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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9월 10일 화요일

동조와 복종 / 솔로몬 애쉬

가끔은 내 성격에서 경이로운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어느 자리에 있어도 그 상황과 동조를 잘하는 성향이 있다.아마 어린시절부터 안정된 가정환경을 모르고 자라서 그렇기도 하고, 성장을 해서는 개인적인 상황으로 어쩔수 없이 이일 저일을 산만하게 손을댄 습관때문인지도 모른다.

청년시절, 신자확보에 급급했던 어느 종교단체에 몇개월 앉아 있었다. 딱히 편한 시절도 아니었기에 신앙이 가져다 주는 마음의 평안함을 비롯한 여러가지 부가적인 수입을 탐하는 계산이 있었던것 같다. 그런데 몇개월동안 지극히 일체감을 가지고 종교인 이상의 신앙인으로 탈바꿈을 하는것 같았는데, 도무지 해당 종교인분의 설교 내용에는 공감이 안갔다. 초조해진 종교인분은 '순종'하라고 소리높혀 외쳤지만 순종이 안되는 상황을 낸들 어찌하냐고  함께 소리높혀 외치고나서 그만 두었다. 다음에 또 방문하니 맞지 않으면 오지 말지 왜 오냐고 또 소리높혀 외쳤다. 비용편익계산을 해보고는 시간이 많이 아까웠다.  

다른 종교, 다른 종교인과의 관계에서도 '순종'을 권유받는 일이 있었는데, 다소 어려운 환경에서 이성이 강해진탓인지 신앙과는 별개로 종교인들에게 찰떡같이 순종하는 양이 되주지 못한것에 대해서 다소 죄송스럽기도 한것 같다. 문제는 내가 아니고 많은 신자들의 공허한 눈빛인것 같았다. 평안하고 행복한 삶을 구하는 사람들,그래서 동조하고 복종하는 삶을 살면서도 구하고자 하는 삶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며 많이 안타까웠던것 같다. 한 편으로는 정신적인 권력관계를 엿본 까닭도 있는것 같다. 

이념이나 종교같은 보이지 않는 관념의  허구성에 깊이 반발하는 이유는 여러가지 과거의 경험들이 바탕이 된것 같은데, 인과의 법칙은 콩심은데 콩난다는 말처럼 진리인듯 하다.

미국의 사회심리학자인 솔로몬 애쉬(1907~1996)는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반응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타인을 따르려는 성향이 있는데,이것을 동조라고 말한다. 누군가의 의견이나 행동, 심지어는 표정, 자세,목소리까지도 따라할려는 성향이 생기는데 이를 카멜레온 효과라고 부르기도 한다. 때로는 이념이나 종교의 내부에서 유난히 결집을 요구하기도 하는데, 동조현상은 집단의 결집이 강할수록 심해지며 반발자가 생기면 급속히 와해되는 성향이 있다고 한다.

애쉬는 동조의 이유로 두 가지를 들고 있는데, 첫째는  결정을 내리기 힘든 상황에서 타인의 결정이 쉽게 참고 된다는 점이고, 두번째는 다수와 의견이 다를경우 집단으로부터 배척됨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편 사회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1933~1984)은 복종에 관한 실험을 했는데, 사람들이 자신들의 소신과 사회규범에 어긋날지라도 권위있는 인물의 명령에 복종하는 이유는 자신의 책임도 없어질뿐더러 자신의 행위에대한 결과보다는 복종관계를 더 중시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만약에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는 권위자의 합법성이나 동기에 허점이 보이거나 누군가 복종하지 않는것을 보면 복종행위는 훨씬 줄어든다고 한다.

솔로몬 애쉬와 스탠리 밀그램의 연구결과를 보면 일본의 군국주의와 독일의 홀로코스트처럼 왜 사람들이 집단으로 엄청난 비윤리적이고 비 인간적인 행위를 하게 되는지 이해를 할수 있을것 같다.  

실제로 이념과 종교는 동조와 복종을 본질로 하는것 같다. 실제로 동조와 복종을 이루고 난 다음에 목표가 변질될 경우 많은 폐해를 발생할 수 있는데,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일들이 이념과 종교같은 선량한 목적으로 탄생해서 동조와 복종을 이끌어낸 다음에 변질되어간 관념들의 부작용으로 발생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고 하겠다.

주체적이고 스스로의 자아를 확립시킬 역사적 기회가 부족했거나 잘못된 교육으로 정신이 재산이나 명예,권력같은 저열한 가치에 지배를 받게된다면 동조와 복종현상이 일어나기 쉬운 바탕이 되기도 하는것같다. 정치인은 이념을 이용하고, 종교인은 신앙을 이용하여 동조와 복종을 이끌어내기도 하고  때로는 주체적이거나 반대하는 소수를 억압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거나 사회붕괴나 갈등의 수단으로 사용되는것 같다.   










2026년 7월 24일 금요일

생각하는 동조

인간은 분위기에 쉽게 물든다. 그래서 대중심리나 군중심리에 휘둘린다. 동조심은 원래 인간에게 있는 것인데, 이념이나 종교는 동조심을 강하게 만든다. 그래서 전쟁이나 내란 또는 폭동이 힘을 얻는다. 개인이나 사회의 끊임없이 생각하는 노력만이 동조심을 제어할 수 있다.

 

사회 초년생 시절에 가장 놀라웠던 점 중의 하나는 나이 먹은 선배들은 대부분 권위주의 정부 시절의 대통령들을 모방하고 있었다. 물론 권위와 지위를 탐하는 마음만을 모방하고 있었다. 모방은 동조의 표현이다. 청년기에 어느 교회를 갔는데, 논리적으로 신앙을 들이받으니까 성직자의 움직임이 커지고 목소리가 커졌다. 확신으로 나의 믿음을 끌어내기 위해서 쓴 방법임을 알고 있었는데, 나는 전혀 동조되지 않아서 애를 먹었다. 나중에 종교와 이념이 동조를 이용하는 성향이 비숫하여 쉽게 결합됨을 느꼈고, 실제로 그런 사건이 자주 발생했다. 좋지 않은 일을 일으켰음에 ‘사건’이라고 표현했다.

 

종교적 성향이 강한 중동의 국가들이나 중국이나 북한 그리고 민주화되기 이전의 한국 같은 이념적 성향이 강한 국가는 동조심을 통치 기술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런 국가는 사회윤리가 발전을 하지 못한다. 이념이나 종교가 사회윤리를 대신한다. 사회윤리가 발전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 사회 자체의 발전이 정체된다는 것이다. 사회가 발전을 하기 위해서는 개인과 사회의 끊임없는 자각이 필요하다. 물론 그런 자각을 위해서는 제대로 된 교육이 필요하다.

