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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7월 17일 금요일

오늘 우는 자여 내일은 웃다가 지쳐서 쓰러지리라

자본주의 사회는 경기의 변동을 탄다. 그건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사회는 경기가 항상 저점에서 움직인다. 그건 인위적으로 파동을 없앤 탓이다. 그러나 그 파동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어느 날 증폭되어 폭발한다. 파동을 없애는 건 평정을 위한 인간의 노력이다.


파동을 크게 증폭 시키는 것도 경로의존성 같은 인간의 노력이다. 어떤 상태를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은 제어하지 못하면 반대편까지 멀리 간다. 그래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같은 극단적 이념이 교대로 나타난다. 실용성을 추구하는 적시적인 이념이 발생하기  힘든 이유는 경로의존성 때문이다.  


인공지능은 자바스크립트를 사용해서 부지런히 토론 내용을 정리해 주었다. 갑자기 생각난게 있어서 정리가 다 된 내용을 보완해 다시 정리해 달라고 하니 불평 없이 정리해 준다. 이게 인공지능이 사랑 받는 이유다. 게다가 마지막 인사로 나랑 토론하는 것이 즐거웠다고 한다. 정말 즐거웠단 말이지? 


파동은 필연이 아니다


— 경로의존성과 평정심에 관하여


이형춘 · Independent Columnist


옛날 어느 도사가 축지법을 익혔다는 이야기가 있다. 땅을 접어 걷는 재주였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시공을 건너 한국의 어느 지하철역에 당도했더니, 그곳엔 평면 에스컬레이터가 놓여 있었다. 도사는 그 자리에서 축지법 수련을 접고 승강기 기능사 자격증을 땄다. 신시대의 축지법을 배운 것이다.


이 이야기가 우스운 건 도사의 선택이 아니라, 대부분의 인간이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우리는 수단을 목적으로 착각하고, 그 착각 위에서 평생을 소진한다.


경기변동을 오랫동안 자연법칙처럼 다뤄왔다. 호황과 불황, 팽창과 수축, 고점과 저점 — 마치 계절이 바뀌듯 당연한 순환으로 설명해왔다. 그러나 이 순환은 자본주의의 본성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민스키(Minsky, 1992)는 금융불안정성 가설에서, 자본주의 경제가 스미스와 왈라스가 상정했던 것처럼 균형으로 수렴하는 체계가 아니라, 안정기 자체가 위험선호를 키워 불안정을 스스로 재생산하는 체계라고 주장했다. 즉 파동을 만드는 것은 시장이 아니라, 시장 안에서 오류를 교정하려는 인간의 습성이다.


문제는 교정 그 자체가 아니다. 문제는 교정이 멈추지 못한다는 데 있다. 결핍을 메우려는 노력이 관성을 얻으면, 그 노력은 결핍이 사라진 지점을 지나쳐도 계속된다. 보완이 목적을 집어삼키고, 어느 순간 주객이 전도된다. 원래는 균형을 찾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 그 자체로 새로운 신앙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건 공학에서도 익숙한 그림이다. 위너(Wiener, 1948)가 사이버네틱스에서 정식화했듯, 되먹임 체계에 지연이 존재하고 그 지연 동안 교정 자체가 관성을 얻으면 체계는 평형이 아니라 진동으로 향한다. 경제학에서도 돈부시(Dornbusch, 1976)의 환율 오버슈팅 모델이 같은 구조를 보여준다 — 가격은 즉각 조정되지 않고, 그 경직성 때문에 환율은 새로운 균형점을 지나쳐 오버슈트한 뒤에야 서서히 되돌아온다. 경기변동의 고점과 저점은 경제의 물리법칙이 아니라, 교정에 내재된 시차와 관성, 그리고 그 관성을 멈출 내적 제동장치의 부재가 만들어낸 결과다.


이 문법은 이념에서 훨씬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자본주의가 극단으로 치달아 모순을 드러내면, 사람들은 그 모순만 도려내지 않는다. 반대편 극단 전체를 새로운 신앙으로 받아들인다. 사회주의가 등장한다. 사회주의가 다시 모순을 드러내면, 이번엔 단순한 보정이 아니라 극우라는 또 다른 거대 프레임이 나타난다. 바이마르의 초인플레이션(Feldman, 1993) 뒤에 나치즘이 왔고, 소비에트의 파탄 뒤에 옐친식 신자유주의(Åslund, 1995)가, 그 신자유주의의 파탄 뒤에 다시 권위주의적 민족주의가 왔다. 매번 문제가 있는 지점만 고치면 될 일이었으나, 인간은 반대편 극단 전체로 빨려 들어갔다.


이는 경로의존성 이론이 설명하는 바와도 통한다. 데이비드(David, 1985)와 아서(Arthur, 1989)가 보여주었듯, 일단 특정 경로가 수확체증을 얻으면 그 경로에서 벗어나는 비용은 계속 상승한다. 노스(North, 1990)는 이 원리를 제도 전반으로 확장해, 제도적 경로의존성이 비효율적 균형조차 고착시킬 수 있음을 보였다. 경제에는 그나마 가격이라는 되먹임 신호가 있다. 이념에는 그 신호조차 없다. 확신은 검증을 면제받은 자리에서 자라기 때문에, 오버슈트를 멈출 내재적 제동장치가 애초에 없다. 그래서 이념의 진폭은 훨씬 크고, 회귀는 훨씬 느리다.


