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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24일 토요일

법조계몽, 법조개혁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70622500086&wlog_tag3=daum



대법원장의 사퇴를 요구하는 판사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책임과 권한이 즉각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법조문화의 특성은 매우 보수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조계내에서도 대법원장사퇴의 요구가 있다면 적폐의 도가 지나쳤다는 현실의 반증이기도 한것 같다. 그러나 법조계의 일들은 '적폐'라고 하기에는 애매모호한 현실이 있는데, 양형에 따른 판단만 하면 되는, 외부의 긴박하고 다이나믹한 경제현장처럼 성과가 보여지지 않는 법조계는 꾸준히 변화하지 않는 옛사람을 양성해내는 중인듯 하다. 항상 걱정스러운 점은 법조계가 내집단화되어서 사회나 시대가 요구하는 개혁의 발목을 붙들고 늘어지는 일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생각이 다른 법조인들도 많은듯 하다.

18세기 프랑스혁명이 일어날 당시 프랑스인들에게는 먼저 계몽사상이라는 철학이 생겼다.

이성에 대한 프랑스인의 신념은 1세기 동안에 인간정신이 여러가지 우수한 성과를 거두었던 만큼 더욱 확고하게 되었다. 뉴튼은 지구와 천체의 복잡한 운동, 그리고 물체의 낙하 등이 하나의 단순한 법칙으로 일관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성이 해석기하학, 수학적 광학에서 개가를 올렸는데 정치와 형이상학에서 실패할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스피노자는 윤리학을 이론화했다. 이성이 이때까지 완전한 사회를 수립하지 못해한 것은 이성이 미신과 전통에 구속되어 인간활동을 지배할 자유를 가지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인간이 진보를 거듭하는 데는 이러한 속박을 절단하고 아직도 사상과 관습을 좌우하고 있는 중세기적인 잔재를 일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악법이 불행한 사회를 조성했으며 정당한 법만 가질 수 있다면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왕국에서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하여는 전통적인 현존 관습을 버리고 단순하고 자연적인 규율로 대체하면 그만일 것이다.

디드로(Denis Diderot, 1713 - 1784 : 철학자)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우리 모두가 겪고 있는 고난의 간략한 역사를 소개하면 이러하다. 옛 적에 한 자연인이 있었는데, 어느때 인위적인 인간을 도입하였더니 그때부터 동굴 안에 내란이 발생하여 일생을 두고 계속되었다."

이 인위적인 인간 즉 전통과 미신을 가진 인간을 제거하면 동굴안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 앙드레 모로아 [프랑스사]중에서 -

아마 한국에서 무리지어 다니면서 사회개혁을 막는 세력이 있다면 이념세력과 종교세력 그 다음이 법조세력일 것이다. 어디서나 누구나 그런 것이 아니지만 작위는 부작위를 구축(毆逐 / expel)하고 행동하는 자가 무리의 정세를 지배하는 현실을 볼때 권력을 얻고자 하거나 권력을 지키고자 하는 무리의 일원은 다른 성실한 구성원의 소극적 태도를 압도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점을 생각할때  조직내부의 서열이나 계층구조에 압박받는 잠재적 개혁가도 많을 것이다. 대법원장 사퇴에 대한 요구는 현실보다 더 활발한 요구일 수도 있을 것이다.

가끔 민원을 담당하는 공공기관이나 법조계같은 관(官 / a public body)의 분위기변화를 살펴보면 정치권이 보수적이냐 개혁적이냐에 따라서 분위기가 많이 변한다. 쉽게 말하면 고객인 국민에게 친절한 정도가 달라진다. 그러니 개혁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문제는 조금 더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문제일 수가 있긴하다. 하지만 사회가 허황된 이념에 빠지는 것 만큼이나 개인의 철학이 더 근본적이고 주체적으로 발전해 나가야 할 과제가 있다.

생각해보면 매일 성경이나 불경같은 종교경전 한권만 받아들이는 사람의 보수성만큼이나 법조문과 법조문화와 같은 폐쇄적 세계를 접하는 사람들이 독단(dogma)과 아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 같다. 반드시 '적폐'라고 분노한 표현을 하기 이전에 법조계의 생태는 많은 국민들의 이해를 필요로 한다. 특히 대법원장의 문제는 수직적 권력관계가 '매우'강한 일본 사회에서 만들어진 법을 계수하고, 권위주의 정치권력밑에서 성장해왔던 법조인이 습관상 개혁적인 성향을 가질 수 없을 것이라는 추측은 할 수 있겠다.


