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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30일 토요일

사상과 브라에스 파라독스(Braess paradox)

교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지름길로 다리를 더 놓았더니 모두가 그 다리를 이용하게 되어서 교통이 더 막히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런 모순을 브라에스 파라독스라고 한다. 교통도 그렇지만 많은 사회현상들이 브라에스 파라독스현상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는데, 사람들의 행동을 규율하는 사상(이념과 종교)의 세계에서도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듯 하다.

시대의 고민거리를 해결하겠다고 만들어진 생각들이 있는데, 시간이 지나자 너도 나도 그 생각들에 달라붙어서 그 속에서 또 다른 분열과 투쟁의 세계가 만들어진다. 원래 사상적인 초심(初心)이 추구했던 세계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다. 전 세계의 공산화, 이상적 자본주의, 특정 종교에서 추구하는 천국같은 세상, 이런 것들은 항상 고찰하고 고민하며 개선하는 과정을 무시하면 이룰수 없는 꿈인듯 하다. 하지만 사회와 인간은 '희망의 이름'으로 현실을 모두 그런 허망한 관념에 투자한다.  

공적공간에 제대로 참여하기

하이데거의 제자였던 독일계 유태인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 - 1975)는 인간이 사적인 영역에서 공적인 영역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진정한 다양성을 인정하는 '평등'이라는 조건이 필요하다고 한다. 공적공간에서 중요한 관심사는 주권이 아니라 자유이며 국민의 통일을 지향하는 국민국가는 진정한 의미의 공적공간이 아니라고 한다.

아렌트가 활동할 당시의 독일과 세계의 환경은 나찌즘이나 냉전등을 겪으면서 다양성과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국민국가가 유행하던 시절이였으니 아렌트의 사상적인 깨달음과 시대사상을 규명하고 변화시킨 공적은 인정받는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한반도에서 통일 국가나 공리(共利)를 추구한다는 자세가 잘못하면 독재국가나 이념적인 성향(공리를 위해서 노력한다는 것이 공산주의라는 오해를 받을 수 있는)을 가진 것으로 오해받을 수 있는 환경이 전혀 개선되지 않았기 때문인듯 하다.

한국에서 정치적인 수직관계 즉 주권을 가진 사람이 누구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부지런히 다투어야 하는 이유는 사회의 평범한 사람들과 대화를 해보면 그 이유를 금방 알 수 있는듯 하다. 정치적인 논쟁에서 미래형 정치세계는 용납이 되지 않는듯 하다. 지독한 친정부(親政府)적인 성향이나 지독한 반정부적인 성향 두가지로 극명하게 나뉜다. 물론 거기에 좌파와 우파라는 이념적인 색체가 포장되기도 하고, 지역적인 영역과 종교적인 영역이 구분되어지기도 한다. 그래놓고 그것을 참여라고 착각을 한다.

민첩한 정치인은 고정표를 얻어내기 위해서 이념과 종교, 심지어는 지역적인 색체를 분명히 하여서 고정표를 얻어내고, 정보의 부재(不在)나 인물의 부재, 관심의 부재, 지식과 지혜의 부재로 흔들리는 표심중에 얼마간을 얻어내어 '정치지도자'가 된다. 물론 사회의 밑바닥에서 평범한 사람들(아무리 평범하다고 하지만 제도적으로 한표를 행사하는 막강한 권력의 시민들)과 생각을 주고받는 기간이 길었던 사람이라면 더욱 민첩해질 가능성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고 시민들의 생각을 어설프게 읽은 것이 문제가 되기도 하는듯 하다. 

제도적으로 아무리 시민사회가 만들어져도 시민들의 정치적 지식이나 지혜가 냉철하고 온화해지고 깊어지지 않는 한은 한국의 정치가 무섭게 투쟁적일 수 밖에 없고, 통합적인 정치지도자가 나오기 힘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때가 많다. 가끔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가 정치이야기가 나오면 들뜨고 심지어는 난폭해지기도 하는데, 그럴때마다 현실은 그렇지 못해서 잘은 모르지만 당신 한 사람 한 사람이 사실상 이 나라의 지도자이며, N분의 1의 책임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곤 한다. 말하자면 공적공간에 주인이 되어 참여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 말이다. 정부와 내가 별개의 개체가 아니며, 주권을 누가 가지고 있느냐 하는 관심도 필요없고, 우리들 각자가 국가를 형성해나가는 개체라는 주체의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그래야지 정치지도자의 임기후 운명도 온화해질 것 같다.

