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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31일 금요일

탈북자와 외교관


라오스대사관과 탈북자간에 연락이 불통되고 탈북한 청소년들이 북으로 송환되었다는 뉴스다.  

반기문이 인도로 발령이 나자 외교부 감사관이 반기문을 불렀다. 지금이야 인도가 '친디아'니 하며 중국과 함께 성장가능성이 높은 나라로 주목받고 있지만 그때만 해도 인도는 오지에 속하는 나라였다. 그런데 외교부 입부 연수 1등이 인도에 가다니 모두 이해하기 힘들어했다. 급기야는 외교부 감사관이 반기문을 불렀다. 뭔가 부당한 인사조치가 개입된게 아니냐는 소리가 돌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자네는 최우수 성적으로 연수를 마치지 않았나. 미국으로 지원했는데 발령이 잘못 난 것은 아닌가?"
"아닙니다. 제가 지원한 것이 맞습니다. 미국은 다음에 갈 기회가 있겠지요. 지금은 제가 지원한 대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청소년들에게 읽으라고 만들어진 롤모델 시리즈에 있는 반기문사무총장의 전기중 일부분이다.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고 선량하게 사는 것이 중요함을 자각하기 위해 사서 읽었는데 나이에 맞는 눈높이로 책을 해석하다보니 외교부내의 인사현실, 반기문총장의 인품 그리고 외교관으로서의 소명의식보다 출세에 무게를 두었다는 느낌이 드는 책의 내용이 종합적으로 눈에 들어온다. 

외교부뿐만이 아니라 모든 관료조직에는 외부에서 모르는 또 다른 그들 세계만이 있는 법이고, 관료조직의 구성원들은 조직내부의 세계에 몰입되어 공복(公僕)의식을 잊어버리기 쉬운 면이 있는것 같다. 조직 내부의 문제나 출세, 라오스대사관으로 발령받은 영사의 자질, 외교부의 내부인사등이 모두 연상되는데, 중요한 것은 평등하게 존엄한 여러 어린 생명이 스러지게 생겼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이 놀다가 연못에 돌을 던졌는데 개구리가 맞아 죽었다.

오래전 외무고시에서 한과목 과락으로 떨어졌다가 다음 해에 붙은 어느 합격생의 합격기에 나왔던 푸념인데 하필이면 지금 딱 탈북청소년들의 처지를 표현하고 있다.

2013년 5월 30일 목요일

장엄과 웃음은 한 걸음 차이에 불과하다.


오래전 어느날 유명하고 잘 나가는 교육연구소에서 전화가 왔다.

"회장님이 이형춘님을 영광스럽게도 뵙자고 하십니다."

속으로 러시아원정을 갔다가 부하를 모두 잃고서 돌아온 나플레옹이 중얼거리던 말이 생각났다.

(장엄과 웃음은 한걸음 차이에 불과하다.)

"언제 찾아뵐테니 회장님께 그렇게 전해 주십시오."

그러구 소리소문없이 연구소의 교육현장을 다녀왔다.
물론 인품이 좋으신 '회장님'도 만났지만 나에게 전화한 교주를 따르는 제자같은 직원은 만나지 못했다.

지난 정부의 시작과 끝을 사이버권력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던것 같다. 혜란강가에서 말을 달리지는 못할망정 이런 치사스런 문제에 신경을 쓸수밖에 없었던 것이, 빈한한 내 처지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 것으로 국기(國氣)를 문란하게 만들 징조가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티끌만한 애국심이 있다면 미력이나마 손을 써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보와 보수를 떠난 정치적 중립성을 피력했으면서도 많은 공권과 정치계의 인사들이 들여다 볼만한 시민단체홈페이지에 '청천'이라는 닉네임으로 들어가서 쉽고 재미있고 편안하게 빅부라더의 탄생을 막을려는 노력을 했던 것 같다. 클릭한 일만명이상의 사람들중에는 '청천'이 누군지 궁금해하는 이들도 많았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 날 이후 컴퓨터에서나 주변에서 일어나는 많은 이상한 일에 대해서는 실사구시적인 커다란 증거들이 잡힐때까지 낚싯대를 드리우고 참고 견디는 인내력을 나름 발휘하곤 했었던 것 같다.