모여서 무리지어서 어떤 세력을 형성하기전에 철학적 사고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감히 나에게' 아니면 '감히 우리에게' 같은 유치한 영웅적 태도는 한 발을 빼고 외부에서 바라보면 조롱거리가 될 정도로 사회구성원들의 생각은 많이 변한듯 하다. 이런 시대에 대법원장이나 검찰은 옛생각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외부에서 변화의 요구가 더 크게 자극되기 전에 스스로 변화하는 것이 자존심을 살리는 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자존심은 '공리적 헌신'이 담긴 철학이 바탕이 되어야 할 것같다

2017년 6월 22일 목요일

비밀공작네트워크와 정책

이념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이 종교네트워크를 관찰하는 일이었다. 20여년전 종교단체나 종교적 카리스마를 갖고자 하는 자들을 유심히 살펴보면서 선의의 목적이 없는 자들이 일반신자들을 네트워크로 이용하는 것을 보았다. 특별한 훈련이 되어 있다기보다 인내심으로 얼굴표정을 숨기고 지냈는데, 정부네트워크에 비하면 아기자기한 집단이라서 대외적으로는 크게 문제삼지않고 가능한한 남위에 군림할려고 하지말고 자세를 낮추고 살라는 충고로 대신했다. 수치심과 분노로 얼룩진 그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서 두고 두고 쓸데없는 자원낭비를 하겠구나 하는 염려가 들었다. 어떤 이는 왜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에 내가 참견을 하느냐고 앙앙거렸지만 먼저 욕망을 갖고 손짓을 한 것은 그 사람들이었다. 이런 상황은 미끼를 물었다는 표현이 적절한 것 같은데, 지금도 서로의 영악스러움에 얼굴이 붉어지는 추억이었던 것 같다.

더 엄청난 일은 훗날 9년동안 벌어진 일이었는데, 대통령이란 사람들이 국가정책은 엉망으로 실행하면서 종교네트워크나 공안기관의 네트워크를 이용해서 공작정치를 펴기에 바빴다. 관찰의 냉정함을 유지할려면 진영논리에 빠져서도 안되고, 국가의 미래를 엉망으로 만들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가능한한 바른 길로 가도록 유도해나갔다. 블러그로 관심을 끌면서 하고자 하는 말을 했는데, 권력의 힘에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서 떠돌아 다니면서 이일 저일을 했다. 한국의 사회적 자유가 세계 56위라는 말을 실감했는데, 30여국에서 내 구글블러그를 방문하는 외국의 고마운 이들이 없었다면 보이지 않는 감옥에 수감될뻔한 답답한 상황이었다.

로이 고드슨(Roy Godson)은 그의 뛰어난 저서[Durty Tricks or Trump Cards]에 이렇게 썼다. "비밀 공작은 후원자에게 책임이 돌아갈 수 없는 방법으로 조건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겠다는 의미이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비밀공작의 근본적인 원칙 : 효과를 거두려면, 그것은 잘 조율된 정책의 일부분이 되어야 한다." 그는 비밀공작을 '정책의 시녀'로 묘사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비밀공작은 정책의 대체물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행동을 원하는지를 결정하지 못한 정부가  - 지속적이고 공조된 방식으로 자원을 투입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단순히 모종의 행동만 취하고자 하는 정부가  - 사용했을 때, 보통 역효과를 낳기 마련이다. 또한 비밀공작은 다른 모든 수단이 실패한 뒤 단독으로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의 총알도 아니다. 이것은 외교나 군사, 경제적 수단과 공조하고 지원을 받아야만 한다. 

각국 정부는 사람들과 사건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더 넓은 차원의 대외정책을 보충하는 수단으로 비밀공작을 벌이고 있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일도 아니다. 기원전 3세기, 알랙산더 대왕의 아버지인 마케도니아 왕 필립포스 2세는 이런 말도 했다. "때로는 어떤 군대도 통과하지 못하는 산맥을 금을 짊어진 당나귀가 지나가기도 한다."

- Henry A. Crumpton의 [The Art of Intelligence]중에서 -

내가 금을 짊어진 당나귀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절대 공안기관이나 정보기관등을 정책의 목적을 잃어버린 정부가 사용해서는 안된다. 자료와 판단은 명확히 구분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고자 하는 일이 시원찮은데, 정보기관을 멋지게 이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보기관이 스스로의 가치관을 정립하지 못하여 용렬한 대통령의 정책에 춤을 추다 함께 망가져가는 상황을 보면서 참으로 많은 참견을 했던것 같다. 이건 추측이지만 얼마전 우회적으로 내 블러그를 들어오는듯한 이웃나라 정보요원이 한국의 정치인들을 농락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런 태도를 인지하지 못하고 꾀죄죄한 모습만 보여주는 한국의 구세대 정치인들이나 언론은 각성해야 할듯 하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몇년전 당시 야당쪽의 어떤 작가와 통화를 하다가 당시 대통령에게 예우상 존칭을 붙였다. 좀 현실적인 말인데, 한국과 같은 현실에 그렇게 블러그글을 통하여 정부수반과 밀접한 교감(적대적이든 친화적이든)을 했으니 내 전화가 도청이나 감청 당할 것을 항상 생각하면서 통화를 해야했다. 때문에 언제나 진심은 오래 남는 글로 표현하지 지나가는 말들은 지나가는 말일뿐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별로 진지하지 않았다. 때로는 장난도 곧잘 쳤다. 그리고 몇일 후 에릭이란 필명을 가진 어떤 블러거가 대통령의 남자들이란 제목으로 몇 사람의 이름을 언급했는데, 그 속에 모든 국민이 알고 있는 몇 사람의 이름과 내 이름이 함께 언급되어 있었다. 그렇게해서 공작전은 진영을 가리지 않는다는 증거를 얻어냈고, 쓸데없는 일에 에너지를 소모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절대 대응하지 않았다. 어쨌던 내 목적은 이념에 의해 다른 판단이 흐려지는 것을 막는것이다.