2015년 5월 29일 금요일

고민했던 것들의 미래

많은 미래학자들이 미래를 예측한다. 그 중에 맞는 것도 있고 맞지 않는 것도 있다. 미래학자들이 신은 아니다. '예측'은 '형성행위'가 아니다. 관객과 배우의 입장도 다르다. 보는 사람과 살아가는 사람의 입장이 다르다. 대게 변화된 미래는 현재 살아가는 사람들이 고민했던 것들의 결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때에 따라서는 고민거리가 될만한 상황인데도 그 상황을 잊고 지내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변화하지 않는듯 하다. 

남 북한의 통일문제가 아직도 심각한 이슈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점을 생각하면 아직도 한반도의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는 태평스러운 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은 잘 살아온듯이 보이고, 북한은 잘 살아오고 있다고 자기최면에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분단된 상황때문에 왜곡되어 왔던 다른 사회, 경제적 문제들에 대한 관심,분단된 상황이 만든 사회적 비용, 심리적 비용, 시차를 두고 장기적으로 발생하는 여러가지 비용등에 둔감해져 가면서 한반도의 민중들은 고민되는 환경을 고민되는 환경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듯 하다.

매일 아침 가젤은 깨어난다. 가젤은 가장 빠른 사자보다 더 빨리 달리지 않으면 잡아먹힌다는 것을 안다. 매일 아침 사자도 깨어난다. 사자는 가장 느린 가젤보다 더빨리 달리지 않으면 굶어 죽는다는 것을 안다. 당신이 사자냐 가젤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해가 뜨면 당신은 뛰어야 한다.

- 토마스 프리드먼 (미국 언론인 1953~ ) -

고민거리를 포착하지 못하게 만든 관념들(이념이나 종교같은)의 폐해는 한반도에서 심각한듯 하다. 북한처럼 적극적으로 퇴보하는 것도 문제지만 한국처럼 소극적으로 주저앉는 것도 문제인듯 하다. 개혁을 위해서는 고민거리부터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듯 하다. 내가 사자냐 가젤이냐 하는 고민거리보다 살아가야 한다는 고민거리가 중요한듯 하다.  

2015년 5월 24일 일요일

최고의 존엄과 남성성

언젠가 적지 않은 나이의 마초와 다툰 적이 있었다. 매우 권력지향적인 모습이 보기싫어 '꼴값을 떤다'고 한마디 한 것이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가는 곳마다 일을 그르치기 일쑤고, 타인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없는 성격때문에 안주인마져도 등을 돌린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들뛰고 있었다.

학창시절 남녀가 함께 있는 상급학교에 올라오자 남학생들의 공격성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심심치않게 과격한 행동을 보이고 있었는데, '진정 네가 대한의 남아'라는 부추김으로 테스토스테론(남성호르몬)을 억제시키는 짖굳은 말을 자주 했던 기억이 난다. 성인이 되서도 특별한 군대생활을 했거나 근육을 키워서 그것을 에너지의 바탕으로 삼는 유치찬란한 대한건아들을 종종 본듯하다. 때로는 그것이 여의치 않은 사람들은 권력관계라는 좀 더 지적(知的)이고 고차원적인 길을 찾아 떠나기도 하였던것 같다.

가끔 북한의 언론이 뭔가 자꾸 최고의 존엄을 훼손한 자들에게 타격을 가하겠다고 떠들때마다 체질적으로 테스토스테론분비에 문제가 있나 하는 짖굳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연구결과에 의하면 테스토스테론의 양이 권력이나 힘을 높여준다는 근거는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권력관계나 남성적 공격성은 인간교육이나 통찰력의 결핍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결론도 나올법하다.  

때로는 많은 온건한 사람들이 진성권력(眞性權力 - 실질적인 권력)을 갖고 있는 경우를 본다. 리더쉽이라는 것은 자신이 챙기는 것이 아니고 타인이 따라야 생기는 것이라는 사실이 이를 말해주는듯 하다. 대국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한반도의 민중들에게 권력에 대한 생각은 많이 강렬했을 것 같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것을 갈망하는 동안에 딱 한 사람 그것을 획득하는 1인자가 탄생하기 마련인듯 하다. 어차피 그것은 한 사람만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개그프로에서 "쩌퍼쩌퍼 다 죽여버리겠다~~~"하던 화산고 학생이 생각난다. 따뜻하게 대해주지 못할망정 죽이긴 왜죽여.........

2015년 5월 23일 토요일

열정국가(passionate nation) / 헤겔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 - 1831) [법의 철학]이란 책에서 좀 엉뚱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바람의 운동이 바다를 부패로부터 막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쟁은 여러 국민의 윤리적 건전함을 유지한다. 지속적인 잔잔함은 바다를 부패시키는 것처럼 영구적 평화는 물론 지속적인 평화조차도 여러 국민을 부패하게 할 것이리라.

