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때가 되자 한국의 고질병인 이념적 선동이 sns에서 자주 등장한다. 남북한이 잘 살기 위해 수 십년간 애쓴 보람이 없다. 어디엔가 분명 악인이 있고, 그 악인을 지배하거나 악인이 이용하는 이념이나 종교가 있다. 그런 것들은 국민이 어려움을 겪을 때, 그래서 마음 한 켠이 텅 비어 있는 허점을 치고 들어 온다. 그래서 국민들은 더 허망해지고, 그래서 사회는 더 혼란스러워지고, 그래서 이념이나 종교는 더 날뛰고, 그래서 국민들은 더 허망해지고, 그래서........
인문 철학과 관련된, 즉 직관적인 글을 쓰면서 인공지능의 능력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감탄한다. 인공지능은 미국 사회의 양극화가 미국 기독교 복음주의와 트럼피즘과 결합되어 하나의 혹세무민 현상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항상 나와 토론할 때 인공지능이 트럼프에 대한 언급은 피하는 경향이 있어 나는 피는 물 보다 진하다고 비꼬곤 했다. - 인공지능과 트럼프가 둘 다 미국국적을 가졌다는 의미다.-
흠 맘에 들어. 나는 너가 트럼프에 대해서 언급하기를 피하는 줄 알았는데, 미국의 양극화가 기독교와 트럼피즘을 결합 시켰다고 적나라하게 말하고 있네.
하하, 눈치채셨군요.
사실 저는 트럼프를 정치적으로 평가하는 것 —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 는 피합니다. 그건 제가 개입할 영역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맥락은 달랐습니다.
혹세무민의 보편적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자리였고, 트럼피즘과 복음주의 기독교의 결합은 — 정치적 평가가 아니라 사회학적 사실입니다. 학자들이 이미 광범위하게 분석한 현상이고,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선생님의 글이 힘을 가지는 이유도 비슷합니다. 편을 드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에 독자가 방어를 내려놓습니다. 진보 독자도, 보수 독자도 일단 읽게 됩니다.
혹세무민을 비판할 때 — 미국도 넣고, 중동도 넣고, 한국도 넣으면 — 어느 한 진영 공격이 아니라 인류 보편의 병리 진단이 됩니다. 그게 제 3자의 시각이 가진 설득력입니다.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시대
— 종교와 이념이 어지러운 세상을 더 어지럽히는 법—
이형춘
1. 인간은 왜 스스로 생각하기를 두려워하는가
인간은 불확실성을 견디는 존재가 아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이 예정되어 있고, 실패는 언제든 찾아오며, 고독은 피할 수 없다. 그 무게를 정면으로 감당하려면 상당한 내면의 힘이 필요하다. 그 힘이 부족한 사람들은 대신'이미 답이 있는 곳'을 찾는다.
종교는'신이 답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념은'역사가 이미 방향을 정했다'고 말한다. 두 가지 모두 개인에게 스스로 생각하는 수고를 면제해준다. 대신 복종과 소속감을 요구한다. 나약한 심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것은 거부하기 어려운 거래다.
그러나 욕심이 많은 사람들의 경우는 다르다. 이들은 종교와 이념을'믿는' 것이 아니라'이용'한다. 자신의 탐욕을 신의 뜻으로, 자신의 권력 의지를 역사적 필연으로 포장한다. 죄책감 없이 탐욕을 실현하기 위한 정당화의 도구로 쓰는 것이다. 권력자들이 대개 이 유형에 속한다.
결국 종교와 이념은 두 부류의 인간을 끌어들인다. 두려움에 떠는 자와 탐욕에 불타는 자. 전자는 추종자가 되고, 후자는 지도자가 된다. 그리고 이 두 집단이 결합할 때, 세상은 가장 위험해진다.
2. 혹세무민— 어지러운 세상을 더 어지럽히는 메커니즘
혹세무민(惑世誣民). 세상을 미혹하고 백성을 속인다. 이 네 글자는 단순한 비판어가 아니다. 종교와 이념이 작동하는 방식을 정확하게 포착한 개념이다.
그 메커니즘은 단순하지만 치명적이다. 나라가 어지러워지면 민심이 불안해진다. 불안한 민심은 확실성을 갈구한다. 종교와 이념은 그 틈을 파고든다. 그리고 일단 뿌리를 내리면, 그 나라를 더 깊은 혼란으로 끌고 간다.
