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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27일 토요일

리더 / 섀클턴


히딩크감독이 한국의 월드컵팀을 지도할때, 한국팀이 정신력은 강한데 체력이 약하다는 전통적인 평가와는 반대로 한국팀은 체력은 강한데 정신력이 약하다고 평가한적이 있었다. 파노라마처럼 지나간 주변의 수많은 사건들을 생각해볼때, '더 나아간다'는 명분으로 얼마나 많은 '인간적인 것들'이 희생되어 왔는지에 대한 생각이 들때가 있다.

희생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선량하지도 않고, 진정성도 없으며 오직 부글거리는 욕망을 위해 앞장서서 달렸던 리더의 시선이라면 히딩크와 같은 통찰력이 생길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나쁜 리더는 공명심과 같은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본질적인 목적을 잊는듯 하다. 더 나쁜것은 그런 욕심은 구성원들에게 포착되게 마련이고, 중대한 약점으로 존재하며 모든 구성원들이 그 리더가 선 자리를 향해 경쟁을 하는듯 하다. 그래서 나쁜 리더는 자신이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착각을 하지만 사실상 그 권력을 지켜내기 위해 구성원들과 경쟁을 하며, 목적을 잊은 리더와 목적을 잊은 구성원, 목적을 잊은 집단이 삼위일체가 되어 파국으로 치닫는듯 하다.

그래서 나쁜 리더가 있는 집단은 항상 바쁘고 재촉하는데, 뭔가가 잘 안되는 성향이 있는듯하다.열심히 일한다는 생각은 했으나 실상은 집단의 구성원들과 투쟁을 해왔던 리더들을 생각하면 원인과 결과의 정확한 연계성을 보여주기도 하는듯 하다.

비숫한 시기에 북극과 남극을 탐험했던 스태팬슨의 칼릭호와 섀클턴이 이끌었던 인듀어런스호의 결말은 리더의 중요성을 알려주는듯 하다.

섀클턴은 항상 낙천적이었다. 아무리 위급하고 어두운 상황에서도 대원들이 의지를 상실할까봐 낙천성을 잃지 않았다. 권위를 생각하지 않고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았는데, 주방장으로부터 대장이란 이유로 특별대우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면 몹시 싫어했다. 침낭과 같은 긴급물품을 배급하는데 있어서도 대원들보다 더 나쁜 것을 먼저 차지했다. 대원을 선발할때 어떤 뛰어난 재주가 있는 것을 선발을 위한 척도로 삼은 것이 아니고 어울려서 노래를 부를 수 있는지 질문을 했다.  

수개월동안 조난을 당했을때 칼럭호의 승무원들은 거짓말하고 도둑질하는 일상속에서 팀이 붕괴되어 전원 목숨을 잃는 결말을 보여줬다. 하지만 인듀어런스호는 섀클턴이라는 리더의 희생과 의지로 전원 무사귀한하는 결말을 보여줬다.

국가라는 배의 승무원들에게도 섀클턴과 같은 리더가 필요한듯 하다. 국가의 본질적인 목적을 아는 리더는 통찰력이 있으며 구성원들도 협력하여 따르는듯 하다. 나쁜 리더는 선량한 구성원도 무기력하게 만드는듯 하다. 한반도에서 필요했던 것은 이념이 아니라 좋은 리더였던것 같다. 구성원과 투쟁하지 않는 리더, 구성원과 심정적으로 격리되지 않는 리더, 솔선수범하는 리더가 필요했던것 같다.

북한을 보면 본질적인 목적이 없는 국가와 리더가 없는 국가의 결말을 보는듯 하다. 북한과 대칭사회인 한국에서 북한을 비교의 척도로 삼아 '어느 선'에서 만족할 것을 말한다면 나쁜 결말을 볼것 같다. 사회의 밑바닥에 살다보면 많이 안좋은 상황이 예고됨을 알고 전율이 느껴질때가 있다. 어떤 학습을 받았는지 모르지만 작은 집단의 구성원들도 수직적 권위에 물들어 있다. 그리고 구성원 누구도 그런 리더에 협력하지 않을려는 모습을 보인다. 문제가 있으면 문제의 해결책을 찾지를 못하는듯 하다. 그냥 자신이 분위기를 이끌고 있다는 상상력만 있는듯 하다.

2014년 12월 20일 토요일

적대적 공생의 종말


진보정당이 헌법재판소 판결에 의해서 해체되면서 민주주의란 단어의 어원인 다수(Demo)가 지배하는 정체(政體)가 형성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좀 회의적인듯 하다. 공리주의자인 밀(John Stuart Mill 1806 - 1873)은 토론과 논쟁으로 상반된 가치의 대립속에서 세련된 진리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말한다.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지금까지 상반된 가치의 대립은 있었으나 세련된 진리를 끌어내기 위한 토론과 논쟁은 없고, 맹목과 격한 투쟁의 종착지에서 소수의 이념정당이 '먼저' 없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이해되지 않는 소수자가 걸어 온 궤적만큼이나 어지러운 다수자의 앞날이 밝다고만은 할 수 없을듯 하다.

좌파가 없어지면 우파를 말할 이유가 없다는데서 새로운 시작이 기대되기도 한다. 국가란 어떤 상황에 직면한다고해도 정부주도적이든 아니면 국민의 개별적인 움직임이든 문제를 교정할려는 의도는 현실화된다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인듯 하다.

2014년 12월 19일 금요일

감정의 경제(economotion)


언젠가 추운 크리스마스 이브에 강변의 화려한 이국적 문화시설에 수많은 아베크족이 몰려 있는것을 보았다. 네온사인이 화려한 또 다른 세계를 구성하고 있었는데, 왠지 나와 관련이 없는 세상임에도 한파속에 그곳을 뚫고 지나가는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았던것 같다. 

그 당시 겪었던 어둡고 냉혹한 외부세계와는 다르게 연인들의 사랑의 속삭임이 있었고, 그런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고용인들이 있었고, 그곳까지 사람들을 모이게 한 고급승용차들이 있었고, 그리고 잠깐이나마 안락한 광경의 위안을 받은 내마음이 있었다.

경제행위에 있어서 감정이라는 것은 참 중요한듯 하다. 때로는 감정이 비극을 느끼게 하는 동기가 되기 때문에 인간의 불완전함으로 매도당하기도 하는듯 하다. 내 자신 조차도 어렵고 힘든 시간에 내 자신을 무감동에 길들여 놓는게 강한 사람이 되는 길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던것 같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이 결심은 본능적으로 잘못된 것임을 깨닫고 시간과 공간이 허락하는 곳에서 음악을 들을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아베크족의 연심(戀心)이 동기가 된 공간은 꽤 폭이 넓은 경제적 인연이 맺어져 있는듯 한데, 감정이 만들어 놓은 경제적 효과의 예를 보는듯 하였다. 사실 좋은 차를 비싸게 팔 수 있는 근원, 맛있는 음식을 비싸게 팔 수 있는 근원, 새로운 스마트폰을 사기 위해 줄을 서는 마음의 근원, 제주도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싣는 근원, 나 혼자 잘살겠다고 나라를 뒤집은 마음의 근원에는 인간적인 감정이라는 가장 본질적인 동기가 바탕이 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듯 하다.

요즘 땅콩회항사건과도 관련해서 운항정지 처분까지 받은 항공사의 손실은 항공사의 입장으로서는 '감정의 불경제'라는 효과를 경험하고 있는듯 하다. 피폐한 북한의 사정이나 천민자본주의 실태를 보여주는 한국사회도 인간적 감정을 소홀히 하면서 '감정의 불경제'효과를 보여주고 있는것 같다.   

감정적이라는 것은 인간적이라는 의미와도 상통하는듯 하다. 그런데 이런 인간의 감정이 많이 손상을 입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믿음과 신념이 지나치게 감정을 대체하는 사회속에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그 믿음과 신념은 더 나은 세계를 만들겠다는 목적으로, 약자를 위한다는  목적으로, 자유를 위한다는 목적으로, 천국을 가게 한다는 목적으로 감정을 대체할려고 노력한다.

이념이나  종교, 물질에 대한 집착은 그보다 훨씬 근원적인 인간의 감정, 달리 표현하면 더욱 인간적인 것을 잃어버리게 하는것 같다. 물리학자 에딩턴은 "물질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우리는 물질이란 상념의 응결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된다."고 말한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며 우리들이 '돈'이라고 하는 지극히 물질적인 존재와 그것들이 흐르는 경제의 배후에는 '인간의 감정'이라는 바탕이 있는듯 하다.

2014년 12월 6일 토요일

노인과 경제 / 아시아 경제의 몰락


오래전 낮에는 주물공장의 용광로에서 일하고 저녁엔 대단히 지적(知的)인 일을 한 적이 있었다.오랫동안 한국사회의 불합리한 현상으로 인정받는  노동현장의 모순따위는 생각해 본적이 없고, 타고난 부실한 심신(心身)을 교정하기 위해 낮시간을 보낼려고 했었던것 같다. 현장에는 학벌이 없는 젊은이 몇명이랑 그리고 많은 '노인'이 있었다.

명문대 출신의 엘리트인 동료들과 엘리트를 지향하는 젊은이들을 상대하는 밤의 일터랑 '문화적 차이'가 많이 나는 낮의 일터로의 전환은 몸과 마음의 순발력을 증진시키는데도 도움이 되었지만 폭넓게 사회와 인간을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특히 기억에 남는 일은 평생을 험한 노동일로 자식들을 대학까지 교육시킨 칠순의 노인분이었다.

특수부대의 훈련을 방불케하는 노동현장에서 수십년동안 견뎌온 깡마른 노인분은 식사시간에 당신은 자식들을 대학까지 보낸 훌륭한 노인이기 때문에 무식한 젊은 노동자들과는 한 상에서 밥을 먹을 수 없다는 완고한 고집을 빼놓고는 경이로운데가 있었다. 훗날 그 '무식한 동료'중 한 명은 회사가 부도가 나서 임금이 밀리자 공장 굴뚝에 올라가 자살소동을 벌이는 장면이 티브이에 중계되어 티브이 스타가 되는 블랙코미디를 연출했다.

바로 그때가 동네 아주머니들이 뭔지 모르지만 무서운 것이 문앞까지 왔다고 하던 임프(IMF)의 시절쯤 되었는데, 그 시절의 거시적인 근원을 하버드 대학의 경제학 교수 토드 부크홀쯔(TODD G.BUCHHOLZ)는 그의 저서 NEW IDEAS FROM DEAD ECONOMISTS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일본경제의 급속한 추락은 결국 주변국들을 모두 집어 삼켰다. 아시아의 호랑이와 용들은 재화의 상당 부분을 일본에 팔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이 구매를 멈추자 그들은 제품 가격인하는 물론이고 이익도 상당히 줄었다. 불행히도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 같은 나라들에서는, 아시아 경제가 영원히 고속성장을 할 것이라고 믿는 외국인 투자자들이 대주는 돈을 가지고 무분별한 소비를 행하고 있었다. 오만했던 그리스 비극의 영웅 이카루스처럼, 말레이시아는 세계 최고층의 건물인 페트로나스타워를 지었다. 1960년대만해도 아이티만큼 가난했던 나라가 말이다! 그러나 시장은 겸양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었다.1997년 아시아 주식시장은 폭락했고, 폭동이 반발하고 정치지도자들이 쫓겨났다. 

아시아의 용들은 일본의 잘못된 경영에 운 나쁘게 휘말린 순진무구한 구경꾼에 불과한 것일까? 그들에게는 일본이나 심지어는 미국의 정부도 탓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심지어는 한국마저 일본과 러시아라는 두 거인의 몰락을 겪어야 했다. 그들은 특정 산업에 돈을 직접 대주면서 강철같은 손을 휘두르는 일본의 관료주의자들을 그대로 모방했다.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그들도 정치가의 친척이나 친구들이 특정부문만이 아니라 산업전체를 독점하는 정실자본주의 양상을 띄고 있었다.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같은 독재자들은 수십억달러의 돈을 가족 소유의 기업에 은밀히 대 주었다. 미국의 경영자들이 "주주가치 shareholder value'를 창출하는데 매진하고 있는동안, 아시아의 경영자들은 현대군벌들의 비위를 맞춰줘야 했다. 그 결과 경영자들은 금융위기가 닥쳤을 때 자회사 분사나 합병 파트너 모색등 재빨리 대처할 자유나 탄력성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더욱이 민간 금융회사들은 부동산거품에 기꺼이 동참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곤란에 처하면 정부가 구해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미국이 통화시장을 갖고 논 덕분에 그들의 혼란이 더욱 심해졌다.  - 중략 - 트레이더들이 달러화를 마구 팔면서 달러화의 평가절하를 이끌었다. 이것이 아시아 호랑이들의 재정을 고갈시키고 있었는데, 그들 대부분은 일본의 은행에 상당한 빚을, 그것도 엔화로 지명된 부채를 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엔화 가치가 상승하면서 그들은 채무상환에 더욱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러다가 1995년 미국정부가 태도를 180도 바꾸고는 트레이더들에게 달러가치를 높이고 엔화가치를 떨어뜨릴 것을 종용했다. 급변한 상황 덕분에 채무 부담은 줄어들었지만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갑자기 엔화 가치 하락이라는 사태를 맞은 일본이 이 호랑이들의 상품을 예전처럼 많이 구매해 줄 수가 없게 된 것이었다. 1. 정부의 과도한 개입, 2. 정실자본주의, 3. 달러화에 대한 미국의 태도 급변이라는 요소들이 치명적으로 결합하면서 아시아의 호랑이들은 뒷골목의 작은 고양이로 전락하고 말았다. 

