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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29일 월요일

시장경제와 공공부문의 만남

한국경제의 가장 큰 문제인 재벌경제와 그 이하의 경제적 세계가 겉도는 이중의 경제구조는 심각한 문제인듯 하다. 실제로 몇년 중소기업현장의 현업에서 일을 해 본 결과 '나는 인간이 아니었다.'라는 과격한 표현이 어울렸던 것 같다. 물론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고용주들은 '나는 조금 덜 인간이 아니었다.'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말일 것이다.

국가의 위상이나 경제적 통계와는 무관하게 비정규직 노동자는 말할 것이 없고,-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해서는 그 이야기를 다 풀어놓으면 지난 보수정부 10년동안의 대통령들의 정신세계와 행태만큼이나 괴이한(grotesque) 현상을 말하게 될 것같다. - 우리가 티브이 연속극에서 볼 수 있는 아기자기한 서민들의 삶이란 찾아볼 수 없고, 오로지 생존을 목적으로 한 일념으로 살아가는 척박한 세계였다. 그리고 추락하는 것은 끝이 없으며 누구나 "내가 아무리 힘들어도 저사람보다 못하겠냐" 할때의 '저사람'역할을 하고 있었다.

간혹 노동조합이 활성화되어있는 기업들의 근로자는 조금 나은 여유를 가지고 있었지만 알량한 중소기업들에게 노동조합까지 상대해야 하는 부담을 만들어주기는 무척 가혹한 상황이었던것 같다. 나의 가족중에도 자영업을 하다가 종업원월급에 치여서 끝을 본 이가 있는만큼 무조건 최저임금을 올리라는 것도 한국에서는 창업을 꿈꾸지 말라고 하는 엄포같이 들리기도 한다. 그래서 공공부문의 적극적 개입이 필요한 것이고, 이런 문제가 이념문제랑 결부가 되어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지 못하는 점이 한 편의 비극이기도 했다.

한 편 정부가 시장시스템에 개입할 수 있는 역량이 없기 때문에 경제주체들의 이해충돌을 정부가 주도해서 조정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한국의 경제학교수도 있고(김상조교수),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경제판을 다시 짜야 된다는 경제학교수(장하준교수)도 있었다.

두 교수의 언어는 상극의 이념적 스팩트럼을 가지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정확히 만나는 점이 있는듯 하다. 대기업을 억압하는 마이너스전략보다 중소기업을 활성화하는 플러스전략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오래전부터 사회적 공감대를 얻어왔을것 같고, 진보진영 정부의 경제적무능함이 예상된다는 추측도 보수진영의 논거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도 경제정책을 펴기위한 자료를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얻어왔다는 사실이 있을 정도였다.  


경제판을 지엽적으로 해석하면 다시 이념논리에 휩쓸릴것 같으니 결론을 이야기하면 중요한 것은 재벌이냐 중소기업이냐 하는 선택의 문제도 아니고 기업이냐 노동자냐 하는 선택의 문제도 아닌듯 하다. 개혁을 해서 경제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도록 해야하고, 국민인 근로자들이나 고용주들을 행복하게 해야 하는데, 여기서 국가 또는 정부가 해야 할 일이 생겨나게 된다. 물론 적극적으로 개입을 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현실의 관료시스템은 개입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니 관료시스템부터 개혁을 해야 한다는 의미다.

나는 관료는 아니었지만 엉망진창인 관료시스템을 피부로 느낀 사람인데, 내가 관료 당사자였다면 이런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경직되고 순종적인 세계라는 말로 시작을 한다. 가장 수평적이고 활동적이어야 할 정보기관이 수직적 관료시스템으로 움직이면서 국익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조직으로 낙인찍힌 일은 많이 언급을 해온듯 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정부조직이나 공무원조직은 외부세계랑 다른 영역을 구축하고 있는듯 하다. 그것이 한국경제의 역동성에 주는 마이너스의 영향은 재벌경제구조만큼이나 절실하다고 보는데, 공무원 조직이 계급제로 운영되는 문제점이 가장 큰 원인이 아닐까 생각된다. 직위분류제와 절충된 계급제라고 항변하는 이가 있겠지만 내가 알고 있는 공공현장은 모두 계급에 의해서 희노애락이 벌어지고 있었고, 그것은 관료조직의 큰 문제인 무사안일, 복지부동과 결부가 되어 있었다. 심지어 가장 큰 적폐현실을 보여준 검찰조직의 행태를 보면 한국사회에서 공공조직이 어떤 모습을 보이고 있는지는 사회적으로 크게 인지가 되고 있는듯 하다.

