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주택에서 아기 울음소리를 들어본지가 오래되었다. 하필이면 때맞춰 청년실업문제도
최악이다. 과거와는 달리 노인이 강력범죄사건을 일으키는 경우도 자주 눈에 띈다. 이쯤되면 세대간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미래에 대한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수가 없는 시대다. 한국만 그런것이 아니고 일찍이 한자녀 낳기 운동을 벌인 중국과 동양에서 가장 선진적으로 초고령화사회를
먼저 이루어낸 일본도 마찬가지다.
어느 날 노인분들과 일을 하다가 생각한 것은 노인에게 기대할 수 있는 진취성이나 혁신성은
노인의 습관,정신건강, 육체건강등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에 의존한다는 사실이다. 한국사회의 노인은 유래없이 근면한 젊은 시절을 보냈던것 같다.
노인세대가 한국의 경제발전을 이루어냈다는 논리는 명확히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의 경제발전을 이루어낸것은 노인세대가 아니라 노인세대의
'젊음'이었다는 사실이 생각난다. 젊은 시절과 노인 시절이 너무 다르다. 당신들도 다르고 환경도 다르다.
근세초 프랑스의 농민들은 계모와 고아의 세계, 비정하고 끝없는 노동의
세계, 거칠기도 하고 동시에 제어된 잔인한 감정의 세계에 살고 있었다. 그 이후에 인간의 조건은 너무도 변화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삶이
야비하고 잔인하고 단명하였던 사람들에게 그 세계가 어떻게 보였는지를 상상하기는 어렵다.
- 로버트 단턴(Robert Darnon)의 [책과 혁명]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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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의 변화는 점점 빨라지고 있는데, 동양 노인들의 보수성은 변화가 없거나 더 심해지고
있는듯 하다. 그 원인은 전통적으로 노인과 젊은 세대간의 평등적 사고를 이루어내지 못한 유교문화권의 잔재가 남아 있거나 지위와 관련된(왕과
신하같은) 수직적 관계의 사고가 개선되지 못한 이유를 여러차례 이야기 한 적이 있다. 게다가 '자유'라는 명분으로 어떤 공리적인 사고를 하는
교육도 받지 못해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외의 영역에 대한 '공동선'같은 것은 생각해 본적이 없었던것 같다. 특히 한국은 그런 현상이 심한듯 한데,
자신에 대한 성찰이나 평생교육, 심신(心身)의 건강관리등을 위해 노력하지 않고, 노후에는 모든 노력이 정지되고 오로지 대접받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생각의 프레임이 짜여진 노인분들이 이끌어가는 사회란 끔찍한 곳임을 직감적으로 느낀다.
처와 자식이 먼저 세상을 떠나 우울증을 앓던 90대의 인도인 노인 파우자
싱이 102세가 될때까지 마라톤을 여러번 완주하며 우울증을 극복해냈다는 사실은 노인의 행복은
과거의 젊은 시절이나 아니면 사회가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노인분들 스스로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을 잘 표현해주고 있는듯 하다.
어느 인터넷사이트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올라왔다. 한 고등학생이 혼자 순대국밥을 먹으러
갔는데 순대국밥집에 있던 손님들이나 주인의 시선이 곱지 않더라는 것이다. 급기야 학생은 혼자 이런데 오는 것이 아니라는 질책을 하는 사람도
있더라는 것이다. 그 글에 달린 댓글이 더 재미있다. 어떤 댓글은 순대국밥은 인생을 다 산 사람들이 소주잔을 기울이며 신세한탄을 하면서 먹는
음식이냐는 비판을 하고 있고, 어떤 댓글은 노인 분들이 파스타집에 오면 노인분들은 혼자 이런데 오면 안된다고 해야 한다고 한다. 노인분들을
바라보는 젊은이들의 생각과 평등을 지향하는 신세대들의 생각이 담겨 있는듯 해서 재미있었다.
세대간의 갈등이 문제가 아니라 세월이 좀 더 지나면 노인도 일해야 하는 시대가 올것이다.
현재를 보면 미래를 알 수 있는 법이다. "교육받은 인간이란 계속 공부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인간이다."고 말한 피터 드럭커(Peter Drucker)의 말처럼
끝임없이 성찰하고 발전하는 노인은 노인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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