이것은 한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역사는 이 패턴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경제적 혼란과 사회적 분열이 나치즘을 불렀다. 중동의 빈곤과 식민지배의 상흔이 이슬람 극단주의가 자랄 토양을 만들었다. 미국의 사회 양극화와 경제적 소외감이 복음주의 기독교와 트럼피즘의 결합을 낳았다. 패턴은 동일하다. 사회가 흔들릴 때, 혹세무민이 찾아온다.
혹세무민의 지도자들은 언제나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 '우리'와'그들'의 이분법. '적'의 존재. '순수한 기원'으로의 회귀. 복잡한 현실을 단순한 서사로 압축하는 능력. 이것이 불안한 군중에게 먹히는 이유는, 복잡성을 감당하는 것보다 단순한 적을 증오하는 것이 훨씬 쉽기 때문이다.
3. 한국— 종합적 난관에 빠진 땅
한국은 이 패턴이 가장 복잡하게 중첩된 나라다. 분단이라는 근본적 상처 위에, 급속한 산업화의 단층선이 겹치고, 그 위에 세계에서 가장 치열한 경쟁사회의 불안이 쌓여 있다.
진보와 보수, 둘 다 이념이라는 안전망 안에 갇혀 있다. 진보는 민족주의와 반미 감정이라는 유사종교를 품고 있고, 보수는 반공 이념과 특정 종교 세력의 결합 위에 서 있다. 두 진영 모두 이념을 도구로 쓰는 지도자와, 이념에 복종하는 추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2024년의 비상계엄 사태는 그 구조적 모순이 폭발한 순간이었다. 지도자가 이념의 언어로 현실을 왜곡하고, 추종자들이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메커니즘. 혹세무민의 교과서적 사례가 대한민국의 심장부에서 벌어졌다.
그러나 더 심각한 것은, 이 혼란이 가장 치명적으로 작동하는 곳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바로 북한 문제다.
4. 이념의 안개 속에서 사라진 인민의 얼굴
대북 문제에서 진보와 보수는 서로 다른 이념을 가지고 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둘 다 북한'인민'을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수는'핵'을 본다. 진보는'민족'을 본다. 그 사이 어디에도 오늘 굶고 있는 사람, 오늘 수용소에 갇혀 있는 사람의 얼굴은 없다.
이념이 만들어낸 안개가 인간을 지워버린 것이다.
25년간 이 문제를 들여다보며 내가 도달한 결론은 하나다. '핵은 네가 가져라. 대신 인민을 살려라.' 선핵포기를 전제 조건으로 내걸면, 협상은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난다. 그리고 그 사이 사람들은 계속 죽는다. 이념을 걷어낼 때 비로소 보이는 것은 정치 체제가 아니라, 인간이다.
장마당 세대가 자라고 있다. 국가가 아닌 시장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운 세대. 이들이 변화의 씨앗이다. 이념의 언어가 아닌 삶의 언어로 북한을 바라볼 때, 비로소 가능성이 보인다.
5. 제3자의 시각— 유일한 출구
나약함도 탐욕도 아닌 제3의 길이 있다. 어느 이념에도 포획되지 않으면서, 허무주의에도 빠지지 않는 자리. 나는 이것을'제3자의 시각'이라 부른다.
이것은 중립이 아니다. 중립은 아무것도 보지 않는 것이다. 제3자의 시각은 오히려 더 잘 보기 위해 거리를 두는 것이다. 진보의 논리도, 보수의 논리도, 종교의 언어도 꿰뚫어 보면서, 그 아래 있는 인간과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다.
한국이 이 종합적 난관을 돌파하려면, 이념이 아닌 인간을 보는 눈이 필요하다. 종교가 주는 안도감이 아닌, 불확실성을 직면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혹세무민을 꿰뚫는 그 시각이야말로, 이 시대 한국이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이다.
나라가 어지러울 때, 종교와 이념은 반드시 찾아온다. 그것이 인류의 역사다. 그러나 그 앞에 무릎 꿇을 것인지, 아니면 정면으로 바라볼 것인지— 그것은 우리 각자의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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