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철학자 메를로퐁티 (Maurice Merleau-Ponty 1908-1961)는 신체가 우리 생활의 기초라고 말한다. 그리고 순수한 의식이란 없고 의식은 신체에 담겨있기 때문에 뇌나 신체의 손상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악화 시킨다고 말한다.
몇 일전 각국 정치 지도자들의 건강에 대해서 당부한 글을 썼다. 사실은 모두 내 문제에서 비롯된 생각들이었다. 나는 실력이 아주 좋은 운동 종목을 가지고 있었다. 한 때는 명상 같은 정신 수련에 의한 결과라는 오해를 받을 정도였다. 그런데 사실 그 이면에는 슬픈 과거가 깔려 있다. 그 동안 이념이나 종교적 광기와 대립해 온 세월들, 정신 질환을 앓는 지인들, 점점 정신 질환이 늘어가는 사회 등등과 대립하면서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키워 온 운동들이었다.
이튼 스쿨의 운동장에서 자신의 승리는 이미 만들어졌다는 웰링턴 공작의 명언이나 카르타고는 반드시 멸망 시켜야 한다는 말로 연설을 끝맺은 로마의 정치가이자 군인인 카토가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 전투중에는 절대 먹고 마시지 않았다는 일화등을 마음속에 박아 놓았다. 하지만 너무 마른 체격을 벌크업 시키기 위해 운동을 소홀히 했던 적이 있는데, 그만한 댓가를 치루고야 운동의 소중함을 다시 깨우쳤다. 청년기에는 운동과 경제적 수입을 동시에 얻기 위해 육체 노동도 꽤 했던 것 같다. 몸을 움직이는 것은 남는 것이 꽤 많다.
이튼 스쿨에 관한 명언을 한 사람을 넬슨이라고 했더니 인공지능이 웰링턴이라고 교정해 준다. 그리고 두 사람을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 정말 그런가?-
정신을 구하는 몸— 스포츠와 정신건강
지도자, 민중, 그리고 생활체육
이형춘(Lee Hyeong-chun)
서문(序文)
인간은 몸을 가진 존재다. 그러나 현대 문명은 점점 더 몸을 필요 없게 만드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농경시대, 산업시대를 지나 정보화시대, AI시대로 접어들면서 인간의 신체는 갈수록 설 자리를 잃고 있다. 그 결과는 심각하다. 세계 각국에서 정신질환자 수가 급격히 늘고 있으며, 이 흐름은 지도자들에서부터 일반 민중에 이르기까지 예외 없이 관통하고 있다.
필자의 지론은 단순하지만 명확하다. 관념적으로 살면 정신병과 직결된다. 몸을 쓰지 않는 삶은 뇌를 내면으로 향하게 만들고, 그 에너지는 불안, 강박, 편집, 망상으로 바뀐다. 반대로 몸을 움직이는 삶은 인간을 현실에 닻으로 붙들어 맨다. 이것은 개인의 건강론이 아니라 문명의 문제다.
제1장: 지도자들의 신체와 정신— 총기(聰氣)의 소멸
필자는 오랜 세월 매스컴에 등장하는 세계 지도자들의 얼굴을 주의 깊게 관찰해왔다. 시진핑, 푸틴, 트럼프, 김정은— 이 네 사람의 공통점은 신체를 정치적 이미지로 활용한다는 점이다. 푸틴의 유도, 시진핑의 수영, 김정은의 승마, 트럼프의 골프. 그러나 퍼포먼스로서의 신체와 실제 신체의 생명력 사이에는 결정적인 간극이 있다.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총기(聰氣)다. 눈빛에 깃든 정신의 긴장감, 살아있음의 신호. 총기가 있을 때 지도자는 계산하고 억제하고 균형을 잡는다. 그러나 총기가 꺼지기 시작하면— 노화든, 고립이든, 질환이든— 계산 대신 충동이 남는다. 두려움, 과대망상, 편집증. 그리고 그것이 폭력적 정책으로 분출된다.
이는 단순한 추측이 아니다. 우크라이나 침공을 전후한 푸틴의 얼굴 변화, 특정 도발 시기 김정은의 부어있는 안색— 지도자의 신체는 정책의 전조다. 몸이 무너지면 정신이 무너지고, 정신이 무너진 권력자는 전쟁을 선택한다.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이념과 종교다. 이념적 확신과 종교적 광신은 그 자체로 정신병리학적 증상에 가깝다. 현실 검증 능력을 마비시키고, 비판적 사고를 차단하며, 집단의 동질성을 강요한다. 관념의 요새에 갇힌 지도자는 몸의 현실감각을 잃고, 이념의 논리만으로 세상을 재단한다. 이것이 지도자가 신체 건강을 유지해야 하는 이유이며, 동시에 이념과 종교에 의한 인지 왜곡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제2장: 민중의 정신— 관념의 바다에서 표류하다
지도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현대 사회의 일반 시민들도 점점 더 관념의 세계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SNS는24시간 자극을 공급하면서도 몸의 현실감각을 마비시킨다. 스마트폰 속 세계는 생생하게 느껴지지만, 실제 몸은 하루 종일 의자에 앉아 움직이지 않는다.