아이엠에프의 구제금융시절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별이 떨어진 것이 아닌듯 하다. 그 이면에는 일본과 아시아 국가간의 경제적 긴밀성, 아시아의 정실자본주의, 아시아 국가들의 정경유착, 심지어는 더 근원을 살펴보면 인구의 노령화와 수직적 관료주의로 성장동력을 잃어가는 일본경제와 아시아국가들의 대중정치적 성향이 위기의 바탕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게한다. 잘은 모르지만 오랫동안 한 자녀 낳기 운동을 벌이는 중국에 의존하고 있는 한국경제나 일본의 사회성향을 그대로 답습해가는 한국이 무엇인가 큰 문제가 있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듯 하다.

한국에선 빈번히 진보성향의 인사들이 노인폄하발언을 했다가 문제가 되곤한다. 아마 문제의 본질과 개선점을 집어내지 못하고 정치적 승부에만 집착을 했기 때문에 대중정치적 성향이 심해지는 부실한 정치여건에서 '기분을 건드려 표를 못 얻는' 재난을 당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인구 노령화와 노인과 젊은이의 세대갈등 문제는 뜻밖에 심각한듯 하다.

노인과 젊은이를 동시에 보면서 느끼는 바로는  노인은 심신의 약화로 급속히 보수화되는 문제가 있는데다가 노인세대가 만든 사회제도 안에서 역동성을 잃어버린 신세대들의 무기력도 한국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요인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즈음에서 일본의 문제를 간략하게 표현하자면 보수성을 벗어나지 못하여 변화의 때를 놓쳐버린 문제가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의 의견이 현존하는 한국정치의 진보나 보수의 어느 한 쪽에 편향된 생각이라면 그것은 지나치게 정치시장적인 관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훨씬 본질적인 문제가 될 수가 있다.

어느 날 파인즈라는 68세의 노인이 한 겨울에 영하 70도까지 내려가는 남극을 탐험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디펙초프라라는 인도계 미국의사는 노인은 주변에서 늙는 이를 보기때문에 늙는다고 말한다. 좀 판타스틱한 말에 가깝긴 하지만 노인의 적극적인 사회참여라든가 혁신을 지향하는 노인의 태도는 정치뿐만이 아니라 경제적이고 개인적인 문제까지 아쉬운 면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노인은 열정을 가질때부터 그 만큼의 노인이 아닌듯 하다. 가끔 젊은이들과 함께 있으면 힘이 날때가 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미래에 대한 꿈이 내 마음도 울렁거리게 만들곤 한다. 어차피 살아가는 것이 꿈과 현실의 조합이라면 한 번 변화를 시도해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꿈은 현실에 대한 집착을 덜어주는 느낌을 받을때가 있다. 현실에 집착을 하면 늙는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어차피 시작된 노령화 국가지만 생각이 젊은 노인이 살아가는 국가란 노령화 국가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2014년 11월 22일 토요일

피케티와 노동현장 그리고 동양철학까지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만 읽으며 두고 두고 봐야할 책들을 적어둔 목록이 꽤 되어서 사보고 싶었던 책을 대량으로 구입하였다. 그 중에 프랑스의 젊은 경제학자인 토마 피케티가 지은 [21세기 자본]도 있었다. 자본이 돈을 버는 속도가 노동이 돈을 버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기 때문에 빈부격차가 심해진다는 피케티의 이론은 실생활에서 너무 생생하게 느끼는 문제였다.

심지어는 위의 문제를 생생하게 느껴보기위해 자의반 타의반으로 노동현장을 경험하고는 그 조악함에 마음의 상처를 크게 입었으며 그때마다 나에게 남겨줄'돈'을 벌지못한, 나아가서는 교육을 시켜주어 '비평적인 사고'를 키워준 부모님을 원망(?)을 하지 않을수가 없었던것 같다. 

노동현장에서 노동시간이 지켜지지 않는것은 다반사고 더 나쁜것은 그 조악한 현장에서 인간의 탐욕과 관련된 살벌한 투쟁이 일어나는것도 다반사였는데, 특히 젊은 노동자들과 경쟁에서 이길수 없는 연령이 많은 근로자들의 생존을 위한 투쟁은 이리보고 저리보아도 삶의 본질은 고통이라는 불교철학을 실감나게 해주었다. 그때마다 하루 여섯시간 근로제나 주4일 근로제와 같은 탄력적인 근로시간이 활성화되면 체력적으로 열세인 노령의 근로자나 학업이나 미래에 대한 투자를 병행해야 하는 젊은이들을 외국인 노동자대신 근로현장에 흡수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하곤했다.

젊었을때 열심히 일했는데, 늙었을때도 열심히 일해야 하는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곳이 한국의 노동현장이라는 사실을 알면 피케티보다 훨씬 선험적으로 자본소득의 위력을 체험한 한국인들은 많았을것 같다. 물론 이런 문제를 거론하는것은 이념과는 전혀 관련이 없고 더 많은 실업자를 구제하거나 노동현장에 활력을 주어서 국부(國富)의 증대에 기여할 수 있다는 관점으로 해석해야 할듯하다.

이미 피케티의 저서가 전세계에 뿌려지기시작할때부터 마르크스와 비교되는 충격적인 비난을 받기 시작했는데, 갈등론자인 마르크스와는 전혀 관련이 없고, '문제의 치유'라는 균형론적인 관점으로 해석되어도 전혀 무리가 없을듯 하다. 내 자신이 조악한 노동현장에서 국가와 부모를 원망하는 시간 보다는 어떻게 이 문제를 개선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는데, 피케티의 생각도 그러했을거라고 생각한다.

이 즈음에서 먹고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한국에서 천대를 받는 철학에 관한 사치스러운 이야기를 하자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쓴 피케티의 책을 살만한 가치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잠깐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을 통계와 합리적인 논리로 풀어나가는 학문의 중요성은 인류가 모두 망하느냐 모두 생존하느냐 하는 단순하고 극단적인 문제에 관심을 집중하는 황당한 종말론적인 종교에 비할 수 없이 중요한 문제인듯 하다. 피케티의 연구와 같은 시도는 어떻게든 문제를 파악해서 새로운 세계로 가는 길을 열어보자는 매우 긍정적이고 인간적인 노력, 현실적인 가치를 보여주고 있는듯 하다.

나는 종종 동양철학이나 동양사상에 대해서 미안한 마음이 들곤 한다. 이념문제와 관련해서 토로해 온 글들이 서양철학이나 서양사상을 많이 인용해 오고 동양철학이나 동양사상에 대해서는 적대시 수준으로 인용을 기피해 온듯 하다. 그러면서도 그 이면에는 동양적인 것을 많이 생각해온듯한 흔적이 보인다는 생각을 남의 글 읽고서 생각하듯이 생각하곤 하였다.

동양철학은 더욱 근본적인듯 하다.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자칫하면 과정의 합리성을 무시해 버리는 교조적이거나 종교적인 믿음으로 생각을 묶어버리는 문제가 있는듯 하다. 불교의 공(空)사상이나 도가의 무위자연(無爲自然),심지어는 불교나 도가 보다도 한 단계 합리성이 업그레이드된 유교사상조차도 근본적인듯 하다. 근본적인 것들은 다른 생각들을 배제하기 쉬운듯 하다. 한 시대의 사상으로 자리 잡으면 다른 세상으로 갈 길을 열어주지 않는 문제가 있는듯 하다.

지금 한참 문제가 되고 있는 광신적인 '이슬람 국가(IS)'의 광란도 더욱 근본적이라서 폐쇄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듯 하다. 개신교에서는 유교가 조선왕조의 폐단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폐단은 달리 생각함을 막아버린데서 문제가 비롯되는듯 하다. 유교의 문제는 모든 종교가 가지고 있는 문제와 일치한다. 동양철학이나 종교의 문제점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옳지만 명확하지 않은 문제가 중구난방으로 해석될 여지를 준다.'는 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서양의 사상들이 인류문화를 발전시킨 이유는 WHY, 왜, 어째서라는 실존적인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주기 때문인듯 하다. 변화와 발전은 끊임없는 의문과 해결책을 내놓는 '수고'에 의해서 이루어지는듯 하다. 이념이 종교화되면서 이런 '수고'를 막아버렸다. 알고 있고, 느끼고 있는 내용이지만 피케티의 저서는 문제의 해결책을 내놓는다. 조악한 상황에 생각없이 분노하기 보다 천천히 현실을 탐구해나가고 교정할 수 있는 여유를 주기 때문에 할 수 없이 33000원짜리 책을 사올 수 밖에 없었다.

책을 읽을 자유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국민에게 사상의 자유가 없으면 북한처럼 동토(冬土)의 왕국을 벗어날 수 없다. 학창시절 옌벤인민공사에서 출판된 철학책을 읽다가 포도청과 불협화음이 있었던 시절을 생각하면 많이 발전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세상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자유가 중요하다는 생각도 든다.

2014년 11월 21일 금요일

복수와 신뢰의 경제


언젠가 일터에 심각한 위해를 입히는 무뢰배가 있었다. 권력적인 지위를 얻고자 수험생활을 병행하던 모습이나 독실한 종교적 믿음을 가질려고 애쓰던 모습등을 생각하며 성장과정에서의 좋지않은 경험등을 유추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어디에도 마음의 점을 찍지 못하고 점점 비뚤어져 간듯 하다. 상처입은 마음을 직장동료들에게 전가시키며 복수가 가져다 주는 달콤할것 같은 과실을 혼자만이 챙길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리고 일터는 비숫한 마음들에 의해 점점 피폐해져갔다.

시간이 흘러 비숫한 무뢰배를 보면 그 동료가 생각이 났는데, 종종 연락을 해서 근황을 물어보곤 하였다. 꽤 오랫동안 그러다가 어느 날 그 동료가 비명을 질렀다. "날 자꾸 괴롭히면 정말 가만히 안있을꺼야!" 한바탕 웃고나서 그 이후로는 연락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복수는 누구에게 앙갚음을 함으로써 억울함을 달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복수와 신뢰라는 것은 동전의 양면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라고 할 수 있다. 트러스트 게임을 이용한 실험에서도 나타났듯이 사람들은 자신이 잘 알지도 못하고 앞으로 만날 일도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신뢰를 가지려는 경향을 보인다. 일반적인 경제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와 같은 맹목적인 신뢰는 비이성적인 것이지만 말이다. 

신뢰를 바탕으로 성립된 사회계약이 깨어졌을 때, 우리가 크게 분노하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경향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사회계약을 깨뜨린 사람들에 대해 시간과 돈을 소비하고, 심지어 신체적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복수를 하려고 하는 이유는 이때의 분노가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사회구성원들끼리 서로 신뢰할 수 있는 사회는 그렇지 못한 사회보다 엄청난 이점을 갖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에서 높은 수준의 신뢰를 구축하려 노력한다.

- Dan Ariely의 [THE UPSIDE OF IRRATIONALITY]중에서 - 

가끔 북한은 한미연합훈련을 하거나 삐라살포등으로 북한체제에 대해 자극을 하면 남북의 신뢰관계를 흔들었다는 이유로 복수를 하겠다는 으름장을 놓곤한다. 물론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이나 북한체제에서 핍박받던 탈북자들을 생각하면 북한이 주장하는 논리의 정당성에 대해서 의문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듯 하다. 그런데 신뢰관계를 깬 문제의 중대성에 대해서 말하지만 그 이면에는 미래지향적인(?) 경제적 계산이 깔려 있음을 누구나 추측하는 바가 있을것 같다.

한국인들은 한이 많다고 한다. 대게는 인간적이고 평화로운 삶을 파괴한 것들에 대한 신뢰감을 상실한 문제에 근원을 두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개인적으로 인간관계를 피폐하게 하는 이들과 깊은 이야기를 해보면 상처받은 과거가 있음을 드러낸다. 국가적으로는 이념대립의 문제도 복수심이 이면에 아주 중대하게 내재해 있는것으로 생각된다. 더 본질적이거나 다른 문제에 대해서 관점을 돌려야 하는데도 이념문제가 개입하는 이유는 과거에 강한 자극을 주었던,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 자극이 바탕이 된 현실(남북관계같은)이 면면히 이어져 관점을 강하게 붙들어매고 있다는 점은 누구나 인정하는듯 하다. 다만 치유가 안될뿐이라는 생각이다.

대중은 권위적인것 보다 신뢰감을 무너뜨리는 것을 더 싫어하는듯 하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우려감, 잡히지 않는 것에 대한 우려감이 더 큰 것으로 생각된다. 이념이나 종교적 일탈, 정치적 일탈, 사기등과 같은 보이지 않는 것들이  만연할 수록 사회의 신뢰감은 깨지고 복수를 위해 칼을 가는 한많은 생각들이 많아질것 같다.