북한의 정보기관은 외교력과 자금력의 후원도 받지 못하는데다가 사상적인 감옥에 갇혀서 전혀 일을 할 수 없을 것이지만 한국의 정보기관도 어느 정도는 그런듯 하다. 사상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다른 공안기관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네트워크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수치스럽게도 별 볼일 없는 종교집단정도로 국가시스템을 운영할려고 했던 대통령들을 내 능력껏 막기위해 최선을 다 했지만 다신 그런 일은 없어야 한다. 북한과 하향 평준화 될 가능성이 짙다. 그러잖아도 이념과 종교는 비숫한 성향이 있어서 적폐의 길로 방향을 바꾸면 아주 나빠지는건 마찬가진데, 그 둘을 이용해서 아기자기하게 한반도를 꾸려갈려고 하는, 아니면 했던 권력자들을 생각하면 괴이한 경험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연못가에서 아이들이 놀다가 돌을 던졌는데 연못속의 개구리가 맞아 죽었다.

전화를 감청하거나 미행하는 건 자유고 멋진 정보전의 표현일 수 있겠지만 잘못된 정치로 비극적인 삶을 진행해가는 국민들을 보면 좀 더 신중하고 인자하며 진지해야 할 분야가 정보분야인듯 하다. 

2017년 6월 21일 수요일

사격훈련과 감정신호 / 폴 에크만

50미터권총사격종목이 도쿄 올림픽때부터 없어진다고 한다. 금메달을 독식했던 진종오선수를 비롯한 아시아선수들에게는 실망스러운 결정이다. 현역선수는 아니지만 22구경 실탄권총사격종목이고 10미터 공기권총종목에 비해서 조금 더 재능이나 내면의 수양이 필요한 종목인것 같다는 내 나름대로의 판단을 하고 마음을 둘 수 있는 종목으로 여겼던 터라 함께 실망했다. 민간인이 총기와 친밀한 서양선수들에 비해서 동양선수들이 사격이나 양궁에 우세한 이유는 엘리트체육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를 이야기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좀 다른 이유도 있는듯 하다. 다른 종목들에 비해서 조금 더 절제와 수양이 필요한 종목이라서 동양의 전통적인 훈련방식이나 유전적인 재능등이 작용한듯 하다.


가끔 사회적 관계에서 정신이 혼돈스러운 일을 겪곤 하는데(정말 많이 겪었다. 그것도 고강도로), 그때마다 종교인이 신앙으로 돌아오듯이 정확한 사격이 가능한 멘탈로 돌아오는 습관을 키웠다.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건지는 알바가 아니고 내면세계의 평정심과 관찰력만 가져다주면 그것으로 얻고자 하는 것은 모두 얻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결과를 볼 수 있는 이상적인 순간도 염두에 두어야 하기때문에 올림픽에서 사격종목중 하나가 없어진다는 것은 진심으로 불쾌한 기분이든다. 사격은 할아버지가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따거나 할머니가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기도 한다. 아마 평정심에서 잇점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사격을 염두에 두면서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습성이 생긴듯 하다. 얼굴표정으로 마음을 읽는 연구의 권위자인 폴 에크만(Paul Ekman 1934 - ) 캘리포니아대학 명예교수는 1960년대 후반 파푸아뉴기니의 원주민인 포레족과 미국대학생들과의 감정표현과 이해에 대한 교차실험을 했다. 서로 어떤 문명적인 교환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포레족과 미국대학생들은 서로의 얼굴 표정이 담긴 사진을 보고 서로의 감정을 정확히 판별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나중에 에크만 교수는 미국연방수사국(FBI)와 중앙정보국(CIA)등에서 범죄 용의자나 테러리스트의 표정 및 심리분석에 관한 조언을 맡았다.

