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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 24일 토요일

이념과 정치적 준지대(quasi-rent)


"많은 실패를 겪더라도 최고의 자리를 바라보라" 역경을 이기고 미국의 대통령이된 링컨의 말이다. 가끔 사회의 여러분야에서 그 세계로의 진입장벽을 느끼는 경우가 많은것 같다. 정보통신의 발달로 많이 해소가 되어가는 느낌이지만 구세대의 감각은 '우리세계'의 의미가 생각보다 중요한것임을 느끼게한다.

언젠가 새로운 정치돌풍을 일으킨 국회의원이 갑자기 대통령후보로 거론되자 정치세계에 익숙하지 않음을 비평하는 기존 정치인의 비평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애매모호한 정체성을 비평하는 기존 정치인의 비평이 또 있었다.

모든 일에서도 그렇지만 정치적인 목표가 이타적이고 공리적이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그냥 익숙해지는 일중의 하나로 자리잡는듯 한데, "누가 되던지 되고나면 다 똑같다."는 정치에 부정적 관점을 가진 대부분의 시민들의 표현이 어쩌면 순리인듯 하다.

경제행위에서 어떤 이익집단이 새로운 구성원의 진입을 막음으로써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성향이 있는데, 이것을 경제학자 마샬은 '준지대'라고 표현하였다. 생각해보면 정치세계에서도 이런 준지대가 존재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변호사나 의사의 숫자제한등의 준지대행위는 직능집단의 의회진출이나 경제적로비등이 수단이 되지만 한국정치세계에서 준지대의 수단이 되는것은 '이념적 정체성'인듯 하다. 가장 포괄적이고 국민생활의 가장 정점에 있는것이 정치분야인 만큼, 변하지 않는 세계를 만들기 위한 이념의 장벽은 극히 장대한 넘사벽인것 같다.

그렇다고 준지대의 피해자인듯한 정치신예가 옳고 바르다는 검증을 하기 힘든 문제도 정치적 준지대를 막을수 없는 원인이 되는듯 하다. 앞서 링컨의 한마디를 소개했는데 노예해방이라는 초유의 업적을 이루었지만 최고의 자리에 연연한 모습에서 '덜 이타적인'목표에서 발생하는 링컨의 인간적 고뇌를 이해할 수 있을것 같다.  

살아있는 생물체와 같은 정치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역시 살아있는 생물체와 같이 이타적이고 공리적인 목표의 계속적인 내면적투입이 있어야 할것 같은데, 쉽지않은 일인듯 하다.싱가포르의 국부(國父)인 리콴유처럼 처음부터 이념적인 바탕이 없는곳에서 시작하기는 쉬우나 이념적 준지대가 이미 형성되어있는 한국에서는 이념적 정체성이 없는 정치인의 여정이 많이 힘들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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