2014년 11월 15일 토요일

국민을 통합시키는 선량한 절대가치


상대적 비교가 시민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는 생각이 맞는것 같다.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며 더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가는 정신들은 자신과 타인에게 부담스러운 존재인듯 하다. 우월감은 자신보다 우월한것을 만났을때 열등감으로 화(化)하는 장면을 많이 본다. 그 마음이 자신의 주변인들과 사회에 대한 적대적 감정으로 표현되는 장면도 많이 본다. 평생 우월감을 찾기 위해 노력한 이는 열등감을 느껴본 이일수 있으며, 자신보다 열등한 이에게 가혹하게 대할 가능성이 있다. 얼마전에 발생한 경비원분신 사건을 보면서 병든 '상대적 시민사회'의 모습을 보는듯 하였다.

언젠가 베트남 국민들이 부러웠던 적이 있다. 베트남 지도자는 국민의 감정을 절대적 가치에 묶어두고 있는듯 하다. 그 절대성이란 도덕감정, 국가목표등으로 해석된다. 이웃과 비교를 할려고 하다가도 지도자의 모습을 보면서 비교를 멈춘다. 장기적으로 비교심은 목표심을 흐트린다는 시민과 사회심리를 인용해보면 베트남의 숨은 저력이 느껴진다.

부탄국민은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국민이라고 한다. 부탄의 일인당 국민소득은 북한과 비숫하다. 그러나 부탄의 국왕은 자신이 스스로 전제정치를 포기하고 입헌정치체제를 도입하였다. 국민이 반대를 하는데도 후세의 국왕이 전제정치를 할 것을 우려한 이유라고 한다. 국민감정을 '선량한 절대가치'에 묶어놓을 줄 아는 지도자인듯 하다. 이에 반해서 북한의 지도자는 국민을 묶어놓는 절대성의 본질적인 가치를 오해하는듯 하다. 그런 면에서는 러시아의 푸틴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훌륭한 지도자들이 국민통합을 위해 절대적 가치를 이용했다. 링컨은 자유주의를 본질적 가치로 하는 미국에서 노예해방이라는 절대적 가치로 국민을 묶었고, 프랑스의 드골은 독일의 침략에 대항한 투쟁이란 절대적 가치로 국민의 정신을 묶어놓았다. 훌륭한 지도자를 판별하는 척도는 지도자가 발휘하는 절대가치의 성격인듯 하다. 

가끔 조악한 일터에서 제대로된 종교적 믿음같은 절대가치를 지닌 이들이 일터의 분위기를 살려주고 있는것을 많이 본다. 반면에 비교와 경쟁이란 절대가치를 지닌 이들은 불평과 싸움을 일삼는다.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서 노력하는 지도자를 둔 시민은 배신감과 상실감을 느끼기거나 모방을 한다. 가진것이 없는 동료라도 비교하지 않는 마음을 가진이가 옆에 있으면 부담없이 즐겁다. 고관대작이라도 비교와 승부의 마음을 가진 이가 옆에 있으면 부담스럽고 싫다. 그런 이는 나 혼자 있어도 느낄 수 있는 행복을 파괴한다. 우월감과 열등감 둘 중에 하나를 느끼게 한다. 그런 이는 나만 파괴하는 것이 아닐것이다. 그런 이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지위의 경중(輕重)에 따라서 사회적 행복을 파괴하기도 하는듯 하다.

평등과 복지라는 절대가치가 선량함과 이타성이라는 도덕적인 절대가치를 내포하고, 비교심과 우열감을 버리도록 한다면 시민사회의 발전에 크게 공헌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과학적사회주의나 천민자본주의같은 이념적인 절대가치를 지닌 국가들이 무너지거나 혼돈으로 빠진 이유는 도덕적인 절대가치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렸기 때문인듯 하다.

훌륭한 목표를 가진 시민, 훌륭한 지도자를 가진 시민, 훌륭한 믿음을 가진 시민의 공통점은 마음을 선량한 절대적 가치에 두었기 때문에 비교하지 않는듯 하다.  

2014년 11월 14일 금요일

인간의 경제이론


가끔 경제학자의 경제예측은 전혀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실제로 한 시대의 주류적인 경제학자들의 이론이 그 시대의 경제적 풍토를 이끌기도 하고, 적절하지 않다는 평가를 받으면 다시 새로운 이론으로 대체되기도 하는데, 그 와중에 경제이론은 맞지 않는다는 채찍을 맞기도 하는듯 하다.

시대의 발전과 경제이론의 발전은 동태적(動態的)으로 맞물려 가고 있으며 경제세계를 형성하고 발전해 나가는 동력이기도 한것 같다. 그러니까 경제학이론이 인간세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부차적이고 종속적이라고 할 수는 없는듯 하다.  

그러나 항상 아쉬운 것은 경제이론이 과학성 또는 실증성이 있어야 한다는 명분으로 또 다른 신앙적인 도그마(독단-獨斷)를 형성해 가면서 몰림현상을 보인다는 문제가 있는듯 하다. 아담스미스의 자유주의 경제이론이나 마르크스 이론의 대립에 이어서 케인즈의 수정자본주의 경제이론이나 프리드먼의 신자유주의 경제이론이 대립하며 새로운 경제이론의 세계를 형성해 나가는데, 요즘엔 자본소득이 노동소득에 비해 월등하다는 피케티의 이론까지 등장을 해서 주류경제이론의 위상을 넘보는듯 하다. 

사실 새로운 이론의 탄생이란 과거이론의 문제점을 '수정'한다는 의미를 두고 있는듯 한데, 이념의 문제를 집요하게 탓하는 내 관점으로는 이념적인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하고 이념적인 세상을 견인하는 '주범'중 하나가 경제이론인듯 하다.

세상은 다양해지고 있고, 인간도 다양한 토양위에 서있는만큼 다양한 존재인듯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은 감정적인 존재인만큼 다양해질 가능성을 안고 있으며,어떤 이론의 독단성에 휘둘릴만큼 의미없는 존재였던 시절이 지나가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서 지난 4월에 '세월호 사건'이라는 비극적인 재난이 있었는데, 조의를 표하는 한국인들의 정돈된 마음가짐이 경제를 위축시킨 예를 보아도 경제라는게 인간의 다양한 심정과 인연이 깊다는것을 말해주고 있는듯 하다. 예전 글에서도 많이 밝힌 바 있지만 자유주의 경제이론이나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이 보인 문제점은 인간과 인간이 살고 있는 경제계를 지나치게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만 해석할려고 했다는 문제점이 있는듯 하다.

10년전, 프랑스의 경제학과 대학생들은 자신들의 지도교수에 대항해 잠시 소규모의 학문적 저항운동을 일으켰다. 대부분의 경제학 이론에 포함된 너무나 심한 비현실적인 가정에 질린 그들은 수업을 거부했고 그들의 교수들이 현실과 동떨어진 경제학 이론을 가르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 교수들은 자연스럽게 이런 주장을 방어했고 학생들은 결국 자신들의 입장을 철회했다. 그러나 이 소란으로부터 마침내 하나의 학술지가 탄생했다. 처음 만들어질 당시 이 학술지의 이름은 <<탈 자페증 경제학(Journal of Post - Autistic Economics)>>이었고, 이후 <<현실 경제 리뷰(Real World Economics Review)>>로 바뀌었다. 이 학술지는 쓸모없는 수학적 묘기가 아닌, 실제로 영감을 주는 경제학 연구를 출판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 Mark Buchanan의 [FORECAST]중에서 -  

2014년 11월 9일 일요일

갈구가 누굴까 / 권력과 투쟁의 관점


어느날 눈이 맑은 맹구가 동료들과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조폭 아홉명이 들어와 함께 술을 마셨다. 덩치와 문신등이 맹구집단과는 매우 이질적인데 호기심을 느낀 맹구는 쳐다왔다. 그러자 조폭중 한 사람이 말했다. "너 갈구냐?" 무슨 말인지 영문을 모르는 맹구는 또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러자 조폭이 또 말했다. "너 갈구냐?"아직도 이해가 안된 맹구는 계속 쳐다보다가 얻어맞았다. 울면서 맹구는 물었다. "도대체 갈구가 누구에요?"

다음은 오래전 어떤 리더쉽에 관한 서적의 추천하는 글에 씌여진 권력의 정점에 있던 정치인의 글이다.

마음에 와 닿는 책이다. 지구촌의 빈곤에 대해 저자의 절실한 문제의식이 느껴진다. 가난한 사람에 대한 연민도 절절하다 모두가 절망에 빠져 있을때 비전을 보고, 서로에게 힘을 실어주는 리더쉽이 해결책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힘이 생긴다.  

사실 그 책은 리더쉽의 과제로서 가난한 사람을 챙기라는 내용이 아니었던것 같다. 훨씬 더 리더쉽의 본질에 관한 문제를 제시한 책이었으며,모든 인간에 대한 이해에 포커스를 맞춘 책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하지만 훗날 결코 가난한 사람을 위한 정치를 하지 않았던 정치인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점을 맞춤으로서 대권을 위한 투쟁에서 표를 계산하고 있다는 의식이 엿보였다는 것은 나만의 생각인듯 싶다.   

사람들은 다양한 관점을 가지고 있는듯 하다. 그러나 주류적 관점에 밀려서 맹구의 입장이 되기 쉬운듯 하다. 문제는 사적인 이익들을 위해서 비뚤어진 관점들을 형성해 나가는 사람들이 있다는게 문제인듯 싶다. 사회의 저점에서 내 자신이 맹구와 같은 입장이 되는 경우를 자주 경험하곤 한다. 사회의 상층부에서 일어나는 권력투쟁은 일반화 되어서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지만 사회의 모든 계층에 깊숙히 만연해 있는 권력투쟁의 관점은 리더쉽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절망적인지를 말해주고 있는듯 하다.

특히 이런 관점은 권위주의 정체(政體)를 겪은 연령대의 시민들에게 만연해 있는데, 결국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주거나 어떻게서든지 리더의 마인드를 가질려는 노력이 느껴진다. 사실 리더쉽은 따라주는것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리더쉽에 관한 책을 부지런히 읽으며 리더가 될려는 사람들만 있는것도 문제인듯 하다. 물론 내 의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념적인 관점은 리더가 될려는 사람들에게 부족한 리더쉽을 메우기 위해 유용하게 쓰여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수가 없는듯 하다.   

요즘 어떤 유명 정치인이 예전엔 잘 모르고 투쟁에 대한 생각만 했는데, 중요한 것은 어떤 문제를 개선하는데 노력을 두어야 했었다는 취지로 말했던 내용이 생각난다.

일은 잘 할 생각을 하지 않고 권력과 권위만 챙겨 달라는 조폭같은 사람들속에서 맹구는 외롭다.도대체 갈구는 누구였을까?  

2014년 11월 7일 금요일

자폐적 세계(Autistic world)


서른 무렵에 초등학교때 친구 형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20여년을 잊고 지냈던 친구였지만 단짝이었고 공부도 잘 하였으며 예방 주사맞는것을 무척 싫어했다는 기억이 남는 친구였다. 갑자기 내가 사는 지방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으니 한 번 만나자는 연락이었다. 20여년만에 만난 어린시절의 친구의 모습은 처참했다. 총명했던 모습은 없어지고 어린아이같은 정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형의 말로는 자폐증세가 있어서 나와 함께 자주 만나서 어린 시절의 추억을 되살리면 좋은 일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한다.

친구와 저녁을 먹으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사실 내가 이런 저런 질문을 하고, 친구는 답을 하는 모양으로 대화를 해 나갔다. 어두운 거리에서 극장 간판의 무술 영화를 보며, 어릴때 무협만화를 좋아하던 친구가 생각나 친구에게 무술영화의 한 장면을 이야기 하는데, 친구의 두 주먹이 불끈 쥐어지며 부르르 떠는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무엇인가 폭력과 억압에 쇼크를 입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남의 집안 일에 유난히 앞장서서 참견하던 어머니와 막내인 친구에게 자율적인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주지 않던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세명의 형들이 생각났다. 어린 시절 그 친구의 집 근처는 새벽을 알리는 닭울음소리 대신 친구의 울음소리로 하루 일과가 시작되었던 생각이 났다. 20여년만에 만난 친구의 어머니는 여전했다. 강하고, 오지랍이 넓었다. 어머니 자신이 평생을 짊어지고 가야할 막내의 불운한 삶이 본인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듯 했다. 어머니와 형들은 막내에게서 에너지를 얻어낼때는 좋았지만 그것때문에 평생을 책임져야할 짐이 생겼다는 해석이 되었다.

사람은 살면서 에너지 전쟁을 겪는다. 아주 나쁜 상황은 태어 날때부터 에너지를 착취하는 자와 착취당하는 자의 관계를 감각적으로 깨닫지 못하고 자율과 책임이 없이 살아가는 상황인데, 이때 구성원의 절반이 의미없는 삶을 살아가는 상황이 전개되기도 하는 것 같다.


