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와 우파의 대립이 심한 한국에서 중도적인 입장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실제로 이념의 바람에 휩쓸릴 여유없이 민생(民生)의 가장 고달픈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사상이나 지식의 가면을 벗어버린 일그러진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인듯 하다.
그들은 결집하여 의사를 표현할 구심점도 없이 기회주의자라는 비난을 감수하며 삶의 가장 본질적인 소망인 '행복'을 찾아서 방황하는 유랑민의 무리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기회주의라는 비난을 감수하며 역사속에서 자신만의 길을 고수했던 등소평의 어려움은 크게 변화되고 발전된 중국의 모습으로 보상받았지만, 대의적이거나 이타적인 목적없이 개인의 욕심을 위하여 기회주의적 태도를 취하게된 정치가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프랑스혁명 당시 3신분을 대표할 국민의회를 만들자고 제안했던 시에예스는 프랑스혁명의 물살이 폭풍처럼 거세지고, 자코뱅당의 로베스피에르가 공포정치를 펴자 외교관으로 피해있거나 시골에서 은둔 생활을 하면서 일신(一身)의 안위(安違)를 구했다.
시에예스는 나플레옹이 쿠데타를 일으키자 나플레옹의 분위기를 '시민적'이라고 착각해 나플레옹의 쿠데타를 주도하다가 나플레옹이 독재를 하는것을 보고 다시 은둔하게 된다. 그러다가 루이필립이 정권을 잡자 다시 파리로 들어왔다. 격렬한 프랑스혁명의 와중에서 숨어 있다가 모임에 나가자 반가와한 친구가 "그 동안 자네 무엇을 했나?"하고 묻자 "살아 남았지."하고 대답한 일은 유명하다.
정치가야 고정적인 지지기반을 구축(構築)하기 위해서 이념이나 종교등을 이용한다고 할 수 있겠지만 국민의 행복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국가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행복해야만 하는 국민들이 이념이나 종교적인 프레임속에 자신들의 사고를 구속하는 일은 자각하여 피해야할 일 같다.
실현 불가능 하더라도 '행복'이라는 단어가 사고의 프레임으로 자리잡는 것이 훨씬 합리적일것 같다. 이념이나 종교같은 대의 명분을 띄고 있는 단어의 알량한 과오를 되짚어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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