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일전 우체국직원의 민원처리태도에 대해서 아쉬운점이 있어서 국민신문고에 의견을 넣었다. 해당 직원개인을 겨냥한것이 아니고, 다른 금융기관과 비교되고 경쟁관계에 있는 우체국의 입지와 공공기관의 특징이 연루된 사안이었다. 몇개월전 진짜권총을 팔겠다는 제안이 와서 경찰청에 제보한 이후 국민신문고에 의견을 제시한것은 두번째인데 그다지 활력있는 제보활동을 하지 않는 조용한 소시민으로서 사는것 같다.
그런데 신문고에 올린 글을 다시 읽어보고 해당기관장분의 정성이 담긴 사죄의 전화를 받고 나서는 주체적인 소시민의 의견이 아닌 공공기관의 입지전체를 연루시키는 의견으로 확대될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좀 미안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이탈리아의 혁명적 좌파 정치가였던 그람시( 1891 ~1937)가 이야기한 '대항이데올로기를 만들어서 노동자들의 집단의식을 일깨우는 유기적 지식인'에 관한 이론이 생각이 났다.
쉽게 표현하면 공공기관과 시민의 관계가 정당한 서비스를 받을 권리관계를 넘어서 갑을의 지배관계로 비화되는 일이 일어난것 같았다.
그람시는 인간은 어떤 형태로든지 지식인 활동을 수행한다고 한다. 그런 활동에는 두가지 유형이 있는데, 첫번째는 예술가나 철학자, 또는 성직자처럼 도덕적이거나 이상주의적인 이데올리기를 따르므로서 편을 가르는 시류(時流)에 휩쓸리지 않는 방식으로 안온(安穩)함을 구하는 방식이 있고,두번째로는 한 시대의 헤게모니를 잡고있는 자본가들에 맞서는 대항마로서 노동자들을 결집시키기위해 '정당'을 만들어내는 지식인의 형태가 있다고 한다.
정보통신이 발달하고 교육수준이 높은 요즘시대는 그람시의 두번째유형의 지식인들이 의미가 없는것 같다. 마르크스의 계급적인 시민분류방식보다는 베버의 계층적인 시민분류방식이 훨씬 어울리는 시대가 도래한지 오래된것 같다. 예를들면 자본가이면서 교육수준이 낮은 시민과 노동자이면서 교육수준이 높은 시민이 공존하며, 어떤 계층을 싸잡아서 비판하다가도 가족이나 친구중의 누군가가 비판대상에 포함되어있다는 생각이 들어 슬그머니 억양이 낮아지는 시대인듯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는 여전히 좌파와 우파, 지배와 피지배라는 양면적인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같은데, 북한이라는 존재와 지식인들의 정치적인 욕망들이 어우러져 발생한 특이한 상황인것 같다. 사실 시민들의 현실과 기대는 훨씬 다양하지만 정치시스템을 통해서 산출물로 전환되어 나올때는 좌파와 우파라는 색깔로 이분화되어 나오는 고질적인 병폐가 보이는것 같다.
나는 왜 우체국에 민원을 제기했을까. 시민의 한사람으로서 친절한 도움을 받고자했지 민원인의 편에서 공공기관이라는 거대조직에 대항하는 장렬한 시민은 아닌듯 하다. 어떤 국가기관은 호국의 사명감을 띄고서 국민의 절반을 좌파로 매도하고, 시민은 각자의 권리를 행사하기위해서 촛불을 들고, 시위는 야당에 의해서 정치적인 색이 입혀지는 악순환을 보면 선량하고 다양한 민주시민의 요구라도 정치적인 활동에 의해서 정책수요가 왜곡되어버리는 현상이 있는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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