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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8일 목요일

인간적 온기

지인중에 무척 간사한 사람이 있었다. 나에 대해서도 두고 두고 뭔가를 꾀하지만 그 문제를 탓한 적이 없었다. 그냥 바라만 보았다. 간사함이란 심약한 사람이 살아가는 방편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사나운 사람이 있는 곳에 간사한 사람이 있다. 둘은 성질은 다르지만 서로에게 대응할 만한 무기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문제는 과도한 정염(burning passion)을 만들게 한 환경 탓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그 문제가 중국 송나라의 진회나 한국의 어떤 옛사람들처럼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 바에야 내가 알고 있으면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던것 같다.

언젠가 전 대통령의 생가쪽을 지나다가 멀리 제철 산업단지의 엄청난 굴뚝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성장기에 저 굴뚝들을 보면서 성장했으면 좀 덜 섬세할 수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머리속을 어지럽히던 사람들은 인간적 온기를 핑계삼아 오랫동안 이념이나 종교와 친밀한 사고를 갖고 있었던것 같다. 정신적인 입지가 좁아지거나 섬세해지면 대국적 성격은 어디가고 인정과 사람다움이란 명분으로 포장되어 성심껏 이권을 추구하는 눈동자를 굴리게 마련인듯 하다. 아마도 생각속에 합리적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도덕적 경계도 모호해진 탓일 것이다.


무토 전 일본 대사가 한국의 현 대통령을 인간적 온기가 없다고 이야기 한 사실은 특별히 무토 전 대사와의 대화에서 함께 공감할 만한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는 말도 되지만 일본인들의 집단적 성향에서 비롯된 우국충정심을 생각해볼때 한국의 현대통령이 일본에 대해 그다지 큰 이익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해석도 될 듯 하다. 더구나 한국과 북한이 일본에 대해서 공통된 견해를 갖게 된다면 전통적으로 일본이 추구했던 한반도에 대한 생각이 크게 수정되어야 하는 사태가 생길것이다.

한 편으로는 공영방송인 한국의 kBS의 기자가 당시 야당의 회의발언록을 도청한 녹취록을 여당의원에게 전달한 사건에 대해서 간사함이 약자의 무기가 아닌 어떤 권위적 전통의 한 방편으로 자리잡을뻔한 사건이 참으로 많았다는 생각이 든다. 간사함은 능력이 아니고 기질적인 문제라는 생각이 드는 요즘에 변해야 하는 것이 참으로 많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날을 생각하면 주변에 간사함이 넘칠수록 눈이 서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것조차도 공격을 하자면 무토 대사의 표현처럼 '인간적 온기'가 없다는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한편으로는 다양한 지혜(?)로 권좌에 오른 토요토미히데요시를 숭상하는 일본인과 왜적과 내부의 간사한 억압을 모두 상대하면서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이순신을 숭상하는 한국인의 윤리의식은 다를 수 있을듯 하다. 그래도 부러운 것 중의 하나는 일본인으로서의 자각에 의해 말하는 무토 전 대사의 우국충정이고, 안타까운 것은 이웃을 이기고서라도 권력이나 출세를 이룰려고 간사했던 사람들을 항상 가까이하고 살아야 하는 한국의 현실인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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