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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7월 24일 금요일

생각하는 동조

인간은 분위기에 쉽게 물든다. 그래서 대중심리나 군중심리에 휘둘린다. 동조심은 원래 인간에게 있는 것인데, 이념이나 종교는 동조심을 강하게 만든다. 그래서 전쟁이나 내란 또는 폭동이 힘을 얻는다. 개인이나 사회의 끊임없이 생각하는 노력만이 동조심을 제어할 수 있다.

 

사회 초년생 시절에 가장 놀라웠던 점 중의 하나는 나이 먹은 선배들은 대부분 권위주의 정부 시절의 대통령들을 모방하고 있었다. 물론 권위와 지위를 탐하는 마음만을 모방하고 있었다. 모방은 동조의 표현이다. 청년기에 어느 교회를 갔는데, 논리적으로 신앙을 들이받으니까 성직자의 움직임이 커지고 목소리가 커졌다. 확신으로 나의 믿음을 끌어내기 위해서 쓴 방법임을 알고 있었는데, 나는 전혀 동조되지 않아서 애를 먹었다. 나중에 종교와 이념이 동조를 이용하는 성향이 비숫하여 쉽게 결합됨을 느꼈고, 실제로 그런 사건이 자주 발생했다. 좋지 않은 일을 일으켰음에 사건이라고 표현했다.

 

종교적 성향이 강한 중동의 국가들이나 중국이나 북한 그리고 민주화되기 이전의 한국 같은 이념적 성향이 강한 국가는 동조심을 통치 기술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런 국가는 사회윤리가 발전을 하지 못한다. 이념이나 종교가 사회윤리를 대신한다. 사회윤리가 발전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 사회 자체의 발전이 정체된다는 것이다. 사회가 발전을 하기 위해서는 개인과 사회의 끊임없는 자각이 필요하다. 물론 그런 자각을 위해서는 제대로 된 교육이 필요하다.

 

마오쩌둥의 이념 국가 건설과 문화 대혁명으로 중국의 사회윤리발전이 멈추고 세계 각지에서 중국인이 비난 받는다고 하니까 인공지능이 근거를 대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현상을 본 사람이 있으면 인공지능에게 신고 바란다. 어디 중국뿐인가. 매일 종교적 갈등으로 바람잘 날 없는 중동국가들도 그렇고 극우주의자들이 나서는 그 밖의 많은 나라들이 그렇다.


마찰 없는 확신: 동조, 교육, 그리고 이념의 사회윤리 대체에 관하여

Convictions Without Friction: Conformity, Education, and the Displacement of Social Ethics by Ideology


이형춘 · 독립 칼럼니스트  /  Lee Hyeong-chun · Independent Columnist

국문초록


동조는 병리가 아니다. 하드웨어다. 태어난 순간부터 작동하는 신경학적 기제이며, 교육과 이념은 그저 이 하드웨어가 무엇에 동조할지를 정하는 소프트웨어일 뿐이다. 본고는 여기서 출발하여, 검증면제형 확신 — 검증되지 않은 것을 이미 검증된 것으로 착각하는 확신 — 을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신앙의 도약과 구분한다. 후자는 불확실성을 자각한 채 떠안는 선택이지만, 전자는 불확실성 자체를 지워버린다. 이 구분을 기준으로 본고는 개인의 확신이 극단으로 치닫는가 여부를 가르는 진짜 변수가 실행의 유무가 아니라 마찰과 피드백의 유무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 틀을 문화대혁명이라는 구체적 사례에 적용하여, 마찰 경험이 없는 세대가 마찰 경험이 축적된 세대와 그 세대가 지녔던 전통적 사회윤리 체계를 이념으로 대체한 과정을 분석한다. 나아가 본고는 한국·중국·북한을 이념의 사회윤리 대체가 지속된 기간과 대안적 마찰 장치의 파괴 정도라는 두 축 위에 배치하여 비교한다. 마지막으로 본고는 칼 슈미트의 결단주의와 루돌프 스멘트의 통합론을 대비시키되, 스멘트의 통합 개념에 경합가능성이라는 조건을 덧붙임으로써 통합과 전체주의적 의례를 구분할 기준을 제시하고, 개방적이고 경합 가능한 통합이 가능한 체제로서 민주주의의 위치를 논한다.


주제어

동조, 검증면제형 확신, 마찰과 피드백, 신앙의 도약, 문화대혁명, 통합론, 결단주의, 경합가능성


1. 서론: 문제 제기


이념이 사회윤리를 대체하는 현상은 특정 국가나 특정 체제에 국한된 병리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 인지의 보편적 취약성이 특정한 제도적 조건과 결합할 때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구조적 결과다. 본고는 이 취약성의 출발점을 동조(同調) 현상에서 찾되, 이를 도덕적 결함이 아니라 인간 하드웨어의 일부로 전제한다. 문제는 동조 자체가 아니라, 그 동조가 무엇을 향하도록 방치되는가에 있다.