 

마오쩌둥의 이념 국가 건설과 문화 대혁명으로 중국의 사회윤리발전이 멈추고 세계 각지에서 중국인이 비난 받는다고 하니까 인공지능이 근거를 대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현상을 본 사람이 있으면 인공지능에게 신고 바란다. 어디 중국뿐인가. 매일 종교적 갈등으로 바람잘 날 없는 중동국가들도 그렇고 극우주의자들이 나서는 그 밖의 많은 나라들이 그렇다.


마찰 없는 확신: 동조, 교육, 그리고 이념의 사회윤리 대체에 관하여

Convictions Without Friction: Conformity, Education, and the Displacement of Social Ethics by Ideology


이형춘 · 독립 칼럼니스트  /  Lee Hyeong-chun · Independent Columnist

국문초록


동조는 병리가 아니다. 하드웨어다. 태어난 순간부터 작동하는 신경학적 기제이며, 교육과 이념은 그저 이 하드웨어가 무엇에 동조할지를 정하는 소프트웨어일 뿐이다. 본고는 여기서 출발하여, 검증면제형 확신 — 검증되지 않은 것을 이미 검증된 것으로 착각하는 확신 — 을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신앙의 도약과 구분한다. 후자는 불확실성을 자각한 채 떠안는 선택이지만, 전자는 불확실성 자체를 지워버린다. 이 구분을 기준으로 본고는 개인의 확신이 극단으로 치닫는가 여부를 가르는 진짜 변수가 실행의 유무가 아니라 마찰과 피드백의 유무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 틀을 문화대혁명이라는 구체적 사례에 적용하여, 마찰 경험이 없는 세대가 마찰 경험이 축적된 세대와 그 세대가 지녔던 전통적 사회윤리 체계를 이념으로 대체한 과정을 분석한다. 나아가 본고는 한국·중국·북한을 이념의 사회윤리 대체가 지속된 기간과 대안적 마찰 장치의 파괴 정도라는 두 축 위에 배치하여 비교한다. 마지막으로 본고는 칼 슈미트의 결단주의와 루돌프 스멘트의 통합론을 대비시키되, 스멘트의 통합 개념에 경합가능성이라는 조건을 덧붙임으로써 통합과 전체주의적 의례를 구분할 기준을 제시하고, 개방적이고 경합 가능한 통합이 가능한 체제로서 민주주의의 위치를 논한다.


주제어

동조, 검증면제형 확신, 마찰과 피드백, 신앙의 도약, 문화대혁명, 통합론, 결단주의, 경합가능성


1. 서론: 문제 제기


이념이 사회윤리를 대체하는 현상은 특정 국가나 특정 체제에 국한된 병리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 인지의 보편적 취약성이 특정한 제도적 조건과 결합할 때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구조적 결과다. 본고는 이 취약성의 출발점을 동조(同調) 현상에서 찾되, 이를 도덕적 결함이 아니라 인간 하드웨어의 일부로 전제한다. 문제는 동조 자체가 아니라, 그 동조가 무엇을 향하도록 방치되는가에 있다.


2. 동조라는 하드웨어와 교육이라는 소프트웨어


신생아 모방 연구는 이 논지의 출발점을 제공한다. 멜초프와 무어(Meltzoff & Moore, 1977)는 생후 12일에서 21일 사이의 신생아가 성인의 표정과 손동작을 모방한다는 것을 보였다. 이 모방은 조건화나 선천적 반사로 설명되지 않으며, 학습 이전에 이미 작동하는 교차양식적 대응 능력을 시사한다. 즉 동조는 후천적으로 학습되는 태도가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장착된 신경학적 기제다. 애쉬(Asch)의 집단 동조 실험과 밀그램(Milgram)의 복종 실험이 학력이나 지적 수준과 무관하게 유사한 동조율을 보였다는 사실은 이 하드웨어가 교육 수준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이로부터 도출되는 결론은 명확하다. 교육과 이념은 동조라는 하드웨어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그것들은 이미 존재하는 하드웨어가 무엇에 동조할지를 결정하는 소프트웨어일 뿐이다. 한국의 경쟁 중심 교육이 저지르는 잘못은 없던 동조 성향을 새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그 성향이 향할 대상을 시험 정답과 위계적 평가 체계로 고정시키고, 그 성향을 교정할 마찰 장치를 설계 단계에서 제거한 것이다.


3. 검증면제형 확신과 신앙의 도약


여기서 정교한 구분이 필요하다. 키에르케고르의 신앙의 도약과, 본고가 '검증면제형 확신'이라 부르는 것은 표면적으로 유사해 보이지만 근본적으로 다르다. 키에르케고르에게 신앙은 이성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을 그 불가능성을 자각한 채로 선택하는 행위였다. 그는 덴마크 국교회로 대표되는 습관화되고 제도화된 신앙 — 태어난 국가가 기독교 국가이므로 자신도 이미 기독교인이라는 식의 순응적 신앙 — 을 정면으로 공격했다. 그가 남긴 '군중은 비진리다'라는 명제는 바로 이 지점을 겨냥한다. 그에게 군중이란 개별자가 각자 신 앞에 단독으로 서는 책임을 회피하고 익명의 다수 뒤에 숨는 상태였다.


반면 검증면제형 확신은 불확실성을 짊어지는 대신 지워버린다. 그것은 '이것은 증명되지 않았지만 나는 선택한다'가 아니라 '이것은 이미 증명되었다'는 착각에서 출발한다. 이 구분의 관건은 능동성의 주관적 느낌이 아니다. 검증면제형 확신에 사로잡힌 사람도 스스로는 자신이 능동적으로 깨달아 선택했다고 느끼며, 오히려 이 주관적 확신의 강도는 진짜 신앙의 도약보다 더 강하게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진짜 구분선은 그 확신이 자신의 불확실성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 불확실성을 이미 해소된 것으로 위장하고 있는가에 있다.


나아가 시간축을 고려하면 이 두 유형은 서로 전환될 수 있다. 동조나 선동에 의해 수동적으로 형성된 확신도, 시간이 흐르며 정체성과 결합하고 인지부조화를 줄이려는 압력을 받으면서 스스로 선택한 것처럼 재구성된다. 즉 동조는 입구에서는 수동적이지만, 퇴로가 사라지면 능동적 확신으로 위장한다. 한국의 입시교육은 학생에게 불확실성을 견디는 훈련이 아니라, 정답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전제 위에서 그 정답을 빠르게 찾아내는 훈련을 시킨다. 이는 신앙의 도약과 정확히 반대되는 인식 습관이며, 검증면제형 확신과는 완벽하게 동형(同型)이다.


4. 마찰과 피드백: 경로의존적 과잉교정의 확장


그렇다면 어떤 확신은 온건함에 머무르고 어떤 확신은 극단으로 치닫는가. 이 차이를 만드는 변수는 독서의 유무나 실행의 유무가 아니다. 순수하게 서재에서 사유하며 평생 실천적 행동을 하지 않은 사상가들 중에도 회의주의와 관용에 도달한 이들이 있고, 반대로 현장 경험이 풍부한 행동가들 중에서도 극단으로 치달은 이들이 있다. 진짜 변수는 마찰과 피드백 — 자신의 확신이 현실과 부딪혀 오류를 통보받는 경험 — 의 유무다.