요즘 경찰과 소방관 같은 고된 직무의 현업조직에서도 계급인플레가 넘쳐난다고 하는데, 점차 공공부문이 빠져든 타성일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렇게 저렇게 추리고 나니까 한국경제에서 중소기업등의 생산현장에서 일하거나 야근을 하는 공공조직의 현장구성원들은 한국경제에 가장 큰 의미이기도 하면서 의미없는 존재이기도 한 상황이 벌어지는듯 하다. 이 즈음에 정부조직의 인사시스템을 좀 더 수평적으로 변화시켜야 할 것 같고, 계급제보다는 직위분류제로 개혁시켜야 하며, 개방형 인사시스템을 강화시켜야 할듯 하다. 그리고 검찰이나 법원조직의 수장급을 영미법계처럼 민선(民選 / elected by popular vote)으로 선출한다면 좀 더 역동적이고 수평적이며 무엇보다 능률적인 공공부문이 형성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존의 제도로 안에서 어찌어찌 할려면 답이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으면서 말할 수 없는 사실인듯 하다,  특히 개혁이란 것이 좌파적 테마로 오해받는 분단국가라서 더욱 그렇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가야할 길이고, 그 길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시장은 좀 더 공공이 개입하고 공공부문은 좀더 시장화 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2017년 5월 27일 토요일

사업가출신 대통령과 투기

오랫동안 외국의 건설현장에 있던 사람이 현지의 정국불안으로 귀국했다가 다시 나가고자 하였다. 정국은 불안하나 돈이 많은 국가의 재건활동이라서 수주를 얻어내는 일만 중요하기때문에 여기저기서 자본을 구하였고, 중국계자본을 유치할 예정이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듣고 사업가의 확신과 성과에 대해 말하면서 웃었다. 특히 사업가의 all or nothing에 대해 생각해봤는데, 나처럼 간이 작은지 아니면 도덕적인 긴장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튼튼한 후방지원없이는 엄두도 못낼 일들이었다. 아니면 스스로의 역량으로 실패할 경우를 대비하든지 해야할 일이다.

1990년대 중반 일본 스미토모상사(Smitomo Corp.)의 야쓰오 하마나카(Yasuo Hamanaka)라는 일개직원이 세계 구리시장에 개입을 하여 매점(cornering)과 투기(speculation)로 30억달러 이상을 날려버린 일이 있었다. 공급과 수요의 변동폭이 크고 재고관리가 용이한 광물인 구리의 특성상 투기하기가 좋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 진실을 알지 못하였다. 환투기전문가인 조지 소로스(George Soros)조차 구리시장에 개입했다가 스미토모의 자금이 무한한 것 같아서 겁에 질려 포기했다고 한다. 하마나카의 행동의 글로벌한 성격은 그의 활동에 대한 규제와 책임소재를 애매하게 만들었고,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Paul Krugman)은 그의 저서 [The Accidental Theorist]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스미토모의 본사는 일본에 있으니까, 책임이 일본에 있는가?  런던 금속시장의 본거지인 영국에 있는가? 스미토모가 소유한 구리의 대부분이 보관되어 있던 미국에 책임이 있는가? 그러나 이러한 책임 소재를 둘러싼 혼란 이상으로 규제란 것 자체가 우리 시대의 무비판적인 시장 만능 이데올로기에 의해 불가능했던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볼만하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는 자유시장에서는 언제나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해결된다는 신조가 있다. - 하마나카 같은 사람들이 저지르는 무엄한 짓거리는 시장이 자동적으로 처벌할 것이므로 그런 자들을 규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4대강 사업을 한다고 국고를 말아먹은 한국의 전대통령때 이념과 종교문제로 얽힌 의식을 추적하며 깨우친 일중의 하나는 대통령이 규제가 없는 투기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1.건설업종에 종사하던 습관으로 무작정 토목사업부터 손을 댐 
2.대통령을 만들기 위해 뭉쳤던 종교적인맥
3.사업가라는 이미지가 국민에게 주는 막연한 활력감
4.사업가는 사업에 실패할 수 있다는 도덕적 해이감을 국가정책에 반영시킨 점
5.안될 것 같은데도 종교적 상상력과 자기 최면을 반복하여 될 것처럼 착각한 점
6.극단적으로 추구했던 자유주의 이념이랑 사업가란 신분이 잘 맞아떨어졌는데, 그만 권력을 가진 대통령이라서 아무도 규제할 수 없었고, 오히려 대통령이 내놓은 정책결정에 맞춰서 연역적인 자료를 내놓게 한 점
7. 그리고 국가안보를 위해서 일해야 할 소중한 정보기관이나 권력기관등을 이념을 구실삼아 개인적인 도구로 이용한 점등을 생각하면 국가적으로 매우 큰 시련을 안겨줄 수밖에 없는 인재(人災/ disaster)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미국의 트럼프대통령의 돌발적인 행동들도 투기적인 사업가의 면모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사업가 출신 대통령의 사업가로서의 전력은 한 국가의 대통령에게 요구되는 공리(共利/ public good)와 전혀 무관한 전력이고 수월하게 투기를 할 수 있는 권력을 국민들이 힘을 합쳐서 쥐어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2017년 5월 21일 일요일

낙관적 대통령 / 셀리그만

http://zum.com/#!/v=2&tab=home&p=0&cm=newsbox&news=0512017052138053559

한국의 새로운 대통령이 반대당의 인사들까지 고루 등용하는 포용심을 보였다. 국민통합이나 대통령의 신뢰성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듯 하다. 낙관적이고 밝은 이미지는 국정을 수행하는 과정에 발생할 수 있는 장애들을 많이 해소시켜 줄 것이다. 지지하지 않는 것과 반대하는 것의 차이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는듯 하다.

