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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21일 금요일

감정이입의 정치

여러가지 일에 시간과 관심을 배분하면서 특히 신경을 썼던 일중의 하나는 어느 한가지 일에 관점을 붙들어매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자신의 욕심과 의지가 담긴 자아가 강하면 그런 생각은 오랫동안 발목을 잡는듯하다. 그래서 극단적인 생각들이 탄생하는듯 하다. 극단성은 습관이며 늪처럼 빠져들어가는 암흑의 미로다. 어려운 시절, 정보기관의 사찰에 순응하지 않고 대응으로 맞섰던 일이 있었는데, 여러가지로 큰 도움이 되었다. 어떻게 하면 자아(ego)에 갖혀있는 상태를 빠져나올 수 있는지를 알게 된 것만해도 큰 수확이었다. 그때 줄기차게 운동을 했는데, 지금은 준수한 운동실력을 갖추게 됬으니 그때 그 정치지도자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런 문제가 쉽게 끝나지 않는 문제라는 걸 인식하고 있다. 개인에게도 버릴 수 없는 습관(때로는 전통이라고도 미화시켜 표현한다)이 있는것처럼 조직이나 집단, 때로는 정당처럼 동(動)적인 추세를 담고 있는 집단조차도 전통과 습관에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매번 깨닫는다. 특히 요즘 대통령의 신변과 관련된 일이나 부패문제와 관련된 소식을 들으면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흔히 잘 모르고 타인을 판단하는 경우가 많은데, 자신이 살아온 환경이나 생각, 지식의 깊이등이 판단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듯 하다. 뜻밖에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으면 타인을 세뇌시킬려는 사람들의 마음을 거꾸로 판단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한다. 어떤 정치적인 문제도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이념이나 종교적인 세뇌와 관련이 되어 있는데, 공감능력은 없으면서 확신만 가진 생각들이 세상을 교란시킨다. 심지어는 정치지도자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도 간혹 생각이 나는데, 어떤 생각이 권력의 정점을 지배하고 있으며, 그 권력이 지배하고 있는 시민들을 생각하면 참으로 암울한 미래를 가진 땅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일단 정권을 잡으면 법률과 규칙을 제정하거나 개정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여기는 합법적인 규칙, 상위 규칙, 법정 판결, 법령 또는 기타 법률이나 소송절차법등이 포함된다. 정치가들은 반대파의 제안을 물리치고 자신들의 제안(그들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을 관철하기 위해 싸운다. 이러한 정치활동은 조직화에 근거하고 있다.

- 중략 -

만약 정치적 의회가 감정이입에의 원칙에 근거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위험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정치가들을 선택하는 방식, 정치적 의회가 통치하는 방식, 정치가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에 혁명적인 변화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 중략 - 감정이입이란 당신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을 마음에 간직하는 것, 다른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무시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생각과 감정에 민감해지는 것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결국 집권하기 위해 "적대자와 싸운다"와 "적대자를 무찌른다"는 생각과 명백하게 모순된다.

- 중략 -

대립을 해결할 능력이 없는, 조직화하는 정치가들의 실례는 무수히 많다. 감정이입하는 정치가는 아마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와 데 클레르크(F.W.de Klerk)남아공 대통령을 본받을 것이다. 서로가 상대진영으로부터 테러리스트로 규정되어 있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하고 감정이입하려고 애쓰면서 혐상테이블에 앉았다. 이런 행위는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다른 사람의 감정과 동일시 함으로서 가능해지는 것이다.

- Simon Baron - Cohen(캠브리지 대학교 발달정신병리학교수) -  

꽤 오랫동안 어려운 근로자들의 삶을 체험하고 있는데, 사실 체험이라고는 하지만 내 자신이 어려운 근로자 그 자체이상이 아닌 처지로서 감정이입이 되는 건 당연했다. 여기서 근로자들의 입장이 단순하게 어렵다거나 기업이 어렵다거나 하는 이분법적인 생각은 나오지 않았다. 당사자가 되고보면 생각할 일이 훨씬 많아진다. 즉각적인 대응이 필요한 일에 휘말렸다는 긴박한 사정이 있기도 하고, 급한 문제는 냉철한 판단을 필요로 한다는 의무감이 개입하기도 한다. 어떤 진보주의자들이 생각하는 노동자는 무조건 힘들고 심지어는 노동자가 아름답다거나 하는 문제도 아니고, 반대로 어떤 보수주의자들이 생각하는 반대의 생각도 타당하지 않는듯 하다. 생각보다 미래의 적절한 해결책이 중요하다. 그래서 품질이 떨어지는 신앙이나 멘토를 참조하는 정치가 있어서도 안되고, 생각하지도 않고 공감에 미친듯이 환호하고 적대감에 부르르떠는 대중이 있어서도 안된다. 그런 얄팍한 사고는 이상한 확신에 포획되기 쉬운 문제가 있다. 한반도의 문제는 그런 것이다. 자아를 버리고 서로서로의 입장을 공감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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