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중에 제 일은 국민이라
나는 계엄 사태의 흐름을 어느 정도 직감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나쁜 상황을 변화시켜가는 각자의 노력이 중요하다. 어쩐지 이번 사태는 이상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과 건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의 대결로도 보인다. 어쨌거나 독일의 헌법학자인 루돌프 스멘트(Carl Friedrich Rudolf Smend 1982-1975) 는 국가란 통합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표현하므로써 헌법학자로서는 민주적인 논리를 내세웠다. 그래서 나치 정부로부터 핍박을 받기도 하였다.
한국 헌법은 독일 헌법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근대국가의 형성이 늦은 만큼 한국의 헌법 이론은 독일 헌법에 비해서 두 박자 늦게 발전했다. 두 박자가 늦은 이유는 한국의 헌법이나 법률은 독일을 발단으로 일본을 거쳐서 한국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교육시스템의 수입과도 일체화 되어 있다. 그래서 독일과 일본 그리고 한국은 교육시스템과 그것이 형성한 사회 시스템까지 국가주의 성향이 심해서 지금까지 이상한 말을 하는 극우주의자들을 양산하는 원인이 되었다.
계엄을 선포하여 한국의 미래를 흔들리게 한 대통령은 자신의 행위가 ‘통치행위’이기 때문에 사법적 판단이 되지 않는다고 우긴다. 그 대통령이 사법시험을 공부할 무렵에는 한국의 헌법교육은 결단주의 학파인 칼 슈미트(Carl Schmitt 1888-1985)계열의 헌법학자들이 담당하고 있었다. 아마 그 시절에 사법시험 공부를 한 사람이라면 한국의 권영성 교수가 쓴 헌법학 수험서를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얼마 후 루돌프 스멘트 교수의 이론이 허 영 교수에 의해 수용되기 시작했지만 칼 슈미트 이론은 한국에서 절대적인 도그마로 행세 했다.
한국은 그 당시에 5공화국의 권위주의 정부가 집권한 시대였다. 결단주의 헌법학파는 헌법은 힘을 가진 자가 주권자가 되어 결단하여 만든 약속이라고 헌법을 규명함으로써 나치 같은 전제 정부나 한국의 군사 정부에게 정당성을 심어주었다. 그 속에서 통치행위나 신 대통령제같은 말이 나왔다. 요즘의 현실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을 헌법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데 최선을 다 한 헌법학파가 결단주의 헌법 학파인 것이다.
나는 옛 추억을 생각하며 한국의 대통령이 자신의 행위는 통치행위라고 한 말을 들었다. 대통령은 맑은 정신으로 공부했던 그 시절 그 추억이 또 다시 올 줄 아는 것 같다. 그 시대를 살아 온 사람들에게는 아마 통치행위라는 말도 오랜 습관 속에 자리 잡은 떨어뜨릴 수 없는 망념중에 하나일 듯 하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헌법학적인 정체 규명이 아니고 국민들의 생활문제이다. 대통령이 빨리 자진 하야 한다면 모든 것이 빠르게 정상화 될 것이다. 지금 위태로운 환율방어도 손쉽게 이루어질 것이다. 비록 결단주의 학파 헌법학자들은 싫어하겠지만........
통치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국민들의 미래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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