마틴 셀리그만(Martin E. Seligman 1942 - )이란 심리학자는 피험자들을 세 집단으로 나누어 실험을 해봤다. 1집단은 귀에 거슬리는 소음이 나올때 책상위의 버튼을 눌러 소음을 중단시킬 수 있었고, 2집단은 소음을 중단 시킬 수 없었고, 3집단은 소음을 전혀 듣지 않는 실험을 했다. 그 다음 단계에서 세 집단을 모두 실험실로 데리고 가서 소음이 들려 오면 버튼을 눌러 소음을 중단 시키라고 했더니 2집단은 소음이 들려와도 버튼 조작을 하지 않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

1975년 셀리그만은 옥스포드대학의 초청강연에서 위 실험의 결과를 '학습된 무력감'이란 테마로 강연을 했는데, 영국의 임상심리학자인 티스테일(John Teasdale)은 실험결과를 좀 더 다른 측면으로 보라고 제안했다. 즉 무력감이라기 보다는 어떤 낙관성이 표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제기했다. 결국 셀리그만은 '학습된 낙관성'의 이론을 내놓게 되었다.

한 번은 민주화운동을 했던 한 인사가 자신들이 희생을 해서 민주화를 이끌어냈더니 민중들은 신군부의 인물이었던 노태우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여 아연실색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생각을 해보면  민중들이 신군부의 독재권력의 어두움 보다도 좀 다른 측면의 낙관성을 보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정치적인 학습이 되지 않은 국민에게는 '독재'라는 개념 자체가 인식이 되지 않은 때였던 것 같다. 부정적으로 해석하면 현실과의 타협이나 무기력함이라고 초기 셀리그만의 해석을 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좋았던 것이 있었다는 생각을 했었다는 민중이 많았던 탓이다. 당위 보다는 현실이었고, 과장보다도 현실이었다.

왜 한국민들이나 미국민들은 사업가출신의 대통령을 선출하고 후회할까. 이유는 간단하다. 사업가라는 이미지에서 낙관성을 포착해낸 것이다. 대게 진보인사들은 현실의 부정적인 모습을 개선할려는 태도를 취하게 되는데, 자칫하면 민중에게는 어두운 이미지를 심어줌으로써 심리적인 격리감을 안겨주기도 하는것 같다. 예를 들면 어려움을 딛고 성공한 사람들이 어려운 처지에 있던 때나 장소를 회상하면 진저리를 치는 이치와 같다. 다시 생각하기도 싫은 것들을 멀리하고 싶었던 생각 같은 것이다. 이번에 당선된 한국의 대통령이나 영부인은 이런 진보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혜롭게 타파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오래전 종교단체의 신자들이 불행하면 자신들의 세계로 오라고 꾀어서 참여했더니 행복을 구걸하기 위해서 아우성치고 있었고 분위기는 우울했으며 내 자신이 가장 낙관적임을 알고 아연실색한 적이 있었다. 이념도 마찬가지인듯 하다. 뭔가 자신들의 세계가 옳고 행복을 가져다 주는 길이라고 항변하고 때로는 강권하고 있지만 현실은 극히 부족함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고 자기 최면에 빠지는 행태를 보이기도 한다. 북한의 현실이 그렇고 한국에서 이념을 이야기 하는 보수나 진보가 모두 그렇다. 그래서 실용주의나 중도주의가 필요한듯 하다. 실용주의나 중도로 가자는 의미가 아니고 새로운 출발을 하자는 의미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2017년 5월 20일 토요일

기질(temperament)

오래전 법공부를 하다가 그만두게 된 까닭은 경제적환경이나 건강조건등 여러가지가 있었는데, 그 중에 가장 심각했던 문제는 문약한(文弱한/effeminate) 기질로 변하는 것이 두려웠다. 내 자신이 그런 기질이 있는지도 모르고 일터의 동료들이나 신앙심 가득한 친구들에게 잔소리를 많이 했던 것 같다. 그것이 정신의학 용어로 표현하면 투사(projection)라는 것인데, 자신이 그런것을 타인에게 전가시키는 증상이다.

한번은 어떤 종교단체에 갔더니 형제님들과 자매님들과의 관계에 정신이 집중되어 있었다. 삶의 모든 문제나 타인을 평가하는 기준이나 관점이 그저 그렇고 그랬다. 전력을 다해서 나를 전도할려고 했던 지인들은 매우 가정적이고 섬세했는데, 내 기질도 그래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정말 체질에 안맞았다. 아니면 내 처지를 봐서는 이렇게 살면 안된다는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얼마후 어떤 대통령과 그의 인선(人選/select a person)스타일도 맘에 안들고, 개인의 권력을 위해서 정보기관을 섬세하게 운영하는 모습이라든가 북파공작원들을 이념문제로 엮어서 당선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데 매우 분노했다.

그리고 반대로 달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것 같다. 일단 외국에 나갈 수단으로 잠수용접을 배워놓자는 생각에 전혀 할 줄 모르는 수영을 시작했는데, 몇개월 안지나서 몇 킬로미터쯤 가게 되었다. 예의 책을 좋아하는 문약한 기질의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수영을 하다가 물 속에서 잠까지 잘 수 있는 사람의 책을 읽은 것이 가장 큰 도움이 되었다. 천천히 물에 자신을 맡기라는 충고였다. 그리고 사격이나 스케이트등의 운동을 원로분들이나 코치분들의 도움을 받아서 익혀나갔는데, 원래 내가 있었던 세계랑 다른 세계에 살 수 있다는 생각에 은근히 재미있었다. 그래서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지난 시간에 대한 원망이 별로 없는듯 하다.  

