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내 자취방에는 별별 책들이 많았다. 한 번은 놀러 온 친구의 눈이 중국의 연변 인민출판공사에서 출판한 철학책에 꽂혔다. 그리고 몇 일후 사복경찰의 가택 수색을 당했다. 그런데 당시 사법시험을 공부하느라 스텐드 불빛 밑에는 이재상 교수의 형법책과 형사소송법책이 펼쳐져 있었다. 경찰은 죄송하다고 인사를 하고 갔다. 먼 훗날 그 친구는 나에게 죽을 죄를 졌다고 용서를 구했지만 그때 나는 별 생각이 없었다. 건강도 돈도 행복한 가정도 아무것도 가진게 없는 나에게 열등감을 느끼게 만든 나의 허세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나의 위치에 매우 만족했다. 그걸 깨닫게 만든 사건이 닉슨과 힉스의 사건이었다.
당시 속칭 좌파 대통령과 이름이 같은 칼럼니스트가 속칭 우파 신문에 있었다. 당시 군부 정치가 매우 권위적일때라서 그런지 그 신문의 성향에 비해서 그 칼럼니스트의 저서는 상당히 정부 비판적이었다. 제목도 하늘이여 땅이여 하면서 절절했다. 그 속에 닉슨과 힉스의 이야기가 있었다. 힉스 상원의원이 닉슨을 이름 없는 지방대 출신이라고 모욕하자 나중에 힉스를 공산주의자로 몰아 파멸시키고 훗날 닉슨은 불법 감청문제(워터게이트사건)로 파멸한 사건이었다. 당시 한국과 미국에서는 자신이 미운 사람을 빨갱이로 몰아 자신의 원한을 갚는 매카시즘이 성행했다. 권력은 없는데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고 싶어하는 나르시스트들이 선택한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나중에 검찰 출신 정치인들이 보수 진영으로 단합해 나라를 파국으로 몰고 가는 것을 보면서 콩은 이미 심어져 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 나는 나르시스트들의 바다에서 해메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을 작게 만들었다고 나를 빨갱이로 고발한 친구놈이나 사법시험을 합격해 권력을 얻어 보겠다고 무리한 내 자신이나 웃기는 팔도강산에 살고 있었다. 나중에 상당히 교육 수준이 높은 인재들이 많은 업체를 관리하다가 내가 교육 수준이 낮은 관리자로 여겨져 골머리를 앓은 적이 있었다. 이런 일들로 어지러운 한국은 큰 문제 거리를 안고 가는 중이었다.
인공지능과 토론했더니 검찰의 전횡은 진행 중인 사건으로 판단한다. 이미 현실에서는 사회적 합의가 정리된 상황이 아닌가 해서 다시 한 번 토론 내용을 둘러봤다.
이형춘 칼럼
구조가 만든 나르시시스트: 한국 사회는 어떻게 공감 없는 권력자를 양산하는가
경쟁 교육, 권위주의의 유산, 그리고 민주주의가 치러야 할 대가
1. 카리스마와 나르시시즘 — 같은 얼굴, 다른 본질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와 나르시시스트는 겉모습이 놀랍도록 닮아 있다. 자신감, 강한 추진력, 언변,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카리스마의 에너지는 바깥을 향하고, 나르시시즘의 에너지는 안을 향한다.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는 공동체를 위해 자신을 소진하지만, 나르시시스트는 공동체를 자신을 위해 소진한다. 권력을 쥐기 전에는 이 둘을 구별하기가 어렵다. 진짜 시험대는 권력을 쥔 후다. 비판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나르시시스트는 비판을 논리로 반박하지 않는다 — 비판자를 적으로 만든다.
역사는 이 패턴을 반복 검증한다. 히틀러, 스탈린, 무솔리니는 초반에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나르시시즘은 위기를 이용해 권력을 잡는 추진력이 됐지만, 결국 현실 인식의 왜곡으로 자멸했다. 권력은 인격을 만들지 않는다. 권력은 인격을 폭로한다.
2. 이타주의를 가장한 나르시시즘 — 매카시와 닉슨의 교훈
나르시시즘의 가장 위험한 형태는 이타주의의 언어를 쓴다. 히틀러도 '독일 민족을 위해'라고 했다. 조지프 매카시도 '미국을 공산주의로부터 구하기 위해'라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기 권력과 자기 서사를 위한 마녀사냥이었다.