기어이 사이버안보컨트롤타워에 대해서 한마디하면서

지난 정부의 시작과 끝을 혜란강가에서 말을 달리는 선구자의 장엄함대신 키보드위에서 손가락을 달리는 찌질함으로 일관했는데, 한 편으로는 007과 같은 멋진 에이전트의 역할대신 컴퓨터의 특정사이트를 들여다 보면서 댓글을 달아야 하는 정보기관 직원들의 애환에 동병상련의 애절함이 느껴지기도 하였다.

상상력이 풍부했던 나플레옹은 러시아원정의 패전에서 초라하게 변해버린 자신을 보면서 폴란드대사 데 프라트에게 "장엄과 웃음은 일보의 차이에 불과하다."고 말했는데 영웅심으로 우쭐대던 과거의 모습에 너무 대조적인 자신을 자조적(自嘲的)으로 표현한 말 같다.  

톨스토이는 [ 戰爭과 平和 ]에서 자신에게 충성한 사람을 버리고 도망가면서도 자만심을 잊지 않는다고 나플레옹을 냉철하게 비판하고 있는데, 어쨌거나 우스꽝스러운 것은 부정할 수 없다고 하겠다.

이념, 종교 또는 상상력은 잘못 사용하면 장엄함에서 우수꽝스러움으로 반전되는 것이 한 순간인듯 하다

2013년 5월 27일 월요일

탈(脫)무드


탈무드는 널리 알려진 유태인들의 정신교육서로서 오래전에 흥미롭게 읽은적이 있다. 그 중에 특히 "가장 좋은 사람은 남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그 다음이 남을 미워하는 사람이며, 그 다음이 무관심한 사람이다. "라는 내용은 오래 기억에 남는다.

살다보면 너무 싫은 사람은 미워하지도 않게 되는것 같다. 시쳇말로 '투명인간' 취급을 한다고 말한다. 존경은 고사하고 미워하기도 싫은 문제들이 많은 정치적 관심사는 시민들을 점차로 정치외면과 향락의 늪으로 인도하는것 같다. 과거에는 '3S정책'이라는 의도적인 정치공작으로 정부에 의해서 주도된적이 있었다.

지난 정부에서 일어난 '참사'의 근원은 어디에 있을까. 정치지도자의 특정종교적 마인드가 시민들의 보편적인 정서와 평행선을 긋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재임기간에도 그랬지만 퇴임을 전후해서도 다른 세상에 사는 이의 마음이 표현되는 멘트가 많았던것 같다. 그러니까 실상은 정치지도자와 시민이 서로 투명인간으로 보았던것 같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시야의 한계를 세계의 한계로 간주한다."라는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정치지도자의 열려있지 않은 마음은 판단력을 크게 흐려놓았다는 생각이 든다. 시민들과 일체감이나 공감대를 공유할수있는 능력의 아쉬움을 느끼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념이나 종교의 틀이 판단력을 흐리는 역사는 한국인이 짊어진 '업'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모든 사람이 한결같이 싫어하더라도 세상의 여론을 믿지 말고 그 진상을 충분히 살펴야 한다. 또 모든 사람이 한결같이 좋다고 하더라도 그대로 믿지 말고 그 진상을 살펴야 한다. 윗사람은 대중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에 미혹되지 말고 진상을 잘 파악하여 판단을 그르치지 말아야 한다.  - 논어 - 

정치란 참으로 어려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하고자 하는 이들이 많은 것은 딜레머다.

2013년 5월 26일 일요일

이기(利己)의 경쟁, 공리(共利)의 경쟁


가끔 학위나 한국적인 고시(考試)시험을 공부하던 친구들이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고  나서는 꿈꾸었던 이상적인 세계가 펼쳐지지 않은데 대한 배신감을 느끼는 경우를 종종본다. 생각해보니 개인적으로는 분명히 '야망'을 달성한 업적이 있지만 그날 이후부터  사회와 이웃들의 공리(共利)를 위한 요구가 더욱 커지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든다. 

"자 이제 멍석이 깔렸으니 너의 능력을 보여주렴."

언젠가 박사학위를 얻었다고  자랑하는 친구에게 나와 이웃들에게 친구의 학위달성을 함께 기뻐해야할 의미를 이해시켜 주는 한마디를 했던것 같다. 공리(共利)보다 이기(利己)를 위한 경쟁에 이긴 사람을 함께 기뻐해야할 이웃은 없는 법인것 같다. 

