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성장동력이라는게 반드시 물질적인 측면에만 있는것이 아니라는것은 교육받은 사람들이 많아진 현시대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생각컨데, 바람을 좇아서 온 기력을 다 쏟았던 보나푸는 이 정밀감(靜謐感)을 알았으리라. 기요메도 또한 눈속에서 알았을 것이다. 나 자신도 어떻게 잊을 수 있으랴. 목까지 모래속에 파묻히고, 갈증으로 바싹바싹 목이 졸리면서, 그 별들의 망또 아래서 그렇게도 마음이 포근했을때의 일을.
어떻게 하면, 우리들의 마음속의 이러한 일종의 해방감을 북돋을 수가 있을까? 인간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이 모순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어떤 사람에게, 그가 의도하는데로 창작에 몰두할 수 있도록 생활을 보장해 주면 그는 잠들어 버린다. 승리를 거둔 정복자는 이내 연약해진다. 선심좋은 사람에게 돈을 주면 수전노가 되어 버린다.
인간을 행복하게 해준다고 주장하는 정치상의 주의(主義)란 것도, 그것이 어떤 종류의 인간을 행복하게 하려는지 우리가 미리 알지 못한다면 무슨 가치가 있을까? 누가 태어나려는가? 우리는 먹이만 있으면 만족해하는 가축들이 아니다. 또 우리에게는 한 사람의 가난한 <파스칼>의 출현이, 분별없는 부호의 출현보다 훨씬 값어치가 있는 것이다.
- 쌩땍쥐베리의 (인간의 대지)중에서 -
한때는 이념의 세계가 지고(知高)하고 창조적인 역동성을 발휘하던 시절이 있었다. 비록 다수나 개인의 행복과 평화를 위한다는 대의적인 명분을 내포하고 있지만 실상은 식자(識者)들이나 행동가들의 자아실현의 도구로서 역할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이등병과같은 삶의 생명력을 끌어내기위한 도구로서 이념을 사용한 면이 있는것 같다. 결국에는 지식과 행동력을 함께 갖춘 정치인이 목표한 그 둘을 모두 갖게되는 결론으로 마무리짓게 되었지만서도.......
북한정부의 국가운영방식을 시계열로 살펴보면 국가를 성장시킬수 있는 이념적인 성장동력이 구제할수 없는 정도로 바닥을 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개성공단사태에 이르러서는 스스로의 획기적인 개선이던지 통일이던지 확실하게 양자택일을 해야하는 지경까지 이른것이 확실하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아마 지도자의 흐트러진 기상이 가장 큰 원인이 되지 않았나 싶다.
자유주의 체제인 남한에서는 많은 갈등을 겪고 있지만 그래도 문제를 제시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피드백을 시킬 수 있는 유연성과 기회가 주어진 까닭에 밝은 미래를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특히 이 문제에 관해서 국민의 정신적인 역량을 갉아먹는 듯한 문제들에 대해서 많은 개선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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