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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7월 10일 금요일

단순한 사회의 결말 / 알튀세



북한사회가 낙후되어 가거나 한국사회가 정체되어 가는 원인은 복합적인 사회구조를 인정하지 않는 철학(이념)이 바탕이 되었음을 항상 토로하곤 하는데, 복합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문제는 정치철학인 이념뿐만 아니라 때로는 독단적인 성격의 종교철학에서도 보이는 문제점인 듯 하다. 특히 유일신을 믿는 종교일수록 배타적인 근본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은 숙명인 듯 하다. 그것은 유일신을 숭배하는 분위기로부터의 소극적 습관이기도 하고, 나아가서는 IS와 같이 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적 때문이기도 한 듯하다.
 
이념이나 종교, 또는 경제문제 등을 마르크스나 헤겔같은 철학자는 현상이냐 본질이냐 하는 이원적인 구도로 해석하지만 프랑스의 마르크스철학자인 알튀세(louis Althuser 1918 1990)는 사회는 복잡성과 다양성을 가지고 있으며,국가이념이나 법이념, 정치이념과 같은 상부구조에도 상대적인 자율성과 독자성이 있다고 한다.
 
좀 더 쉽고 구체적인 생활과 연관시켜 표현하면 흔히 한국사회에서 많은 이들이 지향하는 권력이나 재산증대욕구같은 것들은 헤겔과 마르크스 이념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헤겔이 말하는 변증법에 의한 새로운 정신의 출현, 마르크스가 말하는 물질생활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정신세계인 이념의 발생등은 모든 다양한 관심을 흡수하여 단조롭게 재편하고,공산주의나 자본주의 같은 이념대립의 색체를 더 선명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공산주의냐 자본주의냐 하는 단조로운 관심사는 정치권력이냐 재산이냐 하는 구체적인 성질을 띈 목적으로 변하여 한반도의 민중들의 관점을 붙들어 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훨씬 세련되고 다양한 철학이나 관점들이 홀대밭는 곳에서 지금까지의 단조로운 관심사는 운명의 끝을 볼 수 밖에 없는 듯 하다. 어떤 목표에 대한 성과를 상승시키는 역할은 더욱 폭넓은 바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민중이 없는 곳에서 권력자가 존재할 수 없고, 빈자(貧者)가 없는 곳에서 부자가 존재할 수 없다는 상대적인 이치를 생각해도 그런 듯 하다.
 
누구나가 다 그 길로 가서는 사회발전이 어찌 이루어지겠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조로움을 지향하는 노력은 한반도에서 계속되는 성향이 있는데, 국가나 사회가 변화를 바라지 않는 태도는 일반민중의 한 사람으로서 수동적으로 편승할 수 밖에 없는 추세지만 좀 더 장기적이고 더 큰 영역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정체(停滯)와 낙후(落後)의 결과로 수렴됨은 당연한 듯 하다.
 
가끔 배타적인 종교도 사회발전을 가로막는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사회의 다양한 모습을 포용하지 못하고, 이념의 잔여분자들과 부지런히 싸워봐도 제 3자적인 관점으로는 그 나물의 그 밥이라는 구태의연한 평가를 받을 수 밖에 없는 문제가 있는 듯 하다. 다양함과 혁신은 사회에 생명력을 주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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