교육정책에 많은 문제점을 보여주고 있고, 실제로 시차(時差)를 두고서 부작용이 드러나고 있는 한국에 비해서 핀란드나 독일의 교육이 경쟁이 없는 교육이라고 자신있게 표현할 수는 없을것 같다. 어디서나 경쟁이 없을 수는 없고, 교육선진국에서조차 자국(自國)의 교육목표를 다른  국가와의 경쟁에서 승리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선진국은 '자국민(自國民)의 공리(共利)'에 경쟁의 목표를 두고 있는점이 한국교육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좋은 정치나 좋은 정책은 반대자가 없거나 피해자가 없는 정치나 정책이 아닐것이다. 피해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단순 제로섬게임을 넘어선 전체 국가나 사회의 후생증대를 끌어낼 수 있다면 그것이 최선의 게임이라는게 정치게임의 본질인것 같다. 

중국에게는 기술경쟁력이 위협을 받고 경제성장률마저 일본에 추월당하는  현실은 개인적인 출세를 위해서 달려온 인재들이 많은 한국현실에서 어쩌면 필연적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정치적인 이슈로 창조경제나 구조개혁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시민들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이웃과의 경쟁에서 이기고 출세해야 한다는 마음은 쉽게 없어지지 않을 '이념'으로 자리잡았으며 사회공리적인 관점으로서는 치유되기 힘든 '상처'가 아닌가 생각한다.

2013년 5월 17일 금요일

종교인 / 탈레랑


"설령 신앙의 길에 들어서 있어도 나는 남자라오." 17세기 프랑스극작가 몰리에르의 희극 <타르튀프>가운데 나오는 대사다. 크리스트교의 요승(妖僧)인 타르튀프가 유부녀 에르미르를 감언이설로 유혹을 하는 말이다. 종교의 전성기였던 당시에 빈번하였던 종교인들의 비행을 비판하던 이 작품때문에 몰리에르는 박해와 탄압을 받았다.

종교인들의 비행은 다루기 힘든 문제다. 미지의 존재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인간의 본성상, 눈에 보이지 않는 문제를 다루는 종교인에 대해서 딱히 검증된 선악을 구분해낼수도 없을뿐더러 고결한 몇몇 종교인들의 선행과 덕이 위선적인 종교인들의 비행을 가려주는 장막과 같은 역할을 하기때문이기도 하다.

언젠가 밤잠도 못자고 선행을 하는 어떤 종교인의 모습에 감명을 받아서 종교에 대한 생각을 많이하게 되었다. 종교라는 것은 좋아하던지 미워하던지 관심을 갖는것만으로도 보이지 않는 그 세계에 발을 묶어두는 묘한 성질이 있다. 많이 관심을 가질수록 장점과 단점이 새록 새록 솟아나는 매력이 있기도 하다.

때로는 자신들의 존재이유를 왜곡시키는 종교인들도 있다. 사회세력화 되거나 정치세력화 되어 건전한 국가의 기강을 흔드는 종교인들도 있고, 타르튀프처럼 입에 담기도 거북하고, 글로도 옮기기 거북한 비행을 저지르는 종교인들도 있다.

나만 느끼는 문제인지 모르지만 각자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는 시민보다 종교인의 방황이 더 심한듯 보이기도 한다. 방황하는 내 자신에게도 더 방황하는 사람으로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세속의 문제에 방황하다 종교인이 된 여운이 포착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18세기 정치가였던 탈레랑은 자신이 성직자이면서 정치와 종교를 분리시키는 교육안을 내놓았는데 인간의 본성을 촌철하는 지혜가 있던 성직자로서 일탈한 종교인이 사회에 얼마나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도 촌철하고 있는듯 하다. 요즘 민망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는것 같다. 능동적으로 사회에 영향을 끼치는 지위, 건강한 교육등을 생각하게 한다.

2013년 5월 16일 목요일

신자유주의의 시장실패



선진국까지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동안 프리드먼의 신자유주의 경제이론에 따른 경제정책들이 현실적으로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이런 현상들은 프리드먼의 잘못도, 경제정책을 입안하는 전문가들의 잘못도 아니다. 단순히 시장실패와 정부실패의 순환이 교차적으로 나타나는 '섭리'일 수 있다. 또한 벗어나는것도 섭리인듯 하다. 그동안 정보통신의 발달로 인한 시민들의 지적, 문화적 수준의 향상과 더불어 순환주기가 좀 더 빨라진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내 생각에는 이번 신자유주의에서의 시장실패의 원인은 첫번째 자유시장경제의 시장실패현상과는 달리 3차산업의 과도한 팽창에 있지않나 하는 생각이다.  기본적인 생산력의 증대에 집중하기 보다는 3차산업의 부가가치창출에만 집중을 해온 세계적인 추세가 빈부격차의 문제를 증대시켰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게다가 생산수단의 테크놀러지화에 따른 기술두뇌의 빈부격차도 한몫했을것 같다.