필자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 충격을 받은 장면이 있다. 도시에서 온 동기들이 기초적인 운동조차 제대로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입시에 청춘을 바쳤다. 그러나 공부도 특출나지 못한 채, 몸도 잃고 자신의 가장 빛나는 시절을 소진해버렸다. 이것이 한국 입시교육의 비극이다.
입시로 길들여진 뇌는 시험 답안 쓰듯 세상을 본다. 정해진 답, 권위의 승인, 이분법적 판단. 그 결과 운동장에서 배워야 할 것들— 균형감각, 실패를 통한 회복력, 몸으로 느끼는 타인과의 관계— 을 전혀 학습하지 못한 채 성인이 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엘리트들이 권력을 잡았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우리는 이미 목격했다.
이념과 종교의 문제도 민중 수준에서 더욱 심각하다. 종교 집단 내에서 구성원 전체가 유사한 정신적 왜곡을 공유하는 현상은 집단 정신병리의 교과서적 사례다. 폐쇄적 위계, 비판 금지, 지도자 신격화— 이 구조는 구성원의 인지를 체계적으로 왜곡한다.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이 병을 만드는 것이다. 특정 이념에 경도된 정치 집단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진영만이 옳다는 확신은 현실 검증 능력을 차단하고, 적대와 혐오를 정당화하는 정신병리적 메커니즘으로 작동한다.
제3장: 생활체육— 몸으로 돌아오는 길
해법은 거창하지 않다. 몸으로 돌아오면 된다.
강원도 횡성군에서 노인들의 걷기 활동에 보건소가 인센티브를 지급하는 정책이 시행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단순한 건강 정책이 아니다. 행동경제학적으로도, 신경과학적으로도 옳은 접근이다. 도덕적 설교보다 움직임에 대한 직접적 보상이 인간의 행동을 바꾼다.
이 정책을 확대해야 한다. 생활체육 참여에 기본소득 수준의 인센티브를 부여하거나, 공공 체육시설 접근성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것이다. 스케이트장을 예로 들면, 한국은 일본에 비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스케이팅은 단순한 유산소 운동이 아니다. 끊임없이 균형을 잡아야 하고, 방심하면 즉시 넘어지는 즉각적 피드백을 통해 뇌 전체가 현실과 연결된다. 리듬과 흐름 속에서 명상에 가까운 몰입 상태가 만들어진다.
웰링턴 공작이"워털루의 승리는 이튼스쿨의 운동장에서 만들어졌다"고 말했듯, 진정한 리더십과 정신적 강인함은 책상이 아니라 운동장에서 형성된다. 한국의 교육 개혁도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 입시와 분리된 진짜 체육교육, 몸을 통해 균형과 회복력과 공존을 배우는 교육.
이념적 편향과 종교적 광신 역시 생활체육으로 가라앉힐 수 있다. 운동장에서는 이념이 아니라 몸이 말한다. 땀을 흘리고 넘어지고 일어서는 경험은 관념의 요새를 허문다. 함께 운동하는 공동체는 이념을 초월한 인간적 연대를 만든다. 이것이 생활체육이 단순한 건강 정책을 넘어 사회 치유의 수단이 될 수 있는 이유다.
결론: 몸을 잃은 문명은 정신을 잃는다
필자는60을 앞두고도 스케이팅, 사격, 웨이트 트레이닝을 꾸준히 한다. 정신적 트러블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몸을 쓰는 것은 단순한 건강 관리가 아니라 현실에 닻을 내리는 행위이며, 관념의 과잉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일이다.
세계 지도자들의 눈빛에서 총기가 사라질 때 전쟁이 시작되고, 민중의 몸에서 움직임이 사라질 때 집단 광기가 자란다. 이념과 종교는 몸의 현실감각을 잃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관념의 감옥이다. 생활체육은 그 감옥의 문을 여는 가장 단순하고 가장 근본적인 열쇠다.
몸을 잃은 문명은 정신을 잃는다. 그리고 정신을 잃은 문명은 스스로를 파괴한다.
이형춘| 지정학·철학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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