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직장 동료들 사이에 양편으로 나뉘어 분쟁이 깊어지고 있었다. 상황을 근본적으로 이해할려고 애쓰면서 중립을 지키고 있었는데, 많은 식구들의 생계가 달린 곳을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감때문에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니까 어느 한 쪽에 기대어 개인의 이익을 취할려는, 흔히 기회주의자라고 불리는 수동적인 위치가 아닌 ,끝까지 직장을 살리고 유지해 나가야하는 능동적인 책임감이 마음을 짓누르는 상황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다수의 분란과 논쟁은 개인의 고뇌를 극(克)하고도 남았던것 같다. 시간이 흘러서 개인적인 일로 이념문제의 최전선(最戰線)에서 내가 좌파의 입장으로 생각하면 좌파의 위치에 있는듯 하고, 우파의 입장으로 생각하면 우파의 입장에 있는듯 한 그 때 그 곤란한 상황을 좀 더 크게 경험하는 아주 나쁜 기회를 얻었는데,지금까지도 어린 마음에 겪은 작은 일이나 큰 일이 두고 두고 마음의 상처로 남아 있는것 같다.
그 때 그 직장에서 중립적인 위치에서 꼿꼿하게 입장을 들이미는 나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지 못한 동료 한 명이 "당신 왕따 아니냐 아니면 당신이 양쪽 모두를 왕따 시키는거 아니냐"하고 일갈(一喝)하는 취중행패를 부리고 퇴사를 했다.
미국의 철학자 퍼스(Charles Sanders Peirce 1839 - 1914)는 인간의 정신은 태어날때부터 형성된 지식, 관습, 신념등에 의해서 성립되며 현재의 모든 인식들은 과거의 인식들의 제한을 받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문제의 근원이 되는 과거의 인식들을 찾는 작업을 해 왔는데, 개인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성공적인 결과를 보기도 하고,거국적으로 문제는 계속되고 있는 상황때문에 '참을 수 없는 내 존재의 가벼움'에 대한 비애를 느끼기도 하는듯 하다.
다음은 장하준 교수의 [경제학 강의]에 담겨 있는 구절이다.
다양한 경제이론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힘 있는 사람들이 "대안은 없다."라고 할 때(마거릿 대처가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정책을 실행하면서 말했듯) 그것이 잘못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른 바 '적대적 분파들' 사이에 얼마나 공통점이 많은 지를 알게 되면,모든 것은 부분적으로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은 부분적으로 서로 다른 도덕적, 정치적 가치관에 근거하기 때문임을 이해하고 나면, 경제학을 제대로 알게 되고, 다시 말해서 옳고 그름이 확실한 '과학'이 아닌 정치적 논쟁으로서 경제학을 토론할 자신감을 얻게 된다. 그리고 일반 대중이 이런 문제에 관한 의식을 확실히 드러낼 때에야 비로소 젊은 경제학자들이 과학적 진리의 수호자를 자청 하면서 지적인 으름장을 놀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다음은 과학적 진리를 주장하며 '으름장'을 놓는다고 나름대로 맨큐교수를 비평했던 내용이다.
서로 다른 도덕적 정치적 가치관이란 무엇일까. 그것도 역시 좌파와 우파의 이념적 대립과 관계된 가치관일까. 아니면 직장을 페쇄시키고 모두 흩어져서 경제적인 곤란을 겪는 상황을 막기위한 노력처럼, 국가와 사회의 성장과 발전을 지켜나가기 위한 '유기적인 통합성'을 추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가치관일까.하는 문제에 대해서 생각을 해봤다. 아마도 한국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는 수많은 경제학도들은 '서로 다른'이란 의미를 '좌파와 우파의 대립'이란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퍼스의 말대로 확고한 과거의 인식의 제한을 받기 때문에 그럴것이라고 생각한다.
복지논리같은 것이나 위에서 인용한 피케티교수를 옹호하는 입장은 좌파 우파 논리에 근거하고 있다기 보다 좀 더 발전적이고 정의로운 모습으로 한국사회의 경제적인 구조가 흘러가기를 기대하는 입장인데, '개선을 위한 노력'과 '어느 편에 서기 위한 시도'는 명확하게 구분이 되어야 할 것 같다.
공리(共利)를 위해서라면 이념적인 왕따나 학문적인 왕따를 각오해야 하는 것이 한국의 현실인듯 하다. 그만큼 이념의 골이 깊은듯 하다. 인용한 장하준 교수의 글 속에 담긴 '서로 다른 도덕적 정치적 가치관'이란 단어들을 보자마자 이념논쟁을 떠올리지 않는 한국사람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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