대표적인 예로 한국에서의 지난 정부가 그런 문제점을 가장 많이 노출시킨 예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든다. 생산을 위한 재투자보다는 여가선용이나 서비스산업의 부가가치생산에 정책목표를 두어서 시민들에게 단기적인 판타지만 심어주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것 같다. 근본적으로 아무것도 생산된것은 없는데 시민들은 '뭔가 즐겨야 하는' 비합리적인 현상이 나타났다는 생각이 든다.

역동적인 생산을 하여 국부(國富)를 축적해준다는 자부심을 가진 노키아나 삼성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고용할 수 있을까. 누군가 그런문제를 이야기한다면 핀란드는 수용을 하겠지만 한국에서는 '좌파'적인 편향적 사고로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이탈리아의 법학자이자 경제학자인 베카리아(Beccaria)는 "행복한 국가는 역사가 없는 국가다."라고 이야기했는데 한국은 심한 이념대립의역사가 있어서 '행복의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하도록 "지성과 정책의 눈'을 가리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빈부격차는 부를 가진 입장에서는 문제가 안되는것 같은데 왜 문제가 된다고 할까. 빈부는 서로 엮여있기 때문이고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갑돌이와 을순이만 사는 나라에서 둘이 서로 생산과 소비를 하며 경제적인 행위를 추구하고 있었다. 연봉이 일억인 갑돌이가 연봉이 일천인 을순이를 보면서 우월감을 느꼈는데 노력해도 안되는 을순이가 모든것을 포기하자 갑돌이가 생산한 상품을 사줄 사람이 없어져서 갑돌이도 모든것을 포기하게 되었다.

아니면 의욕이 꺾인 을순이의 생산과 소비가 줄자 갑돌이의 연봉이 일천으로 줄었는데 을순이는 일백으로 줄었다. 갑돌이의 우월감과 만족감은 변함이 없는데 국가의 부(富)가 십분의 일로 줄어드는 현상이 생긴다. 이기(利己)를 취하다가 공리(共利)가 망가지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할 수 있겠다.   

복지는 나누어주는 문제라기 보다는 재생산을 위한  문제고, 과학기술을 증대시켜서 기본적인 생산기능을 활성화시켜야 그 다음을 이야기할 수 있는 미래지향적이고 창조지향적인 경제정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2013년 5월 13일 월요일

변화를 예고하는 북한


50대의 장정남이 70대의 고령자인 김격식을 밀어내고 인민무력부장으로 임명된 이번 인사는 북한지도부의 대폭적인 교체를 알리는 신호탄인듯 하다. 아무래도 군부의 힘이 절대적인 북한으로서는 불안정했던 김정은의 권력기반을 집권적으로 강화시키고 개혁과 변화를 이끌어내는 두가지 목적을 함께 취하기위해 군부의 변화부터 시도하려는듯이 보인다.

어쩌면 북한내부의 보수라고 할 수 있는 김일성과 김정일세대의 인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물갈이가 있을것 같다. 감상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했던 김정일과는 달리 추진력과 고집이 엿보이는 김정은의 분위기로 봐서는 확실하고 강력한 '집권'을 추진하는 과정이 예고된 일이었던것 같다.

게다가 이번에 경제적인 이익과 변화에 관해서 자극적인 사태인 개성공단 사태를 겪으면서 변화에 대한 납득할만한 구실을 북한의 보수인사들에게 어필할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북한에서  변화를 가장 잘 이끌어낼 수 있는 사람은 1인자인 김정은뿐인듯 하다. 김정은은 북한의 가장 진보적인 인사라고 표현할 수 있을것 같다.  다른 지도층 인사들이 자유시장경제를 경험해 보지 않았으며, 주체사상과 관련된 이념적인 사고의 틀을 깨지 못하는 경직된 사고를 가진것과는 달리 김정은은 사상적 통제를 받지않은 자유로운 성장과정을 겪고, 지금은 북한시스템을 궤뚫어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점이 그렇다.