신체적으로 건강하고 동(動)적인 열정에 가득찬 철학을 이야기했던 헤겔다운 이야기인데,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 말인 것 같다. 지나치게 동적이라서 무책임하게 전쟁을 옹호한 의미는 과장되고 호전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서 마땅하지만 무엇인가 끊임없이 열정을 추구하지 않으면 국가는 유지해 나갈 수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좋을 것 같다.

오래전 연세 있으신 분들과 일을 하다가 자주 다투는 장면을 목격했는데, 갑자기 헤겔의 말이 생각나 '적당한 싸움은 삶의 에너지를 충전시켜 준다'고 말해서 사람들을 웃겼던 일이 생각났다. 그 이후로 다툼이 없어졌다. 에너지 싸움의 장을 근본적으로 뭉개버린 일침이 된 모양이다. 아니면 열심히 싸워서 망가지라고 종용하는 비꼬임으로 받아들여졌는지 모르겠다.

[중국의 붉은 별]의 저자 에드가 스노우(Edgar Snow 1905 - 1972)가 중국 산시(山西)성의 바이안(保安)을 방문했을때 중국혁명의 지도자들은 누더기 옷을 입은채 동굴에서 생활하고 있었다고 한다. 중국의 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것은 지도자의 능력이나 기존 사회의 모순외에도 혁명 지도부의 열정이 중요했다는 사실을 에드가 스노우는 강조하고 있다.

아직도 혁명정신을 이야기하고 있으나 그 정신이 전혀 발현되지 않고 퇴보하고 있는 북한이나 돈 상자가 정치적 뇌물로 부지런히 내부출입을 하고 있는 한국, 과거사를 인정하지 않는 일본과 같은 동북아 국가들에게서 국가적 열정은 느껴지지 않는다. 매우 동적인 이론가인 헤겔은 '기존의 국가의 모습이 부정되고 새로운 유토피아적 국가'를 발생시켜야 한다고 혁명을 이야기 하고 있지만 달리 표현하면 더 나은 세상으로 끊임없이 개혁을 시도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유토피아란 '평화로운 삶'를 본질로 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런것 같다. 

2015년 5월 22일 금요일

성공과 성취 / 파스칼

청소년기부터 성인이 되서도 한참을 큰 질병으로 고통을 받은 적이 있었다. 어느 때가 되자 뭔가 결판을 내야할 시기가 됬다고 생각하고 관련 서적과 관련 안된 서적까지 수백여권을 습득하며 결국 질병을 스스로 치유했다. 성취감은 대단했던것 같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스스로 노력한 업적과 독서의 위대한 힘을 깨닫기도 전에 권력과 돈이 모든 행복의 근원으로 여겨지는 험한 세상과 조우하게 되었다. 권력과 돈이 따라주지 않는 노력은 타인에게 호의적인 평가를 받지 못하고 내 마음도 함께 타인들과 동조가 되어 산으로 가고 있었고 아직 길을 잃고 헤매는듯 하다. 그러니까 한국의 보통사람인게지....... 

가끔 정치인이나 고위공직자들의 비리를 볼때면 성공과 성취를 헛갈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려운 시험이나 학위등을 통해서 성공이라는 영역속에 일찌감치 발을 디뎌놓고 생각을 하니 성장동력을 얻을 수 있는 원천을 찾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주변과, 위 아래가 모두 비숫한 열정을 쏟아붓는 사람들만 보이는듯 하다. 사회의 상층부에서 그런 현상이 보이니 모방과 동조의 힘에 의해 하부계층도 병들어 가는 것은 당연한듯 하다.

한국에서는 그 바닥(영역)에 오래 있었던 사람들이 달리 생각하는데 도움이 될 환경과 접촉하지 못해보고 전통으로 세워버린 엘리트범죄로 혼란을 겪고 있는듯 하다. 물론 중국의 시진핑도 엘리트범죄와 전쟁을 하기 위해 경호인력을 대폭 늘리고 있는듯 하다. 두 나라 모두 이념문제가 사회정신의 헤게모니를 잡고 있었던 시간이 길어 진정한 시민사회의 영역에 관심을 가질 시간이 짧았다는 공통점이 있는듯 하다. 그런 문제에 있어서는 러시아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사회분위기에 동조해버린 푸틴보다 개혁을 시도하는 시진핑이 좋아보인다.