자유와 억압의 차이도 같은 문법 안에 있다. 자본주의가 파동을 타는 것은, 자유가 가격이라는 되먹임 신호를 살려두기 때문이다. 반면 사회주의 계획경제는 국가가 그 신호 자체를 차단한다. 코르나이(Kornai, 1980)가 부족의 경제학에서 보여주었듯, 국영기업은 손실을 내도 국가가 메워주는 연성 예산제약 속에서 가격과 무관하게 팽창을 계속하고, 그 결과 경제 전체가 만성적 초과수요, 즉 부족 상태에 고착된다. 자본주의가 만성적 과잉생산에 시달린다면, 통제경제는 만성적 부족에 시달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고착은 오르내림의 소멸이 아니라 오르내림의 압축이다. 관성은 사라지지 않고 배출구를 잃을 뿐이다. 자유로운 사회는 그 관성을 잦고 작은 파동으로 나누어 방출한다. 통제된 사회는 그 관성을 수십 년간 눌러 담았다가 단 한 번, 훨씬 큰 진폭으로 터뜨린다. 소비에트의 붕괴, 그리고 그 직후 옐친식 초자유주의로의 격렬한 쏠림이 정확히 그 사례다. 억압은 파동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파동의 주기를 한 세대로 늘리고 그 진폭을 감당할 수 없이 키우는 것이다.


이 문법은 개인의 삶에서도 똑같이 반복된다. 가난에 한이 맺힌 이는 공장을 세워 돈을 벌었다. 몸이 약했던 이는 평생 무예를 수련해 강해졌다. 둘 다 결핍을 딛고 일어섰다. 그러나 결핍이 사라진 뒤에도 관성은 멈추지 않았다. 한 사람은 수전노가 되었고, 한 사람은 주먹만 아는 이가 되었다. 목표는 이미 달성했으나, 그 관성을 멈출 신호가 없었기에 원래 바라던 평온한 삶과는 정반대의 자리에 도달했다.


무엇이 이 관성을 멈추는가. 결국 평정심이다. 지금 하고 있는 이 행위가 여전히 원래의 목적에 봉사하고 있는가를 계속 되묻는 습관이다. 종교가 평정심을 최고의 경지로 여겨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다만 종교는 도달 불가능한 이상을 내세우면서 소극적 제어를 강조하는 반면, 철학은 인간의 욕망을 인정하고 들어가기에 오히려 능동적이고 혈기적이다. 블로흐(Bloch, 1954/1986)의 희망의 철학이 강조하는 능동적 유토피아 지향과, 불교적 평정심이 강조하는 집착의 내려놓음은 바로 이 지점에서 대비된다. 이상향은 종교의 몫이고, 그 이상향을 향해 가는 인간의 욕망을 다루는 것은 철학의 몫이다.


그러나 개인과 사회는 다르다. 개인은 늙고, 병들고, 관계가 무너지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 평정심을 배울 기회를 얻는다. 사회는 그렇지 않다. 사회가 관성을 멈추는 유일한 계기는 위기다. 대공황이 있어야 예금보험제도가 생겼고, 세계대전의 참화가 있어야 국제 인권체제가 생겼고, 금융위기가 있어야 최소한의 규제가 강화되었다. 완충재는 언제나 사후적이다. 트라우마의 산물이지, 미리 준비한 지혜의 산물이 아니다.


더 서늘한 것은, 그렇게 만들어진 완충재조차 오래가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안정기가 길어지면 사람들은 완충재를 답답하게 여기고 서서히 걷어낸다. 그러면 다음 파동이 온다. 개인은 생애주기를 통해 어렵게나마 평정심을 배우지만, 사회는 그 배움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지 못한다. 완충재라는 제도는 사회의 기억을 물질화한 것인데, 그 기억조차 세대가 지나면 휘발된다.


인간은 바벨탑을 쌓듯 파동이 없는 세상을 만들려 한다. 그러나 매번 무너진다. 무너지는 이유는 하늘이 노해서가 아니다. 관성을 멈출 신호를 스스로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사는 그 신호를 들었다. 목적을 놓치지 않았기에, 낡은 수단을 미련 없이 버릴 수 있었다. 파동은 피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진폭은, 우리가 얼마나 자주 스스로에게 "이제 됐다"고 물을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참고문헌


Arthur, W. B. (1989). Competing Technologies, Increasing Returns, and Lock-In by Historical Events. The Economic Journal, 99(394), 116–131.

Åslund, A. (1995). How Russia Became a Market Economy. Washington, DC: Brookings Institution Press.

Bloch, E. (1986). The Principle of Hope (N. Plaice, S. Plaice, & P. Knight, Trans.). Cambridge, MA: MIT Press. (Original work published 1954–1959)

David, P. A. (1985). Clio and the Economics of QWERTY. American Economic Review, 75(2), 332–337.

Dornbusch, R. (1976). Expectations and Exchange Rate Dynamics. Journal of Political Economy, 84(6), 1161–1176.

Feldman, G. D. (1993). The Great Disorder: Politics, Economics, and Society in the German Inflation, 1914–1924.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Kornai, J. (1980). Economics of Shortage. Amsterdam: North-Holland.

Minsky, H. P. (1992). The Financial Instability Hypothesis (Working Paper No. 74). Levy Economics Institute of Bard College.

North, D. C. (1990). Institutions, Institutional Change and Economic Performanc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Wiener, N. (1948). Cybernetics: Or Control and Communication in the Animal and the Machine. Cambridge, MA: MIT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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