사격과 명상같은 초합리적인 정신능력과의 연관성에 관심을 갖는 이도 있겠지만 장기간의 연습이나 마음에 두는 시간 자체가 명상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오래전 누구나 자주 쏠 수 없는 실탄권총과는 달리 스포츠권총은 진종오선수같은 엘리트선수를 극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근접해가는 연습실력과는 달리 진짜 경기에 임하면 달인과 평범한 사람은 분명 차이가 있었던것 같다. 아마 세상이치가 그럴 것이다. 어떤 일본 사업가가 돌 위에서라도 3년만 앉아 있어보면 깨닫는 것이 있다고 했는데, 지극히 일본인다운, 아니면 예의 동양인다운 발상이지만 사실 그렇다. 어떤 분야든지 1인자가 되는 길은 시간과 정성을 들이는 길 외에는 편법이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고, 그 사실을 아는 바에는 속칭 '잔 머리'를 쓰거나 쓰는 사람을 보는 것이 불편해지는듯 하다. 

2017년 6월 17일 토요일

Why, 왜, 어째서

바로 직전 글에서 독서를 많이 한 모택동이 혁명지도자가 되었다고 서술했다. 그럴수밖에 없는게, 당시 위아래의 수직적 계층구조가 강한 사회에서는 사회현상을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인재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독서는 자신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세계관을 좀 더 객관적으로 아니면 분석적으로 변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다른 많은 세상을 경험함으로써 자아(自我 / ego)의 색체를 좀 더 엷게 만드는 역할을 하는듯 하다.

한국에서 중산층이 붕괴되었다고 하는데, 좀 더 미래지향적인 중산층은 미처 태동되기도 전에 사라져갔다고 표현하는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가장 중요하고 포괄적인 문제는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수직적 권력관계와 이념과 종교로 편향화된 사고를 만들어낸 전통이라고 생각한다. 지배하거나 복종하거나 아니면 맹목적으로 믿으면 그만인 사회에서 개척정신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특히 동북아시아 국가들은 서양의 국가들에 비해서 합리적이고 분석적인 사고를 하지 않고 종합적 사고, 말하자면 두리뭉실할 수 있는 사고를 하는 습관이 있어서 사회발전에 많은 진통을 겪는듯 하다.

중산층 부모는 노동계층 부모에 비해 아이에게 책을 훨씬 많이 읽어준다. 중산층 가정에는 단순히 재미로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게 아니라, 아이가 책 속의 대상과 바깥 세상의 대상을 연결 지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중산층 가정의 아이는 아주 어릴 때부터 책 내용을 질문 받으리라 기대할 뿐만 아니라,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도 알고 있다. 부모는 아이에게 대상의 속성을 질문하고 그 특징에 근거해 범주화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노동계층의 아이는 책을 읽어주는 사람과 대화하도록 양육되지 않는다. 대신 "이제 너는 잘 듣는 법을 배워야 해"라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

- Richard E. Nisbett 의 [INTELLIGENCE]중에서 -

생각해보면 내 인생의 가장 후회스러운 시간중의 하나가 암기식 시험공부에 손을 댄 시간들이었고, 가장 생산적인 시간들이 이념이나 종교를 연구하기 위해서 사회집단이나 개인을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자아(ego)의 표현일 수 있지만 관찰 분석하지 않는 전통은 사회적 적폐를 남긴다는 증거를 한국사회 여러곳에서 살펴볼 수 있었다.

요즘 계속 검찰권력에 대해 비평하는 편이지만 종교, 이념과 관련해서 맹목적인 복종이나 순종을 권유하는 습성을 가지거나 수직적 권력관계에 익숙한 사람들이 자율의식을 가지거나 도덕이나 윤리라는 개념을 더욱 진지하고 신중하게 받아들일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게 좋을 것 같다. 자칫하면 자신이 강요받았던 관계를 그대로 타인에게 강요할 수 있는데, 이런 관계는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습성에 길들여지게 될 것같다.

2017년 6월 15일 목요일

성공과 변화 / 그랜트 스터디(Grant study)

자동차로 반나절을 달리면 종단할 수 있는 작은 땅이지만 산이 많아서 그런지 지리적 특색이나 풍속 습관등의 차이가 꽤 있는 한국은 심리적영토가 꽤 넓은 편이다. 아마 그래서 지역감정이나 이념감정등의 차이가 있는 것 같다. 가끔 집에서도 심리적 영토를 넓히는 방법이 있는데, 다방면의 책을 많이 읽는 것이다. 어느 한 분야의 집중적인 학습으로 인한 전문가에 대한 환상이 깨진지는 오래되었다. 모택동은 젊었을때 책을 많이 읽을려고 중학교를 자퇴하고 다방면의 지식을 쌓고 혁명가가 되었다. 그리고 혁명의 전문가가 되고 혁명의 정신적 바탕인 이념의 전문가가 되면서 정신이 고착화되어 자신이 개혁시킬려고 했던 봉건적적폐를 답습하고 있었다. 북한도 모택동의 중국과 같은 패턴을 보이지만 더 오래 가고 있다. 아마 주은래나 등소평과 같은 개혁가의 등장을 막아버린 세습독재의 부작용이라고 생각한다. 김정은과 같은 집권자가 변하기전에는 중국과 같은 개혁이 없을 것 같다.