오랫동안 봉건적인 지배관계나 권위주의적인 권력관계에서 살아가는 시민들은 말이 시민이지 정신적으로 오랫동안 신민(臣民)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를 본다. 자율을 얻어내고자 하는 의지는 '저항'이라는 명분으로 족쇄가 채워지는 경우도 있는듯 하다. 어느 날 보편적인 삶(경제적 풍요, 가정같은)에 신경을 쓸려고 하면 불현듯 엄습하는 에너지지배를 감당하지 못하는 상황이 생기기도 한다. 그래서 종교에 심취하기도 하고, 사업에 실패하면 모든것을 잃어버렸다는 착각에 자살을 하기도 한다. 자율적인 의지를 가진 자신의 진행중인 삶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는다.

국가도 마찬가지인듯 하다. 지도자와 구성원이 개인의 이익보다는 공존을 위해서 노력하고,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며 세계인으로서의 자각에 임하여 생각하고 행동할때 자폐적 증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듯 하다. 이념문제도 자폐적 증세의 하나로 생각된다. 모든 자율적인 의식세계를 차단 시킨다. 그래서 자율적인 의식을 성장시키는 교육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공영을 위한 의식도 스스로가 일깨워 나가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뜻이다.

어느 연령 이상의 한국의 시민들은 시민이 아니라 신민이 많다는 생각이 불현듯 드는 경우가 많다. 경제적인 이익이나 이념적인 사고의 족쇄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자율적인 시민의식이 성장하지 못하던 역사적인 사실들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는 면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 국가의 짐이 될 가능성도 있고, 그 전조를 여기저기서 느끼기도 한다. 적시(適時)에 필요한 변화를 얻어내지 못하는 국가는 자폐적증세를 지고 가야한다. 한반도의 절반은 그렇게 되었고, 세계가 부담해야 할  짐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2014년 11월 2일 일요일

간신(姦臣)과 바른 정치철학의 확립


서점에 들렸더니 모택동평전이 할인도서로 나와 있었다. 어쩌면 중국인에게는 영웅적인 존재지만 한반도의 통일에 지대하게 부정적인 공헌을 한 바가 있어서 이름만 들어도 울화가 치미는 존재인듯 하다. 살다보면 울화가 치미는때가 자주 있게 마련인데, 언젠가 간사스런 지인을 울화를 삭여가며 도전정신으로 지켜보는 강수(强手)를 두어서 모택동의 16자전법을 이해했던 적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서 명나라의 대표적 간신인 위충현이 특무기관을 이용해 국기를 문란하게 만드는 사건과 비숫한 사건에 피해자로서 연루가 되면서 드러나지 않는 문제거리에 대한 관심이 깊어진듯 하다. 그 당시의 곤란한 상황과 그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 열심히 스케이트를 타던 생각을 하면 훌륭한 인생공부를 한것 같은데, 그 덕분에 요즘도 청와대 게시판이나 검찰청 게시판에 탈 이념을 지향하는 내 이름을 가진 존재를 마르크스주의자인 교수이름으로 탈법적으로(불법이 아닌) 비난하는 글을보면 그냥 많이 만연되어 있는 일이구나 하는 생각만 든다.


어쩌면 좋은 상황은 아니지만 누가 올린 글인지 규명할것도 없이(청와대게시판이 실명제로 운영되는지 잘 몰라서......)  "이해하고 있다."라는 간략하게 표현하는것이 가장 적절한듯 하다. 아마 상당기간 모택동의 전략대로 치고 빠지기를 반복할 것으로 예상된다. 요즘 뛰어나게 운동을 잘 하게 되었는데, 훌륭한 정치철학과 건전한 심신은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인듯 하다.

단언컨데 한반도 자체가 지나치게 병리적인 이념적사고로 물들어 있다고 용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저항과 단련'의 힘에 근거한다는 생각도 든다. 이렇게 해서 적대적 공생관계가 형성되어 가는구나 하는 생각도 하며 빙그레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이런 일이 지속되면 애초부터 별볼일 없는 나만 망하는 것이 아니고 국가의 존립자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는 일이기에 교정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정의롭고도 유연하며 시끄럽지 않게 확산되어가야 할듯 하다. 솔직히 말하면 난 지난 정부때 한국이 쇄망의 입구에 들어서는 줄 알았다. 보이지 않는 간신은 정치현상인듯 한데, 무능한 지도자는 간신이 성장하는 토양이 된다고 한다. 맑은 근원, 올바른 정치철학만이 간신을 막아낼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2014년 11월 1일 토요일

북한의 체제유지노력의 전말


2차대전때 프랑스가 독일에 패전한 날, 프랑스의 수상 폴 레노는 처칠에게 전화를 했다. "우리 프랑스가 독일에 패배를 했습니다." 처칠은 프랭클린 루스벨트에게 50기~60기에 달하는 구축함을 조달하도록 차관을 승인해 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그때가 5월 15일이었는데, 루즈벨트는 차관을 빌려주기 위해서 하원의 승인이 필요하고, 몇 주일이 걸릴것이라고 거절했다. 

몇일후에 처칠은 루즈벨트에게 다시 연락을 해서 처칠 자신이 이끄는 영국은 끝까지 싸울것이지만 차기 정부의 수상은 영국이 패한다면 협상카드로 영국함대를 독일에 넘겨줄 것이며, 독일은 그 함대를 이용해 미국까지 위협할 것이라는 암시를 주었다.

프랑크왕국시절부터 이합집산에 능한 유럽에서의 전쟁이란 승자와 패자의 사정이 그렇게 냉혹하지 않은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데, 프랑스를 패배시키고도 독일의 식민정권을 세우지 않고 프랑스의 괴로정부인 비씨정부를 세운 독일의 선택이나 영국이 독일에 패배하고도 영국정부는 독일과 '협상'해서 독일에 이권을 넘겨줄 수 있다는 비교적 '관대한' 전쟁문화는 존재냐 소멸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극단적인 오리엔탈적 전쟁문화를 무색하게 하는듯 하다.

특히 민족적인 결집성이 강한 동양의 국가, 그 중에서도 근대이후 약소국으로 존재했던 한반도에서는 침략에 대해서 패배를 인정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냉혹한 댓가를 치루는지 일본통치하 36년을 거치면서 온 몸으로 익힌 절망적인 경험이었던듯 싶다. 이런 상황에서 이념으로 갈라진 북한정부와 한국정부는 각자 다른 선택을 하게 되는데, 아마 그 차이는 외세(外勢)나 외침(外侵)에 대해서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느냐 하는 문제로 더욱 큰 성향 차이를 나타낸듯 하다.

북한의 건국정부는 이념적인 성향과 더불어 민족적인 고립성이 한국정부보다 한층 강화된 모습을 보이는데, 북한 건국정부의 주요 인사들이 공산주의자이면서 일본의 침략에 맞서서 중국정부나 소련정부에 공헌하던 인사들로 이루어졌고, 특히 그 인사들 대부분은 정치적 또는 외교적인 소양이 없는 군인출신들이었던 것을 생각해볼 수 있을것 같다. 

북한이 그렇게 문제삼았던 한국의 친미정부는 2차대전의 승전국으로서 세계 경제의 46퍼센트를 차지한 막강한 세계국가 미국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는데, 비교적 자유주의적인 분위기에서 협상이나 변화에 능한 인사들이 건국에 참여를 했고, 오랫동안 미국의 영향을 받게 되었던것 같다.

그러니까 북한과 한국의 차이는 엄밀하게 따지면 이념이외의 더 큰 변수가 개입될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해외나 국제정세의 분위기를 읽고 대처할 수 있는 능력에 있어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었던것 같기도 하고, 북한의 호전적이거나 전투적이고 군사적인 건국인사들의 분위기가 건국의 분위기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도 있을것 같다.

더 나쁜것은 '외세'에 대해서 민감하고 과장되며 부정적인 관점이 북한에서 형성되어 지금까지도 주체사상을 거쳐서 '우리민족끼리'라던가 '체제유지'라는 구호에 오랫동안 의존하고 있는 북한의 변하지 않는 정신문화인듯 하다. 그 이면에는 중국이나 일본과 대등할 수 없는 한계를 인식한 약소국의 비극, 그리고 열세를 인식했을때 종속으로 직결된다는 외세에 대한 민감한 공포감등이 북한체제를 끊임없이 수렁속으로 밀어넣고 있는듯 하다.

사실 변화를 두려워하는 인간의 특성상, 변화와 통일이 과거의 나쁜 경험과 습관을 일시에 사라지게 만드는 명약처방이라는 것을 인지하기도 힘든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2014년 10월 31일 금요일

나쁜 인센티브 / 서열과 계급


내가 마르크스 이론에 가장 큰 문제점이 있다고 느낀것은 경제적인 계급을 나누는 관점과 유혈혁명을 통한 사회개선방법인듯 하다. 사회가 어느 정도 다변화되면서 연속적이거나 종합적 분류방식인 막스베버의 계층구분의 방식이 더 설득력있는 관점이 되었으며 유혈혁명보다는 설득과 계몽으로 문제를 해결해도 되는 시대에 이르게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빈부격차문제나 자본가와 노동자의 갈등문제등은 좀 더 본질적인 문제로 근본을 찾을 수 있는 사회적 태도나 관점이 어느 정도 형성이 되어 있다고 생각한듯 하다. 러시아 혁명당시처럼 봉건적인 지배와 무지한 농노계급이 존재하는 사회가 아닌바에야 마르크시즘은 과장된 해결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계급과 서열의 수직적 문화는 아직도 한반도의 민중들을 끈질기게 괴롭히는 관점인듯 하다. 혹시 그래서 아직도 이념적인 문제가 이렇게 오랫동안 여운을 남기는게 아닌지 하는 생각도 해봤다.

 북한의 지도자인 김정은이 공군부대를 시찰할때 함께 한 비행장교들에게 군사칭호(계급)를 한등급씩 올려주었다는 기사를 보면서 무지한 백성을 계급이라는 인센티브로 다스리는 탁월한 영도력을 가졌다는 생각과 정말 유혈혁명이 일어날 계급적인 관점을 형성하고 있는 사회가 북한사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가끔 승진때문에 그외의 많은 가치를 잃어버리는 지인들을 본다. 오래전 어느 날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아무것도  없어도 오만한 태도를 놓치지 않는 나를 굴복시키기위해 찾아 오는 지인이 몇몇 있었다. 그때마다 "열심히 일하여 조직의 초석이 되어주렴"하는 격려를 아끼지 않았는데,이기지 못해 버들버들(柳柳) 떨며 가는 지인의 뒷모습을 보면서 심신이 건강해질것을 끝까지 당부했던 기억이 있다. 사실 남모르는 불행을 겪던 날(한국에서는 많은 이들이 겪은),삶이 짧고 허망함을 본능적으로 느낀탓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데, 가끔 그렇고 "나도 때로는 드라마에 나오는 부유한 주인공이 되고싶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계급과 서열문화는 경쟁문화와 더불어 긍정적인 결과보다 부정적인 결과를 더 많이 가져온다고 믿는다. 우리는 서로 갈등의 존재가 아니라 협동의 존재로 봐야 옳으며 생산자는 생산품을 통하여 타인의 사랑을 받으며, 정치인은 시민에게 봉사하여 사랑을 받으며, 선생은 잘 가르쳐서 사랑을 받으며, 연예인은 이뻐서 사랑을 받아서 얻고자 하는 것을 얻어내는 것이 사회인듯 하다. 한반도는 계급과 서열문화에 오래 길들여 온 탓인지 사회자체가 계급과 서열같은 부정적인 관점과 싸우는데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는듯 하다.

"내가 반드시 성공해서 복수할거야"하는 생각이나 "쩌퍼 쩌퍼 모두 죽여버리겠다"는 화산고 학생같은 사고방식은 안 그럴것 같은 사회에서 참으로 오랫동안 잔존해 있는듯 하다.

2014년 10월 25일 토요일

국가의 실존에 관한 질문/ 하이데거와 오레스테스의 신화


한반도에서 권력과 복종,통제와 자유,공산주의 이념과 자본주의 이념같은 대립되고 경직된 관점에 얽매여 있는동안 통치철학이나 인문사회학적 발전,또는 실존적인 질문이 담긴 고민을 하지않은 댓가를 크게 치루고 있는듯 하다.

하이데거는 정치체제가 존재의 의미에 관해서 사유하는 기능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하이데거는 고대 그리스체제를 실존적인 의미가 담긴 역사의 표본으로 여기는데, 아주 오래전, 우리가 야만의 시대라고 착각하는 시절에 그리스는 정치체제와 그것을 뒷받침 해주는 철학사상이 실존적인 고민으로 가득차 있음을 말하였다.

언젠가 방황하던 시절에 미국의 정신과 의사인 M.스콧펙이 저술한 [끝나지 않은 길]이라는 책속에 담긴 그리스신화의 한 내용이 오랫동안 마음에 여운을 남긴 적이 있었다.