나는 인간이 갖고 있는 갖가지의 동요, 인간이 궁정이나 전쟁에서 몸을 드러내는 위험이나 고생, 거기에서 생기는 수많은 다툼과 정욕(情欲), 대담하며 때로는 사악한 기도 등을 때때로 고찰해 보았는데, 그때 나는 인간의 불행이 방에 가만히 휴식하고 있을 수가 없다고 하는 이 유일한 사실에서 오는 것을 발견했다. - 중략 - 나는 거기에 하나의 결정적인 이유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약하고 죽어야 할 우리들 인간의 상태, 그것을 정면으로 생각하면 아무것도 우리들의 위안이 되지 않을 만큼 인간은 비참하게 타고난 불행에 처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 파스칼의 [팡세] -

뭔가를 위해서 숙명처럼 움직여야 하는 비참한 운명의 인간이 그나마 고결해 보일 수 있는 '성취'라는 언어를 무시하고, '성공'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안가리는 저열함은 '나' '너' '우리' '우리나라 대한민국' 모두의 속성인듯 하다.  

2015년 5월 16일 토요일

정서지능과 욕망

어느 날 고민이 많아서 우울증의 경지에까지 다다른 지인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지인의 대화의 내용은 돈, 명예, 권력, 승진등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차 있었고, 결국 그것들이 충족되지 못한 이유로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내려놓는 수단으로서 운동을 해보라고 권유를 하니 운동조차도 성취욕의 수단으로서 이용할려고 하였다. 나 자신도 경험해봤지만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심층심리속에 이미 습관으로 다져진 권력, 명예, 돈,성공이라고 하는 것들에 대한 열망을 비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님을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이념과 종교에 대한 위기감을 부지런히 토로하는데, 현실적으로  그런 관념들이 본질을 잃어 버리고 욕망의 충족수단으로 들뛰는 사태를 현실적으로 느껴봤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과학적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문제점은 있는 파이를 나누거나 가진 파이를 지키고자 하는데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즉 파이를 창조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을 해보지 않는것 같다. 물론 종교도 한국에서는 파이를 가지지 못한 마음을 달래 달라는 기복신앙으로 흘러가거나 파이를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문제를 현장체험을 한 적이 있는듯 하다.

요즘 창조적인 기업들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곤 하는데, 어딘가 무한히 널려있는 파이를 창조해 내기위해 합리성과 효율성, 과학성등에 의지하지 않고 과거와는 다르게 인간의 감정을 배려하는 여유가 있다는 공통점이 있는것 같다.

미국 예일대학교의 심리학교수 피터 셀러베이(Peter Salovey 1958 ~ )에 따르면 우리들 마음속에는 '정서적인 극장(emotional theater)'이 존재하는데, 어떤 사람의 극장에는 항상 비극적인 영화만 상영되고, 어떤 사람의 극장에는 행복한 프로그램이 상영된다고 한다. 정서지능은 이러한 프로그램을 능동적으로 상영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셀러베이교수의 나이가 그리 많지 않다. 그 이전 시대의 사람들이 얼마나 과학적 합리성이나 기계적인 욕망에 시달려왔는지 반증하는듯 하다. 하지만 1908년에 태어난 제이콥 브로노우스키(Jacob Bronowski)라는 수학자는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탄에 충격을 받아서 과학과 인간성의 상반된 가치를 화해시키기 위해서 노력했는데, 특이하게도 브로노우스키는 '시인'이기도 하다.

인간을 중시하는건 자체가 목적이기도 하지만 다른 열망들을 성취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가 많은듯 하다. 물론 그 반대로 인간을 무시하여 몰락하는 사회나 개인도 많은 것 같다.

2015년 5월 14일 목요일

북한 선군정치속의 문제해결방식 / 현영철

북한군부 제 2인자인 현영철이 숙청되어 고사총에 잔혹하게 처형당했다는 정보가 국정원발 뉴스에 등장을 하기 시작했다. 아직 검증된것은 없지만 북한 군부에 대한 숙청은 여러가지 이유로 예견된 바 있는듯 하다. 그중에 가장 공신력있게 알려진 숙청의 이유로는 북한의 젊은 지도자 김정은의 권력기반이 완전히 서지 않은 상태에서 김정은과 북한군부의 보이지 않는 권력투쟁을 들 수 있을것 같다.

오랫동안 선군정치의 타성에 빠진 북한군부의 보수성은 김정은의 개혁시도를 방해하고 있는듯 하다. 군장성들의 숙청이나 계급강등이 빈번하게 행사되어 왔지만 경제관료에 대한 숙청은 화폐개혁의 실패이후에 없는 것으로 봐서 경제개혁을 시도하고 있는 김정은의 의도가 보인다는 해석도 있는듯 하다. 한 편으로는 김정일로부터 김정은으로 권력이 이양되는 과정에 북한군 장성들은 군부마피아를 형성하여 보이지 않는 힘을 행사하고 있다는 생각도 할 수 있을것 같다. 장성택의 숙청도 북한의 개혁을 바라지 않는 북한군부의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했을거라는 생각도 든다.

