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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6월 1일 월요일

버스 문제는 인간의 문제인가 이념의 문제인가

나는 여러가지 일을 했다. 공장 노동자, 중장비 기사, 전기기사등으로 일하기도 했고, 사설 학원에서 행정학이나 헌법 경찰학등을 강의하기도 했다.  많이 일해본 것 중에 언제나 오래 참고 언제나 온유하게 마음을 붙들어매야 하는 일 중의 제일은 버스 기사였다. 내가 해 본 많은 일 중에서 노동 강도가 가장 강했고, 가장 위험했으며, 가장 천대 받았다. 아마 복잡한 도로에서 직접 시민을 상대해야 하는 '전투중인 야전군'이라고 표현해도 맞을 것이다. 버스 문제는 그냥 넘어가면 안될 것 같아서 임금과 상관없이 열악한 노선만 찾아다니며 무려 7년이나 일했다. 그리고 계속 버스 재벌의 해체와 준공영제를 말해왔다. 그리고 근로를 천대시해서 위태로운 국가의 미래도 느껴봤다.    


버스는 절대로 시장재가 아닌 공공재라는 주장을 많이 했는데, 많은 시민들과 정치인들이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공정한 절차를 거쳐 준공영제로 전환중이다. 그러나 서울 마을 버스나 경기도의 많은 버스들은 아직도 준공영제를 미루고 있다. 문제는 예산 배정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것이다. 내가 일하던 경기도 어느 신도시는 눈 오는 날이면 버스 정류장 가까운 바깥 차로는 눈을 치워주지 않았고,  버스 기사를 천대하는 승객이 가장 많았으며, 다른 지역에 버스 기사를 뺏기지 않기 위해 버스 기사에게 이미 주어진 임금 보정액을 지급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 지방 자치단체장은 보수 정치인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지방 자치단체장이, 아니면 그 지역 자체가 공공성에 대한 원한을 가지고 있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결국 이 문제는 버스 기사만의 문제가 아니고 시민들의 문제인 것이다. 버스는 공공재이기 때문이다. 버스는 수돗물이나 전기처럼 시민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버스기사를 혹사시키는 사회는 결국 자신을 혹사시킨다

— 준공영제 외면은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무지와 무책임의 문제다


이형춘 칼럼




경기도 어느 마을버스 정류장. 한여름 炎天下에 노인이 40분째 기다리고 있다. 버스는 오지 않는다. 결행이다. 기사가 없어서다. 그 노인은 아마 기사를 욕할 것이다. 그러나 욕을 먹어야 할 사람은 따로 있다.



격일제라는 합법적 잔혹 행위

경기도 시내버스와 마을버스 상당수는 아직도 격일제로 운영된다. 하루 1618시간 운전하고, 다음 날 쉬고, 또 1618시간. 명목상 격일이지만 실질 주당 노동시간은 60~70시간에 달한다.


의학적으로 18시간 연속 각성 상태의 인지능력은 혈중알코올농도 0.05% 수준과 유사하다. 우리는 음주운전을 범죄로 처벌한다. 그러나 그것과 다를 바 없는 상태로 수십 명의 승객을 태우고 달리도록 구조적으로 강제하는 것은 처벌하지 않는다. 아니, 그것을 '정상적 근로형태'라고 부른다.


이것은 기사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구조의 문제다.



피해는 기사에서 끝나지 않는다

기사가 쓰러지면 그 버스 노선도 쓰러진다. 그 노선이 쓰러지면 그 동네가 고립된다.


처우가 열악하니 기사를 구할 수 없다. 기사가 없으니 배차 간격이 늘어난다. 배차가 늘어나니 승객이 줄어든다. 수익이 줄어드니 차량을 교체할 수 없다. 고물차가 도로를 달린다. 사고 위험이 높아진다. 그 사고의 책임은 또 기사에게 돌아간다.


이 악순환의 가장 큰 피해자는 승용차 없는 사람들이다. 노인, 학생, 장애인, 저소득 노동자. 사회적 이동권이 가장 취약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가장 깊이 피해를 입는다. 마을버스가 끊기면 지하철역까지 걸어서 30분이다. 한겨울에, 폭염 속에.


그런데 민원은 기사에게 간다. 배차가 늦어도 기사 탓, 차가 낡아도 기사 탓, 노선이 줄어도 기사 탓. 구조를 방치한 지자체와 운수회사는 시민의 시야 밖에 있다.



"준공영제는 좌파 정책"이라는 무식한 주장

일부 보수 성향 지방자치단체장들은 준공영제 도입을 사회주의적 발상이라며 거부한다. 시장경쟁에 맡겨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보수가 아니다. 경제학의 기본을 모르는 것이다.


시장경쟁이 작동하려면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소비자가 공급자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하고, 수익이 나는 곳에 자본이 유입되어야 하며, 경쟁이 실제로 품질을 높여야 한다. 버스는 이 세 가지가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 노선은 고정되어 있고, 외곽 노선은 구조적 적자이며, 경쟁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시장이 실패한 영역에 공공이 개입하는 것은 좌파 이념이 아니다. 그것은 애덤 스미스 이래 보수 경제학이 인정해온 정통 원칙이다. 영국의 대처 정부는 1980년대에 버스를 민영화했다가 처참하게 실패하고 공공 개입으로 회귀했다. 독일, 일본, 싱가포르 — 보수적 행정 전통을 가진 나라들도 대중교통만큼은 공공이 책임진다.


준공영제를 거부하는 단체장에게 묻고 싶다. 당신이 신봉한다는 자본주의 경제학 교과서 어디에, 시장 실패 영역을 경쟁에 내맡기라고 쓰여 있는가.



예산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의지가 없는 것이다

재정난을 이유로 준공영제를 미루는 지자체들, 그러나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다르다. 대형 토목사업엔 예산이 나온다. 지역 축제, 청사 신축엔 예산이 나온다. 정작 주민이 매일 이용하는 버스엔 "재정이 없다"고 한다.


이것은 재정의 문제가 아니다. 정치적 우선순위의 문제다. 버스기사의 처우는 표가 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준공영제 전환의 성과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마을버스 배차가 40분인 동네, 심야 노선이 사라진 동네, 결행이 반복되는 노선 — 이 모든 것이 단체장의 선택의 결과임을 유권자들이 알아야 한다.



노동을 경시한 사회의 청구서

더 넓게 보면, 이것은 한국 사회 전체가 수십 년간 외면해온 청구서다.


부동산 불로소득이 노동 소득보다 훨씬 큰 사회, "공부 못하면 막노동"이라는 언어가 일상인 사회, 사농공상의 위계가 현대의 학벌주의로 재포장된 사회. 이런 사회에서 땀 흘려 일하는 것의 가치는 지속적으로 평가절하되어 왔다.


버스기사는 그 평가절하의 가장 극단적 피해자다. 매일 수십 명의 생명을 책임지는 고도의 집중력과 판단력이 요구되는 일. 그러나 사회적 보상도, 존중도 그에 걸맞지 않다.


그 결과가 지금 우리 동네 정류장에 나타나고 있다. 오지 않는 버스로.




다음 선거에서 물어보자. "우리 동네 마을버스, 왜 아직도 격일제입니까?" 대답하지 못하는 단체장에게는 표를 주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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