오레스테스는 아트레우스의 손자입니다. 아트레우스는 신들보다 자신이 강력함을 입증하려고 음모를 꾸몄습니다. 신들은 아트레우스를 처벌하여 그의 모든 가문에 대한 저주의 하나로 오레스테스의 아버지, 즉 자기 남편인 아가멤논을 살해했습니다. 이 죄악은 다시 오레스테스의 머리에 저주를 가져왔습니다. 그리스의 명예 법전에 의하면 아들은 다른 누구보다도 자기 아버지의 살인자를 죽일 의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에서 가장 큰 죄는 어머니를 죽이는 것입니다. 오레스테스는 자신의 곤경 대문에 고뇌를 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자신이 해야 될 것으로 보이는 일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결국 그는 어머니를 살해한 것입니다.

이 죄에 대해서 신들은 오레스테스를 처벌하고자 그에게 퓨리스를 보냈습니다. 퓨리스는 유령같이 생긴 새 하피를 시켜, 오직 오레스테스만이 보고 들을 수 있게끔 밤낮으로 꼬꼬댁거리는 비난과 무서운 모습으로 그를 괴롭히도록 했습니다. 그가 어디를 가든지 퓨리스가 따라다녔으므로 오레스테스는 자기 죄를 보상할 땅을 찾아 방황했습니다. 여러 해 동안의 외로운 자기 반성과 자기 파멸을 수행한 뒤, 오레스테스는 신들에게 아트레우스 가문에 대한 저주와 퓨리스를 통해 자기 위에 덜어진 그 천벌을 제거해 주도록 요청하고, 자신은 어머니를 살해한 죄가를 보상했다고 믿는다고 했습니다. 이 시련은 신들이 준 것입니다. 

오레스테스를 변호하던 아폴로는, 자신이 오레스테스로 하여금 어머니를 살해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빠지는 상황을 조성했으므로 오레스테스는 실제로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때 오레스테스는 펄쩍 뛰면서 자신의 변호자인 아폴로에게 반박하였습니다. "내 어머니를 죽인 것은 나이지 아폴로가 아닙니다." 이에 신들은 놀랐습니다. 그동안 아트레우스가에는 신들을 비난하지 않고 스스로 모든 책임을 떠맡은 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마침내 신들은 오레스테스를 위해서 시련을 끝내기로 했습니다. 그에게서 아트레우스가문에 떨어진 저주를 제거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퓨리스를 통해 현명한 충고를 제시해 오레스테스로 하여금 계속해서 행운을 얻을 수 있게 하는 유메니데스, 즉 사랑의 정령으로 변화시켜 오레스테스 곁에 계속 머물게 했습니다.

하이데거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상반된 이데올로기로 표현되는 두 체제는 효용의 관점으로, 자유주의는 개인의 이익을 극대화하는데 봉사하며 사회주의는 특정계급의 이익을 극대화하는데 봉사한다고 말한다.이런 관점은 인간이 자신에 대하여 사유할 기회를 박탈했다고 말한다.

한반도에서는 전혀 의도하지 않게 휘말려버린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만들어진 비극들을 체험하였는데, 이념문제는 그 비극들이 시간의 흐름에 의해 망각될 수 있다는 시간이 주는 특권마져도 무색하게 만드는 것 같다.남쪽만 바라보며 체제 경쟁을 하다 무너져가는 북한이나 북한에 대해서 대칭적인 존재라는 사유를 버리지 못하는 한국은 역사의 비극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운명을 지녔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권력만 있고 인민의 행복에 책임지지 않던 북쪽의 통치자, 국민의 공익보다 개인의 이익을 위해 헌신하던 지도자, 이념이나 종교등으로 사유의 편리성을 누리던 국민들 모두는 퓨리스의 저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끝나지 않는 길'을 가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2014년 10월 24일 금요일

미래가치 / 마르크스와 세이


꿈과 희망이 없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그리고 당사자가 되어보기도 했다. 신념이나 비젼이 없는 사람들의 세계는 어둡다. 그들은 자존심도 없고, 철학도 없으며 먹고 사는 일, 본능적 유희를 위해 시간과 노력을 헌신하며,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해지는듯 하다.

최소한의 기본적인 욕구, 즉 물질적인 욕구등이 충족되지 않았을 시대에는 그런것들의 충족을 기대하는 것이 미래의 가치였던것 같다. 호의호식(好衣好食)이라는 비젼을 이루기 위해서 전력을 다했던 한국의 중년이상의 세대들에게는 경제적인 문제를 넘어선 신념이나 비젼은 사치로 여겨졌던 시대를 인정할수밖에 없을듯 하다.

오랫동안 한국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진보와 보수논쟁이 이념과 관련이 있다는 착각은 전혀 타당하지 않은듯 하다. 진보와 보수의 문제는 관점을 얼마나 미래가치에 집중하느냐 하는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의 기질과 미래에 대한 비젼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고려해보면 노인의 보수적 성향이나 젊은이의  진보적 성향은 당연한듯 하다.   

또 자본의 폭주가 문제가 되는 시대의 노동가치설에 관점을 집중한 마르크시즘의 등장은 당연한 것이며, 소비자들의 사용가치와 효용가치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며, 노동력을 제공한 사람은 여가의 효용을 희생했고, 자본을 제공한 사람은 사치의 효용을 희생했다는 프랑스 자본주의 경제학자 세이(Jean-Baptiste Say 1767 -1832)의 이야기도 타당한듯 하다.다만 그 시대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는 대중의 관점에 얼마나 설득력을 주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비젼을 주었는지에 따라서 마르크스의 이론이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는 집중을 받았던듯 하다.  

사실 마르크스와 세이의 이야기보다 중요한 무엇인가가 있는듯 하다. 인간의 삶에는 비젼의 존재와 비젼을 이루기 위한 노력은 상당히 중요한 듯 하다.각자의 꿈과 희망이 결집하여 국가와 사회의 발전을 이룬다고 생각할때 사회적 불평등이 커서 국민개인의 비젼을 형성하는 동력과 그 비젼을 이룰려는 의지를 억제하고 있다면 심각한 사회적 손실이라는 생각이 든다.

중요한 것은 빨갱이 이야기도 아니고 골통 이야기도 아닌듯 하다. 내 자신이 더 늙었을때 내가 내 비젼을 이룰 수 있는 세상, 우리들 세대가 즐겁고 활기찬 젊은이들이 꿈을 이루는 세상을 볼 수 있는 이야기가 중요한듯 하다. 아직도 옛 이야기를 반복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해가 안된다.

2014년 10월 18일 토요일

기계적 마르크스 / 미완성균형곡


마르크스는 역사발전의 단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1단계 : 노동자와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와의 갈등으로 기존사회가 해체된다. 2단계 :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난다. 3단계 : 사회주의 국가가 완성된다.  

가끔 대학도서관에서 학위논문을 읽다가 다음과 같은 단어들을 많이 본다. ~에 관한 고찰, ~에 관한 제고등 형식과 논리로 잘 짜여진 제목과 세부목차를 보고 있으면 17,18세기를 전후해서  과학혁명이 일어나던 시절에 만연했던 기계적 사고의 잔영을 보는듯 한 느낌을 받는다.

물론 검증되지 못하는 직관적인 사고에 모든 것을 의존해서도 안되지만 시작과 투쟁과 완성이라는 기계적으로 짜여진 틀 속에서 경제와 역사적인 관점을 형성해 나가는 마르크스의 이론은 과학의 명분을 빌려 교조주의적인 믿음을 얻기에 충분했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하물며 종교적인 두리뭉실한 직관의 시대에 환멸을 느끼는 그 시절의 분위기는 마르크스에게 더욱 힘을 실어주었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개인의 생각이 단조롭지 않은 것처럼, 그런 인간이 모인 사회도 그렇게 단조롭지 않은듯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만연한 고민거리를 해결해줄 방도를 찾기 위한 '복음'과 같은 것을 찾는듯 하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문제점이 만연하던 시절에 마르크시즘과 같은 투쟁적인 이념이 발생하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것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세상을 완성시키는 이념이란 있을 수 없는듯 하다. 오직 균형을 위한 노력만이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개인과 사회의 모습은 정지된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움직여 나가는 생물체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야 할 듯 하다. 확고한 이념이란 대칭적인 이념을 낳게 마련인듯 하다. 말하자면 노이즈마케팅으로 서로 비판하면서 성장을 해나가다가 각자의 관점속에 갇힌채로 파국을 맞는듯 하다. 그나마 먼저 꼬리를 내리는 쪽이 승리하는것 같다.

수정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균형점을 찾아 꼬리를 내린 자본주의는 살아있고, 기계적 투쟁을 강조하던 마르크시즘은 파멸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듯 하다.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념이란 '약을 파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프랑스의 철학자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1884 ~ 1962 )는 역사의 비연속성을 이야기 하지만 노이즈마케팅으로 인하여 서로 상반된 영역이 확장되어나간 자본주의와 과학적사회주의가 극단적으로 확장된 사건은 역사적인 흐름을 포괄적으로 생각해보면 강물처럼 도도하게 끊이지 않고 흘러갔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마르크스만을 비판할 것도 아니다. 노이즈마케팅에 걸려들어서 신자유주의라는 이념으로 깊이 빠져버리거나 반공이라는 이념으로 깊이 빠져서 다른 관점의 가능성을 닫아버리는 사회도 문제가 있을 것 같다. 그래서 과거 보다는 미래의 가치를 고려하는 것이 좀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균형을 찾아서~~~

  

2014년 10월 17일 금요일

가을꽃

      가을꽃  / 이형춘  



     강변의 꽃길을 걸었다
     가을꽃은 바람에 흔들리는게 예쁘다

     그 꽃들속에 줄기는 시들고 망울이 채 열리지 않은

     슬픈 꽃이 보였다
        

     꽃송이에 눈길을 기대며
     아직도 욕망으로 가슴이 뜨거운 A노인과 내 모습을 생각했다.

     그런데 뒤에서는 ......석양이 밀려왔다.

     
     

2014년 10월 11일 토요일

(텅)빈체제 / 본질을 찾아서


북한의 지도자 김정은에 관한 여러가지 소문이 많은 가운데 북한군부의 실세 3인이 인천아시안게임폐막식을 참관하기도 했다. 정치적인 태도라기보다 유희적인 태도일 것이라는 추측대로 곧 연천에서는 총격전이 일어나서 남북관계의 기대할 수 없는 분위기를 확신시켜주기도 하였다.

김정은이 어떤 상황에 놓여도 북한체제에는 혁명적인 변화가 없을 것 같다. ( http://hyeong-chun.blogspot.kr/search?q=%EC%93%B0%EB%A6%AC%EC%BF%BC%ED%84%B0) 다만 장성택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와의 정쟁(政爭)에서 승리한 보수적인 군부세력(북한의 보수세력이란 김일성 주체사상과 같은 강력한 공산주의 이념에 의존하는 정치세력을 의미한다.)의 권력행사는 순조로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 편으로는 한국에서는 인터넷통제가 이슈로 떠 오르고 있는데, 정부에 의한 인터넷통제가 정당성이 있느냐의 문제보다 국가와 사회의 생명력을 얻어내기 위해서 필요한 여론조성에 손상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용의 심각성보다 사회이슈자체가 통제와 반발이라는 관점으로 집중되는데 문제가 있을 듯 하다.

전에도 언급한 바 있지만 마르크스주의자인 누군가의 이름으로 탈 이념론적인 입장에 있는 내이름을 손상시킬려는 시도가 국내의 모든 검찰청 홈페이지의 자유게시판에 넘치고 있지만 사회의 저점(低点)에 있으면서도 본질을 찾을려는 역동성을 가지고 있는 처지에 구질서에 편입되어 방황할 이유가 뭐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고 보니 요즘 한반도와 내 주변이 모두 냉전 중심의 구질서로의 복귀를 시도하는 것 같아 쓴 웃음이 나온다. 본질을 잊은 정치사상과 정치행위가 다시 한반도를 지배하는 날이 오면, 우리는 다 함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동방의 조용해지는  석양의 나라'를 꿈꿔야 하는게 아닌가 하는 익살스러운 생각이 떠오르기도 한다.

가끔 블러그글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사상이나 루소의 정치사상과 같은 먼 과거의 정치사상을 인용하기도 하지만 그런 사상을 원칙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무감보다는 한 번 생각해보면 어떨까 하는 의도로 제시한 것 뿐인듯 하다. 영국의 정치역사 철학자 스키너(Quentin Skinner)의 말대로 정치적 고전안에 내재해있는 지적인 맥락에 따라서 좀 다양하게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보자는 의도였던것 같다.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본질을 찾을 수 있는 길을 열어줄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통찰력은 집착을 벗어나야 생긴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데, 한 국가의 통치시스템 자체가 경직되게 흘러가는 것은 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솔직히 요즘엔 좀 방황스럽다. 반동(反動)적으로 흘러가는 주변분위기에 희망을 느껴보지 못한 탓이기도 한 것 같다. 상황이 아무리 안 좋아도 본질을 향한 역동성은 나의 모든 재산이었던 듯 한데,그 재산이 흔들리고 있는듯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과거의 이념이나 분단현실에 의존하고 있던 사람들은 내 입장과 반대입장을 가질수도 있지만 희망과 미래라는 두 단어의 밀접한 연관성을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2014년 10월 4일 토요일

이념의 오리알 유희


북한 수뇌부의 3인이 인천 아시안게임 폐막식에 참석했다.한 편으로는 '오리지날' 좌빨이 인천에 등장을 했다는 해학스러운 상상이 드는데, 심각한 한국의 좌우대립문제는 이 상황을 소용돌이같은 정국으로 끌고 들어가야 정상적이지 않나 하는 상상을 하면서 웃음이 나왔다.
 