군부라는 거친영역의 세계는 거친방식으로 대응하고, 계급사회는 계급으로 통제하며, 폭력적인 관점을 키워 온 군부를 통제하는 방법은 폭력밖에 없다고 믿을 수 밖에 없는 김정은의 고민이 느껴진다.

원래 오랜 옛날 권력이 없던 시절에는 인류는 호혜적(互惠的)인정에 의하여 상호교환관계를 가졌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법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법이 권력으로 등장하고 법의 영역 안에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기도 하였다. 반면에 폭력적인 권력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상호관계도 당연히 폭력적으로 교환될 수 밖에 없는듯 하다.  김정은은 무서운 성질로 성장한 북한군부에 잔혹한 방식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깨우침을 터득하였는지도 모른다. 논리적이거나 인정적인 설득이 통하지 않는 사회에 서있다는 생각이 들던 날 자신의 마음도 무너지는 경험을 한 사람들이 북한 외부의 세상에서도 많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북한이란 어두운 시스템과 상호교환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의 심경이 해석이 되는듯 하다.

2015년 5월 9일 토요일

비교의 의미 / 리카싱


어느 대기업을 방문한 시설물기사가 휴게실에서 무료로 제공되는 커피를 마실려고 하자 그 커피는 자랑스러운 OO맨만 마실수가 있다면서 거부하더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제대로 된 기업의 오너라면 그런 발상을 내놓은 기획자에게 주의를 주거나 징계를 해야지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업구성원에게 자부심을 부여하는 태도는 좋지만 좀 더 장기적인 안목으로 보면 공공성을 결여하고 내집단화 될수록 기업의 입지가 좁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기업의 구성원들의 자부심은 기업이 공익적 가치에 기여한다는 전제에 바탕을 두고 있어야지 정당하며, 그렇지 않고 다른 기업이나 다른 국민들과 비교해서 나은 사람이기 때문에 대접받아야 한다면 그 기업에서 생산하는 제품을 소비자들이 구매하는 것이 옳은 행위가 아닌 논리가 되어 버린다. 그러고서도 구매를 한다면 나를 저열하게 생각하는 누군가에게 그 사람의 생각을 모르고 그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상황이 되어버릴것이다. 말하자면 정보의 편향성이나 무지로 사기를 당한 형국이 되어 버린다. 극단적인 표현을 하자면 그 기업은 소비자를 우롱하는 사기꾼이 되어버린다. 그 시설물기사가 그 기업의 제품을 사용하고 있으므로 더욱 그런 논리가 되어버릴것이다. 기업 종업원의 입장에서도 시간이 지나면 퇴직을 할 것이고 자랑스러움은 지나간 추억이 될것이며 기업을 위한 부품으로서 개인적으로는 어떤 의미도 건지지 못한 경험이 되기도 할 것이다.

동양 최고의 기업인인 리카싱은 항상 검소하다고 한다. 사업을 하면서 자만심을 갖지 않도록 조심하며 사회적 책임감을 갖도록 노력한다고 한다. 상거래의 원칙은 작은 이익을 갖더라도 많이 판매해 많은 사람에게 이득을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기본적으로 망가지는 사회의 이면에는 비교와 우열감이 존재하는듯 하다. 역시 장기적으로 나타나는 부작용을 인지하는 사람도 없다. 아마 우월감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에서 정보의 비대칭현상이 나타나고 있는줄도 모른다. 열등한 사람은 우월한 사람을 위하여 무엇인가 공헌을 하면서도 그 사실을 잘 모른다. 우월감을 가진 사람은 그런 상황을 자신의 능력이나 투쟁의 결과라고 착각한다.

사회구성원들 사이에서는 눈에 안띄는 연결고리가 있다. 리카싱이라는 기업인은 밑바닥인생을 살아본 경험으로 그것을 깨쳤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계승자가 창업자보다 못한 마인드를 가지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2015년 5월 8일 금요일

네 믿음이 너를 헛갈리게 하였느니라 / 수면자효과(Sleeper effect)


어느 날 지인이 나에게 유익한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깜짝 놀랐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오래전 내가 지인에게 가볍게 해준 위로성격의 정보였기 때문이었다. 지인은 이야기의 내용은 감명깊게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출처를 기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인은 항상 의지박약하고 쉽게 동조되는 성향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교육을 많이 받은 엘리트가 '자기생각'이라는게 그다지 많지 않다는 사실에 은근히 놀랐다. 한편으로는 '참을 수 없는 대화의 가벼움'을 좀 더 신중하고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필요를 느끼기도 했다.