어느 날 포항,울산공업단지와 진해군항등을 돌아보다가 중공업을 일으키거나 대양해군을 건설할려고 했던 과거 두 대통령의 기질에 대한 생각이 났다. 이념적인 관점이나 다른 방향의 관점등을 치워놓고 생각해보면 국민들이 아침에 일어나서 새마을 운동 노래부터 들으면서 기분을 업데이트시키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이나 서민적이고 평등함을 추구하며 국민각자가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자율적인 국민성을 유도했던 대통령들의 기질이 문약하지 않았던 모습은 매우 호감스러웠다. 한 대통령은 임기가 너무 길어서 초심을 잃었고, 한 대통령은 임기가 너무 짧아서 일을 할 시간이 부족했던 것 같다.

국가원수의 기질은 국민들의 기질과 빠르게 연관성을 맺는듯 하다. 국민은 그 분위기를 금방 따라보고 배우는 듯 하다. 혹자는 국민이 자신들의 수준에 맞는 정치지도자를 선출한다고 말하지만 국민과 대통령이 상호 영향력을 주고 받는듯 하다. 나쁘거나 좋은 것은 대통령이나 국민 어느 한 쪽이 아니다. 두 개체는 공동 운명체이고 역사를 형성해가는 공동 주체인 것이다.

2017년 5월 17일 수요일

정치와 검찰

오래전 일터의 동료들중에 고시공부를 하던 인재들이 많았다. 때로는 합격을 하기도 했다. 나는 항상 내가 사무실직장인인지 육체노동자인지 고시생인지 스스로 헷갈리고 있었으므로 한 발 멀리서서 동료들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반복의 무료함을 견디지 못하는 나와는 달리 고집과 인내심이 출중한 고시생들은 존경할만 했다. 다만 자신이 고시공부를 해야되는 이유에 대해서는 출세나 권력때문이 아니라고 자신있게 말 할 수 있는 동료들은 없었을 것이다. 그때는 우리모두가 출세와 권력이 생존을 수월하게 할 수 있는 조건이기도 했다. 


이란은 아주 오랫동안 호메이니의 종교적이고 반동적인 정치로 어두운 시간을 보냈다. 중동국가들에게는 자유주의 국가인 미국과 우호관계나 적대관계를 유지하는 문제는 개혁과 보수라는 이념적문제와 동일시되는 문제이기도 했다. 그리고 반미는 친소나 친러시아라는 냉전시대에 이념문제로 나뉘어진 양강(A both powerful country)의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외교적환경이 만들어졌다. 최근 잠시나마 이란을 개혁으로 이끌던 로하니 대통령이 보수적인 검찰총장출신인 라이시후보를 중심으로 연대하고 있는 보수세력에 의해서 연임이 위태로워지고 있다. 보수적인 종교권력과 보수적인 검찰권력이 힘을 합쳐 이란을 다시 어두운 과거로 되돌릴수 있다는 해석밖에 할 수 없는듯 하다.

미국과 친한 것이 반드시 개혁이라고는 할 수 없는듯 하다. 최근 미국도 트럼프라는 보수적인 대통령이 미국의 전통적인 정서에 어긋나는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을 볼때 권력을 얻었거나 얻을려고 하는 사람들의 배경에 대해서 좀 생각해봐야 할 필요가 있는듯 하다.


요즘 일어난 한국의 정치적변혁의 와중에도  보수쪽에는 검찰출신들이 있었다. 수평적이거나 평등한 세상을 보지 못한 검찰출신들이 보수쪽에 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검찰구성원조차도 권위적이거나 억압적인 한국의 과거 정치사의 피해자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다만 국내적 국외적 환경이 변하는 만큼 검찰도 함께 부응해야 한다는 것은 검찰의 선의적 과제이기도 하다. 검찰은 협소한 시각으로 지나치게 권력에 집착해서는 안된다. 수사권을 좀 더 현업적 현장인력인 경찰과 나누는 것도 고려해봐야 한다.

권력적인 조직이라는 것은 원래 응집력으로 네트워크화 된다. 종교권력도 그렇고 경제권력도 그렇다. 그래서 법조계는 자기식구 챙기기에 열중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지난 10여년동안 생각해보니 이명박 전 대통령에 비해서 박근혜 전 대통령은 네트워크를 잘 이용하지 못해서 비선실세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졌나 하는 생각도 든다. 정치권력이 바뀌고 정치권력에 협조하지 않으면 네트워크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문제도 있다. 꼭 그런것은 아니지만 현 정부가 검찰을 개혁시키려고 하는 이유는 여러가지로 추측할 수 있는듯 하다.

1. 기존 검찰의 조직과 행태는 대 국민 봉사라는 본질적 목적에 부합하지 않았다.  
2. 검찰은 보수적인 입장에서 개혁적인 성향의 정치세력과 대립각을 세워왔다.
3. 조직문화와 행태가 좀 더 다양하고 수평적인 시대적 요구에 부합하지 않는다.