정치적인 두뇌와 국정운영을 위한 전문적인 두뇌가 양분되어 충분히 공급되는 한국과는 달리 혼자서 두가지 재능의 정점에 서 있는 김정은은 아버지 김정일과는 달리 북한에 적절하고 유용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어려운 과업을 이겨낼 수 있을것 같은 생각이 든다.


2013년 5월 12일 일요일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그러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어찌 이뿐이랴? 오뉴월의 장의 행렬. 가난한 노파의 눈물. 거만한 인간. 바이올렛 빛과 흑색의 빛깔들. 둔한 종소리, 바이올린의 지이(G)현, 가을밭에 보이는 연기. 산 길에 흩어진 비둘기의 털, 자동차에 앉은 출세한 부녀자의 좁은 어깨, 흘러다니는 가극단의 여배우들, 줄에서 세번째 떨어진 광대, 지붕위에 떨어지는 빗소리,휴가의 마지막 날, 사무실에서 처녀의 가는 손가락이 때 묻은 서류속에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게 될 때, 만월의 밤 개 짖는 소리, 어린아이의 배고픈 모양, 철창안에 보이는 죄수의 창백한 얼굴, 무성한 나무위에 떨어지는 백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

- 안톤 시나크 -


인간은 욕심이 있는 한은 행복하지 않는것 같다. 재산과 명예와 권력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는데 욕심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현대인들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한다. 의지력으로 모든게 충족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욕심의 정체는 상대성의 원리에 따르는듯 하다. 욕심은 타인과의 비교에 근원을 두고 있는것 같다.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타인을 이기는 방법을 배워서 얻어낸 지위나 권력의 한 편으로는, 집중할 수 있는 인간능력과 시간의 한계상 충족되지 못한 것들이 있다. 도덕적이거나 평화와 공영을 위한 인간 내면의 행복이 그것인데 한국교육방침에서 잊혀진지 오래 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일들이 자주 일어나는듯 하다.

유베날리스의 시의 한 구절에 건전한 몸에 건전한 마음이라는 말이 있다.

특히 나를 중심으로 우리는 모두 슬픈 사람들 같다. 스포츠에 전념하지 않으면 쉴새없이 밀려오는 우울함과 저속한 욕심들과 싸우기 위한  에너지 소모가 무척 심한 것을 느낀다. '슬픈 베아뜨리체'라는 말에는 감성의 미(美)가 느껴지지만 '슬픈 내자신'이라는 말에는 욕망 속에서 방황하는 나이 먹은 한국인이 느껴진다.

2013년 5월 11일 토요일

실향(失鄕)

                  실향(失鄕)
                                                        이형춘

          옛날은 가고 없어도
          날새기전 마지막 돌풍이 부는 새벽
          은빛 파도를 타는 갈매기 꿈을 꾼다.

          가을하늘 짙게 푸르던
          고향땅을 밟은 기억도 아스라히
          없어진 사람들, 없어진 추억들
          어머니 인자한 웃음.......  

          도망온 타향에서 난.....죽어도 살아가리 

                            

북향인(北鄕人)


                    북향인(北鄕仁)
                                                            이형춘  


          비바람 사잇새로  옷깃을 여미면서

          너머온 남쪽나라 설운꿈을 키워왔네

          임진각 돌아오면서 묻어버린 내고향 



                                                   

2013년 5월 10일 금요일

한고조와 한신


이류의 인간은 삼류의 인간을 고용할려고 하고 일류의 인간은 일류의 인간을 고용할려고 한다.

어렸을때 책갈피에 적힌 명언 한 구절이 생각난다. 조금씩 성장해가면서 나보다 못한 친구가 옆에 있음이 마음이 편하다는 사실을 알고서 그 명언의 심오한 뜻을 어렴풋하게 눈치를 챘는데, 나이가 조금 더 들어 나 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옆에 있으므로서 내 마음이 더 편해지는 사실을 깨닫고  그 뜻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한고조 유방과 한신이 대화하고 있었다.