가끔 옛 친구들을 만나면 산전수전을 겪은 친구들과 그렇지 않은 친구들은 많이 다르다. 다른 세상을 보지 못할수록 생각은 옛생각에 머물러있는듯 하다. 다양한 삶을 취할려고 노력해보지만 외부세상에 온몸을 던져놓기까지는 다양한 삶은 경험하기 힘든일인듯 하다. 역사적 풍파가 많은 한반도에서 성공적인 삶의 이상형은 안주하는 삶을 사는 것이고, 최소한의 안전을 구하기 위해서는 출세를 해야하고, 어떤 지위를 얻어내기 위해서 아니면 지켜내기 위한 태도가 적폐적 현실로 발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성공적인 삶이란 무엇일까.

1938년 하버드대보건소의 알리 보크(Arlie Bock)박사와 클라크 히스(Clark Heath)박사는 하버드 대학교 졸업생중 몸과 마음이 건강한 268명을 선발하여 대학졸업후의 삶을 70년동안 추적했다. 그 결과 30퍼센트는 뚜렷하게 성공한 삶을 살고 30퍼센트는 뚜렷하게 실패한 삶을 살고 있었다. 이 연구는 그랜트라는 후원자의 도움으로 이루어졌기때문에 그랜트스터디(Grant study)라고 한다.

2차대전을 겪으면서 대부분 동일선상에 우월적인 행태와 지위에 있던 졸업생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삶의 명암이 점차 크게 차이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성공과 실패는 살아가면서 터득하는 삶의 기술에 의해 결정된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랜트 스터디의 결론을 대충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성공적인 삶은 주관적 만족도, 객관적인 소득이나 지위, 성취여부, 여가 심신의 건강등의 척도로 보아서 분명히 존재한다는 점
2) 우리가 흔히 드라마에서 보듯이 어느 한 충격적인 자극으로 인생행로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삶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습관이나 특성으로 인해서 성공이 결정 된다는 점 
3)삶에 있어서 없을 수 없는, 고통이라는 스트레스를 어떻게 긍정적으로 대처하느냐에  따라서 성공이 결정된다는 점
4)스스로를 빚어낼 수 있는 심리적 기술에 의해서 인생이 결정된다는 점

나름의 결론을 내리면 성공이나 행복이라는 것은 끊임없는 변화에 대한 투입(INPUT)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변화지 않으면 기회조차 오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해보기도 한다. 

2017년 6월 10일 토요일

줄 수 있을때 받아야 하는 권력 / 마빈해리스

http://v.media.daum.net/v/20170610215708802?rcmd=r

한 보수정당의 대표가 망해가는 보수를 바꾸고 싶다고 말한다. 작금의 정치적 사태를 살펴보면 충분히 이해되는 절규다. 특히 보수진영에서 흔하지 않게 개혁을 추구했던 인물로서 진실성과 헌신성등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받고 있는듯 하다. 하지만 정권획득을 목적으로 한 정당이란 집단속에서 혼자만 갈 수도 없는 환경이라서 그만큼 고통이 심한 것으로 생각된다.

미리 결론을 말하자면 공동체내에서 권력을 얻는다는 것은 공동체에 기여하기 위한 수단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기존의 보수진영에서는 권력과 공리적 헌신을 다른 문제로 생각했기때문에 필연적인 결과를 얻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권력을 추구한다는 것을 이제는 누구나 쉽게 파악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민도(The people's standard of intellectualize)가 향상된 점이 있다. 예전처럼 힘이나 술수로 권력을 얻어내는 시대가 점차 지나가고 있는듯 하다. 굉장히 바람직한 현상이기도 하면서 시장경제의 모습처럼 정치권력의 시장에서도 '주고 받는 교환 관계'가 중요한 거래방법처럼  흘러가는 면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여기에서 지적해 두어야 할 것은 교환관계를 통해 사회적 복잡성을 구축해 가는 과정의 그 어느 단계에서도 주고받는 반응을 지배하는 유전적 통제가 전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 조상들이 손도끼와 굴봉을 만들도록 타고나지 않았듯이, 애덤 스미스등의 고전 경제학자들이 믿는 것처럼 <교환하고 거래>하도록 타고난 것도 아니다.

성관계를 통해 원시적으로 주고받거나 서로 털을 손질해 주는 것을 넘어서 교환의 영역을 확장해 가는 데는 하나의 단순한 행위 관계가 일반화되는 것이 필요했다. 즉 아파렌시스와 하빌리스는 자기에게 무엇을 준 자에게 자기도 무엇을 주면 그에게서 또 다시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배워야 했다.

- 중략 -

그러나 일단 문화적 도약이 이루어진 이후로는 교환 관계는 재빨리 진화하여 다양한 경제적 거래로 전개되었다. 선물 교환, 물물 교환, 교역, 재분배, 세금, 그리고 결국 구매와 판매, 봉급, 그리고 임금으로 세분화된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을 친구관계나 결혼으로 묶어주고 가족과 공동체, 그리고 더 고차원적인 정치 및 기업기구들을 만들어내는 것은 교환이다. 

