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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9일 일요일

마샬계획(Marshall plan)과 북한의 철도


어렸을때 한국의 철도망이 잘 건설된 지역에 살았다. 부친이 태백이나 정선등지의 광산에서 자동차품을 팔았던 이유로 그 지역에서 지냈는데, 당시 철도는 광산 지역에서 어쩌면 유일한 운송수단이었다. 산업철도는 태백, 정선지역의 높낮이가 심한 지형을 극복할 수 있는 교통수단으로서 적은 비용으로 많은 물류를 수송하는 역할을 충실히 해내었다. 기차를 탈때면 대형 디젤기관차에 씌여진 양손바닥그림위에 올려 놓은 '받들자 미국의 힘'이라는 글이 인상적이었는데, 미국의 원조로 들여 온 기관차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윙윙 거리는 전기기관차의 엔진소리도 인상적이었는데, 70년대에는 다른 지역과는 달리 가장 생명력이 넘치는 지역이 강원도 남부의 광업지역이었다. 그 당시 매우 어렸음에도 그곳에서 정선선을 연장하기 위해 건설중인 광경도 기억을 하는데, 저 철도가 어느 미지의 세게로 자꾸 뻗어나가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산으로 둘러쌓인 지역을 벗어나는 꿈을 꾸곤했다. 조만간 북한에서 어느 어린이가 비숫한 경험을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부친에게 북한의 부전고원의 인클라인 철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곤했는데, 험한 지형을 극복하기 위한 철도 방식이 한국에도 여러 군데 있었다.   

북한의 경제성장은 철도 인프라의 건설로 시작될 것 같다. 한국정부가 북한의 철도에 가장 먼저 신경을 쓰는 이유는 북한 내부의 물류수송을 위해서도  시급한 문제지만  한국과 러시아 중국, 나아가서는 유럽과도 연결되는 '개방적 한반도'를 만드는 일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일 것이다. 말하자면 유럽과 같은 선진 개방사회를 만드는 초석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어느 날 이스라엘 경제가 어려워지자 이스라엘 각료회의에서 이스라엘의 전함을 미국으로 보내어 미국의 뉴욕을 폭격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그러면 미국은 이스라엘과 전쟁을 할 것이고 이스라엘이 패할 것은 확실하고 미국은 마샬 플랜과 같은 경제원조를 하여 이스라엘을 부흥시켜 즐 것이라는 의견이었다. 물론 유머다. 마샬 플랜으로 서유럽 경제(특히 미국과 전쟁을 한  독일경제를 비롯하여) 가 크게 성장하였음을 풍자한 유머다.

Least we forget (some Europeans don,t always remember), it was American generosity that got the European unification movement off the ground. President Harry Truman's secretary of state, George C.Marshall, in a speech at Harvard University on June 5, 1947, proposed  a huge United States investment in Europe's recovery. It was not all altruism, to be sure : the American administration feared that communist parties would gain control over European countries west of the Iron Curtain, and helping Europe recover economically would pay huge dividends polically as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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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ropean enthusiasm for the Marshall Plan grew from the realization that it would have political as well as economic consequences. By enmeshing all major European states in this multinational scheme,  the risk of a third war would be minimized, and Europe could set about its recovery under the security of the military 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NATO). The Marshall Plan commenced in 1948 and the protective shield of NATO took effect in 1949. Now it was up to the European to convert their good fortune into lasting cooperation and to accept a rehabilitating (West) Germany as part of the mission.

잊지 않기 위해(유럽인들이 이를 기억 못할 때도 있지만) 첨언하자면, 유럽 통합 운동이 이륙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아량 덕분이었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 직속 국무장관이었던 조지 C. 마셜(George C.Marshall)은 1947년 6월 5일 하버드 대학 연설에서 미국이 유럽의 복구에 대규모 투자를 할 것을 제안하였다. 분명히 이는 순수한 이타심에서 나온 제안은 아니었다. 미국 행정부는 철의 장막 서쪽의 유럽 국가에서 공산당이 통제권을 잡을까봐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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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은 마샬 플랜의 경제적 이점은 물론 정치적 중요성을 깨닫고 여기에 열성적으로 임했다. 유럽의 주요 국가 전부가 하나의 다국적 전략망으로 묶이면 3차대전의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었고, 유럽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보호 아래서 복구 작업을 진행 할 수 있었다. 마셜 플랜은 1948년에 시작 되었으며 나토의 보호막은 1949년부터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제 그들에게 찾아 온 영구한 협력으로 발전시키고 (서)독일의 재활을 그 사명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일은 유럽인들의 몫이 되었다. 

- Harm de Blij의 [WHY GEOGRAPHY MATTERS]중에서-

어쩌면 북한의 철도개혁과 한국의 협조는 정치적 문제를 넘어서는 양국의 생존 문제와 직결될 수 있다. 경제적 이익추구를 넘어선 최소한의 필요조건임을 양국은 잘 알고 있는듯 하다. 흔히 한국의 대중정치의 반대편 논리에서 표현하는 무조건 퍼다주는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성공적이었음을 인식하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개발 논리를 한국과 북한의 절실한 필요에 의해 이념을 넘어선 다른 성격의 정부에서 재현되고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가능한 많은 대중들의 지지가 필요하고 또 지지를 받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매우 성공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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