"짐에게는 몇만의 군사를 거느릴 역량이 있다고 보는가?"
"기껏해야 10만입니다."
유방이 재차 물었다.
"그러면 귀공은?"
"저는 다다익선(多多益善)입니다."
"그러면 귀공은 왜 내 밑에 있는가?"
'폐하는 병사의 장이 될 역량은 없고 장수의 장이 되실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

결국 그릇이 큰 유방에게 한신은 훌륭한 참모로서 역할을 했지만 유방이 사망하고 그 부인인 여태후에게 죽음을 당하는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

아무리 빠른 말과 글과 지식이 지배하는 세상이라고는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그런것들이 재앙으로 변할 수 있는 점은 진리인것 같다. 사람을 쓴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인것 같다. 쓴다기보다 목표를 향하여 함께 가야할 사람을 구한다는 생각을 해야 서로에게 의미있는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2013년 5월 9일 목요일

마음을 둔 곳 / 故 김세완 대법관


1955년 새해 아침부터 대법관들을 무던히도 당황케한 사건이 있었다. 경무대로 신년하례를 가기로 약속하고 대법관 모두가 대법원에 모이기로 한 이 날 아침 유독 김세완 대법관이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것이었다. 김대법관을 기다리던 대법관들은 경무대 약속시간을 다소넘긴 오전 10시경할 수 없이 경무대로 떠났다. 더러는 김대법관을 탓하며 불평하는 이도 있었다.

대법관 일행이 경무대에 당도한 뒤 얼마쯤 뒤였을까, 대통령비서실 경비전화가 요란스럽게 울렸다. 그리고 경무대 경비를 맡은 한 경찰관이 다급하게 보고해 왔다."지금 등산복 차림의 한 노인이 경무대에서 대통령각하와 약속이 있다며 막무가내로 들어오려고 합니다. 자신이 대법관 김세완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아무래도 수상합니다."


김세완씨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단어가 바로 '등산'이다. 등산이야말로 그의 삶의 역정을 깨끗하고 빛나게 해준 세척제였다. 끝내는 죽음의 길이 되기도 했지만...... .

그가 등산을 시작한 계기를 들어보자. [ 내 나이 20세에 판사가 되기 위해 법원서기로 취직하고 보니 화류계와 연회석의 유혹이 상당하였다. 어느 날 문득 술을 마시다 마음에 사무치는 점이 있었다. 나를 공부시키기 위해 갖은 애를 쓰다 돌아가신 아버님의 임종도 보지 못한 내가 술에 취해 길을 헤매거나 화류계에 드나드는 일이 있어서야 되겠느냐는 반성이 일었다.] - 자서전에서 -


[등산은 육체적인 운동으로서만이 아니고 정신을 씻고 키우는 데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 아닌가 한다. 수원에서 판사로 있을 때 공휴일이면 도시락을 사가지고 찬삼이와 광교산을 다녔다. 길가에서 군밤 스무개씩을 한 줄에 꿰 5전씩에 파는 것과 군고구마 5전어치를 사들고 산에 오르면 가슴이 뿌듯하고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것 같은 생각이 들곤 했다.] - 자서전에서-   

- 84년 韓國記者賞受賞 법에 사는 사람들 -

빈곤한 정신을 이겨내기 위해서 스포츠에 마음을 두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내용이다. 이런 부친을 둔 여행가 김찬삼 선생의 복은 말할 것도 없고,자식들에 대한 애정은 아랑곳 없고, 북녘의 고향만 그리며 눈을 감은 나의 부친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있다면 '저 구름 흘러가는 곳'에 마음을 두도록 붙잡아준 일이다.  

나의 압바는 고향을 그리워 했는데
나는 압바가 그립다.

2013년 5월 8일 수요일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 입법자들의 책임


철학에는 두가지 기본 프레임이 있다. 절대적인 진리를 인정해야 할것이냐, 아니면 진리란 상대적인것으로서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변화될 수 있는 여지가 있는가 하는 프레임이다. 벤덤과 밀이 주장하는 공리주의 철학은 진리보다는 인간의 쾌락이나 행복에 진리에 버금가는 의미를 부여한 상대주의 철학에 해당된다.

지구가 중력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 인류는 고통과 쾌락이라는 두 지배자에게 묶여있다. 고통은 회피되어야 하고 누구나 고통을 회피할려고 하며 쾌락을 갈망하고 있다. 때문에 인간은 마땅히 쾌락을 선택해야한다. 그러나 그 쾌락은 단순한 쾌락보다는 고차원적인 의미가 있다. '나의 선택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경우, 나는 개개인이 누릴 수 있는 쾌락의 합산량이 최대인 길을 선택해야 한다.' 도덕과 입법의 최고 목적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다.' 

벤덤은 이러한 공리주의 사상을 영국의 비국교회목사이자 산소를 발견한 과학자인 프리스틀리(1733-1804)의 [통치론]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벤덤은 법률적으로 자연법사상을 부정했고, 자유방임주의를 지지했으며, 프랑스혁명사상에 반대하였다.