이는 자본주의의 경기순환에 관한 경로의존적 과잉교정 이론과 구조적으로 동일하다. 시장은 가격이라는 피드백을 통해 왜곡을 스스로 교정하지만, 그 피드백이 인위적으로 억눌리면 왜곡은 영구화되거나 트로프에 고착된다. 사상과 이념도 마찬가지다. 현실과의 마찰은 확신에 '이것은 틀렸다'는 신호를 지속적으로 보내는 교정 장치이며, 순수한 이념적 몰입은 이 장치가 없는 상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 마찰을 피하려는 성향 — 일종의 인지적 게으름 — 을 타고나지만, 이는 도덕적 태만이라기보다 하드웨어의 일부다. 따라서 좋은 사회 제도의 과제는 이 타고난 게으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겨내도록 강제하는 마찰 장치를 설계에 심어 넣는 것이다. 한국 교육의 결정적 결함은 게으름을 만들어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게으름을 극복하도록 강제할 장치를 설계에서 빼버린 데 있다.


5. 사례 연구: 문화대혁명과 마찰 장치의 파괴


문화대혁명(1966-1976)은 이 마찰 파괴 메커니즘을 역사적으로 실행한 사건이다. 반우파 투쟁 이후 강화된 지식인 숙청, 전통 교육기관의 폐쇄, 그리고 홍위병을 동원한 원로·교사·전문가에 대한 공개 비판은 사회 전체의 피드백 메커니즘 — 경험 많은 연장자, 축적된 전문지식, 유가적 전통윤리 체계 — 을 국가가 조직적으로 파괴한 사례였다. 마오쩌둥 자신이 넓게 읽지 않은 편향된 소프트웨어 위에서 작동한 하드웨어였다는 점, 그리고 그가 정확히 마찰 경험이 가장 적은 집단(청년 홍위병)을 동원하여 마찰 경험이 가장 많이 축적된 집단(원로, 지식인)을 숙청했다는 점은 역설적이다. 마찰을 겪어보지 못한 세대가 어리석은 선동에 동원되어, 사회가 오랜 시간에 걸쳐 구축한 마찰 장치 자체를 해체한 것이다.


여기서 본고는 신중해야 할 지점을 명확히 한다. 특정 국민 전체를 성격적으로 규정하는 진술 — 예컨대 오늘날의 특정 국민성을 수십 년 전의 정치적 사건에 직접 인과적으로 귀속시키는 진술 — 은 검증 불가능하며, 본고가 비판 대상으로 삼는 검증면제형 확신과 형식상 동일한 오류를 범한다. 따라서 본고가 다루는 것은 국민성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국가가 사회의 마찰 장치를 인위적으로 파괴한 제도적 메커니즘 그 자체다.


6. 비교 구조 분석: 한국, 중국, 북한


이 틀을 세 사회에 적용하면 하나의 공통된 축과 그 위의 위치 차이가 드러난다. 세 사회 모두 이념전쟁을 통해 이념이 사회윤리를 대체하고 이념이 교육 기능을 겸하는 과정을 겪었다. 그러나 그 정도와 지속성은 서로 다르다. 이 차이를 만드는 독립변수는 결과론적으로 서술되는 '민주화의 속도'가 아니라, 다음 두 요인의 곱이다: 이념 독점이 지속된 기간, 그리고 대안적 마찰 장치 — 가족·종교·전통윤리·시민사회 — 가 파괴된 정도.


한국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사회윤리와 개인적 자각이 발전할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했고 권위주의 체제 아래 이념 독점을 겪었지만, 그 지속 기간은 상대적으로 짧았고(약 1961년-1987년), 급속히 성장한 종교(국가 이념과 구별되는 별도의 윤리 체계 제공), 문화대혁명 수준으로 파괴되지 않은 유교적 가족·문중 구조, 그리고 탄압받으면서도 완전히 절멸되지는 않은 노동·학생운동이라는 대안적 마찰 장치가 살아남았다. 중국은 문화대혁명과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사회윤리와 개인적 자각의 형성 기반 자체가 파괴되었고, 이념 독점은 1949년 이래 70년 넘게 단절 없이 지속되고 있다. 북한은 폐쇄적 체제 안에서 이 두 결핍 — 사회윤리 발전의 시간 부재와 이념에 의한 전통윤리 대체 — 이 모두 극한까지 포개져 있으며, 이념 독점은 1948년 이래 단 한 번도 끊긴 적이 없다.


이 비교는 어느 국민이 도덕적으로 더 우월한가를 판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런 판정은 본고 스스로 세운 원칙 — 특정 진영을 편들지 않고 동일한 잣대로 분석한다는 원칙 — 과 충돌한다. 이 비교가 보여주는 것은 오직 이것이다. 이념 독점이 지속된 기간이 길고 대안적 마찰 장치의 파괴가 철저할수록, 사회가 검증면제형 확신으로부터 스스로를 교정할 자원은 그만큼 고갈된다.


7. 대안: 결단주의를 넘어, 경합가능성을 갖춘 통합론으로


이 진단으로부터 어떤 처방이 도출되는가. 여기서 독일 국법학의 두 대립하는 이론이 유용한 참조점이 된다. 칼 슈미트는 1928년 저작 『헌법학(Verfassungslehre)』에서 국가와 헌법을 주권자의 일회적 결단으로 파악하는 결단주의를 제시했다. 같은 해 루돌프 스멘트는 『헌법과 헌법률(Verfassung und Verfassungsrecht)』에서 이에 정면으로 맞서는 통합론을 내놓았다. 스멘트에게 국가는 한 번의 결단으로 확정되는 실체가 아니라, 구성원과 지도부가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통해 매번 다시 만들어가는 통합 과정이었다.


그러나 이 통합 개념을 그대로 처방으로 쓰기에는 위험이 있다. 스멘트가 나치 집권기에도 교수직을 유지했다는 사실이 보여주듯, '국가는 결단이 아니라 통합의 과정'이라는 명제 자체는 그 통합이 무엇을 향해 일어나는가에 대해 중립적이다. 북한 역시 선거, 대규모 집단체조, 반복적 의례를 통해 표면적으로는 기능적 통합의 형식을 완비하고 있다. 따라서 스멘트의 통합 개념은 하나의 조건이 추가되지 않는 한 전체주의적 의례를 걸러내지 못한다. 그 조건은 경합가능성(contestability) — 지도자와 구성원 사이의 피드백이 실제로 지도자 쪽의 결정을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는가 — 이다. 결과가 이미 정해진 채 반복되는 참여는 통합이 아니라 검증면제형 확신의 집단적 의례에 불과하다.