-  Marvin Harris의 [OUR KIND  WHO WE ARE  WHERE WE CAME FROM  WHERE WE ARE GOING ]중에서 -

생각해보면 남북분쟁의 비극속에서 한국을 지켜낸 보수진영과 민주화운동에 희생을 한 진보진영이 무엇인가 '주었다'는 명분을 가지고 정권획득을 위해 노력한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지난 10년의 보수정권이 보여준 것은 '가지려고만 하는 행태'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무능하면서 권력만 탐하는 모습이 민중들을 크게 각성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차후에 총선때도 한 번 더 평가를 받겠지만 이제는 정치적 관점자체를 변화시켜야 할 듯 하다. 아직도 보수정당의 한 끝에서는 국민의 고통보다는 이념을 운운하며 얻어낼려는 행위는 보수진영의 미래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것 같다.  

2017년 6월 9일 금요일

공안기관의 내집단화와 통제

조사를 받는 절차중인데도 팔짱을 끼고서 웃고 있는 우병우 전 청와대수석의 여유를 보면서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정보기관 퇴직자들로 만들어진 정보동우회, 경찰 퇴직자들로 만들어진 경우회등의 내집단의 결속력을 얻어내기 위한 모임들이었다. 검찰은 그런 통합된 조직이 없지만 정치적 이념이나 정치적 라인을 통한 연대감으로 작은 조직들을 만들어내는 전통이 있었던 것 같다.

과거 잠시 경찰공무원이 될려는 젊은이들을 학습지도한 적이 있는데, 다이나믹한 경찰직에 매력을 느끼는 밝고 활달한 젊은이들이었던 것 같다. 옛날 어린이들은 호환이나 마마를 두려워했지만 우리 어린시절에만 해도 순사를 무서워했다. 일본제국주의 시절 경찰은 국민을 억압하는 존재였고, 꽤 오랫동안 정부에 대해 할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폭압적인 존재로 군림했다. 사실 경찰 조직에 문제가 있다기보다 정치권력에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 자신도 예외가 아니어서 꽤나 채신머리없는 소수의 경찰가족(경찰이 아님)에게 스트레스를 받은 적이 있는데, 자신과 의견이 어긋나거나 가족인 경찰 당사자의 정보활동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주변의 누구든지 적대적인 관계로 만들곤 했다. 그래서 친하던 인연도 끊어지고 본인들은 왜 그런지 모르는 황당한 일을 많이 보았던 것 같다. 생각해보니 그 배후에는 내집단화 의식, 그러니까 국민과 다른 '우리들 세계'를 만들어 온 전통이 있어서 그런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유난히 한국의 공안기관들은 국민에게 봉사한다는 이념이 아닌 군림한다는 이념으로 지탱하는 조직같다. 현업에서 고생하는 실무자들과는 달리 직급이 높아질수록 정치적 이념과 결합되는 성향이 있고, 그 정치적 이념은 당연히 정권의 성향이랑 결합이 되는듯 하다. 불행스러운건지 다행스러운건지는 잘 모르겠는데, 가급적 평등을 주장하는 진보적인 성향이 있는 정부가 들어서면 집단의 우월감에 손상을 입을 것을 두려워하여 정치권력에 대항하는 사태도 벌어진다. 아마 공안검사출신으로 오랫동안 한국정치의 좋지 않은 모습을 그려낸 누군가의 말처럼 '우리가 남이 아니기 때문에 서로 도와서 우리의 영역을 구축해나가야 한다'는 의도인지도 모른다.

이번 정부가 들어서서 국정원의 국내정보활동과 검찰의 수사권을 경찰에 집중시킬려고 하니 경찰권이 강해질 우려가 있다는 생각들을 많이 한다. 생각해보건데 국내정보활동은 경찰이 국정원 못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보기도 한다. 말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경험해봤기 때문에 잘 아는 사실이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독일경찰은 한국의 국정원이 할 수 있는 국내정보활동의 대부분을 해왔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독일경찰이 정보활동으로 인한 권력의 집중이 되지 않은 까닭은 중앙연방경찰이랑 지방정부경찰로 분권화 되어 있기 때문인 것으로 알고 있다.

한국공안기관에서 가장 큰 문제는 본질적인 목적(국민에 대한 봉사)이외의 목적으로 집중화 되어 내집단화 되는 성질이 있다는 것이다. 업무의 부처간 분산이나 재배치도 중요하지만 공안기관의 수장급의 고위직을 민간에게 개방시키거나 선거에 의한 임명등을 통하여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방법을 추진해봐야 한다. 도대체 이해가 안되는 것은 월급이나 명예에 덧붙여 권력까지 탐하면서 국민이나 조직의 성실한 일원들 위에 군림할려는 이들이 어떻게 저렇게 통제받지 않고 죄인으로 조사받으면서도 팔짱을 끼고 웃고 있는지 신기한 점이 있다.