한 편으로는 일상에서 버드나무잎과 같은 권력이라도 가져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보기도 하는데, 좌우 어느 한쪽의 모습으로 들이대면, 사태는 거국적으로 비화되어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한 유용한 도구로 화()하는 장면을 본 것이 한 두 번이 아닌듯하다.
 
그럴때면 마치 생을 유희적으로 살아가는 일단의 사람들과 본질적이지 못하면서도 본질적이 되고자 발버둥치는 일단의 사람들과의 또 다른 국면의 계층성을 보는 듯한 생각도 든다.그런 장면을 보고 웃고 있는 사람이나 북한의 작은 국가와 사회를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우월한 권력자로 착각하는 사람들은 유희의 인간으로, 어지러운 시대(시대라고 추상적으로 말하지만 사실은 너, , 우리, 우리나라 대한민국이라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존재들)를 이념이라는 다소 본질적인 프레임으로 정리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은 본질의 인간으로 규정해 보았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라캉(Jacques Lacan 1901 - 1981)은 인간은 유아기에 거울이나 타자(他者)와의 관계속에서 비춰지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자신의 모습을 찾아내다가 언어네트워크가 형성된 상징계에 진입해 주체성을 형성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라캉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반도의 민중들은 자신의 모습을 좌우이념적인 교육을 받고 그런 교육에 투영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다가 급기야 이념과 관련된 언어들의 네트워크속에서 자신의 주체성을 형성해나갔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재미있는 것은 일단 상징계에 들어간 '나'가 네트워크속의 언어를 거부하면 외부와의 관계를 잃어버리고 자신도 잃어버리는 정신병상태가 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한반도에서 이념으로부터 자유로운 자는 불안한 사회를 포용할 수 있는 너그러운 聖賢과 같은 사람이거나 정신병이 있거나 하는 논리까지 비약이 될 수 있다고 하겠다. 말장난이 좀 심했지만 아마 이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세계의 정점에 있는 사람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좌우문제에 목숨걸고 살아가는 이유는 현실보다 본질에 정신을 두고자 하는 모습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발전하는 사회와 발전하는 교육은 그것마저 본질이 아님을 밝혀주고 있는데, 내 생각에는 '인간'이란 언어를 가장 본질적인 것으로 대접을 해야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심각한 사람들의 정점(頂點)에는 책상에 앉아서 뭔가 민중을 위해서 일을 하겠다는 명분으로 일신(一身)의 유희적 즐거움을 보전하기 위해 이념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사회적 약속


어느 해 겨울에 아래층에 아기를 데리고 사는 젊은 부부가 위층 아래층에 과일을 돌렸다. 별안간 받아든 과일을 들고 당황해하고 있는데, 아이가 울어서 미안하다고 말한다. 또 그때쯤 일터에서 연로한 근로자 한 분이 일처리에 허점을 보이고 있는데, 주변분들이 대신 일을 해 주면서 기업의 입장에서는 효용성이 없는 근로자분의 신변을 보호해주고 있었다. 또 퇴근 길에 폐지를 모은 리어카를 끌고 교통을 방해하는 노인이 있는데, 누구나 경적을 울리지 않고 기다리거나 피해갔다.
 
아무도 불평을 한 일이 없는데, 아이 울음소리로 이웃에 피해를 입혀서는 안된다고 생각한 부부, 우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인식하고 있는 이웃들, 연로한 근로자를 보호하고 있는 동료들이 모두 효용성과 능률성, 이기심등의 기준을 내려놓고 암묵적으로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사회적 약속을 하고 있는듯 하였다.
 
그런 마음은 어쩌면 본능일 수도 있고, 때로는 국가와 사회가 입법적으로나 사회적 규약으로 지켜주기도 하는 약속인 듯하다.
 
한 편으로는 비숫한 시기에 젊은이들의 꿈을 꺾는 사회현실이 만들어지는 광경을 보기도 하고, 젊은이가 자신의 젊음과 성공가능성을 내세워 노인의 논리를 굽히게 만드는 장면을 목격하기도 하였다.
 
어제는 근로자들의 휴일근로수당을 깎는 입법이 발의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을 듣는 순간 휴일에 근로를 해야 하는 열등한 지위의 근로자들과 중소기업을 살리겠다는 목적으로 중소기업근로자들의 인건비로 균형을 맞추겠다는 논리를 보며 좌파적인 논리가 우파적인 논리에 압도당한다는 생각보다는 우리사회의 사회적 약속들이 점점 붕괴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부가 앞장서서 사회적 약속을 무너뜨려야 할 이유는 없는 듯 하다.

2014년 9월 27일 토요일

흐르는 정보의 강물처럼 / 인터넷 감시


인터넷상의 허위사실 유포에 대한 검찰의 감시를 대통령이 지시했다는 기사가 발표되자 좀 당혹스러운 면이 있었다. 무엇보다 지난 정부때 내 트위터계정에 조작적으로 올라오던 팔로워들의 혐오스러운 사진이 생각났다. 지난 정부때는 이념과 종교적 환상이 정국(政局)을 지배하는 상황을 많이 걱정했던것 같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이 정국을 지배한다는 사실은 창조와 미래라는 단어들과는 거리가 먼 과거지향적인 국가로의 회귀를 의미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인간이란 기득권이 있고 없고를 따지지 않고 지극히 과거 지향적이고 보수적이기 쉬운듯 하다. 미래지향적인 개혁의지는 자기자신을 일깨우려는 수고를 필요로 하기 때문인듯 하다. 개혁을 부르짖는 이들이 개혁을 갈망하는 환경에 놓인 이들조차 보수진영에 투표한다는 불만을 토로하는 것도 무리가 아닌듯 하다.

어느 날 대검찰청 홈페이지에 동명이인인지는  모르겠으나 마르크스주의자인 어느 대학교수의 이름으로 동명이인인지는 모르겠으나 내 이름을 가진 사람을 고소할려는 시도를 했다는 내용의 글이 지유게시판에 올라왔고, 그 글이 내 이름을 검색하면 검색되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많은 의미가 담긴 복선이 깔려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생각이 진실과 가상사이를 어떻게 줄타기 할 수 있는지를 자각하기도 하고, 인터넷의 폐해를 자각하기도 하고, 한국에 발붙이고 있는 동안 이념문제는 나를 끊임없이 괴롭힐 것을 자각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대통령의 지시가 있던 그 날에 그것도 대검찰청의 홈페이지에 마르크스주의자인 대학교수의 이름으로 내 이름을 가진 사람을 고소할려는 시도를 했다는 설상가상(내지는 금상첨화)의 복선이 깔린 일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많이 생각했다.

2차대전 직전에 런던 주재 미국대사인 조지프 케네디의 대사관에서 비밀전문을 담당하던 타일러 캔트가 히틀러가 유럽을 침공할 것을 대비해 처칠이 루즈벨트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는 사실을 나치의 비밀요원인 애나 울코프에게 건네 주었다. 당시 캔트는 처칠과 루즈벨트가 소비에트 공산주의자와 유대인들을 위해서 미국인들의 희생을 요구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켄트는 반역죄로 체포되고, 루즈벨트는 FBI의 후버국장에게 영장없이 도청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당시 법무부장관이었던 로버트 잭슨은 도청이 위법이라고 판단해 후버국장에게 중단을 지시했다가 루즈벨트의 지시에 의해서 지시를 번복했다고 한다.

후버는 잭슨에 대한 원한을 오랫동안 가지게 되었고, 잭슨이 사망하자 잭슨이 음란하게도 개인비서였던 정부의 품에서 사망했다고 폭로했다. 훗날 잭슨은 도청에 대한 무한한 권한을 FBI에 부여한 결정을 후회했는데, 리처드 닉슨때까지 대통령들은 30여년동안 잭슨의 결정을 방패삼아 FBI를 이용해 정적들과 국가의 적들을 추적하게 했다고 한다.

- 마이클 베슐로스의 저서 [PRESDENTIAL  COURAGE]중에서 발췌요약 - 

결국 구국적(救國的)신념에 의해서 만들어진 선례(先例)가 정적(政敵)을 물리치기 위한 술책으로 전용되어 나쁜 선례를 습관처럼 이용한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최종책임을 지고, 대통령 임기를 못채우는 오명까지 뒤집어쓰게 된 사실이 있다.

내 자신은 대통령이나 검찰간부들이 생각할 수도 없는 서민들의 일상속에서 인격적인 모욕이나 갈등을 겪는 적이 많은데, 이념문제 같은 다소 포괄적인 문제에 골몰하다 보면 치사스런 갈등이 사람들의 특징이나 사회의 흐름으로 모니터링 되어 나오는 신기한 경험을 하기도 하는듯 하다.

J.C.칼레슨이라는 어느 전직 CIA요원은 비방꾼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은 흐름을 포착하는 활동과도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 스파이가 보고하는 내용이 부정적일수록 해당요원의 경력에 훨씬 이롭다고도 한다. 그러나 기업의 세계에서는 긍정적인 데이터에만 관심을 쏟기 때문에 잠재적인 위험을 무시하게 된다고 말한다.

심각하고 본질적인 문제와 사소하거나 개인적인 감정의 문제는 구별되도록 노력해야 하고, 부정적이고 심지어는 불쾌하기도 한 많은 정보들이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훌륭한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무엇보다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와 같은 엄청난 탄압도 유학의 발전을 막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면 정보에 대한 세계는 작위적인 방법으로 흐름을 막아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

2014년 9월 20일 토요일

통일에 관한 독일과 영미(英美)식 사고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로부터 분리독립할려는 시도를 보면서 '참을 수 없는 국민의 가벼움'에 대해서 생각을 해봤다. 물론 분리되어 통상이나 왕래가 불가능한 한반도처럼 극단적인 상황까지는 가지 않겠지만 독일처럼 같은 유럽 안에서 통일을 위해서 노력하고 성과를 얻어낸 국가도 있는데, 이제는 크지도 않은 국가를 분리독립 시킬려는 시도를 생각하면 옛 '대영제국'의 영화가 빠르게 추억으로 자리잡는 노쇄한 국가를 보는듯 한 느낌이다.

독일과 영미(英美)식 국가분위기는 많이 다른듯 하다. 구태여 표현하면 이성이 강한 국가와 감성이 강한 국가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것 같다. 물론 어느 쪽이 바람직 하다고 판단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듯 하다. 감성이 우세한 국가에서 더욱 개인주의적이거나 민주적인 시민의식은 자연스럽게 발달하기 때문에 '성향의 차이가 있다'는 표현이 적절한듯 하다.

성문법이 발달한 독일식 법체계와 불문법이 발달한 영미식법체계도 차이가 있는데, 확실하고 실증적인 잣대를 표방하는 독일과 상황에 따른 개인과 환경의 유동적인 흐름을 중시하는 영미식 사고의 차이인듯 하다. 또 철학도 독일철학은 감각을 넘어선 '진리나 의무'를 가정하는 절대주의적인 성향이 강한듯 한데, 영국과 미국은 감각이나 현상, 이익의 범위 안에서 철학적인 시도를 하는 상대주의적인 성향이 있는듯 하다.

위와같은 차이는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생각해봤다. 어쩌면 대륙의 한쪽 귀퉁이에서 열려있지않은 지리적 조건, 좋지않은 자연환경, 결핍된 자원등과 싸워온 독일인들의 억제된 사고를 반영하는듯 하고, 해양으로 열려있어 일찍이 식민지 건설을 통한 풍요로움을 경험한 영국과 넓은 영토와 풍부한 자원을 통하여 인류 역사상 가장 호사를 누리고 있는 미국의 호기(浩氣)를 반영하는듯 하다.

한국은 미국의 전통적 우방으로서 자연스럽게 영미식 사고를 닮아가는듯 하다. 과거 독일과 우방이었던 일본식 사고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나쁜 환경으로 벗어나 민주적인 요구나 다양성을 인정하는 분위기, 감각적으로 변해가는 대중들의 성향은 그런것을 반영하는듯 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문제나 사회복지시스템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는 영미식 분위기를 닮지 말아야 할 '최소한의 한계'인듯 하다. 이유는 그만한 번영을 누리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달리 표현하자면 정부주도의 복지시스템 외에는 국민의 생존권을 지켜줘야 하는 안전판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복지와 일을 하고자 하는 의욕의 상관관계는 북유럽이나 독일의 모델을 지향하면 될 듯 하다.   

스코틀랜드의 분리독립요구는 작은 국가들이 모여서 유럽연합(EU)과 같은 결속체를 아루고 있는 유럽의 국제적 환경을 최소한의 위안으로 삼는듯 하다. 분리된다고 해도 고립국이나 적대국으로서 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 확신이 위안이 되고 있는듯 하다. 미국도 역시 주정부가 반독립적인 국가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외부에 대한 스트레스나 여유있는 경제적 환경이 전체국가의 결속력을 침해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인듯 하다. 반면에 결속을 위한 국제적인 환경이나 문화적, 경제적인 환경이 빈곤하고 오직 정치적 통합에만 의존했던 구 소련은 쉽게 분리되어 때로는 서로 적대적인 갈등을 보이기도 하는듯 하다.