성직자임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인 진리로 여겨지는 크리스트교의 종교사상을 좀 더 '현실적인' 사상으로 변환시킨 프리스틀리의 사상은 당시에 상당히  진보적이었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이러한 사상은 과학적인 탐구를 소홀히 하지 않았던 프리스틀리의 부지런한 관찰력과 지적탐구심의 결실인듯 하다.

벤덤이 자연법사상을 부정한 태도는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이었는데, 그 당시까지 사상적인 변혁을 절대 인정하지 않았던 종교(크리스트교)의 세계가 뉴우튼의 만유인력법칙에 의해서 시작된 과학의 세계에 헤게모니를 넘겨주던 흐름에 크게 조력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그러면서도 철저한 자유방임주의를 주창한 이유는 그 당시로서는 자유방임주의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위해 필요한 질서였으며, 막 태동하는 경제사상으로서 어떤 문제점도 검증되지 않았음에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2013년 5월 7일 화요일

시에예스와 기회주의


좌파와 우파의 대립이 심한 한국에서 중도적인 입장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실제로 이념의 바람에 휩쓸릴 여유없이 민생(民生)의 가장 고달픈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사상이나 지식의 가면을 벗어버린 일그러진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인듯 하다.

그들은 결집하여 의사를 표현할 구심점도 없이 기회주의자라는 비난을 감수하며 삶의 가장 본질적인 소망인 '행복'을 찾아서 방황하는 유랑민의 무리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기회주의라는 비난을 감수하며 역사속에서 자신만의 길을 고수했던 등소평의 어려움은 크게 변화되고 발전된 중국의 모습으로  보상받았지만, 대의적이거나 이타적인 목적없이 개인의 욕심을 위하여 기회주의적 태도를 취하게된 정치가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프랑스혁명 당시 3신분을 대표할 국민의회를 만들자고 제안했던 시에예스는 프랑스혁명의 물살이 폭풍처럼 거세지고, 자코뱅당의 로베스피에르가 공포정치를 펴자 외교관으로 피해있거나 시골에서 은둔 생활을 하면서 일신(一身)의 안위(安違)를 구했다.

시에예스는 나플레옹이 쿠데타를 일으키자 나플레옹의 분위기를 '시민적'이라고 착각해 나플레옹의 쿠데타를 주도하다가 나플레옹이 독재를 하는것을 보고 다시 은둔하게 된다. 그러다가 루이필립이 정권을 잡자 다시 파리로 들어왔다. 격렬한 프랑스혁명의 와중에서 숨어 있다가  모임에 나가자 반가와한 친구가 "그 동안 자네 무엇을 했나?"하고 묻자 "살아 남았지."하고 대답한 일은 유명하다.

정치가야 고정적인 지지기반을 구축(構築)하기 위해서 이념이나 종교등을 이용한다고 할 수 있겠지만 국민의 행복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국가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행복해야만 하는 국민들이 이념이나 종교적인 프레임속에 자신들의 사고를 구속하는 일은 자각하여 피해야할 일 같다. 

실현 불가능 하더라도 '행복'이라는 단어가 사고의 프레임으로 자리잡는 것이 훨씬 합리적일것 같다. 이념이나 종교같은 대의 명분을 띄고 있는 단어의 알량한 과오를 되짚어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2013년 5월 5일 일요일

가족사(家族史)


요즘 연예인들의 가족사 이야기가 화제다. 어린시절의 가족사는 겪어내고 습관화시키는 어린이의 세계가 가정과 학교로 제한되는것을 볼때 분명히 인성발달에 많은 영향을 끼쳤을거라는 생각이다. 불안한 가정은 확대된 사회적 관계에도 영향을 끼쳐서 좋지않은 사회분위기를 형성하는데 필연적인 역할을 하게된다. 

누군가가 연예인가족사에 관한 기사 에 '한국의 부부사이는 사탄이 지배한다'는 댓글을 올린것을 보고 댓글을 쓴 당사자와 그 주변 가정의 가족관계가 원만치 않음을 이해할 수도 있겠고, 역사적인 트라우마가 많은 한국민들의 응어리진 마음들이 원만한 가족사를 만드는데 걸림돌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형법학에서는 '인과관계설'이라는 말이 있다. 책임의 기원을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끊어내야 하는지에 관한 학설이다. 나의 가정의 불화는 사회적인 불안감에 원인이 있기도 하고, 후대의 사회적 불안감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면서 순환해가는 모습이다.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 개인의 많은 노력이 필요한것 같다. 한국의 가정에서는 더욱 그런것 같다.