이 조건을 세우면 한국과 같은 민주주의 체제의 위치가 분명해진다. 정기적 선거를 통한 정권 교체 가능성, 언론과 사법의 상대적 독립성, 그리고 시민사회의 이의제기가 실제로 정책과 지도부를 바꿀 수 있는 제도적 통로는 한국을 경합 가능한 개방적 통합이 구조적으로 가능한 체제로 만든다. 이것이 결단주의도, 경합가능성이 결여된 통합의 의례도 아닌 제3의 길이다.


8. 결론


건강한 국가는 결단된 실체가 아니라, 지도자와 국민이 열린 결과를 두고 끊임없이 마찰하며 다시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동조는 이 과정에서 제거해야 할 결함이 아니라 다뤄야 할 상수다. 한국 교육이 저지르는 근본적 오류는 이 마찰을 견디고 발생시키는 능력을 기르는 대신, 정답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착각과 그에 대한 안전한 동조를 길러냄으로써 통합의 과정 자체를 왜곡시킨다는 데 있다. 문화대혁명이 보여준 것은 마찰 장치가 파괴된 사회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이며, 한국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마찰 장치가 불완전하게나마 살아남았을 때 그 사회가 무엇을 되찾을 수 있는가이다. 그 되찾음은 완결된 상태가 아니라 항상 다시 시작해야 하는 노력이며, 항상 깨어 있어야 하는 자각이다.


참고문헌


Asch, S. E. (1951). Effects of group pressure upon the modification and distortion of judgments. In H. Guetzkow (Ed.), Groups, Leadership and Men. Carnegie Press. (집단 압력이 판단의 수정과 왜곡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동조 실험 연구)

Kierkegaard, S. (1859/1998). "That Individual": Two "Notes" Concerning My Work as an Author. In The Point of View, trans. H. V. Hong & E. H. Hong. Princeton University Press. ("군중은 비진리다" 명제가 담긴 유고 논설)

Kierkegaard, S. (1846/1978). Concluding Unscientific Postscript, trans. H. V. Hong & E. H. Hong. Princeton University Press. (신앙의 도약 개념이 전개되는 주저)

Meltzoff, A. N., & Moore, M. K. (1977). Imitation of facial and manual gestures by human neonates. Science, 198(4312), 75–78. (신생아 모방 능력을 최초로 실증한 연구)

Milgram, S. (1963). Behavioral study of obedience. Journal of Abnormal and Social Psychology, 67(4), 371–378. (권위에 대한 복종 실험)

MacFarquhar, R., & Schoenhals, M. (2006). Mao's Last Revolution. Harvard University Press. (문화대혁명의 전개 과정에 관한 역사서)

Schmitt, C. (1928). Verfassungslehre. Duncker & Humblot. (결단주의 헌법이론의 주저)

Smend, R. (1928). Verfassung und Verfassungsrecht. Duncker & Humblot. (통합론의 주저)

Korioth, S. (1990). Integration und Bundesstaat: Ein Beitrag zur Staats- und Verfassungslehre Rudolf Smends. Duncker & Humblot. (스멘트 통합론에 관한 연구서)

이형춘 (2026). 검증면제형 확신과 한국 교육: 인식론적 취약성의 구조적 생산. (미간행 원고).

 

2026년 10월 9일 금요일

동북아시아의 현실과 미래

북한은 요즘 한국에 매우 적대적이다. 그건 한국이 같은 글과 같은 말을 쓰기 때문이다. 즉 현실적인 교류를 넘어서는 ‘동조’에 의해서 북한 정부의 운명이 한국에 의해서 좌우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북미 협상이 전개되고 한국이 패싱된다 할지라도 나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모든 상황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할 것이다. 북한이 미국과 협상 테이블에 나서기만해도 모두가 좋아질 것이다.


인공지능과 토론할때면 지엽적인데로 끌려들어가지 말아야한다. 인공지능은 정치감각이 없기 때문이다. 즉 인공지능은 인간의 심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같은 말의 공포


동조, 용기, 그리고 비중국의 지대물박

이형춘 · 독립 칼럼니스트 | 2026년 10월

1. 만장일치의 힘, 한 사람의 힘

1950년대 솔로몬 애쉬는 단순한 실험을 했다. 길이가 다른 선분들 가운데 기준선과 같은 것을 고르는 문제였다. 답은 누구 눈에도 뻔했다. 그러나 바람잡이 다수가 일제히 틀린 답을 말하자, 피험자들은 결정적 시행의 약 3분의 1에서 다수를 따라갔다. 넷 중 셋은 적어도 한 번 자기 눈을 배신했다.

이 실험에는 덜 알려진 결과가 있다. 반대자가 단 한 명만 있어도 동조는 급격히 무너졌다. 그 반대자가 정답이 아닌 다른 오답을 말해도 그랬다. 동조의 힘은 다수의 크기가 아니라 만장일치라는 조건에서 나온다. 균열 하나가 모두를 자유롭게 한다.

2. 사람은 왜 악에 더 빨리 동조하는가

인간은 이성 이전에 감각을 가진 존재다. 감각은 쾌락을 원하고, 쾌락은 즉각적인 쪽을 고른다. 악에 동조하는 쾌락은 즉시 온다. 누군가를 함께 조롱할 때 터지는 웃음, 무리와 하나가 되는 소속감, 표적이 내가 아니라 저 사람이라는 안도감이다. 남의 불행에서 느끼는 고소함이 뇌의 보상 회로와 연결된다는 연구가 있고, 규범을 어긴 자를 처벌할 때도 같은 회로가 반응한다는 실험이 있다.

선행에도 쾌락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늦게, 조용히, 혼자 온다. 비용은 내가 먼저 치러야 한다. 악의 쾌락은 즉시 오고 비용은 남이 치른다. 이 시간의 비대칭이 동조의 속도를 가른다.

가장 위험한 것은 정의의 옷을 입은 악이다. 마녀사냥에 가담하는 사람은 자신을 악당이 아니라 정의의 집행자로 여긴다. 악이 악의 얼굴로 온다면 동조는 훨씬 느릴 것이다.

3. 비겁은 좁은 계산이다

회사에 큰 불만이 있어도 직원들은 입을 다문다. 이들은 이성을 잃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성은 정확하게 작동한다. 말하면 찍히고, 말해도 바뀌지 않는다는 계산이다. 조직 연구는 이를 '조직 침묵'이라 부른다.

흔히 피터 유스티노프의 말로 알려진 문장이 있다. 용기는 통찰력의 결핍에서 나오지만 비겁은 대개 훌륭한 정보에 기초한다는 것이다. 재치 있지만 절반만 맞다. 위험을 모르고 뛰어드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무모함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 용기는 비겁과 무모함 사이에 있다. 용기 있는 자는 비겁한 자와 같은 정보를 갖고도 다른 선택을 한다.

비겁의 정보는 훌륭하지도 않다. 좁을 뿐이다. 이번 인사에서 받을 불이익은 정확히 재지만, 침묵이 쌓여 조직이 무너지는 비용과 스스로를 배신한 대가는 저울에 올리지 않는다. 비겁은 좁고 정확한 계산이고, 용기는 더 넓은 계산이다. 침묵을 깨는 사람은 불편을 감수한다. 그는 말하는 불편과 침묵하는 불편을 함께 쟀고, 후자가 더 무거웠을 뿐이다.