2017년 6월 8일 목요일

인간적 온기

지인중에 무척 간사한 사람이 있었다. 나에 대해서도 두고 두고 뭔가를 꾀하지만 그 문제를 탓한 적이 없었다. 그냥 바라만 보았다. 간사함이란 심약한 사람이 살아가는 방편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사나운 사람이 있는 곳에 간사한 사람이 있다. 둘은 성질은 다르지만 서로에게 대응할 만한 무기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문제는 과도한 정염(burning passion)을 만들게 한 환경 탓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그 문제가 중국 송나라의 진회나 한국의 어떤 옛사람들처럼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 바에야 내가 알고 있으면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던것 같다.

언젠가 전 대통령의 생가쪽을 지나다가 멀리 제철 산업단지의 엄청난 굴뚝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성장기에 저 굴뚝들을 보면서 성장했으면 좀 덜 섬세할 수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머리속을 어지럽히던 사람들은 인간적 온기를 핑계삼아 오랫동안 이념이나 종교와 친밀한 사고를 갖고 있었던것 같다. 정신적인 입지가 좁아지거나 섬세해지면 대국적 성격은 어디가고 인정과 사람다움이란 명분으로 포장되어 성심껏 이권을 추구하는 눈동자를 굴리게 마련인듯 하다. 아마도 생각속에 합리적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도덕적 경계도 모호해진 탓일 것이다.


무토 전 일본 대사가 한국의 현 대통령을 인간적 온기가 없다고 이야기 한 사실은 특별히 무토 전 대사와의 대화에서 함께 공감할 만한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는 말도 되지만 일본인들의 집단적 성향에서 비롯된 우국충정심을 생각해볼때 한국의 현대통령이 일본에 대해 그다지 큰 이익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해석도 될 듯 하다. 더구나 한국과 북한이 일본에 대해서 공통된 견해를 갖게 된다면 전통적으로 일본이 추구했던 한반도에 대한 생각이 크게 수정되어야 하는 사태가 생길것이다.

한 편으로는 공영방송인 한국의 kBS의 기자가 당시 야당의 회의발언록을 도청한 녹취록을 여당의원에게 전달한 사건에 대해서 간사함이 약자의 무기가 아닌 어떤 권위적 전통의 한 방편으로 자리잡을뻔한 사건이 참으로 많았다는 생각이 든다. 간사함은 능력이 아니고 기질적인 문제라는 생각이 드는 요즘에 변해야 하는 것이 참으로 많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날을 생각하면 주변에 간사함이 넘칠수록 눈이 서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것조차도 공격을 하자면 무토 대사의 표현처럼 '인간적 온기'가 없다는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한편으로는 다양한 지혜(?)로 권좌에 오른 토요토미히데요시를 숭상하는 일본인과 왜적과 내부의 간사한 억압을 모두 상대하면서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이순신을 숭상하는 한국인의 윤리의식은 다를 수 있을듯 하다. 그래도 부러운 것 중의 하나는 일본인으로서의 자각에 의해 말하는 무토 전 대사의 우국충정이고, 안타까운 것은 이웃을 이기고서라도 권력이나 출세를 이룰려고 간사했던 사람들을 항상 가까이하고 살아야 하는 한국의 현실인듯 하다. 

2017년 6월 5일 월요일

눈물의 도카타 / 실물경제

한국에서는 막일을 하는 사람들을 '노가다'라고 한다. 일본말 土房(TOKATA)의 잔재라고 하는데, 이제는 한국의 엔지니어들까지 자조적(自嘲的)인 의미로 사용하곤 한다. 한편으로는 눈물의 토카타라는 폴모리아의 미뉴에트선율의 피아노곡이 있다.

가끔 실물경제의 민낯을 보고는 한숨을 내쉰적이 많았다.  오래전 부동산자격증을 취득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학습지도를 한 적이 있었다.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일이긴 하지만 타인에게 자격증을 취득하거나 시험에 합격하도록 하는 일이라는게 흡족한 결과를 이루어내는 일은 아니다. 특히 부동산자격증은 실물경제보다 금융경제에 가까운 투기성분야에 가까워질 수 있는 자격증이고, 공무원시험처럼 응시자대비 합격자수가 적은 시험은 훗날 서로 얼굴보기 민망한 상황이 많이 연출되곤 했다. 그래서 미안한 마음도 있고, 실물경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있고, 막연히 특허관련 일을 해봐야겠다는 생각도 있고 해서 여가 시간에 기술을 배웠다. 그리고 나서 이후 너무 다른 세계의 현실에 충격을 받았다. 말하자면 이론과 현실이 다름을 깨달았다는 것인데, 더구나 이런 나의 생각이 이념적인 의미로 비춰지던지 비춰질 수 있던지 하는 압박감도 있었다. 아마 한국이라서 더욱 그럴 것이다. 한국에서는 진보성향이 강한 정치후보가 노동자의 권리나 노동이 행복한 나라를 이야기하고, 노동이 아무리 노오력해도 자본을 이길 수 없는 현실을 경제학적으로 설파한 프랑스의 경제학자 토마피케티는 새로운 마르크스라고 매도 당하고 있었다.      