부부라는 사회에서는 일에 따라 각자가 상대를 돕고, 혹은 상대를 지배한다.따라서 부부는 대등하면서도 다르다. 그들은 다르므로 대등한 것이다.  

시몬느베이유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프랑스철학자 알랭의 말이다. 부부사이가 사랑의 감정으로 결합되어 있기는 하지만 부부사이도 하나의 사회적 협력관계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의미가 들어있는것 같다.

두 영혼이 영원히 결합됨을 서로가 느낄 때에는 참으로 위대하다. 온갖 고통이나 험준한 길에 있어서 서로 의지하며, 서로 위로하며, 서로 떨어지지 않고 결합되기를 원할때에는 참으로 위대하다. 

영국의 여류(요즘은 남녀 평등의 입장에서 '여류'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고 한다.)소설가 조지 엘리어트의 말이다. 철학자의 이성적인 해석에 비해서 감성적으로 부부관계를 해석하는 면이 있다.

뭐 잘은 모르지만은 사람사는 일이 모두 그렇듯이 부부사이도 Give and Take 관계나 Talio의 법칙이 예외없이 적용되는것 같다. 상대방에 대한 헌신이 필요한 관계임이 예외없다는 생각이든다.

2013년 5월 4일 토요일

잃어버린 세계 / 남북의 이념


국가의 성장동력이라는게 반드시 물질적인 측면에만 있는것이 아니라는것은 교육받은 사람들이 많아진 현시대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생각컨데, 바람을 좇아서 온 기력을 다 쏟았던 보나푸는 이 정밀감(靜謐感)을 알았으리라. 기요메도 또한 눈속에서 알았을 것이다. 나 자신도 어떻게 잊을 수 있으랴. 목까지 모래속에 파묻히고, 갈증으로 바싹바싹 목이 졸리면서, 그 별들의 망또 아래서 그렇게도 마음이 포근했을때의 일을.


어떻게 하면, 우리들의 마음속의 이러한 일종의 해방감을 북돋을 수가 있을까? 인간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이 모순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어떤 사람에게, 그가 의도하는데로 창작에 몰두할 수 있도록 생활을 보장해 주면 그는 잠들어 버린다. 승리를 거둔 정복자는 이내 연약해진다. 선심좋은 사람에게 돈을 주면 수전노가 되어 버린다.


인간을 행복하게 해준다고 주장하는 정치상의 주의(主義)란 것도, 그것이 어떤 종류의 인간을 행복하게 하려는지 우리가 미리 알지 못한다면 무슨 가치가 있을까? 누가 태어나려는가? 우리는 먹이만 있으면 만족해하는 가축들이 아니다. 또 우리에게는 한 사람의 가난한 <파스칼>의 출현이, 분별없는 부호의 출현보다 훨씬 값어치가 있는 것이다.     


- 쌩땍쥐베리의 (인간의 대지)중에서 - 

한때는 이념의 세계가 지고(知高)하고 창조적인 역동성을 발휘하던 시절이 있었다. 비록 다수나 개인의 행복과 평화를 위한다는 대의적인 명분을 내포하고 있지만 실상은 식자(識者)들이나 행동가들의 자아실현의 도구로서 역할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이등병과같은 삶의 생명력을 끌어내기위한 도구로서 이념을 사용한 면이 있는것 같다. 결국에는 지식과 행동력을 함께 갖춘 정치인이 목표한 그 둘을 모두 갖게되는 결론으로 마무리짓게 되었지만서도.......

북한정부의 국가운영방식을 시계열로 살펴보면 국가를 성장시킬수 있는 이념적인 성장동력이 구제할수 없는 정도로 바닥을 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개성공단사태에 이르러서는 스스로의 획기적인 개선이던지 통일이던지 확실하게 양자택일을 해야하는 지경까지 이른것이 확실하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아마 지도자의 흐트러진 기상이 가장 큰 원인이 되지 않았나 싶다.

자유주의 체제인 남한에서는 많은 갈등을 겪고 있지만 그래도 문제를 제시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피드백을 시킬 수 있는 유연성과 기회가 주어진 까닭에 밝은 미래를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특히 이 문제에 관해서  국민의 정신적인 역량을 갉아먹는 듯한 문제들에 대해서 많은 개선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