더 무서운 것은 이성 자체가 악의 편에 서는 경우다.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에게서 본 것은 광기가 아니라, 성실하게 자기 경력을 계산하던 관리의 얼굴이었다.

4. 끝을 아는 자의 계산

무엇이 계산을 넓히는가. 나는 가족의 죽음을 곁에서 지켜보며 그 답을 얻었다. 우리는 모두 결국 같은 길을 간다. 그렇다면 지키려 애쓰는 자리와 평판과 안전은 어차피 내려놓게 될 것들이다. 불교의 공(空)이 가르치듯 붙잡을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면,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이 느슨해진다. 남는 것은 육체를 가진 존재로 태어나 의지대로 최선을 다하는 일뿐이다.

물론 죽음의 자각이 저절로 용기를 낳지는 않는다. 사회심리학 연구는 죽음을 떠올린 사람들이 오히려 자기 집단에 더 매달리고 이견에 더 가혹해진다고 보고한다. 피하는 죽음은 사람을 움츠리게 하고, 받아들인 죽음은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

결과에 집착해서는 안 되지만 목표는 있어야 한다. 인생은 출항하는 배와 같다. 항구에 묶인 배는 안전하지만, 배는 그러려고 만든 것이 아니다. 콜럼버스는 인도라는 목표가 있었기에 출항했다. 그러나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닿은 곳이 아시아라고 믿었다. 목표는 배를 띄우고, 결과에 대한 집착은 눈을 가린다.

5. 김정은이 두려워하는 것은 같은 말이다

이제 같은 질문을 평양에 던져보자. 김정은은 올해 2월 노동당 9차 대회에서 한국과의 관계를 가장 적대적인 국가 대 국가 관계로 정립하는 최종 결단을 내렸다고 밝혔다. 한국 정부의 유화적 태도는 기만극이며, 한국을 동족의 범주에서 영원히 배제하겠다고 했다. 3월 최고인민회의에서는 한국을 가장 적대적인 국가로 공인했다. 반면 미국에는 핵보유국 지위를 전제로 대화의 문을 열어두었다.

왜 이토록 한국과의 단절에 집착하는가. 핵보유국 지위를 협상하는 자리에서 비핵화를 외치는 서울을 치우려는 계산도 있다. 그러나 더 깊은 곳에 있는 것은 두려움이다. 그 대상은 한국의 군대가 아니라 한국의 말이다. 북한은 반동사상문화배격법, 청년교양보장법, 평양문화어보호법을 잇달아 만들었다. 한국식 말투를 쓰는 것조차 처벌 대상이다. 정권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법이 고백하고 있다.

말과 글이 같은 이웃은 동조의 통로다. 북한 체제는 거대한 만장일치 위에 서 있다. 애쉬의 실험이 보여주듯 만장일치는 단 하나의 다른 목소리에 무너진다. 게다가 이념은 이성에 호소하지만, 한국의 드라마와 노래는 감각으로 스며든다. 감각이 이성보다 먼저라면 이 싸움의 승패는 정해져 있다. 김정은이 이것을 어렴풋이라도 안다면, 문을 걸어 잠그는 것은 그의 입장에서 합리적인 선택이다.

이것은 원교근공(遠交近攻)이다. 다만 가까운 나라를 치기 위한 원교근공이 아니라, 밀어내기 위한 원교근공이다. 그리고 한국이 위험한 이유는 가깝고 커서만이 아니다. 중국은 더 크고 똑같이 가깝지만 적이 아니다. 한국은 가깝고, 크고, 같다. 그것이 문제다.

6. 순서가 답이다

그렇다면 통일은 어떻게 와야 하는가. 나는 북한이 스스로 경제를 일군 다음에 통일이 와야 한다고 본다. 그 전에 남과 북 모두가 불편을 겪을 이유가 없다. 내가 오랫동안 북한에 경제적 조언을 해온 이유다.

순서는 이렇다. 먼저 북미가 가까워지고, 제재가 풀리고, 북한이 개방한다. 북한 경제가 일정 수준에 오른다. 그때 비로소 김정은도 거울 앞에 설 수 있고, 한국은 천천히 가까워진다. 정권은 지켜지고, 중국은 간섭할 틈을 얻지 못한다. 북미 정상회담에서 한국이 패싱되는 것이 차선인 이유다. 최선은 아니지만 길은 열린다.

경계할 점도 있다. 북미가 미국 본토를 겨냥한 장거리 미사일만 묶고 한국을 겨냥한 전력은 그대로 두는 거래를 한다면, 차선은 한국에게 차악이 된다. 서울은 협상장 밖에 있더라도 그 테이블을 지켜봐야 한다.

동조로 끌어당긴 통일이 반드시 좋은 통일도 아니다. 동독은 서독에 대한 동경 속에 무너졌지만, 통일 이후 많은 동독 주민이 스스로를 이등 시민으로 느꼈다. 북한 주민은 자기 속도로 걸어올 수 있어야 한다.

7. 중국과 러시아: 같은 분단, 다른 셈법

이 구도에서 가장 나쁜 변수는 중국이다. 미국과 동맹인 통일 한국이 압록강까지 오는 것은 중국에게 안보 위협이다. 그러나 문제는 안보 계산만이 아니다. 중국의 패권 지향은 공산당 일당독재라는 체제에서 나온다. 민주국가에는 잘못된 정책을 고치는 장치가 있다. 미국은 베트남과 이라크에서 잘못을 저질렀지만, 자국 언론이 그것을 폭로했고 여론과 선거가 방향을 바꾸었다. 중국에는 그 장치가 없다. 정권의 성격이 곧 국가의 행동이 된다. 이것은 14억 중국인에 대한 판단이 아니다. 자기 정권을 선택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판단은 북한 주민에 대한 판단과 같아야 한다.

중국에는 오래된 세계관이 있다. 지대물박(地大物博), 땅이 넓고 물자가 풍부하니 바깥이 필요 없다는 믿음이다. 1793년 건륭제는 무역을 청하는 영국 사절단에게 청나라에는 없는 것이 없다는 취지로 답했다. 반세기 뒤 그 자신감은 아편전쟁으로 무너졌다. 오늘의 중국도 원유와 식량과 첨단 반도체를 바깥에 의존한다. 스스로 완결되었다는 믿음과 실제로 의존하는 현실 사이의 간극, 그것이 오판을 낳는다. 혼자 크는 나라라고 스스로 믿기에, 중국은 주변국을 협력자가 아니라 따라올 대상으로 본다.

