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 1870 - 1937)는 어린시절 학교앞 공동묘지를 지나가는것을 매우 두려워했다. 유전적인 질병으로 구루병을 앓아서 죽을뻔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죽음의 세계랑 친근한 공동묘지가 자신에게 의미있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서 의사가 된 아들러는 자신의 기억속에 존재했던 공동묘지는 원래 없던거라는것을 알게 되었다. 아들러의 기억외에는 어느 누구도 그 공동묘지를 본 사람은 없었다.

여기서 아들러는 사실  그 자체보다도 인간의 주관적 인식이 인간의 행동에 더 큰 영향을 주고 있다는것을 알게 되었다.

가끔 신앙심이 깊은 지인들에게 풍부한 상상력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없던 일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자신의 생각속에 고착시키곤한다. 때로는 긍정적으로 작용하여 인생의 밝은 비전으로 자리잡는 경우도 있지만, 어두운 기억들이나 비현실적인 정보들과 결합하여 평범하지 않은 사건과 인격을 낳기도 하는것 같다. 고요한 기도의 시간에 자신을 돌아보는 반성과 각오대신 인내가 수반되지 않는 기대와 상상이 자리잡는다면 문제가 될 수 있겠다 싶다.

게다가 평생 받아들여야 하는 정보는, 어떤 한 종류의 일관되거나 편향된 성향을 지님으로써 다양하고 비판가능한 사고의 훈련을 방해하는 문제가 있는것 같다.

신앙심깊은 지인이 한 가지 일을 끝내지 못하고 뭐든지 될것 같은 비전만 가지고 이일 저일 방황하는 모습을 보며, 또는 어린시절 마음의 상처를 준 사람의 모습을 자신의 주변인들에게 쉽게 찾아내어 회피하는 모습을 보며,크게는 정치적인 상상력과 종교적인 상상력이 결부되는것을 보며 허상을 실상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인내와 노력이 필요하다는것을 느낀다.

요즘 대학생들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반기문 사무총장이나 법정스님이라고 한다. 흔히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비전을 가지고 폭발적으로 현실화 시킨 분들은 아닌듯 하다. 조용하고 성찰하는 분위기의 멘토를 기대하는 심리가 반영된듯 하다. 한 편으로는 이념이나 종교가 주는 상상력에 취해서 허상을 쫓아 살아오던 습관을 가진 시민들의 사고가 점점 냉철해지는것 같은 생각이 든다.

살다보면 편히 가고자 할때 더 힘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인내심과 노력이 없는 상상력은 몽환적인 비전을 준다. 될것 같은데 안 이루어진다.

아들러는 병약한 신체적 콤플렉스에 좌절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여 정신과 의사가 되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내면적인 성찰을 통해서 자신의 내면을 정신연구의 기반으로 삼았다. 그래서 그런지 아들러는 열등감을 극복하는 태도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2013년 9월 23일 월요일

북한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선택과 존엄


북한의 퍼스트레이디인 리설주의 추문에 관련된 기사가 한국언론에서 보도되자 북한정부는 최고의 '존엄'을 해한 부당성을 성토하고 나섰다. 그만큼 북한으로서는 정치지도자의 존엄이 북한체제를 지탱하는 구심점이라는 사실을 입증한 셈이 된다.

북한은 과학적 사회주의나 주체사상과 같은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선택하면서 부차적으로 정치지도자의 존엄을 부각시켜서 인민을 통제하는 구심력을 견고하게 확립해온듯 하다. 과학적 사회주의를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선택한 모든 공산국가들이 이데올로기의 정당성을 잃어버리자 무너지고 말았는데,개인적인 수명이 짧은 지도자에 대한 우상화를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선택한 북한은 아직도 체제를 유지하고 있으니, 북한 지도부의 입장에서는  '현명한'선택을 하였다는 판단을 할법하다.

짧은 지도자의 생물학적인 수명을 혈연적인 승계로 보완하면서 체제를 유지하는 정치적 기술은 탁월한 면이 있는데,지도자가 바뀔때마다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견고하게 다지거나 유지하는 작업에 많은 국가에너지를 소비하는 '비효율성'을 생각하면 인민을 위한 경제발전을 우선의 과제로 삼은 현 북한정부의 결의가 무색해 보인다. 