2. 동조라는 하드웨어와 교육이라는 소프트웨어


신생아 모방 연구는 이 논지의 출발점을 제공한다. 멜초프와 무어(Meltzoff & Moore, 1977)는 생후 12일에서 21일 사이의 신생아가 성인의 표정과 손동작을 모방한다는 것을 보였다. 이 모방은 조건화나 선천적 반사로 설명되지 않으며, 학습 이전에 이미 작동하는 교차양식적 대응 능력을 시사한다. 즉 동조는 후천적으로 학습되는 태도가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장착된 신경학적 기제다. 애쉬(Asch)의 집단 동조 실험과 밀그램(Milgram)의 복종 실험이 학력이나 지적 수준과 무관하게 유사한 동조율을 보였다는 사실은 이 하드웨어가 교육 수준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이로부터 도출되는 결론은 명확하다. 교육과 이념은 동조라는 하드웨어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그것들은 이미 존재하는 하드웨어가 무엇에 동조할지를 결정하는 소프트웨어일 뿐이다. 한국의 경쟁 중심 교육이 저지르는 잘못은 없던 동조 성향을 새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그 성향이 향할 대상을 시험 정답과 위계적 평가 체계로 고정시키고, 그 성향을 교정할 마찰 장치를 설계 단계에서 제거한 것이다.


3. 검증면제형 확신과 신앙의 도약


여기서 정교한 구분이 필요하다. 키에르케고르의 신앙의 도약과, 본고가 '검증면제형 확신'이라 부르는 것은 표면적으로 유사해 보이지만 근본적으로 다르다. 키에르케고르에게 신앙은 이성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을 그 불가능성을 자각한 채로 선택하는 행위였다. 그는 덴마크 국교회로 대표되는 습관화되고 제도화된 신앙 — 태어난 국가가 기독교 국가이므로 자신도 이미 기독교인이라는 식의 순응적 신앙 — 을 정면으로 공격했다. 그가 남긴 '군중은 비진리다'라는 명제는 바로 이 지점을 겨냥한다. 그에게 군중이란 개별자가 각자 신 앞에 단독으로 서는 책임을 회피하고 익명의 다수 뒤에 숨는 상태였다.


반면 검증면제형 확신은 불확실성을 짊어지는 대신 지워버린다. 그것은 '이것은 증명되지 않았지만 나는 선택한다'가 아니라 '이것은 이미 증명되었다'는 착각에서 출발한다. 이 구분의 관건은 능동성의 주관적 느낌이 아니다. 검증면제형 확신에 사로잡힌 사람도 스스로는 자신이 능동적으로 깨달아 선택했다고 느끼며, 오히려 이 주관적 확신의 강도는 진짜 신앙의 도약보다 더 강하게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진짜 구분선은 그 확신이 자신의 불확실성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 불확실성을 이미 해소된 것으로 위장하고 있는가에 있다.


나아가 시간축을 고려하면 이 두 유형은 서로 전환될 수 있다. 동조나 선동에 의해 수동적으로 형성된 확신도, 시간이 흐르며 정체성과 결합하고 인지부조화를 줄이려는 압력을 받으면서 스스로 선택한 것처럼 재구성된다. 즉 동조는 입구에서는 수동적이지만, 퇴로가 사라지면 능동적 확신으로 위장한다. 한국의 입시교육은 학생에게 불확실성을 견디는 훈련이 아니라, 정답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전제 위에서 그 정답을 빠르게 찾아내는 훈련을 시킨다. 이는 신앙의 도약과 정확히 반대되는 인식 습관이며, 검증면제형 확신과는 완벽하게 동형(同型)이다.


4. 마찰과 피드백: 경로의존적 과잉교정의 확장


그렇다면 어떤 확신은 온건함에 머무르고 어떤 확신은 극단으로 치닫는가. 이 차이를 만드는 변수는 독서의 유무나 실행의 유무가 아니다. 순수하게 서재에서 사유하며 평생 실천적 행동을 하지 않은 사상가들 중에도 회의주의와 관용에 도달한 이들이 있고, 반대로 현장 경험이 풍부한 행동가들 중에서도 극단으로 치달은 이들이 있다. 진짜 변수는 마찰과 피드백 — 자신의 확신이 현실과 부딪혀 오류를 통보받는 경험 — 의 유무다.


