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고민이 많아서 우울증의 경지에까지 다다른 지인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지인의
대화의 내용은 돈, 명예, 권력, 승진등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차 있었고, 결국 그것들이 충족되지 못한 이유로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내려놓는
수단으로서 운동을 해보라고 권유를 하니 운동조차도 성취욕의 수단으로서 이용할려고 하였다. 나 자신도 경험해봤지만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심층심리속에 이미 습관으로 다져진 권력, 명예, 돈,성공이라고 하는 것들에 대한 열망을 비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님을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이념과 종교에 대한 위기감을 부지런히 토로하는데, 현실적으로 그런 관념들이
본질을 잃어 버리고 욕망의 충족수단으로 들뛰는 사태를 현실적으로 느껴봤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과학적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문제점은 있는 파이를 나누거나 가진 파이를 지키고자 하는데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즉 파이를 창조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을 해보지 않는것 같다. 물론
종교도 한국에서는 파이를 가지지 못한 마음을 달래 달라는 기복신앙으로 흘러가거나 파이를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문제를 현장체험을 한 적이
있는듯 하다.
요즘 창조적인 기업들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곤 하는데, 어딘가 무한히 널려있는 파이를
창조해 내기위해 합리성과 효율성, 과학성등에 의지하지 않고 과거와는 다르게 인간의 감정을 배려하는 여유가 있다는 공통점이 있는것 같다.
미국 예일대학교의 심리학교수 피터 셀러베이(Peter Salovey 1958 ~ )에
따르면 우리들 마음속에는 '정서적인 극장(emotional theater)'이 존재하는데, 어떤 사람의 극장에는 항상 비극적인 영화만
상영되고, 어떤 사람의 극장에는 행복한 프로그램이 상영된다고 한다. 정서지능은 이러한 프로그램을 능동적으로 상영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셀러베이교수의 나이가 그리 많지 않다. 그 이전 시대의 사람들이 얼마나 과학적 합리성이나 기계적인 욕망에 시달려왔는지 반증하는듯
하다. 하지만 1908년에 태어난 제이콥 브로노우스키(Jacob Bronowski)라는 수학자는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탄에 충격을 받아서 과학과
인간성의 상반된 가치를 화해시키기 위해서 노력했는데, 특이하게도 브로노우스키는 '시인'이기도 하다.
인간을 중시하는건 자체가 목적이기도 하지만 다른 열망들을 성취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가 많은듯 하다. 물론 그 반대로 인간을 무시하여 몰락하는 사회나 개인도 많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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