한 편으로는 자신의 권위, 나이, 믿음에 근거한 생각을 타인에게 주입시키려고 애쓰는 어설픈 '교주'들도 많이 보는데, 그 지인과 어설픈 교주가 만나면 '훌륭한(?) 조화'를 이루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념문제나 종교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의문이나 근원에 대한 탐구가 용납되지 않고 선전이나 선동에 휘둘리는 자칭 '똑똑한 사람들'의 실체를 자주 경험해보기도 하는데, 대체로 그런 휘둘림은 소극적으로는 방심, 적극적으로는 어떤 욕망으로 가려진 사고의 둔감함에 근원을 두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유명한 미국심리학자 칼 호브랜드(Carl Hovland)와 동료 두 명은 미군병사들에게 [왜 우리는 싸우는가]라는 선전영화를 보여준 뒤 전쟁에 대한 생각을 물었는데, 처음에는 영화가 별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다가 시간이 갈수록 병사들은 선전영화를 믿게 되었고, 선전영화의 내용을 신뢰했다. 호브랜드와 동료들은 이 역설적인 효과를 수면자효과(Sleeper effect)라고 불렀다. 거기서 말하는 내용이 훗날 기억 한 구석에서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 비난트 폰 페터스도로프(Winand von Petersdorff) -

자율적으로 원했던 정보에 대한 믿음은 '배움'이라는 유익한 이름으로 도움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수면자효과'를 통해 선동이나 세뇌의 도구가 되기도 하는듯 하다. 물론 정신적인 또는 철학적인 교육이 빈곤한 한반도에서 더욱 그런것 같다.

2015년 5월 4일 월요일

프리드먼의 아날로그

어느 날 리서치엔 리서치에서 설문조사를 위한 전화가 왔다. 정치와 경제, 국제정세, 지도자들에 대한 전반적인 선호도와 미래예측을 위한 조사였던것 같은데, 여당 야당을 떠나고, 좌우 이념을 떠나서 객관적으로 선호도를 조절하느라고 부지런히 자기검열을 했다. 그리고 적절히 안배했다. 나에게 그런 분야의 설문은 신뢰도와 타당도를 상실한것 같다.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것은 모두 내 탓이 아닌듯 하다.

한국에서 보궐선거가 있었는데 야당이 완전히 참패를 하였다. 직전에 여당이 전대미문의 부패스캔들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선거는 여당쪽에 유리한 결과가 나왔다. 소선구제, 다수대표제 선거제도에서 소속된 정당보다는 후보의 인물에 관심을 둔 유권자들의 영향탓도 있겠고, 어느 정도 부패는 일상적일수도 있다는 부패에 둔감해져가는 망국(亡國)의 민심(民心)이 성장해 가는 탓도 있겠다 싶다.

그런데 내 관심의 영역속에서 해석을 하자면(진실은 아닐수도 있다는 의미다)  이념정치의 틀이 깨지는 과정에서 야당이 적절한 정치적인 이슈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예를들어 복지문제나 개혁문제를 여당이 심각하게 이슈화시키면 야당은 적극적인 이슈와 소극적인 이슈를 모두 잃어버리는 상황이 발생하는것 같다. 결국 좌우문제에 대한 관점으로는 슬그머니 아날로그화되는 여당에 디지털방식으로 대응할려다 실패했다는 생각이 든다. 공학적인 개념으로는 디지털이 좋은 것 같지만 나는 지금 유연성이 없다는 표현으로 사용하고 있는 중이다.

신자유주의경제학자의 대부(大父)인 시카고학파 경제학자인 프리드먼(Milton Friedman)이 이런 상황과 관점을 현명하게 파악하고 이용했던것 같다.

프리드먼은 인플레이션이 은밀하게 퍼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인플레이션은 미국인에게 슬며시 더 높은 과세등급을 부과하고, 금리를 혼란에 빠뜨리며, 정치가로 하여금 정당한 대가도 치르지 않고 정부의 몸집을 불릴 자금을 확보할 수 있게 한다. 프리드먼은 우파 돈벌레와 좌파 선무당을 모두 거부했다. 그는 좌파 선무당에 대해 "우리는 미세하게 다이얼을 조정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 만큼 (너무나 복잡하고 변동이 심한 경제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한다. 어설프게 나서봤자 또 다른 폐단만 더할 뿐"이라고 말했다. 프리드먼은 경제와 인구가 성장하는 속도에 따라 서서히 통화공급을 늘리는 방안을 선호했다.