언젠가 법조계에서 일하는 지인에게 법조계는 스스로 개혁하지 않으면 외부개혁이 시도될 것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자기주도 학습을 해보지 않은 보수조직이 스스로 개혁하는 습관을 만들기란 대단히 어렵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

검찰권력과 정치권력의 필연적인 연관성(그것이 동일시되던지 상대시되던지)을 생각하기 이전에 국가의 목적은 착한생활이고, 정치적인 사회는 단순히 동료들을 사귀기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고귀한 행동을 위해서 존재한다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명심해야 할 것 같다. 정치권력이나 검찰권력이나 경제권력, 심지어 종교권력까지 모두 그렇다.  

2017년 5월 14일 일요일

기분파가 아닌 기본파

사회초년생시절 용광로에서 막노동과 외판원등을 하다가  공무원이 되고자 하는 수험생들을 지도하는 일을 했다. 지적인( intellectual)일을 하는 내내 막노동판이 그리웠다. 이런 말을 하면 혹자는 벌써 이념적 프레임을 바탕으로 한 좌파적인 사람이라는 평가를 하곤 했다. 그래서 그런 것이 아니고 선천적으로 허약하게 태어난 신체를 튼튼하게 하고 정신력을 강화시키는 재미가 있었다. 사무실 책상에 '이등병처럼 살라'라는 구호를 써놓고서는 실천할려고 노력했던것 같다.

그 당시 빨치산이었던 이태씨의 수기인 [남부군]과 육철식씨의 수기인[빨치산]을 읽었다. 나의 부친은 인민군장교였던 친구의 강권에 의해 남파공작원이나 인민군정치장교를 양성하는 학교(강동정치학원)에 입교를 하던 중 기차역에서 탈출하여 월남을 했는데, 육철식씨는 그 학교 출신이었다.나의 부친은 팔자가 세서 한반도에서는 남파공작원이 아니면 북파공작원으로 살 운명이었던것 같다.  그 책들을 보면서 느낀점은 그 참혹한 고생을 하면서도 이념으로 선동되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사람들이나 남부군 대장 이현상과 같은 인텔리들의 카리스마에 대해서 사람들이 열광하는 모습, 말을 타고 나타난 강동정치학원 교장인 오진우의 위용이 모두 같잖았다. 작금의 현실도 그렇지만 일제식민지치하를 겪은지 얼마 안되어 이념이란 정신나간 관념에 의해서 휘둘리는 운명들이 그 안에서 '멋'을 찾고 있었다. 즉 '기분'을 내고 있었던 것이다.

운동을 하다가 기분내지 않고 기본에 충실할려고 하니 운동실력이 급속히 향상되는 것을 느꼈다. 기분에 휘둘린다는 것은 때로는 위험하다. 뭔가 상황이 내뜻대로 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좋을 수만은 없는듯 하다. 좋아서 입벌리고 웃다보면 입속으로 파리들어가는 것을 모른다.

몇 개월전 건설기계를 운전하며 가고 있었는데, 투싼 승용차 한대가 천천히 따라붙었다. 그런 상황이 예전에도 있어서 별로 신경을 안쓰고 있다가 퇴근때 다시 따라붙는 것을 보고 무엇인가 나에게 시위를 하는구나 생각하고 그 이유가 무엇일까 하고 천천히 근래에 있었던 일들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위 글을 쓴지 몇 일 후였는데, 그 몇일전 국회정문에서 민영화반대 시위를하던 KTX철도노조위원장을 만나 민영화와 신자유주의에 관한 짤막한 대화를 나누던 중에 옆에 서있던 누군가에게 살짝 웃었던 적도 있었다. 원래 시위하는 노조위원장옆에 안전을 위해 기관에 계시는 분들이 함께 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거듭 말하지만 난 우파든 좌파든 이념이 같잖았다.

나이가 먹으면 정신적 신체적능력이 퇴화됨에 따라서 열정과 인내심도 수그러들고 보수적으로 변하기 쉬운듯 하다. 뭔가 이루어놓거나 가진것 안에서 자신의 세계가 만들어진다. 실용주의를 지향하기 위해서는 열정이나 정신적인 탄력성이 필요한듯 하다. 어떻게보면 극우나 극좌는 기본을 잃어버리고 기분에 휘둘리게 된 형국이다. 보수가 부정부패와 친해지고 진보가 입진보(말만 살아있는 진보)가 되는 이유는 기본을 잃어버린 까닭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요즘들어 미국의 트럼프대통령이 기분을 잘 내는데다가 내 자신도 점점 열정을 잃어버리는 것 같아서 기본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았다.  

2017년 5월 9일 화요일

강화이론(Reinforcement theory)과 습관 / 한국의 대선결과

대충 한국의 대선결과가 드러났다. 문후보가 당선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신기한 것은 과거의 적폐에 대해서 청산의지가 없는 후보가 뜻밖의 선방을 했다. 한국인들이 아직 정치문제에 대해서는 정의감보다는 이념감정이나 지역감정등에 휘둘리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듯 하다.


언젠가 쉬운길로 갈려는 대중이 허황된 공약에 설득된다는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오랫동안 관습처럼 행해졌던 부패의 습관이나 부정에 대한 불감증은 습관으로서 그리고 청산에 대한 강력한 의지가 부족함으로서 대중은 부정부패를 있어서는 안될 것이 아닌 현실적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듯 하다.

