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지인이 나에게 유익한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깜짝 놀랐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오래전 내가 지인에게 가볍게 해준 위로성격의 정보였기 때문이었다. 지인은 이야기의 내용은 감명깊게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출처를 기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인은 항상 의지박약하고 쉽게 동조되는 성향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교육을 많이 받은 엘리트가 '자기생각'이라는게
그다지 많지 않다는 사실에 은근히 놀랐다. 한편으로는 '참을 수 없는 대화의 가벼움'을 좀 더 신중하고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필요를 느끼기도
했다.
한 편으로는 자신의 권위, 나이, 믿음에 근거한 생각을 타인에게 주입시키려고 애쓰는
어설픈 '교주'들도 많이 보는데, 그 지인과 어설픈 교주가 만나면 '훌륭한(?) 조화'를 이루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념문제나 종교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의문이나 근원에 대한 탐구가 용납되지 않고 선전이나 선동에 휘둘리는 자칭 '똑똑한 사람들'의 실체를 자주 경험해보기도 하는데,
대체로 그런 휘둘림은 소극적으로는 방심, 적극적으로는 어떤 욕망으로 가려진 사고의 둔감함에 근원을 두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유명한 미국심리학자 칼 호브랜드(Carl Hovland)와 동료 두 명은
미군병사들에게 [왜 우리는 싸우는가]라는 선전영화를 보여준 뒤 전쟁에 대한 생각을 물었는데, 처음에는 영화가 별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다가
시간이 갈수록 병사들은 선전영화를 믿게 되었고, 선전영화의 내용을 신뢰했다. 호브랜드와 동료들은 이 역설적인 효과를 수면자효과(Sleeper
effect)라고 불렀다. 거기서 말하는 내용이 훗날 기억 한 구석에서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 비난트 폰 페터스도로프(Winand von Petersdor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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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적으로 원했던 정보에 대한 믿음은 '배움'이라는 유익한 이름으로 도움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수면자효과'를 통해 선동이나 세뇌의 도구가 되기도 하는듯 하다. 물론 정신적인 또는 철학적인 교육이 빈곤한 한반도에서 더욱 그런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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