주부들이 슈퍼마켓에 몰려가 가격인상에 대해 항의하던 1966년, 프리드먼은 "주부들이 불평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이 배달된 슈퍼마켓이 아니라 그것을 만든 워싱턴에 불평해야 한다. "라고 말했다. 프리드먼은 독자가 정확히 이해할 수 있도록 가능한 쉬운 용어만 사용해 "인플레이션은 언제 어디서나 통화 현상"이며, "인플레이션은 워싱턴이 만들고 오직 워싱턴만이 없앨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렇듯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 사이에 학계 저널에서나 나올 법한 M1 이니 M2니 하는 복잡한 공식이 간혹 끼어 있었다. 프리드먼의 칼럼은 저자는 상아탑에서 내려오고 독자는 군중 이상으로 올라서는 화해의 장이었다. 

- Daniel J. Flynn -  

위 내용을 부연해서 설명을 하자면 인플레이션은 은밀하고 슬그머니 아날로그방식으로 왔다고 프리드먼은 말하고 있고, 그것 때문에 정부는 은밀히 규모가 커지는 당시의 잣대로서는 좌파적 결과를 낳았기 때문에 프리드먼은 우파와 좌파를 구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생각이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우파는 경제적 기득권에 집착하는 돈벌레로 좌파는 검증되지 않은 개혁방안을 밀어부치는 선무당으로 인식하는 생각은 변함이 없는듯 하다.

또 프리드먼은 경제현상이 복잡하고 변동이 심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프리드먼 자신은 현대경제현상을 '형성'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스스로가 경제적 창조행위를 주도 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워싱턴에서 인플레이션을 만들기도 하고 없앨수도 있다고 말하면서 정부의 경제적 '형성행위'도 말하고 있는데,경제환경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변화시켜야 함(형성함)을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로 알려져 있는 교묘함이 있는듯 하다.

한편으로는 경제와 인구가 성장하는 속도에 따라서 '서서히'통화공급을 늘리는 방안을 제시함으로서 유연성 있고, 점진적인 개선방안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프리드먼이 경제적 환경이나 경제정책을 생각하는 관점이 우파와 좌파의 어느 쪽에 자정(自定, 디지털화 시킴)할 수 없는, 자정할려고 하면 혼돈이 오는 상황을 이해하고 있듯이 경제정책이나 심지어는 프리드먼 개인의 생각까지도 아날로그적인 연속성의 관점으로 해석을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또 한국의 망국병인 부패현상도 서서히 아날로그처럼 깊어진듯 하다. 해결도 서서히 아날로그 방식으로.......그건 안될 것 같다. 

2015년 5월 3일 일요일

노국 /Old nation and Labor nation

공동주택에서 아기 울음소리를 들어본지가 오래되었다. 하필이면 때맞춰 청년실업문제도 최악이다. 과거와는 달리 노인이 강력범죄사건을 일으키는 경우도 자주 눈에 띈다. 이쯤되면 세대간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미래에 대한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수가 없는 시대다. 한국만 그런것이 아니고 일찍이 한자녀 낳기 운동을 벌인 중국과 동양에서 가장 선진적으로 초고령화사회를 먼저 이루어낸 일본도 마찬가지다.

어느 날 노인분들과 일을 하다가 생각한 것은 노인에게 기대할 수 있는 진취성이나 혁신성은 노인의 습관,정신건강, 육체건강등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에 의존한다는 사실이다. 한국사회의 노인은 유래없이 근면한 젊은 시절을 보냈던것 같다. 노인세대가 한국의 경제발전을 이루어냈다는 논리는 명확히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의 경제발전을 이루어낸것은 노인세대가 아니라 노인세대의 '젊음'이었다는 사실이 생각난다. 젊은 시절과 노인 시절이 너무 다르다. 당신들도 다르고 환경도 다르다.

근세초 프랑스의 농민들은 계모와 고아의 세계, 비정하고 끝없는 노동의 세계, 거칠기도 하고 동시에 제어된 잔인한 감정의 세계에 살고 있었다. 그 이후에 인간의 조건은 너무도 변화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삶이 야비하고 잔인하고 단명하였던 사람들에게 그 세계가 어떻게 보였는지를 상상하기는 어렵다.

