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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모국회의원이 사이버안보컨트롤타워를 청와대에 설치하자는 법안을 발의했을때 내 기준으로는 극렬하게 반대했다. 왜냐하면 민주적 통제가 안되고 대통령직속의 정보기관에 많은 권한이 집중되어 대통령의 정치적인 생명보다 긴 관료조직의 권력이 더욱 막강해질것을 우려했던것 같다. 그 전에 음성적인 정부(이념편향성이 있거나 종교편향성이 있으면 음울한 개구리처럼 우울하고 식견이 협소한 정책결정이 발생한다는 입장에 있었다.)에서 혼이 나 본 경험이 한 몫했던것 같다.
상당히 오랫동안 내 글은 그 문제의 중심에 서 있었던것 같다. 그 법안을 발의한 의원분은 애국과 안보를 생각했을텐데 나는 그보다 원칙을 지켜주는 것이 근본적으로 더욱 애국과 안보를 생각하는 것이라는 판단을 하였던 것 같다. 지금 그 의원분은 공천에서 탈락하고 백의종군의 입장으로 돌아왔는데, 오랫동안 그리고 영원히 백의종군하는 입장에서 바라보건데, 그 법안이 현실화되었으면 앞으로 많은 자유의 가능성을 손상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백의종군하는 이의 자유(통신의 자유를 비롯하여)는 그야말로 익은 음식이고 내놓은 어린아이인것 같다. 잡귀의 온상이 된 내 핸드폰대신 잔돈뭉치를 들고 공중전화를 이용할때마다 품위도 없고 깔끔하지 못한 처지에 있기는 내 자신이나 정보기관이나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많았던것 같다. 공중전화로 비애국적이거나 안보에 반하는 통화를 했냐하면 그건 아니다. 그런 방어책이 없으면 정보기관이나 정치권력에 대한 위협감과 의심을 느끼게 되고, 마음이 집중이 안되어 생활자체가 지리멸렬해지는게 싫었기 때문이다.
이념과 종교가 지배하게 되는 사회는 의심과 판단이 과장되어 있는것 같다. 있지 않거나 있지 않을 일도 있다고 상상한다. 무의미하게 상상하는 습관은 비전이라는 명분으로 시야를 방해한다. 밀(John Stuart Mill 1806 - 1873)의 말처럼 좋은 사회는 토론과 대화에 열려있다. 음성적인 판단은 검증과 도전이 없는 가치를 만들어내고 보수적이라는 명분으로 사회를 퇴보시킨다. 많은 가치들이 사회속에서 표현되어야 하고 그것들이 옳고 그른가는 서로가 대립하면서 판단해 가는 것이 옳은듯 하다. 그런 방법은 실패를 통해서 성공을 하게 된다는 개인적인 성공이론 만큼이나 확실한 발전의 길인듯 하다.
이유없이 예방적인 차원으로 자유와 인권을 간섭할려는 시도는 서로를 신뢰하지 않는데서 생긴문제인듯 하다. 내 생각으로는 가장 정치하지 말아야 할 사람은 시민과 자신을 공감대를 형성하는 동일체로 보지 않고 별개의 '상대'로 생각하는 사람인듯 하다. 그에게 시민은 신뢰할 수 없는 적이며 지배해야 할 대상일수도 있는듯 하다. 그러나 자신이 생각하는 시민은 반드시 그런 형태로 나타나는 법칙이 있는듯 하다. 적대감은 적대감을 만든다. 한 번은 우연치않게 북파공작원문제에 연루가 되니 상상력이 풍부한 지인이 오랫동안 내가 자신에게 위협적인 존재라고 자기 최면을 걸고 있는것을 보고 원칙과 중심의 중요성을 재고(再顧)한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음성적인 정부를 싫어하면서도 개인적으로 그런 일에 물려 있을것 같은 상황을 반성하였다는 의미다.
정부가 대테러방지법을 통과시키니 수사기관의 통신자료 수집에 관한 문제가 큰 이슈로 떠오른다. 원칙이 없는 시도에 자극을 받아서 너도 나도 관심을 갖는 바람직한 사태가 만들어지는듯 하다. 누군가 뭔가 국가를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아니면 서민을 위해서 무슨 일을 한다고 하지만 그 내면에는 지배욕과 권력욕이 내재되어있는지 모른다. 정부와 시민은 별개의 존재가 아니며 그냥 양심을 가지고 원칙을 지키면 서로를 위해 예방이라는 과잉액션을 취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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