심리학에서는 강화이론이라는 것이 있다. 선악의 판단기준은 경험으로부터 형성된다는 이론이다. 예를들면 도둑질을 했는데도 발각되지 않고 끝나거나, 도둑질의 성공이 같은 패거리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는 경험이 반복된 아이는 도덕적으로 둔감해져서 바늘도둑이 소도둑이 된다는 이론이다.

어느 날 종교적인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인 문제점을 발견한 적이 있다. 무엇인가 부도덕한 일을 저지르고 나서는 양심에 시달리는 시간이 매우 짧다는 사실이었다. 인간 본연의 양심이 주는 고통을 '회개'라는 행위로 빠르게 해소시켜나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부도덕이 오랫동안 양심을 괴롭혀 이런 나쁜 행위를 다시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결심을 확고하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비숫한 행위를 또 반복하였다. 한국에서 이념이나 종교자체가 적폐가 될 수 있다는 이유는 그런 것이다. 부정한 일을 빠르게 합리화시켜준다. 반성할 시간을 주지 않고 오히려 정당화시켜주기도 한다. 특히 정치적범죄는 그 추상성으로 인해서 무궁무진한 양심적 회피의 퇴로를 만들어낼 수 있다.

우리편이 잘못한건 알지만 저쪽이 더 나쁜 좌익이나 우익이기때문에 형평성의 원칙으로 계산을 해보니 우리의 부정부패는 조금 더 사소한 문제였다고 합리화시켜나가는 것이다. 어떤 심리학책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요즘 아이들 중에는 '경찰에 붙잡히는 것은 별거 아니다.' '퇴학 당해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일반적인 가치관이 통용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아무리 도둑질에 엄벌을 가하더라도 벌이 벌로서의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 채, 조금도 줄어들지 않게 된다.

경우에 따라서 아이들에 있어서 벌이 무거운 만큼 발각되지 않고 훔칠 수 있는지 어떤지의 스릴을 높이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도둑질이라는 범죄행위를 더욱 더 부채질(강화)하고 마는 얄궂은 결과를 낳게 될지도 모른다.

도둑질을 줄이고자 한다면, 도둑질에 대해 벌을 엄중히 하기 보다는 도둑질 이외의 행동이 강화될 수 있도록 상점 간의 장치 혹은 협조를 이루어 나가는 편이 효과적일 것이다.

- Chris Ravan 과 Jeudie Williams 공저 [Joy of Psychology]중에서 -

그래서 사회적 관심사가 좀 더 미래지향적이고 발전적이며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앙드레지드(Andre Paul Guillaume Gide)와 인연의 흐름

앙드레지드(Andre Paul Guillaume Gide)와 시몬느베이유(Simone Weil)의 나라인 프랑스에서는 바람대로 젊은 실용주의자인 마크롱이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한국의 대선결과를 한 고비를 넘기는 심정으로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어디서든지 그런 일들이 있지만, 대중이 잘 모르는 일의 현장에서 설득하고, 설득당하고, 치고받고 했던 일들이 어떤 결과를 낳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인연으로 생성되는 시간들이다. 최순실 사건이후 내가 줄다리기 했던 상대의 크기가 이것밖에 안되었나 하는 생각에 좀 허탈한 기분이 들어서 내내 실없이 웃으면서 지냈다.

중학교 1학년때 어느 군소재지로 전학을 왔는데, 주변의 모든 것이 안좋았으므로 위안을 받기위해 서점을 찾았다. 그 날 프랑스문호 앙드레지드의 [좁은 문]이라는 책을 골랐고, 막 수입상영되던 영화 [갈매기 조나산 /Jonathan Livingston Seagull]의 대본을 구입했다. 그리고 영화 [슈퍼맨]의 대본을 꺼내서 읽다가 하필 서점을 방문했던 국어선생님에게 들켜서 책 두권에 대해서는 칭찬받고 슈퍼맨대본에 대해서는 핀잔을 받았다. 뜻밖에 학교공부를 포기한 댓가로 책을 읽을만한 여유가 있었다. 서점을 나오니 길건너편에서 테테라는 별명을 가진 친구가 신문배달하고 남은 신문을 버스터미널에서 팔고 있었는데, 어려운 처지의 여러형태와 부모님의 사랑을 아주 잠시 생각해 보았다.

제목은 [좁은문]이었는데, 그 책속에 [전원교향악]이 함께 끼어들어 있었다. 사촌지간인 알리사와 제롬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임을 알리사가 좁은문이라는 은유를 사용해서 설명하는 내용이었던 것 같은데, 천국으로 가는 길은 '좁은문'을 지나야 한다는 알리사의 설명이 있었다. 사실 [전원교향악]이 인상에 남았다. 장님인 제르튀르드가 젊은 여주인공이고 제르튀르드를 돌봐주던 목사(이름은 기억 안남)가 등장을 하는데, 제르튀르드는 수술로 눈을 뜨게 되고, 목사는 제르튀르드를 사랑하게 되고, 제르튀르드는 자신을 정말 순수하게 사랑했던 사람은 목사가 아니라 목사의 아들이였음을 깨닫고 자살한다는 내용이었다.