- 로버트 단턴(Robert Darnon)의 [책과 혁명]중에서 -

환경의 변화는 점점 빨라지고 있는데, 동양 노인들의 보수성은 변화가 없거나 더 심해지고 있는듯 하다. 그 원인은 전통적으로 노인과 젊은 세대간의 평등적 사고를 이루어내지 못한 유교문화권의 잔재가 남아 있거나 지위와 관련된(왕과 신하같은) 수직적 관계의 사고가 개선되지 못한 이유를 여러차례 이야기 한 적이 있다. 게다가 '자유'라는 명분으로 어떤 공리적인 사고를 하는 교육도 받지 못해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외의 영역에 대한 '공동선'같은 것은 생각해 본적이 없었던것 같다. 특히 한국은 그런 현상이 심한듯 한데, 자신에 대한 성찰이나 평생교육, 심신(心身)의 건강관리등을 위해 노력하지 않고, 노후에는 모든 노력이 정지되고 오로지 대접받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생각의 프레임이 짜여진 노인분들이 이끌어가는 사회란 끔찍한 곳임을 직감적으로 느낀다.

처와 자식이 먼저 세상을 떠나 우울증을 앓던 90대의 인도인 노인 파우자 싱 102세가 될때까지 마라톤을 여러번 완주하며 우울증을 극복해냈다는 사실은 노인의 행복은 과거의 젊은 시절이나 아니면 사회가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노인분들 스스로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을 잘 표현해주고 있는듯 하다.

어느 인터넷사이트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올라왔다. 한 고등학생이 혼자 순대국밥을 먹으러 갔는데 순대국밥집에 있던 손님들이나 주인의 시선이 곱지 않더라는 것이다. 급기야 학생은 혼자 이런데 오는 것이 아니라는 질책을 하는 사람도 있더라는 것이다. 그 글에 달린 댓글이 더 재미있다. 어떤 댓글은 순대국밥은 인생을 다 산 사람들이 소주잔을 기울이며 신세한탄을 하면서 먹는 음식이냐는 비판을 하고 있고, 어떤 댓글은 노인 분들이 파스타집에 오면 노인분들은 혼자 이런데 오면 안된다고 해야 한다고 한다. 노인분들을 바라보는 젊은이들의 생각과 평등을 지향하는 신세대들의 생각이 담겨 있는듯 해서 재미있었다.  

세대간의 갈등이 문제가 아니라 세월이 좀 더 지나면 노인도 일해야 하는 시대가 올것이다. 현재를 보면 미래를 알 수 있는 법이다. "교육받은 인간이란 계속 공부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인간이다."고 말한 피터 드럭커(Peter Drucker) 말처럼 끝임없이 성찰하고 발전하는 노인은 노인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2015년 5월 2일 토요일

나는 이상한 사람과 결혼했다 / 군사문화와 자아의 발달

좀 험한 군대생활을 한 사람들때문에 이상한 상황에 물려들어간 일이 몇 번 있었다. 나를 '이상한 일'에 물려 들어가게 한 주인공들은 모두 결혼생활이 원만하지 못했다. 이혼을 하거나 배우자가 심한 우울증을 앓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주인공들은 모두 심약한 정신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험한 군대생활을 견뎠다. 견뎠을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몇 년, 몇 십년을 두고 후유증을 앓고 있었다.

자신은 강하다는 자존감과 심약한 현실적 내면의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복잡한 내면은 변덕스럽게 표현되고, 배우자에 대한 과다한 집착으로 표현되었다. 때로는 마초의 심리로 폭군처럼 군림하기도 했고, 그런 행동에 대한 책임으로 애정을 구걸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사랑의 이름으로 배우자를 헷갈리게 하고 있었다. 집에서 세는 바가지는 여지없이 주변인들까지 헷갈리게 하고 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징병문화를 가지고 있는 한국에서는 젊은 시간들을 군대에서 사회성을 학습하면서 보낸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기관총열로 엉덩이가 헤지도록 빠따를 맞아야 했던 과거의 군대생활을 한 세대들에게 군대는 악몽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일본식 군대의 잔재가 남아서 개인을 별로 중시하지 않았던 과거의 군대는 남성들에게 '강한 인성'을 부여하는 동시에 타율성까지 선사한듯 하였다. 도대체 자기 생각이란게 참 비천했다. "나 자신속에 한사람의 타인이 있다."고 한 랭보의 말처럼 강하다는 착각과 언제든지 상대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 반란을 일으킬 스파르타쿠스의 모습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독일태생 미국의 정신분석학자 에릭슨은 청년기에 해결해야 할 과제로 자기 동일성(identity)의 의식을 발달시키는 것에 대해서 강조했다. 그 중요한 시간들을 어쩔수없는 정세적인 여건속에서 길들여진 사람들은 방황하고 있고, 강력한 의지로 주변까지 방황하게 하고 있는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