터키의 지도자 캐말파샤는 자신에게 시스템이 집중되는 구심력을 확보했지만 '터키민족의 부흥'이라는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선택을 함으로서 좀 더 영속적인 터키민중의 지지를 얻게되고, 국가와 사회에너지의 낭비를 막은 효율성이 있었던것 같다. 더구나 개인이 오랜 구심점으로 역할을 하면서 일어날수있는 '혈연적인 승계'를 피하기 위해 자식도 따로 두지 않을정도로 장기적인 판단을 하였다고 한다.

터키는 아직 중동의 강국으로서 행세하고 있고, 케말파샤에 대한 터키국민의 사랑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북한의 전 지도자였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던 '통이 큰 정치'나 '강성대국'등의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현 지도자인 김정은은 다시 생각해봐야할듯 싶다. 지도자의 영속성이 국가시스템의 영속성을 견인하는것이 아니라 국가시스템의 영속성이 지도자의 영속성을 견인하는 현실을 빨리 이해해야할 필요가 있는듯 싶다.

최고의 존엄은 통일되거나 적어도 통일에 가까운 협력에 이른 한반도 민중의 영속적인 평화가 아닌가 싶다.  

2013년 9월 21일 토요일

정치사상과 휴머니즘 / 칼 슈미트


엘리자베스 1세의 신하였던 필립 시드니(1554-1586)는 외숙부인 레지스터를 따라서 스페인과의 전쟁에 참가하고 있었다. 당시 영국은 신흥국가로서 스페인이라는 대국을 맞아서 네덜란드지방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시드니도 이 전투에 참가해서 싸우다가 다리에 중상을 입고 출혈때문에 목이말라 물을 청했다.가져온 수통의 물을 마시려고 하는데, 옆에 빈사상태로 후송되어 온 한 병사가 물끄러미 시드니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드니는 물통을 병사에게 건네주며 "그대에게 더욱 필요한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시드니의 친구인 플크 그레빌이 증언하였다.

어느 날 간디가 기차를 타다가 신발 한쪽이 벗겨진 채로 기차가 출발하였다.  간디는 나머지 한 쪽 신발을 차창 밖으로 던졌다. 동행인이 놀라서 그 이유를 묻자 간디는 "서로 나누어진 신발 한 짝은 누구에게나 쓸모가 없지요. 그렇지만 저렇게 두 짝이 되면 누구에게나 쓸모가 있게 되지요.가난한 사람이 줍는다면 더욱 좋은 일이겠지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독일의 정치학자이며 헌법학자인 칼 슈미트(Carl Schmitt 1888 ~1985)는 적과 동지를 구분하여 '우리'라는 동질성을 가진 집단의 결속력을 다져가는 방식이 민주주의라고 한다. 당시 독일은 칼 슈미트의 이론에 의거하여 반유태주의나 범 게르만주의의 동질성을 추구하면서 내부민주화를 다지게 되었다.

어쩌면 위에 예시한 시드니도 외부집단인 스페인과의 전쟁을 통해서 동료애를 발휘하는 기회를 얻게되어 자신을 희생하는 민주주의적 가치를 보여주게 되고, 간디도 훗날 영국의 식민주의에 저항하는 지도자로서 인도민족에 대한 동료애를 보여주며 민주주의적 가치를 실현했다고도 할 수 있을것 같다.