[갈매기조나산]은 주인공 갈매기인 조나산이 스승으로부터 비행법을 배워가는 장면을 명상적으로 구성했는데, 역시 책을 좋아하던 누이가 영화를 보았는데, 영상미가 너무 좋았다고 한다. 나중에 저자인 리처드바크(Richard Bach)의 책을 많이 읽었다. 리처드바크는 현실로도 푼돈을 받고 아이들에게 비행기를 태워주거나 곡예를 보여주는 떠돌이 비행사로서 생활을 했는데, 리처드바크의 낭만적이고 명상적이면서 방랑적인 모습은 '평범한 생활인'으로서 안주하게 하지 못하는 생각을 만드는 시초가 되었던것 같다. 

하필이면 예의 국어선생님눈에 들어서 학교도서관일을 하게 되었다. 방과후에 책을 대출해주는 일을 했는데, 시골학교치고는 정말 근사한 도서관임에도 불구하고 책을 대출해주고 대출해가는 사람은 '나' 한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니까 민법용어로 표현하면 '자기계약'을 한 것이다. 덕분에 이것 저것 많이 읽었는데, 똑똑하게 생긴 내 사수가 1년 선배였다. 이렇게 맺어진 인연때문에 선배를 따라 잠시 개신교를 다녔는데, 앙드레지드와 도서관과 개신교가 내 의식속에서 얽혀가면서 친근하다기보다 '잘 알 수 있는 세계'가 되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인연이란 참으로 신기하다. 이념문제로 고민하던 국가에서 이념문제가 인연이 되어 힘들게 살아가던 가정에서 현실적인 꿈을 꿀 수 없어서 공부대신 책만 읽다가 종교와 의식적으로 인연을 맺게되고, 먼 훗날 이념과 그 종교를 이용해서 '이상한 짓'을 하던 패거리들과 치고 받게 되고, 그렇게 치고 받던 내 자신의 심정은 눈이 멀었을때 무척 아름다울거라고 상상했던 세상이 막상 눈을 뜨고보니 실망스러운 세상이었다는 제르튀르드의 자괴감 이상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념문제해결을 위한 '실용주의 정치'를 이야기하는 내 자신, 그리고 앙드레지드의 나라에서 연상의 사촌인 알리사와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빠진 제롬과는 달리 이룰 수 없어 보이는 사랑을 이룬  실용주의 대선주자 마크롱이 대통령이 되고, 다음날 한국에서도 실용주의 정치를 위한 한 걸음이 시작되는 일들이 내 주변에서 이렇게 인연이 맺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흥미롭고 즐거운 경험인것 같다.  

2017년 5월 7일 일요일

허영의 시장(Vanity Fair)과 한국대통령

17세기 후반, 존 번연이란 시골의 대장장이가 아내가 시집올때 가지고 온 종교서 두 권을 읽고 감동을 받아서 열렬한 신앙심이 샘솟아 신앙을 전도하였다. 얼마 후 왕정복고때 왕당파의 미움을 사서 감옥에 투옥되었다. 감옥안에서 [천로역정/天路歷程/Pilgrim progress]이란 책을 쓰는데, 그 책속에 '허영의 시장'이 나온다. 그 시장은 모든 종류의 허영을 판다. 예를들면 집,토지,지위,명예,벼슬,왕국,색욕,환락,쾌락,창부,매파,아내,남편,아이,식모,생명,피,육체,영혼,금,은,보석등을 판다.

종교적인 진리이자 영적인 진리를 생각하는 종교의 입장에서는 모든 현실적인 것들이 허영으로 비추어지는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가 그 허영을 쫒기 위한 수단이 될 수도 있는 일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관점을 그 안에 묶어두면 그 안에서 또 별 일이 다 일어나는 법이다.   

가끔 돈이 안되는 일에 정신과 시간과 비용을 투자하는 일이 많은데, 요즘들어 부쩍 가까운 지인들이 한마디씩 나를 탓한다. 공통적으로 '소유'의 욕망이 강한 사람들이라는 특징이 있다. 그러면서도 많이 '소유'하고 있지 못한 특징도 함께 가지고 있다. 사연많은 과거에 얽힌 일들의 매듭을 풀기위해 나름 애쓰는 중에 '하고자 하는 일'은 할 수 있어도 '갖고자 하는 일'은 뜻대로 안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본능적으로 갖고자 하는 마음에 휩쓸리는 자신을 발견하곤 하는데, 18세기 한국의 대표적 실학자였던 정약용 선생이 인정한 인간이란 혈기론적인 존재(血氣論的 存在/ A vigorous existence)라는 한계는 부정할 수 없는듯 하다.   

돈이 사람을 따라야지 사람이 돈을 따르면 안된다는 말이 있다. 욕망이 강하면 하는 일에 집중을 할 수가 없다.. 부글거리는 권력욕구나 재물욕구때문에 사회를 퇴보시키는 인재들이 많은데, 이념이나 종교가 그런 부작용에 조력하게 되어 하고자 하는 일의 목적을 잊어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한때 종교, 특히 개신교를 무척 혐오했던 적이 있다. 그렇다고 개신교를 신앙으로 삼은 이들에 대한 생각은 별개의 문제다. 개신교신앙인들중에 마음이 열려있고 그래서 존경하고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한 편으로는 모든 사고가 종교적으로 경화(硬化/ solidify)되어버린 지인들이 공감능력도 없고, 여러가지 지식도 없는 그래서 생각도 없는 말들을 왈왈 거리고 가면 그렇게 혐오스러울 수가 없었다. 한때 독실한 크리스천인척 하면서 정보기관등을 동원하여 온갖 적폐질을 하고, 아둔하게 정부를 운영했던 대통령과 그를 따르는, 아니면 추대한 무리들이 설상가상으로 이념적으로도 경화된 모습을 보면서 좀 끔찍했다. 북한과 같은 적폐적 현실이 기어이 한국에서도 일어나는구나 싶었다. 이쯤에 대통령 임기가 그나마 5년이란 사실은 불행 중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비숫한 일이 5년 더 있었다.