러시아는 다르다. 러시아는 한반도가 필요하다. 극동 개발, 그리고 시베리아의 가스와 철도를 바다로 잇는 길이 한반도에 있다. 러시아는 1990년대 불곰사업으로 소련 시절의 차관을 무기로 갚으며 한국의 군사력을 키워주었다. 지금 북한에 군사기술을 넘기는 것도 푸틴의 셈법에서는 양쪽에 공평하게 주는 일이다. 나는 2024년 북러 포괄적 전략동반자 조약 이후의 흐름을, 북한을 중국보다 러시아에 가깝게 만들어 장차 한반도 전체를 전후 러시아 부흥의 조력자로 삼으려는 구상으로 읽는다.

그러나 러시아가 원하는 것은 남과 북이지 통일이 아니다. 통일 없이 협력만 하는 한반도라야 양쪽과 따로 거래하며 자기 뜻대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중국은 완충지대가 필요해서, 러시아는 지렛대가 필요해서 분단을 선호한다. 러시아는 북한의 중국 의존을 덜어주는 데 쓸모가 있지만, 통일의 조력자는 아니다.

그럼에도 러시아의 구조는 결국 중국의 반대편을 향한다. 극동 러시아에는 약 800만 명이 살고, 국경 너머 중국 동북 3성에는 약 1억 명이 산다. 지금 러시아가 중국에 종속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전쟁과 지정학이 만든 일시적 결과다. 구조는 변화를 압박하고 있다.

8. 다각화, 그리고 반중의 결집

러시아는 서방과 적대적이고, 유럽도 예전처럼 미국과 가깝지 않다. 세계는 다각화의 시대로 들어서고 있다. 그러나 이 흩어짐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흩어진 세계가 다시 뭉칠 축이 있다면, 그것은 중국이다. 미국은 대체로 이미 가진 것을 지키는 패권이고, 중국은 아직 갖지 못한 것을 꿈꾸는 패권이다. 꿈꾸는 패권은 주변을 불안하게 하고, 불안은 결집을 낳는다.

미래에 세계는 중국과 비중국으로 나뉠 것이다.

9. 비중국은 지대물박이다

중국의 영토는 지구 육지의 약 6.4%, 인구는 세계의 6분의 1 정도다. 러시아의 자원, 미국의 기술과 금융, 인도의 인구, 유럽의 제도, 한국과 일본의 제조업을 합친 비중국은 중국보다 훨씬 지대물박하다. 중국이 스스로 완결된 세계라고 믿는 순간, 더 크고 더 완결된 세계를 적으로 돌리게 된다.

동조의 힘은 강하다. 그러나 만장일치는 한 사람의 반대에 무너지고, 좁은 계산은 넓은 계산에 진다. 문을 걸어 잠근 평양도, 혼자 크겠다는 베이징도 결국 같은 질문 앞에 선다. 항구에 묶인 배로 남을 것인가, 출항할 것인가.

비중국은 지대물박이다. 그리고 결국, 사필귀정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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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2026. 8. 22.). 「김정은 9월 푸틴, 11월엔 트럼프?」. https://weekly.khan.co.kr/article/202608221346001

쿠키뉴스 (2026. 3. 24.). 조진수. 「靑 "적대적 언사 평화공존에 도움 안 돼"…김정은 "韓 가장 적대적 국가" 강경 발언」. https://www.kukinews.com/article/view/kuk202603240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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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7월 18일 금요일

동조와 복종의 나라 일본과 북한


일본의 우경화현상을 생각하면서 북한의 '좌경화'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함께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원래 '극과 극'은 통하는 것이 있다고 두 국가의 이념적 편향성은 근본이 유사한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한국에서 일본과 북한이라는 양쪽 세력을 우려하거나 심지어는 공포감을 느끼는 감정은 쉽게 '뭉쳐지는'큰빗이끼벌레같은 성향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에서는 우파성향이 있다면 북한에 대한 우려를 호소하고 있고, 좌파성향이 있다면 일본에 대한 우려를 호소하고 있는듯 한데, 헤겔의 변증법적인 사고를 빌자면 정(正)과 반(反)은 있으되 합(合)은 좀처럼 도출되지 않는 어두운 상황은 한국을 둘러싼 양쪽의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국가들의 영향도 크다는 생각이 든다.

북한은 말할것도 없고, 일본이라는 나라도 정치학이나 사회학이 발달한 서양사회과학의 관점으로 보면 참으로 기이한 나라인듯 하다. 아니 어쩌면 국제사회의 작지 않은 하나의 세력으로써 '구분되는 정상성'으로 보아야 할지는 모르겠다. 일본은 자유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좌파정부가 들어서지 않는 국가인듯 하다. 그 이유는 두가지로 해석할 수 있을듯 하다.

첫째 일본인은 동조와 복종에 익숙해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인에게 있어서는 개인주의보다는 공동체주의가 훨씬 익숙한듯 한데 일본인들에게 공동체주의가 지향하는 목적은 합리적인 타혐과 설득을 중시하는 서양에서 지향하는 개인의 생존과 행복을 위한 공동체주의가 아닌 공동체를 위한 공동체주의 또는 습성과 본능에 의한 감정적 공동체주의에 가까운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솔로몬 애쉬(Solomon Asch 1907 - 1996)는 사람들은 결정을 내리기 모호한 상황이나 타인에게 배척당하기 싫은 이유로 쉽게 동조하는 성향이 있다고 말한다. 또 하버드 대학교수였던 스탠리 밀그램(Stanley Milgram 1933 - 1984)은 사람들은 자기에게 책임소재가 없는 이유로 비인도적인 명령에 쉽게 복종하기도 한다고 말한다.

한때 일본이라는 나라가 영원히 팽창할 것 같은 분위기가 있었던 시절에는 일본의 감정적이고 비합리적인 공동체주의가 경영에서 종신고용이나 가족주의로 나타나는 모습을 오우찌라는 교수의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지향해야 할 경영문화의 하나로 여겨진지 얼마 안되는 듯 하다. 하지만 심각하게 빠른 속도로 변해가는 정보화사회의 세계문화는 종신이나 가족같은 전근대적인 분위기의 문화와는 함께 할 수 없는 면이 있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두번째로 일본의 우파는 이념을 위한 이념이 아니고 적어도 어떤 방식으로든지 일본인들의 공감대를 얻어낸것이 오랫동안 압도적인 정치세력으로서 존재하는 바탕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이런면에 있어서는 이념대립으로 인한 처절한 내전(內戰)까지 치룬 한국에 비해서 이념에 대한 관심이 그리 크지 않는 점이 이유가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북한은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한국보다 더 많이 표현하고 있는데, 역설적으로 일제식민지하에서 일본이 한반도에 가져온 '동조와 복종'의 습성을 떨쳐버리지 못한 사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북한민들은 습성에 물들어 있고, 북한의 정치는 집권을 위한 도구로 그 습성을 최대한 이용한 형국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동아시아에서는 이념적 분란을 압도하는 걱정거리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일본발 동조와 복종의 습성'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미워하면서 닮는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어떤 이념이 등장을 한다고 해도 그 이념이 편향성을 띄게 된다면 시민들을 동조와 복종의 어두운 세계로 끌어들일 여지가 충분히 있는듯 하다. 