이는 자본주의의 경기순환에 관한 경로의존적 과잉교정 이론과 구조적으로 동일하다. 시장은 가격이라는 피드백을 통해 왜곡을 스스로 교정하지만, 그 피드백이 인위적으로 억눌리면 왜곡은 영구화되거나 트로프에 고착된다. 사상과 이념도 마찬가지다. 현실과의 마찰은 확신에 '이것은 틀렸다'는 신호를 지속적으로 보내는 교정 장치이며, 순수한 이념적 몰입은 이 장치가 없는 상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 마찰을 피하려는 성향 — 일종의 인지적 게으름 — 을 타고나지만, 이는 도덕적 태만이라기보다 하드웨어의 일부다. 따라서 좋은 사회 제도의 과제는 이 타고난 게으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겨내도록 강제하는 마찰 장치를 설계에 심어 넣는 것이다. 한국 교육의 결정적 결함은 게으름을 만들어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게으름을 극복하도록 강제할 장치를 설계에서 빼버린 데 있다.


5. 사례 연구: 문화대혁명과 마찰 장치의 파괴


문화대혁명(1966-1976)은 이 마찰 파괴 메커니즘을 역사적으로 실행한 사건이다. 반우파 투쟁 이후 강화된 지식인 숙청, 전통 교육기관의 폐쇄, 그리고 홍위병을 동원한 원로·교사·전문가에 대한 공개 비판은 사회 전체의 피드백 메커니즘 — 경험 많은 연장자, 축적된 전문지식, 유가적 전통윤리 체계 — 을 국가가 조직적으로 파괴한 사례였다. 마오쩌둥 자신이 넓게 읽지 않은 편향된 소프트웨어 위에서 작동한 하드웨어였다는 점, 그리고 그가 정확히 마찰 경험이 가장 적은 집단(청년 홍위병)을 동원하여 마찰 경험이 가장 많이 축적된 집단(원로, 지식인)을 숙청했다는 점은 역설적이다. 마찰을 겪어보지 못한 세대가 어리석은 선동에 동원되어, 사회가 오랜 시간에 걸쳐 구축한 마찰 장치 자체를 해체한 것이다.


여기서 본고는 신중해야 할 지점을 명확히 한다. 특정 국민 전체를 성격적으로 규정하는 진술 — 예컨대 오늘날의 특정 국민성을 수십 년 전의 정치적 사건에 직접 인과적으로 귀속시키는 진술 — 은 검증 불가능하며, 본고가 비판 대상으로 삼는 검증면제형 확신과 형식상 동일한 오류를 범한다. 따라서 본고가 다루는 것은 국민성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국가가 사회의 마찰 장치를 인위적으로 파괴한 제도적 메커니즘 그 자체다.


6. 비교 구조 분석: 한국, 중국, 북한


이 틀을 세 사회에 적용하면 하나의 공통된 축과 그 위의 위치 차이가 드러난다. 세 사회 모두 이념전쟁을 통해 이념이 사회윤리를 대체하고 이념이 교육 기능을 겸하는 과정을 겪었다. 그러나 그 정도와 지속성은 서로 다르다. 이 차이를 만드는 독립변수는 결과론적으로 서술되는 '민주화의 속도'가 아니라, 다음 두 요인의 곱이다: 이념 독점이 지속된 기간, 그리고 대안적 마찰 장치 — 가족·종교·전통윤리·시민사회 — 가 파괴된 정도.


한국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사회윤리와 개인적 자각이 발전할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했고 권위주의 체제 아래 이념 독점을 겪었지만, 그 지속 기간은 상대적으로 짧았고(약 1961년-1987년), 급속히 성장한 종교(국가 이념과 구별되는 별도의 윤리 체계 제공), 문화대혁명 수준으로 파괴되지 않은 유교적 가족·문중 구조, 그리고 탄압받으면서도 완전히 절멸되지는 않은 노동·학생운동이라는 대안적 마찰 장치가 살아남았다. 중국은 문화대혁명과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사회윤리와 개인적 자각의 형성 기반 자체가 파괴되었고, 이념 독점은 1949년 이래 70년 넘게 단절 없이 지속되고 있다. 북한은 폐쇄적 체제 안에서 이 두 결핍 — 사회윤리 발전의 시간 부재와 이념에 의한 전통윤리 대체 — 이 모두 극한까지 포개져 있으며, 이념 독점은 1948년 이래 단 한 번도 끊긴 적이 없다.


이 비교는 어느 국민이 도덕적으로 더 우월한가를 판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런 판정은 본고 스스로 세운 원칙 — 특정 진영을 편들지 않고 동일한 잣대로 분석한다는 원칙 — 과 충돌한다. 이 비교가 보여주는 것은 오직 이것이다. 이념 독점이 지속된 기간이 길고 대안적 마찰 장치의 파괴가 철저할수록, 사회가 검증면제형 확신으로부터 스스로를 교정할 자원은 그만큼 고갈된다.