얼마전 한 보수정치인이 공항의 게이트에서 여행가방을 보좌관에게 던져놓듯이 굴려 맡기고 팔자걸음으로 게이트를 빠져나오는 장면이 세계적으로 패러디된 일이 있었다. 마치 주인인 금융경제와 하인인 실물경제의 민낯을 보는것 같았다.

전 세계 인구의 소득 상위 1퍼센트가 하위 90퍼센트가 가진 것보다 많은 것을 차지해 부가 사회의 일부에 편중되고 또 다른 일부는 기본적인 필요도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현재 부의 불균형 상태가 위험 수준에 도달해 있다. 소득 및 부의 재분배 등을 통해 기본적인 인권이 보다 잘 보장될 수 있게 해야 한다.

전 세계의 외환거래 규모는 1500조달러로 20조 달러의 국제무역총액에 비하여 지나치게 크다. 이는 금융경제와 실물경제가 완전히 따로 움직이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그 결과 점차 '투기의 한계'에 봉착해 간다.

우리는 집단적으로 아무도 원치 않은 결과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의사경정자들이 자신의 결정으로 인해 영향을 받는 사람들과 차츰 더 멀어지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는 '리더쉽의 한계'에 직면해 있다. 폐쇄적 메커니즘으로 작동하는 전통적 상명하달식 리더쉽이 한계에 도달한 것이다. 

 - Otto Schamer와 Katrin Kaufer 공저 [Leading from the Emerging future] 중에서 -

한국에서는 이념문제가 부의 재분배문제나 실물경제에 대한 위상, 수직적 권력문제를 개선할 수 있는 여지를 막아버렸는데, 한국의 보수진영은 국가발전에 참으로 비협조적이었던 것 같다. 가뭄도 심한 요즘 낙동강 보 근처를 지나가서 포항입구에 4대강 사업을 했던 전 대통령 생가입구를 알리는 표지판을 보면서 한 때 유행했던 "이게 다 이**때문이다"라는 말이 생각났다.  

금융경제와 친밀한 투기적 자본이 활력을 얻고 실물경제와 친밀한 노동이 활력을 잃어가는 세계를 만든 것은  " 이게 다 이념때문이다." 

2017년 6월 3일 토요일

포드의 이념성향

시장경제의 목적은 이기심과 경쟁이 아니고 공리적 발전이다. 한국에선 오랫동안 정치와 경제분야에서 집단들 사이의 이익을 위한 쟁투의 명분으로 시장경제의 본질이 회손된 점이 있다. 


자동차왕 헨리포드가 알랙스 맬콤슨과 존 S.그레이로부터 투자를 받아서 자동차를 생산할려고 할때 측근들은 부유층을 겨냥한 고급자동차의 생산을 조언했다. 하지만 포드는 중산층도 소유할 수 있을 정도로 대중화된 경제형 자동차 T모델을 대량생산했다. 직원들의 일당도 다른 업체들의 두배로 지급하고, 하루 8시간근무와 주 40시간근무원칙을 고수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포드의 임금정책을 '경제범죄'로 매도했고, 학자들은 FORDISM이라고 조롱했다. 하지만 포드는 노동자들에게 많은 임금과 많은 여유시간이 주어지면 자동차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것이라고 예측했고 그 예측은 현실화 되었다. 말하자면 수요와 공급을 함께 증대시킬만한 방안을 전체적인 관점으로 파악해서 현실에 응용시키고 크게 성공한 사례가 되겠다.

반면에 전체적인 관점을 가져야 하는 정치인이나 거대재벌의 경제인들이 이념문제에 구속되거나 단기적 이익이나 이기심에 구속되어 현실을 크게 망가뜨린 사례가 많다. 한국경제의 재벌집중이나 빈부격차등을 정부의 개입같은 제도적인 방식으로 교정하는 문제도 중요하고, 공리적인 생각들이 발전으로 연계될 수 있는 생각과 가까워지는 것이 중요할 것같다.

기업가가 정치지도자가 되어 국익을 훼손하는 이유는 공익의 관점과 사익의 관점 사이의 괴리현상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업의 세계와 국가의 세계가 스케일 자체가 다르다는 것은 기본이고 단기적 이익을 추구하는 세계와 공리를 추구하는 세계가 다르다는 사실도 몰랐던 것 같다. 전체적이고 장기적인 예측을 했던 포드가 한국에 있었다면 '사회주의자'로 낙인 찍혔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