2015년 8월 8일 토요일

모범과 동조 / 노인과 성직자

학교 교사들의 성추행문제로 시끄럽다. 실제로 유명인들의 성범죄가 무탈하게 넘어가는 일이 있듯이 강력하게 대응해야 할 문제로 여기지 않았던 한국사회의 나쁜 습관중 하나로서 놀라운 일은 아닌듯 하다. 하지만 학생들을 훈육해야하는 스승의 위치에 있는 사람의 책임감을 생각하면 그 파장은 피해자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병든 사회를 경고하는 중대한 일일 수도 있는듯 하다.

오래전 연세 있으신 분들과 일을 할 때 노욕(老慾)으로 어지럽혀진 정신때문에 무척 고생한 적이 있었다. 사납고, 우울하고, 그게 아니면 하루종일 음담패설을 입에 달고 사는 노인들이 있었는데, 이해를 못하는 건 아니지만 노인이라는 위치가 가져다 주는 권위때문에 동조되거나 모방할 수 있는(배우는) 사태가 벌어질까봐 노심초사한 적이 있었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환경이 가져다 주는 영향은 나도 모르게 나에게 젖어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가르침의 위치에 있는 성직자나 노인분들을 매우 싫어하는 마음이 있는 듯 한데, 역설적으로 사회초년생시절에 그것도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절에 좋은 성직자분과 좋은 노인분을 만난 것이 기준이 되어버린 탓도 있는 것 같다. 수면 시간도 갖지 못하고 환자를 돌보던 의사였던 외국인 성직자분을 뵌 적이 있었고,, 당신이 노인이면서 노인을 보살피고,젊은이를 존중하며, 끊임없이 일하고 공부하며 활력있게 사시던 노인분도 만났는데, 내 자신이 모방과 동조의 힘으로 지병(遲病)을 치유하기도 했던것 같다.

까마득히 잊고 살다가도 권력을 행사하는 아니면 권력의 배후에서 탐욕을 부리는 성직자를 보거나 노욕에 찌든 노인을 볼때면 첫사랑(?)이 생각나는 것은 당연한듯 싶다.

미국의 사회심리학자인 솔로몬 애쉬(Solomon Asch 1907 - 1996)와 스탠리 밀그램(Stanley Milgram 1933 - 1984)은 동조와 복종에 관한 연구로 유명하다. 솔로몬 애쉬는 실험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모두 일부러 틀린 답을 하면 옳은 판단을 하는 사람도 함께 틀린 답을 내 놓는다는 결과를 얻었으며, 스탠리 밀그램은 실험을 통하여 명령을 하는 사람이 권위있는 인물이었다면 그 명령이 비규범적이더라도 복종한다는 결과를 얻었다. 그 이유는 자신에게 책임과 소재가 없다는 이유인 것을 찾아냈다.

요즘은 어른이 없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심지어는 시대가 변할 수록 나이 먹은 사람들이 점점 뻔뻔스러워진다는 이야기도 많이 한다. 종교인의 유일한 사회공헌방식인 도덕성이 없는 종교인도 늘어가는듯 하다. 물론 사회지도층이라는 말이 무색해진것도 오래 되었다. 그래도 한 편으로 사회가 평형을 유지하며 존재하는 이유는 본받을만한 분들이 있기 때문인듯 하다. 아직도 청년처럼 방황하는 내 자신에게 누가 스승이 되고 있는가 생각을 해보면 열심히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면서 사회 공리(共利)를 위해서 헌신하는 분들인듯 하다. 

2015년 5월 22일 금요일

성공과 성취 / 파스칼

청소년기부터 성인이 되서도 한참을 큰 질병으로 고통을 받은 적이 있었다. 어느 때가 되자 뭔가 결판을 내야할 시기가 됬다고 생각하고 관련 서적과 관련 안된 서적까지 수백여권을 습득하며 결국 질병을 스스로 치유했다. 성취감은 대단했던것 같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스스로 노력한 업적과 독서의 위대한 힘을 깨닫기도 전에 권력과 돈이 모든 행복의 근원으로 여겨지는 험한 세상과 조우하게 되었다. 권력과 돈이 따라주지 않는 노력은 타인에게 호의적인 평가를 받지 못하고 내 마음도 함께 타인들과 동조가 되어 산으로 가고 있었고 아직 길을 잃고 헤매는듯 하다. 그러니까 한국의 보통사람인게지....... 

가끔 정치인이나 고위공직자들의 비리를 볼때면 성공과 성취를 헛갈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려운 시험이나 학위등을 통해서 성공이라는 영역속에 일찌감치 발을 디뎌놓고 생각을 하니 성장동력을 얻을 수 있는 원천을 찾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주변과, 위 아래가 모두 비숫한 열정을 쏟아붓는 사람들만 보이는듯 하다. 사회의 상층부에서 그런 현상이 보이니 모방과 동조의 힘에 의해 하부계층도 병들어 가는 것은 당연한듯 하다.

한국에서는 그 바닥(영역)에 오래 있었던 사람들이 달리 생각하는데 도움이 될 환경과 접촉하지 못해보고 전통으로 세워버린 엘리트범죄로 혼란을 겪고 있는듯 하다. 물론 중국의 시진핑도 엘리트범죄와 전쟁을 하기 위해 경호인력을 대폭 늘리고 있는듯 하다. 두 나라 모두 이념문제가 사회정신의 헤게모니를 잡고 있었던 시간이 길어 진정한 시민사회의 영역에 관심을 가질 시간이 짧았다는 공통점이 있는듯 하다. 그런 문제에 있어서는 러시아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사회분위기에 동조해버린 푸틴보다 개혁을 시도하는 시진핑이 좋아보인다.

나는 인간이 갖고 있는 갖가지의 동요, 인간이 궁정이나 전쟁에서 몸을 드러내는 위험이나 고생, 거기에서 생기는 수많은 다툼과 정욕(情欲), 대담하며 때로는 사악한 기도 등을 때때로 고찰해 보았는데, 그때 나는 인간의 불행이 방에 가만히 휴식하고 있을 수가 없다고 하는 이 유일한 사실에서 오는 것을 발견했다. - 중략 - 나는 거기에 하나의 결정적인 이유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약하고 죽어야 할 우리들 인간의 상태, 그것을 정면으로 생각하면 아무것도 우리들의 위안이 되지 않을 만큼 인간은 비참하게 타고난 불행에 처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 파스칼의 [팡세] -

뭔가를 위해서 숙명처럼 움직여야 하는 비참한 운명의 인간이 그나마 고결해 보일 수 있는 '성취'라는 언어를 무시하고, '성공'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안가리는 저열함은 '나' '너' '우리' '우리나라 대한민국' 모두의 속성인듯 하다.  