고대 로마의 갤리선에서 노예들이 열심히 노를 젓고 있는데, 감독이 노예들에게 말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을 알려주겠다. 먼저 좋은 소식은 오늘 여러분에게 맛있는 점심을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쁜 소식은  선장님이 오후에 수상스키를 타시겠단다."

일단은 공약에 속은 국민들이 제대로 된 생각을 하지 못한 까닭이다. 내 자신도 매번 겪는 일이지만 쉽게 갈려다가, 말하자면 맛있는 점심뒤에 선장님의 수상스키타임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깜빡 깜빡 잊는다. 보수의 공약뿐만 아니라 진보의 공약도 마찬가지다. 지나치게 장미빛이거나 지나치게 극단적이면 다시 한 번 생각해볼일이 아닌가 한다.

이념이나 종교, 그리고 정치적 자세가 지나치게 극단적인 국민들의 속성은 정신적인 탄력성이나 인내심을 잊어버린 상태다. 한 편으로는 욕망의 과격한 발호(prevalence)로 생각된다. 한국뿐만 아니라 초유의 퇴보정부인 북한, 푸틴을 장기집권하게 만든 러시아, 에르도안을 독재권력으로 만든 터키,프랑스의 극우대선주자인 르펜을 함께 생각하는 이유는 처한 현실과 국민의 속성중 공통점이 보이기 때문이다.

중우정치(衆遇政治 / mobocracy)는 고대 그리스부터 민주주의 국가의 고민이지만 좋은 정치인은 최대한 중우정치의 욕망을 자제해야 한다. 백성이 우매하면 계몽을 해야지 욕망을 이루기 위해 대중의 속성을 이용한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처럼 뽑고 나니 후회스러운 상황이 된다면 대통령도 국민도 냉철한 마음으로 자신들을 돌아 볼 일이다.   

2017년 5월 4일 목요일

김정은을 deal with 하다


타임지표지에 한국의 대선주자 기호1번이 보였다. 한국내에서는 이념적 프레임으로 오인받을 수 있겠지만 통일문제나 남북협력문제에 대해서는 지난 정부보다 더욱 발전된 길을 갈 것이라는 추측을 해볼만하다. 상대성의 원칙을 생각해볼때, 북한에 대해서  무용한 적대적감정을 덜 표현할 것이라는 최소한의 기대가 있는만큼 북한을 협상테이블로 불러올 수 있는 상황이 연출 될 것이라는 추측이 된다.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든다. 누군가 나를 어떻게 다루고 있을까. 여러가지 많은 글로 이념이나 종교문제를 이슈화시키는 나의 글을 통제하거나 신변을 통제할려고 해왔던, 그리고 해오고 있는 집단이나 기관은 나를 실제로 통제하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런 생각은 그들 생각이고, 내가 알고 있으면 통제받는 것이 아닌데, 기분 나쁜것은 사실이다. 어차피 내 생각의 프레임은 평화와 협력이란 관념이 깊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쓸모없이 기싸움꾼들이 걸어오는 시비를 대응하는 일이 귀찮아서 모른척 하고 사는 것이지 마음의 앙금은 가라않지 않는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거냐 하면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이 유일한 '한 방'인 핵무기에 집중하는 이유는 '동등한' 입장을 추구할려는 이유인 것은 확실하다. 전체적으로 부족한 국가가 독립된 지위를 유지해나가기 위해서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벌어질 치킨게임의 한 방이 필요한데, 김정은 위원장은 핵무기를 이용하여 동등한 입장을 추구할려고 노력하는 중인 것이다. 아마 한국의 문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김정은 위원장을' 잘 다룰 수 있다'고  한 타임지 기사는 북한에 대해서 좀 더 유연한 태도를 취하여 북한의 상대적인 적대감을 축소시킬 것이라는 의도로 표현된 기사말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사실 마음을 잃지 않아 끌려다니지 않는 쪽이 상대방을 다룰 것이지만 가능한한 동등한 입장으로 협상테이블로 '초대해야 '바람직한 미래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좀 더 냉철하고 객관적인 지도자들의 마음 가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전 정부에서 그랫듯이 쓸데없는 이념과 같은 정신적 프레임으로 기싸움을 할려고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기본바탕이 되어야 할 것 같다.  서로 다룰려고(deal with)하지 말고 협력할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뜬금없이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S.A Kierkeggard 1813 - 1855)가 그의 저서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절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한 말이 생각난다.

"자기가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것이야말로 절망에 다름아니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국가가 국가로 여겨지지 않는 것이야말로 절망에 다름아니다. 남북한은 쓸데없는 기싸움을 하지말고 협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