그러나 칼 슈미트는 '인간성(humanity)'이 정치의 바탕이 될 수 없는 이유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이유란 인간성이란 처단해야 할 외부의 적 즉 동지가 아닌 집단을 처단할 수 없는 논리를 제공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칼 슈미트에  따르면 시드니의 동료애가 더 큰 인류애적인 범위에서 발휘되거나 간디의 무저항 비폭력주의는 대단히 "비 정치적인 행위'로 오해 받을 수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대단히 칼 슈미트 다운 발상인듯 하다. 칼 슈미트는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휴머니즘이라는 개념과 동등한 위치에 놓음으로서 둘의 가치를 대립시켜서 민주주의 같은 정치적인 가치가 휴머니즘 같은 더욱 근본적인 가치를 압도하도록 하는 나쁜 전통을 만들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당시 독일뿐만이 아니다. 미국에서도 냉전시대에 정치적인 적이였던 공산주의가 무너지자 911사태를 도화선으로 이슬람세계를 정치적인 적으로 여기기 시작하였는데,이면에 불의나 테러에 대한 인간적인 혐오같은 휴머니즘의 감정은 정치적인 관점에 밀려서 서서히 표면에서 자취를 감추는 문제가 생기는것 같다. 물론 한국도 예외가 아닌듯 하다. 이념적인 정치적 갈등이 민주주의란 명분으로  정치의 주된 관점으로 휴머니즘을 압도하고 있는 기간이 무척 길다는 생각이 든다.

민주주의란 가치는 휴머니즘이란 가치와 결코 동등한 위치에 놓을 수 없는 개념인듯 하다. 휴머니즘이 보다 근본적이고 포괄적인 가치로서 민주주의란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칼 슈미트를 비롯한 정치학자들이나 정치적인 인물들과 정치적인 사건들은 오랫동안 정치적인 명분을 위하여 휴머니즘을 희생시키고 있었던것 같은데, 호전적이고 불안한 상황을 겪은 현대민주주의의 고민이라고 할 수 있을것 같다.  

역사에 가정이란 없지만 아담스미스가 인간은 무조건 이기적이라는 가정만 하지 않고, 휴머니스트인 인간을 가정했다면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가 발 붙일 수 있는 여지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아마 인간을 생각하는 경제이념이 탄생하여 극단이 반대편의 극단을 낳는 오류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많은 실패를 겪어야 합의점을 끌어내는 인간의 무지(無知)와 그 무지를 학문적인 포장으로 선동하는 학자들의 죄가 큰것 같다.


2013년 9월 12일 목요일

치유되지않는 사회의식 / 융


스위스의 정신의학자 융(1875~1961)의 병원에 망상형분열증 환자가 나타났다. 이 환자는 융을 창가로 데려가서 "태양에는 페니스가 있으며, 그것이 움직임으로 인해 바람이 생긴다." 라고 말하였다. 4년이 지나서 융이 로마시대 미트라교의 기도서를 읽다가 같은 문장이 있는것을  발견하였는데, 그 남자의 교양수준이나 기도서가 출판된 년도를 생각하면 그 남자가 기도서를 읽을 확률은 없었다.

융은 위와같은 사례를 연구하면서 모든 사람들에게는 공통된 이미지나 주제를 품고있는 마음의 층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그것을 보편적 무의식이라고 칭하였다.

요즘 들어와서 한국사회에서 이념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한국사회의 보편적인 무의식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육이오가 가져다 준 상처가 오랫동안 국민들의 무의식속에 자리잡은 이유도 있겠고, 지배와 피지배관계로 인한 상처가 오랫동안 국민들의 무의식속에 남아있는 까닭에 전자는 우파라는 명분으로, 후자는 좌파라는 명분으로 표출되기도 하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종교또한 경제적인 위상에 비해서 대단히 초합리적이고 비현실적인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은데, 과학적인 물질문명이 국민들의 의식속에 늦게 자리잡은 이유라는 생각이 든다. 종교와 관련된 면에 있어서는 신도라는 명목으로 귀신을 숭배하는 일본국민도 초합리적인 모습을 띄는 경우가 많은데, 한국이나 일본의 근대화기간이 짧은 만큼의 깊이인것 같다.

생각해보면 메시아에대한 기대는 역사적으로 한국만큼 간절한 나라가 없었던듯 한데, 과거에는 미륵신앙이라는 모습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현대에는 이념이라는 모습으로 표현되기도 하는 것 같다. 그 이면에는 수많은 외침과 싸우거나 계급적인 사회구조로 고통받던 민중들의 무의식이 면면히 표출된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념과 종교같은 내면적인 구속을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승화시키지 못하는 국민들에게 정부기관이나 지식인 또는 종교인들이 앞장서서 우파나 좌파의 영원한 대립, 망상적인 종교활동같은 '치유불가능한 상태'로 몰아가는 일은 없었으면 좋을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