7. 대안: 결단주의를 넘어, 경합가능성을 갖춘 통합론으로


이 진단으로부터 어떤 처방이 도출되는가. 여기서 독일 국법학의 두 대립하는 이론이 유용한 참조점이 된다. 칼 슈미트는 1928년 저작 『헌법학(Verfassungslehre)』에서 국가와 헌법을 주권자의 일회적 결단으로 파악하는 결단주의를 제시했다. 같은 해 루돌프 스멘트는 『헌법과 헌법률(Verfassung und Verfassungsrecht)』에서 이에 정면으로 맞서는 통합론을 내놓았다. 스멘트에게 국가는 한 번의 결단으로 확정되는 실체가 아니라, 구성원과 지도부가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통해 매번 다시 만들어가는 통합 과정이었다.


그러나 이 통합 개념을 그대로 처방으로 쓰기에는 위험이 있다. 스멘트가 나치 집권기에도 교수직을 유지했다는 사실이 보여주듯, '국가는 결단이 아니라 통합의 과정'이라는 명제 자체는 그 통합이 무엇을 향해 일어나는가에 대해 중립적이다. 북한 역시 선거, 대규모 집단체조, 반복적 의례를 통해 표면적으로는 기능적 통합의 형식을 완비하고 있다. 따라서 스멘트의 통합 개념은 하나의 조건이 추가되지 않는 한 전체주의적 의례를 걸러내지 못한다. 그 조건은 경합가능성(contestability) — 지도자와 구성원 사이의 피드백이 실제로 지도자 쪽의 결정을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는가 — 이다. 결과가 이미 정해진 채 반복되는 참여는 통합이 아니라 검증면제형 확신의 집단적 의례에 불과하다.


이 조건을 세우면 한국과 같은 민주주의 체제의 위치가 분명해진다. 정기적 선거를 통한 정권 교체 가능성, 언론과 사법의 상대적 독립성, 그리고 시민사회의 이의제기가 실제로 정책과 지도부를 바꿀 수 있는 제도적 통로는 한국을 경합 가능한 개방적 통합이 구조적으로 가능한 체제로 만든다. 이것이 결단주의도, 경합가능성이 결여된 통합의 의례도 아닌 제3의 길이다.


8. 결론


건강한 국가는 결단된 실체가 아니라, 지도자와 국민이 열린 결과를 두고 끊임없이 마찰하며 다시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동조는 이 과정에서 제거해야 할 결함이 아니라 다뤄야 할 상수다. 한국 교육이 저지르는 근본적 오류는 이 마찰을 견디고 발생시키는 능력을 기르는 대신, 정답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착각과 그에 대한 안전한 동조를 길러냄으로써 통합의 과정 자체를 왜곡시킨다는 데 있다. 문화대혁명이 보여준 것은 마찰 장치가 파괴된 사회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이며, 한국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마찰 장치가 불완전하게나마 살아남았을 때 그 사회가 무엇을 되찾을 수 있는가이다. 그 되찾음은 완결된 상태가 아니라 항상 다시 시작해야 하는 노력이며, 항상 깨어 있어야 하는 자각이다.


참고문헌


Asch, S. E. (1951). Effects of group pressure upon the modification and distortion of judgments. In H. Guetzkow (Ed.), Groups, Leadership and Men. Carnegie Press. (집단 압력이 판단의 수정과 왜곡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동조 실험 연구)

Kierkegaard, S. (1859/1998). "That Individual": Two "Notes" Concerning My Work as an Author. In The Point of View, trans. H. V. Hong & E. H. Hong. Princeton University Press. ("군중은 비진리다" 명제가 담긴 유고 논설)

Kierkegaard, S. (1846/1978). Concluding Unscientific Postscript, trans. H. V. Hong & E. H. Hong. Princeton University Press. (신앙의 도약 개념이 전개되는 주저)

Meltzoff, A. N., & Moore, M. K. (1977). Imitation of facial and manual gestures by human neonates. Science, 198(4312), 75–78. (신생아 모방 능력을 최초로 실증한 연구)

Milgram, S. (1963). Behavioral study of obedience. Journal of Abnormal and Social Psychology, 67(4), 371–378. (권위에 대한 복종 실험)

MacFarquhar, R., & Schoenhals, M. (2006). Mao's Last Revolution. Harvard University Press. (문화대혁명의 전개 과정에 관한 역사서)

Schmitt, C. (1928). Verfassungslehre. Duncker & Humblot. (결단주의 헌법이론의 주저)

Smend, R. (1928). Verfassung und Verfassungsrecht. Duncker & Humblot. (통합론의 주저)

Korioth, S. (1990). Integration und Bundesstaat: Ein Beitrag zur Staats- und Verfassungslehre Rudolf Smends. Duncker & Humblot. (스멘트 통합론에 관한 연구서)

이형춘 (2026). 검증면제형 확신과 한국 교육: 인식론적 취약성의 구조적 생산. (미간행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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