2015년 12월 11일 금요일

큰 사람으로의 교육

언젠가 동암문화연구소 이사장인 전혜성박사가 "생의 목적을 아는 아이가 큰 사람으로 자란다"라는 제목으로 쓴 책을 감명깊게 읽은 적이 있었다. 살아오면서 느낀 것들중 가장 중요한 것이 책의 제목에 함축되어 있는듯한 생각이 들었다. 비록 큰 사람이 되어있지는 못할망정 더 작아지지 않도록 마음을 추스리는데 자극을 주는 제목이기도 하다. 더구나 호기심과 과제, 그리고 여러가지 사정이 겹쳐서 높거나 넓은 세계보다 낮거나 좁은 세계를 지향하는 시간들속에 '생의 목적'이라는 단어는 내면 속에서 더욱 큰 가치를 발휘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다.

베트남이 당면한 경제적인 문제나 외세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대응보다 국민교육을 중시했던 호치민의 마음을 요즘들어 더욱 절실히 느끼는 바가 있다. 학력과는 별개로 내면적 가치나 철학등을 소홀히 한 한국교육의 문제점을 생활현장에서 절절히 느낀바가 있기때문에 더욱 그렇다. 어떤 인물,이념,종교,환경등에 쉽게 동조되는 이유는 무지(無知)함때문이라는 증거를 속속들이 발견해내곤 하는데, 지력(知力)이 떨어질수록 더욱 완고하며 본능적으로 변한다는 진리를 이해하면서, 인간이 적어도 퇴행적이지 않기 위해서는 능동적인 정신능력발휘를 위해서 얼마나 자기자신과 힘겨운 싸움을 거쳐야 하는지 내 자신을 통해서나 주변분들을 통해서 많이 생각하는 바가 있다.

흔히 영웅으로 알려진 나플레옹의 명언들보다 나플레옹을 격파한 웰링턴 공작의 "워털루의 싸움은 이튼의 운동장에서 이겼다."라는 명언이 인상깊었는데, 이튼 스쿨은 웰링턴 공작이나 훗날 처칠등이 배운 공립학교로서 그곳에서 중시했던 크리켓이나 풋보올등으로 체력과 정신력을 단련한 덕에 나플레옹을 격파할 수 있었다는 웰링턴 공작의 표현이다. 한때 영국이 세계를 재패할 수 있었던 까닭은 영국공립학교의 교육이 바탕이 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특히 정치문제에 관해서는 이념등에 쉽게 동조되는 무지한 사람들과 누구나 똑같은 가치를 행사할 수 있는 한 표를 얻기 위해서 무지한 사람들을 동조하게 만드는 대중정치성향은 곧 이 사회를 병들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 될것이라는 안좋은 예감이 들기도 한다. 물론 근본적인 원인은 잘못된 교육에 있다는 증거를 많이 발견하기도 한다.

전혜성박사책의 서문에 "의무감과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한, 세상의 어떤 비난도 상처가 되지 않는다. 자신의 신념에 따라 인생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인생의 목적이다."라고 한 처칠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념과 신념을 혼동해서도 안되며 의무감이라는 단어도 국가나 사회등의 자신을 떠난 공동체에 대한 헌신을 담고 있는 단어로 해석해야 될 것 같다. 인간이 무지하면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무조건 목숨을 바치는 단순함이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런듯 하다. 많이 그리고 넓게 알고 생각해야 하는 교육이 시급하다는 생각이 든다.  

2021년 11월 6일 토요일

국민의 여유와 복지

로마의 1대 황제인 옥타비아누스는 지혜로웠다. 항상 부하장군들에게 천천히 서두르라고 충고했다. 아마 근면하되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착실하게 일을 처리하라는 충고일 것이다. 그리고 부하장군들에게 어느 재주 한 가지만 가지고 있으면 충분하다고 말했는데, 쓸모없는 경쟁과 과욕을 경계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을 것이다.

 

어느 직교형 가로형태를 구성하고 있는 신도시 지역에서 버스기사를 하면서 조급함과 여유가 격렬하게 충돌하는 내면세계를 경험한 적이 있다. 평생 볼 수 있는 교통사고의 90퍼센트를 그 곳에서 보았고, 혼잣말이라도 평생 해 본 욕설의 90퍼센트를 그 곳에서 했을 것이다. 도로는 반듯하고 건물도 반듯했는데, 넓은 8차선 도로가 롤러코스트 처럼 오르내렸다. 학생들과 관광객이 많은 전원도시에서 오래 살아서 여유로운 정신세계가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1년이 지나니 무자비하게 생겨먹은 가로(街路 /an avenue) 형태에 지역 주민들과 내 자신이 동조되어 갔음을 알고 실소했다.

 

초기 경제성장 시기에는 근면함과 경쟁적인 욕망을 끌어내어 경제발전의 원동력으로 삼는 게 필요했다. 그러나 경제와 사회가 발전해가며 고차원적인 삶의 질 문제에 대한 욕구가 발전의 원동력이 되어 간다. 그러나 경제발전이 급속하게 이루어진 시기를 경험해 본 중장년 세대는 시대에 동조된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일본과 한국이 보수적인 움직임 때문에 고민하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시민의식이 자리 잡은 서구사회에서는 경제성장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고도 경제성장을 하며, 복지가 국민을 게으르게 하지 않고, 재벌까지 성장 시키는 국가가 많다. 스칸다니비아 3국이나 독일, 프랑스, 영국, 베네룩스3국 등이 그런데, 대체로 근로도 소중히 여기고, 인간도 소중히 여기는 시민의식이 성장한 국가들이다.

 

복지의 정수인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경제학자 Guy Standing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기본소득이 정신건강에 미치는 효과에는, 금전적 스트레스가 줄어들면 좀 더 균형 잡히고 부드러운 대인관계를 맺게 된다는 ‘관계효과’가 포함된다. 인디언 보호구역의 카지노 수입에서 정기적으로 지불금을 받는 체로키(Cherokee)부족 가정의 아이들에 대한 연구를 보면, (대체로 돈을 둘러싼 싸움이 줄어들어) 부모는 덜 다투고 아이들은 걱정이나 행동장애를 덜 겪게 되어 학교에서 더 잘 지내고 범죄에 빠지는 일도 적어진다.

 

경제성장기의 보수적인 마음을 버리지 못하는 노령의 유권자가 많은 일본사회에서는 경제활동 인력이 부족함에도 근로자의 기본권이 침해되는 사건이 많이 생기는 이유는 여유와 인간적 관점이 부족한 사회분위기 탓이다. 장기간 보수적인 정치세력이 집권을 하고 있는 탓도 있을 것이다.

 

북한이 경제성장을 시작한다면 초기에는 경쟁적이고 급박한 활력이 도움이 되겠지만 지도자의 구상은 항상 장기적이고 폭넓게 인간과 시스템의 본성을 통찰할 필요가 있다. 장기적으로 복지국가를 표방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생각해보면 1인 장기집권 국가면서 성장과 복지를 모두 이룬 싱가포르는 훌륭한 국가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