닉슨의 사례는 더 극적이다. 명문대 출신 앨저 히스에게 무시당했던 열등감을 간직한 닉슨은 훗날 히스를 간첩으로 몰아 정치적 발판을 삼았다. 그런 그가 결국 불법 도청으로 자멸했다. 남을 함정에 빠뜨린 방식으로 본인이 무너진 것이다. 나르시시스트의 본성은 바뀌지 않는다. 권력이 커질수록 더 노골적으로 드러날 뿐이다.
한국의 '빨갱이', '종북' 프레임도 구조가 같다. 논리로 반박하지 못하면 상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이것이 나르시시즘의 정치 언어다. 꿰뚫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속성이다.
3. 한국 교육 경쟁이 만드는 인격 구조 — 공감 없는 엘리트
한국은 나르시시즘을 우연히 키운 것이 아니다. 교육 시스템이 구조적으로 설계했다.
극단적인 입시 경쟁 속에서 아이들은 일찌감치 배운다. 타인은 협력 대상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경쟁자라는 것을. 공감은 사치이고, 서열이 진실이라는 것을. 수십 년간 이 경험을 반복하면 그것이 세계관이 된다.
사법시험이나 행정고시 같은 관문을 통과한 사람들은 여기서 한 겹이 더 추가된다. 극소수만 통과하는 시험 — '나는 선택받은 자'라는 엘리트 의식이 내면화된다. 이 의식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타인에 대한 경멸로 바뀐다.
결과는 이렇다. 법 공부만 한 사람, 시험만 통과한 사람이 사회의 요직을 채운다. 장사를 해봤거나, 공장을 다녀봤거나, 부당함을 몸으로 겪어봤거나 — 그런 사회적 공감의 토양이 없다. 그 부재가 권력을 잡은 후에야 비로소 드러난다.
4. 권위주의의 모방 심리 — '작은 독재자' 현상
교육이 만든 나르시시즘에 역사가 한 겹을 더 얹는다. 박정희, 전두환 시대를 살아온 세대는 두 가지 방식으로 그 경험을 소화했다. 트라우마로 저항하거나, 그 구조를 내면화하여 자기 영역에서 재현하거나.
후자가 만들어낸 것이 '작은 독재자' 현상이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지역사회에서 자기만의 왕국을 구축하려는 인간형. 박정희·전두환을 욕하면서도 그 방식 — 명령, 복종, 반대자 제거 — 을 그대로 모방한다. 아이러니가 아니라 구조다.
이 모방 심리는 세대를 건너 재생산된다. 권위주의적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는 그 관계 방식을 내면화하고, 성인이 되어 자신의 영역에서 그것을 반복한다. 구조가 사람을 만들고, 그 사람이 다시 구조를 강화한다.
5. 구조가 만든 나르시시스트가 정치에 진입할 때
교육 경쟁이 공감 없는 엘리트를 만들고, 권위주의의 유산이 복종의 언어를 내면화시킨 사람들이 정치 무대에 오른다. 문제는 정치가 요구하는 능력이 그들이 훈련받은 것과 정반대라는 데 있다.
정치는 협상과 설득의 언어를 요구한다. 나르시시즘은 단죄와 복종의 언어만 안다. 유권자를 시민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심문해야 할 대상으로 본다. 비판을 정책 토론의 자원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인다.
결과는 반복된다. 나르시시스트 정치인은 권력이 커질수록 현실과 멀어진다. 주변에는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사라지고, 자기 서사를 확인해주는 사람만 남는다. 그 끝에 있는 것은 언제나 같다 — 현실 인식의 붕괴, 그리고 돌이키기 어려운 결정.
이것이 단순한 개인의 실패가 아닌 이유다. 그 인격을 만든 것은 구조였다.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같은 유형의 인간이 같은 자리에 반복해서 앉는다.
맺음말: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다음 위기는 반드시 온다
나르시시즘은 개인의 성격 결함이 아니다. 물론 그런 측면도 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나르시시즘은 수십 년간 축적된 교육 경쟁과 권위주의의 구조적 산물이다.
공감을 가르치지 않는 교육, 협력보다 경쟁을 강요하는 사회, 권위에 복종을 미덕으로 가르친 역사 — 이 세 가지가 결합될 때 권력은 공동체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자기 서사를 확인하는 수단이 된다.
민주주의는 제도다. 그러나 제도는 그것을 운용하는 사람의 인격 위에 서 있다. 경쟁만 가르치고 공감을 키우지 않는 사회는, 결국 자신이 키운 인격에 의해 민주주의 자체가 위협받는 역설에 빠진다. 구조를 바꾸는 것 — 그것이 가장 긴 호흡의 민주주의 과제다.
이형춘 | 지정학·철학 칼럼니스트
본 칼럼은 저자의 블로그 및 소셜 미디어를 통해 국제 독자들에게 배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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