통일과 분리에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지리적 환경등이 크게 '연루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2014년 9월 13일 토요일

경제학의 이념과 가치관


오래전 직장 동료들 사이에 양편으로 나뉘어 분쟁이 깊어지고 있었다. 상황을 근본적으로 이해할려고 애쓰면서 중립을 지키고 있었는데,  많은 식구들의 생계가 달린 곳을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감때문에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니까 어느 한 쪽에 기대어 개인의 이익을 취할려는, 흔히 기회주의자라고 불리는 수동적인 위치가 아닌 ,끝까지 직장을 살리고 유지해 나가야하는 능동적인 책임감이 마음을 짓누르는 상황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다수의 분란과 논쟁은 개인의 고뇌를 극(克)하고도 남았던것 같다. 시간이 흘러서 개인적인 일로 이념문제의 최전선(最戰線)에서 내가 좌파의 입장으로 생각하면 좌파의 위치에 있는듯 하고, 우파의 입장으로 생각하면 우파의 입장에 있는듯 한 그 때 그 곤란한 상황을 좀 더 크게 경험하는 아주 나쁜 기회를 얻었는데,지금까지도 어린 마음에 겪은 작은 일이나 큰 일이 두고 두고 마음의 상처로 남아 있는것 같다. 

그 때 그 직장에서 중립적인 위치에서 꼿꼿하게 입장을 들이미는 나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지 못한 동료 한 명이  "당신 왕따 아니냐 아니면 당신이 양쪽 모두를 왕따 시키는거 아니냐"하고 일갈(一喝)하는 취중행패를 부리고 퇴사를 했다.      

미국의 철학자 퍼스(Charles Sanders Peirce 1839 - 1914)는 인간의 정신은 태어날때부터 형성된 지식, 관습, 신념등에 의해서 성립되며 현재의 모든 인식들은 과거의 인식들의 제한을 받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문제의 근원이 되는 과거의 인식들을 찾는 작업을 해 왔는데, 개인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성공적인 결과를 보기도 하고,거국적으로 문제는 계속되고 있는 상황때문에 '참을 수 없는 내 존재의 가벼움'에 대한 비애를 느끼기도 하는듯 하다.

다음은 장하준 교수의 [경제학 강의]에 담겨 있는 구절이다.

다양한 경제이론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힘 있는 사람들이 "대안은 없다."라고 할 때(마거릿 대처가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정책을 실행하면서 말했듯) 그것이 잘못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른 바 '적대적 분파들' 사이에 얼마나 공통점이 많은 지를 알게 되면,모든 것은 부분적으로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은 부분적으로 서로 다른 도덕적, 정치적 가치관에 근거하기 때문임을 이해하고 나면, 경제학을 제대로 알게 되고, 다시 말해서 옳고 그름이 확실한 '과학'이 아닌 정치적 논쟁으로서 경제학을 토론할 자신감을 얻게 된다. 그리고 일반 대중이 이런 문제에 관한 의식을 확실히 드러낼 때에야 비로소 젊은 경제학자들이 과학적 진리의 수호자를 자청 하면서 지적인 으름장을 놀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다음은 과학적 진리를 주장하며 '으름장'을 놓는다고  나름대로 맨큐교수를 비평했던 내용이다.  


서로 다른 도덕적 정치적 가치관이란 무엇일까. 그것도 역시 좌파와 우파의 이념적 대립과 관계된 가치관일까. 아니면 직장을 페쇄시키고 모두 흩어져서 경제적인 곤란을 겪는 상황을 막기위한 노력처럼, 국가와 사회의 성장과 발전을 지켜나가기 위한 '유기적인 통합성'을 추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가치관일까.하는 문제에 대해서 생각을 해봤다. 아마도 한국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는 수많은 경제학도들은 '서로 다른'이란 의미를 '좌파와 우파의 대립'이란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퍼스의 말대로 확고한 과거의 인식의 제한을 받기 때문에 그럴것이라고 생각한다.

복지논리같은 것이나 위에서 인용한 피케티교수를 옹호하는 입장은 좌파 우파 논리에 근거하고 있다기 보다 좀 더 발전적이고 정의로운 모습으로 한국사회의 경제적인 구조가 흘러가기를 기대하는 입장인데, '개선을 위한 노력'과  '어느 편에 서기 위한 시도'는 명확하게 구분이 되어야 할 것 같다.

공리(共利)를 위해서라면 이념적인 왕따나 학문적인 왕따를 각오해야 하는 것이 한국의 현실인듯 하다. 그만큼 이념의 골이 깊은듯 하다. 인용한 장하준 교수의 글 속에 담긴 '서로 다른 도덕적 정치적 가치관'이란 단어들을 보자마자 이념논쟁을 떠올리지 않는 한국사람은 없을 것 같다.   

2014년 9월 10일 수요일

나로부터 시작된 관점 / 이기적인 이념의 세계


서점에서 이책 저책 읽다가 동류(同類)의 책들이 모두 다른 의견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옳다고 느껴지는 현상이 있어서 좀 놀랐던적이 있다. 한 편으로는 사물에 대한 판단이나 인간에 대한 판단이 내 자신이 형성한 관점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사실을 알고서 오랜 시간을 광사(狂士 : 박지원선생의 열하일기에 나오는 소피스트같은 미친 선비)와 같이 방황했던 적이 있었다.

다년간 이념의 성질을 탐구할려고 애쓰는 척 하지만 그 정체를 미리 알고 있음을 나타내지 않고 이런 저런 말을 질질 끌고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는듯 하다. 사실 이념의 발생은 창조적인 사고에 근거하고 있지만 그것이 일으킨 결과는 이기심이 가득한 관점들이 야합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선두주자인 막스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 1895 - 1973)는 나치즘을 '이성과 자연의 악마적 통합'이라고 말한다. 즉 사회의 합리화가 개인의 비이성(감성이나 탐욕같은 자연적인 것)과 결부되어 보다 강력한 사회의 합리화를 추구하고 문명파괴의 선두에 섰다고 말한다.

이념이라는 것은 상당히 과학적인 설명을 하고 있다. 이념은 문명에 대해서 어떻게든 창조적인 공헌을 하기위해 마음 먹었던것 같은데, 권력을 탐하는 소수의 인간, 더 나은 세상을 탐하는 다수의 인간에 의해서 문명파괴의 길, 특히 한반도 파괴의 길로 들어섰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듯 하다. 호르크하이머가 이 시간 이장소에 있었다면 나치즘 보다 한반도에서 횡행하는 역병과 같은 이념논란을 '이성과 자연의 악마적 통합'에 대한 실증적인 예로 연구 발표했을듯 싶다.

문제의 근원은 인간의 마음에 있고, 그래서 인간을 더 탐구하는 것이 인위적 장치인 이념을 탐구하는 것보다 더 실효성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것 같다. 한반도에서 이념이란 한반도 구성원들의 지나친 부지런함이나 과도한 작위적 행태와 결부되어 이미 절반의 문명을 파괴했고, 나머지 절반을 위태롭게 하고 있는듯 하다.   

이념적인 말과 행위로 죄를 짓는 것은 내탓이오. 내 자신이 형성한 관점의 탓인듯 하다.   

2014년 9월 8일 월요일

한국형 노인과 젊은이를 보는 애상(哀想)


어느 집에 키다리 할아버지가 살고 있었다. 마당에는 과일나무에 과일이 주렁주렁 열려있고, 꽃나무에는 꽃이 피어있으며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노래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몰려와 새소리에 묻혀서 함께 재잘거리고, 꽃더미에 묻혀서 웃고 있었다. 어느 날 키다리 할아버지는 심술이 나서 아이들을 쫓아버렸다. 그러자 꽃도 지고, 과일은 떨어졌으며, 새는 떠나고, 쓸쓸한 바람만 불었다. 키다리 할아버지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초등학교때 국어교재에 나온 이야기였는데 어렴풋이 생각이 난다. 연세 있으신 지인이 오랫동안 같은 연립주택에 살고 있는데,방음도 제대로 안되는 연립주택에서 어린아이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아이들 웃음소리가 그치고 적막함만 감돈다고 한다.  그 시절에 비해 먹어버린 나이와 더불어 스러져가는 인생과 쇠락해 가는 시간의 여운도 함께 느낀다고 말한다.

어느 날 유명 정치인이 요즘 젊은이들이 아무 일이나 하지 않을려고 한다는 말을 했다. 그러나 아무일이나 해 본 사람의 입장에서는 꿈이나 희망을 포기하고 '연명'을 위해서 근로현장에 선다면 모를까 한국에서 삼년 돈을 모아 고향에 가면 여기서부터 저기 지평선까지 땅을 살 수 있다는 젊은 외국인 노동자의 희망에 비하면 한국 젊은이들의 자화상은 초라하기 이를바 없는듯 하다.

젊은 사람과 노인을 비교해보면, 노인과 젊은이가 많이 다르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인듯 하다. 기력(氣力)과 패기(覇氣)의 있고 없음은 사려(思慮)와 심지(心智)의 있고 없음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구성과 발전에는 심각한 영향을 줄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역사를 이끌어 온 공과(供誇)를 생각하면 갖은 시련을 겪은 세대들의 어려움은 보상받지 못하는 슬픈 전설로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것도 아닌듯 하다.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서 경제적인 것과 정신적인 정성의 모든 것을 바친 노인들의 완고한 고집, 그래서 변할 수 없는 습관, 쇠락해 가는 심신(心身)은 이해하면서도 현실과 미래를 생각하면 암울한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듯 하다.

일찌기 한국이 북유럽형 복지국가로 변신하기 위한 시도를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근본적으로 국정(國政)과 관련된 논의에서 이념논리를 일찌감치 지워버렸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한 편으로는 경쟁과 이익, 감각적인 현실에 익숙한 젊은 세대들이 통일이란' 나눠줘야 하는 부담'으로 보수적인 인식을 하는 것을 보면서 어른들이 극복하지 못한 단기적인 사고의 문제점을 그대로 답습해 나가는 비극을 보는듯 하다.

백년대계가 서 있으면 희망이 생기는데, 그 희망을 찾는 것이 시급하다는 생각이 생각이 든다

2014년 9월 6일 토요일

niladmirari(허무적 무감동) / 로마의 쇠퇴


로마문화가 우아하면서도 타성에 빠져서 더 이상의 역동성을 잃어버릴때의 지식인들의 정신건강상태를 로마시인 호라티우스는 niladmirari(허무적 무감동)이라고 표현하였다.

공동체 구성원들의 유기적 연관성이나 문제의 근원속에 도사리고 있는 의식구조의 결함등을 인지하지 못하고 불안정한 현실속에서 헤메는 한국사회를 보면 성장과 쇠퇴의 분수령을 넘는 로마의 모습이 생각난다. 더구나 세계 자살률 3위인 한국, 자살률 2위인 북한사회를 생각하면 한반도의 문화는 피어보지도 못하고 지는 꽃의 전조를 보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때가 있다. 물론 문제의 근원에는 문제점이나 합의점을 찾아가는 길을 이념과 같은 정신적인 편견이 방해하고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는듯 하다.

카르타고와의 포에니전쟁에서 승리한 로마는 속주지사(proconsul)와 같은 관료집단이나 징세청부인(publicani), 원로원의원, 기사(equites)와 같은 특권층이 발전해 나갔다. 반면에 장기간 중장보병으로 종군한 자영농민들은 관리할 수 없는 농지를 버리고 몰락해 갔으며 그 농지는 정복한 속주로부터 유입된 노예노동에 의존하는 대농장(latifundium)에 합병되어 나갔다. 로마의 주축을 이루던 중소지주층들은 막대한 가계부채를 짊어지고 몰락해가면서 로마의 사회질서는 붕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로마의 귀족은 호화생활을 하며, 빈민들은 더러운 고층아파트의 비위생적인 환경에 기거하면서 빵과 서커스, 공중목욕탕, 원형극장(Colosseum)의 환상과 고된 현실을 바꾸어 나갔다. 로마의 정치권에서도 원로원을 중심으로 한 벌족파(Optimates)와  민회를 중심으로 한 평민파(Populares)로 나뉘어 서로 도시빈민을 매수하면서 자기편을 만드는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결국 시저의 종신독재권 획득의 노력과 시저의 죽음, 혼란기, 옥타비아누스의 황제즉위등을 거치면서 로마의 공화정은 전제정으로 변했다.

공화정말기부터 시작된 '로마의 역동성의 감소현상'은 제정시대에 들어와 정복전쟁이 정지되자 페달을 밟지않는 자전거처럼 로마는 붕괴되기 시작했다. 부족한 군인은 게르만 용병으로 메워지기 시작했고, 근위대(scholac)를 장악한 군벌이 황제권 획득을 위해서 투쟁하는 시대를 겪고나서 동서로마로 분리된 후 서로마는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서 멸망하게 되었다.  

