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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30일 토요일

공적공간에 제대로 참여하기

하이데거의 제자였던 독일계 유태인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 - 1975)는 인간이 사적인 영역에서 공적인 영역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진정한 다양성을 인정하는 '평등'이라는 조건이 필요하다고 한다. 공적공간에서 중요한 관심사는 주권이 아니라 자유이며 국민의 통일을 지향하는 국민국가는 진정한 의미의 공적공간이 아니라고 한다.

아렌트가 활동할 당시의 독일과 세계의 환경은 나찌즘이나 냉전등을 겪으면서 다양성과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국민국가가 유행하던 시절이였으니 아렌트의 사상적인 깨달음과 시대사상을 규명하고 변화시킨 공적은 인정받는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한반도에서 통일 국가나 공리(共利)를 추구한다는 자세가 잘못하면 독재국가나 이념적인 성향(공리를 위해서 노력한다는 것이 공산주의라는 오해를 받을 수 있는)을 가진 것으로 오해받을 수 있는 환경이 전혀 개선되지 않았기 때문인듯 하다.

한국에서 정치적인 수직관계 즉 주권을 가진 사람이 누구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부지런히 다투어야 하는 이유는 사회의 평범한 사람들과 대화를 해보면 그 이유를 금방 알 수 있는듯 하다. 정치적인 논쟁에서 미래형 정치세계는 용납이 되지 않는듯 하다. 지독한 친정부(親政府)적인 성향이나 지독한 반정부적인 성향 두가지로 극명하게 나뉜다. 물론 거기에 좌파와 우파라는 이념적인 색체가 포장되기도 하고, 지역적인 영역과 종교적인 영역이 구분되어지기도 한다. 그래놓고 그것을 참여라고 착각을 한다.

민첩한 정치인은 고정표를 얻어내기 위해서 이념과 종교, 심지어는 지역적인 색체를 분명히 하여서 고정표를 얻어내고, 정보의 부재(不在)나 인물의 부재, 관심의 부재, 지식과 지혜의 부재로 흔들리는 표심중에 얼마간을 얻어내어 '정치지도자'가 된다. 물론 사회의 밑바닥에서 평범한 사람들(아무리 평범하다고 하지만 제도적으로 한표를 행사하는 막강한 권력의 시민들)과 생각을 주고받는 기간이 길었던 사람이라면 더욱 민첩해질 가능성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고 시민들의 생각을 어설프게 읽은 것이 문제가 되기도 하는듯 하다. 

제도적으로 아무리 시민사회가 만들어져도 시민들의 정치적 지식이나 지혜가 냉철하고 온화해지고 깊어지지 않는 한은 한국의 정치가 무섭게 투쟁적일 수 밖에 없고, 통합적인 정치지도자가 나오기 힘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때가 많다. 가끔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가 정치이야기가 나오면 들뜨고 심지어는 난폭해지기도 하는데, 그럴때마다 현실은 그렇지 못해서 잘은 모르지만 당신 한 사람 한 사람이 사실상 이 나라의 지도자이며, N분의 1의 책임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곤 한다. 말하자면 공적공간에 주인이 되어 참여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 말이다. 정부와 내가 별개의 개체가 아니며, 주권을 누가 가지고 있느냐 하는 관심도 필요없고, 우리들 각자가 국가를 형성해나가는 개체라는 주체의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그래야지 정치지도자의 임기후 운명도 온화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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