머나먼 과거의 지구 저편에 있었던 찬란한 문화의 일대기를 간략하게 서술해 보았는데, 자꾸 뭔가 현실적인 감정이 개입되는 기이한 느낌을 받는 것은 우연이 아닌듯 하다.위기를 느끼면서도 손을 쓸 수 없는 감정 그런것 같은데, 호라티우스는 그런 감정을  niladmirari(허무적 무감동)이라고 표현한듯 하다.

자영업자의 몰락, 젊은 세대들의 감소, 좌파와 우파의 대립, 대기업 위주의 경제구조, 대중정치 성향, 가계부채, 외국인 노동자의 유입........이건 로마처럼 피어보지도 못한 한국의 이야기다.

2014년 9월 5일 금요일

Homo swindler swindler (사기 사기 사람)과 불확실성


어떤 부자가 악어를 키우고 있는 연못이 있는 정원에서 파티를 하다가 손님들에게 연못을 헤엄쳐 건너는 사람에게 많은 재산을 줄것을 제의했다. (원래 딸을 줄 것을 제의했다는 우화인데, 불확실성에 운명을 맡겨야 하는 불쌍한 딸의 입장과 양성평등의 구현을 위해서 그냥 재산으로 바꿔봤다.)

순간 어떤 젊은이가 연못에 뛰어들어 헤엄을 쳐서 건너갔다. 사람들은 그 젊은이의 용기를 칭찬하며 부자는 자신의 약속을 지킬 것을 다짐하며 물었다. "어떻게 그런 용기가 나올 수 있나?" 그러자 젊은이가 외쳤다. "누가 나를 밀었소?"

"신이 세상을 창조할 때 확실성을 포함시키는 것을 깜박 잊어버렸다."

시카고 학파 경제학의 시조로 알려진 경제학자 나이트가  한 말이다. 나이트는 측정이 불가능한 불확실성(An unmeasurable uncertainty)의 위험은 이윤발생의 원천이며 불확실성이 높을수록 불확실한 상황과 불확실한 미래를 확실한 것으로 바꿀 수 있는 판단력이 있는 관리자의 중요성이 커진다고 말한다. 물론 관리자뿐만 아니라 불확실한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서 누군가의 창의력을 필요로 하고, 그 창의력이 작게는 개인, 기업과 크게는 국가와 인류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불확실성이 큰 사회일수록 창의력과 판단력, 예측력을 더욱 필요로 하고, 불확실성이 큰 상황에 놓인 기업일수록 불확실한 상황을 관리가능한 상황으로 제압할 수 있는 인재가 필요한 것은 당연한듯 하다.

사람들은 열심히 돈을 벌어 저축을 한다. 그리고 좋은 직장을 얻을려고 노력하고, 안정된 노후를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하는데, 역시 불확실성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하는 태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또 전후(戰後)의 혼란속에서 재벌이 탄생할 수 있는 것도 불확실한 상황을 이겨나간 공로에 대한 댓가로 많은 사람들의 호의적인 시선을 받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인류역사에서 반드시 과학문명이나 물질문명의 개선을 위한 노력으로 불확실성을 타개하는 방법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한 상황일 수록 정신적인 확실성을 지향하는 노력이 있게 마련인데, 춘추전국시대 혼란기에 발달한 중국의 여러가지 철학사상이나 불확실한 개인의 운명이나 사회적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 등장하는 종교사상, 이데올로기 사상등도 모두 불확실성을 관리가능한 확실성으로 바꿀려는 노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불확실성을 이겨나갈려는 자세조차도 불확실할때는 문제가 되는듯 하다. 불확실한 상황은 실증(實證)과 비증(非證)의 틈새시장을 발달시키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는듯 하다. 불확실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간절한 요구는 쓸모없는 창의력과 판단력, 직관력도 함께 불러들이는 문제도 생기는듯 하다. 불확실한 처지에 있는 개인은 사기범죄에 노출되기 쉽고, 불확실한 상황에 놓인 국가는 이념이나 종교에 집착하기 쉬운 성향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듯 하다. 간절한 소망이 노력을 동반하지 않을때는 '보이지 않는 손들'의 '보이지 않는 투쟁'이 심각한듯 하다.

한국이 다른 범죄율은 낮은데, 사기나 횡령과 같은 범죄율은 세계최고라는 통계를 보고 생각해 보았다. 어느 날 '성공하는 법'에 관한 실용서적을 읽다가 어떤 창의적인 노력보다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 흔들어서 있는 돈을 내놓게 할 수 있는지에 관한 기술이 담겨 있는 것을 보고, 머나먼 미래를 예측해 보았다. 누구나가 그런 기술을 배워서 서로의 주머니를 노리는 보이지 않는 전쟁터가 만들어진다면 창의성은 누가 발휘하며 위험을 감수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그게 머나먼 미래의 예측이 아닌 지금의 상황인듯 하다.내 자신은 이렇게 예측력이 없어서 초라하게 사는게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어 쓴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2014년 8월 30일 토요일

루소의 역사공부


나는 언제부터인가 좋은 사람이 되어간다. 누군가 싸움을 걸어오면 그 싸움에 응대하기보다는 그 누군가가 왜 싸움을 걸었는지, 배경에는 어떤 생각이 있는지, 나아가서는 저런 기질을 만든 것은 가정사탓인지, 아니면 동류집단에서 유행하고 있는 분위기의 탓인지를 생각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원인없는 결과는 없으며, 반대로 결과를 보며 원인을 유추할 수도 있고, 어떤 열악한 지위나 장소에서도 인간이 있는 곳이라면 무한한 생각의 꺼리를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이 인간사(人間事)라는 사실을 조금씩 깨달으며 삶의 풍요로움을 느끼기도 하는 것 같다. 배움이란 인간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존재하며, 사회는 내속에 있는  다른 욕망들이 배움의 열망으로 대체될때는 비싼 학비를 내는 어떤 학교도 가르쳐주지 않는 것들을  가르쳐주는듯 하다.

루소는 특히 인간을 읽는 방법으로 역사의 도움을 강조하고 있는데, 개인과 사회, 그리고 국가가 어떻게 유기적으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오밀조밀한 피조물들의 세계를  형성해나가는지를 한 눈에 통찰할 수 있는 방법으로 역사공부를 권하고 있다. 방금 '피조물'이란 창조주의 관점에서 표현한 종교적인 단어를 인용한 까닭은 역사공부는 관점을 그만큼 넓혀줄 수 있다는 과장된 표현으로 인용해 본 것인데, 그만큼 넓은 관점을 약속해준다는 확신이 떠오를때가 종종 있는듯 하다.

역사의 도움을 얻으면 철학의 교훈 없이도 인간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이 도움을 얻으면 그는 냉정하고 편견없는 방청자로서 그것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원조자나 그들의 비난자로서가 아닌 그들의 비판자로서 말이다.

- 중략 - 

더구나 역사에 그려진 사실은 진실로 있었던 것의 정확한 기술이기는 커녕 역사가의 머릿속에서 변형되어 그의 이해에 따라 빚어지고 그의 편견에 물들여진다. 청년에 대해서 가장 나쁜 역사가는 그에게 자신의 의견을 가르치는 역사가이다. 사실 그 다음은 만사를 그 자신에게 판단시키는 것이 좋다. 그래서 그는 인간을 배우는 것이다. 만일 그가 항상 작가의 입장에서만 지도하게 된다면 결국 그는 다른 사람의 눈으로서 보는 셈이되어 눈이 없어지게 되면 그는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된다. 

- 중략 -

역사에는 결점이 있다. 그것은 사람과 때와 장소에 따라 확정할 수 있는 명백하고 현저한 사실만을 기록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에 대한 완만하고 점진적인 원인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으므로 언제나 모르고 있다. 역사가는 한 정치가를 그리는데 있어서 그가 보아도 좋도록 그린다. 역사가가 그리는 것은 그 자신보다도 그의 의상을 그릴 뿐이다. 나는 차라리 개인의 전기를 읽어서 인간 마음의 연구를 시작하려고 한다. 

- 루소[에밀]-

제도권 밖에서 인간과 사회를 공부하여 한때 에밀을 저술하고 나서 수배자 신세가 되었던 루소의 자율적인 학습관이 잘 나타나 있는듯 하다. 자연으로 돌아가길 강조했던 루소는 구속받지 않는 생각의 가치를 말하고 있으며 본인이 그 가치를 실증하여 인류역사상 사상의 발전에 가장 큰 변화와 공헌을 한 인물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는듯 하다.

루소의 생각이 현재 내가 속한 사회와 그 구성원들에게 좀 더 가치있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괜한 마음이 아닌것 같다. 이곳은 세뇌 시킬려는 마음과 세뇌 당하는 마음만 만연하고 있는듯 하다. 루소는 독립적인 사고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는듯 하다.

2014년 8월 29일 금요일

북한의 시장경제 / 위로부터의 개혁이 필요


북한에서는 이미 정부의 배급체계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지 오래되어 각 가계의 단위로 '자생적 시장경제'의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북한정부는 시장경제의 인프라가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발생한 시장경제의 출현에 무척 당황한듯 하다. 그렇다고 이념으로 지탱하는 체제에서 혁명적인 변화는 체제유지를 위해서 적극 억제하고 있고, 점증적인 변화조차도 자신이 없는 곤란한 상태에 있는듯 하다. 화폐개혁도 시도해 보았지만 변하지 않는 정치체제는 변하지 않는 경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만 확인한듯 하다.

북한의 변화가 어려운 이유는 당연히 이념적인 체제때문이지만 변화의 모델로 삼을만한 사례가 없을 정도로 기이한 형태로 운영되어온 정체성의 혼란에 기인한듯 하다. 위로부터의 개혁으로 정치는 사회주의, 경제는 자본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중국과는 달리 정부주도로 조세제도나 법률제도와 같은 시장경제의 인프라를 갖추기도 전에 인민들이 시장경제의 좌판을 먼저 벌려버린 결과는 유럽에서 18세기 이전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산업자본주의가 아닌 상업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보여줄 것 같다.

18세기 이전의 유럽의 상업자본주의는 전근대적인 지주의 고리대나 특권상인들의 지배에 의해서 운영되며 전통적인 봉건제도에 기생하는 좋지않은 상황이 지속되었는데,북한의 시장경제도  체제에 적당히 기생하여 부패나 빈부격차문제를 발생시킬 것이라는 사실은 예정되어 있는듯 하다.   

경제시스템에는 손을 놓고, 체제수호에만 전력을 하는 북한 정부의 입장에서는 인천아시안게임에 응원단을 보내지 않는 방침같은, 어떤 이유를 들어서라도 인민들과 외부와의 소통을 단절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할듯 하다. 이천칠백만의 작은 시장규모에서는 식민지를 포함한 광대한 시장을 바탕으로 했던 18세기 이전 유럽의 상업자본주의만도 못한 여건을 가진 북한은 시장경제에서 발생하는 인민의 발산하는 경제적 자유에의 욕구를 막는것이 시급한 문제임을 생각하는듯 하다.

한 편으로는 정부주도로 산업을 발달시켜서 시장경제를 더욱 확대시키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예측되지 않는데, 산업자본주의 발달과 경제규모의 팽창,그리고 지금의 북한체제는 과거 유럽의 시민혁명과 산업혁명 당시를  생각하면 체제에 위협이 될것이라는 불안감을 주기에 충분한 듯 하다. 2000년이전에 중국 진나라에서도 있었던 왕도 옹립할 수 있는 자본가의 힘은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시장경제로의 항로는 닥쳐야 될 운명같은 사건으로 볼 수 밖에 없는데, 계속 방치하여 북한 정부가 붕괴되고 국가가 전체적으로 깊은 혼란에 빠지는 길 보다는 19세기 초의 프로이센의 슈타인 하르덴베르크(Stein . Hardenberg)개혁과 같이 위로부터의 개혁이나 위로부터의 자본주의화를 시도해보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 이전에 이념적인 편견을 벗어나서 경제적인 문제에 전력을 할 수 있는 인재를 육성하고,그 인재가 자신의 견해를 국정에 반영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주는 것이 필요한듯 하다.


2014년 8월 24일 일요일

사상적 놀이감 / 루소


여러분의 학생을 자연의 현상에 주의시켜라. 곧 그는 호기심을 일으킬 것이다. 그러나 그 호기심을 만족시키는데 너무 서둘지 말라. 그의 앞에 손이 닿는 문제를 주어서 그 자신에게 풀게하라. 여러분이 말해주어서 알게 하지 말고 그가 스스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에게 학문을 가르치지말고 그 자신이 그것을 발견하도록 만들어라. 만일 그의 마음속에 이성 대신 권위를 넣어 준다면 그는 추리하지 않을 것이며 타인의 사상적 놀잇감이 되고 말 것이다.  

-  루소 -

주입식 교육과 수동적인 학습습관이 어떻게 우민(愚民)을 만들어 내는지를 잘 표현한 글인듯 하다. 내 경험으로는 생각하기를 멈추고 반복학습을 시작한지 일주일이 되니까 두뇌회전이 느려지는걸 분명히 느끼곤한다. 그러나 살아가는 현실에서는 생각의 영토를 넓힐 기회가 그렇게 주어져있지 않는듯 하다. 타인의 영토를 빼앗지 않고도 영토를 넓힐 수 있는 창조적인 방법인데도 불구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