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삶을 영원한 시간속의 한 부분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절망과 불안에 발목을 잡혀 헤어나지 못할 것 같다. 원래 시간이란 것은 영원했었는데 자신의 생명이란 관점으로 해석을 하기 때문에 항상 바쁘고 이루어낼 일이 생기는것 같다.
시간을 받아들이는 관점은 크게 두 가지가 있는 것 같다.
아름다운 젊음이 얼마나 남았는가.
이다지도 속절없이 세월이 갈 줄은
향락을 구하는 자 어서 찾아가거라.
내일을 믿을 수는 없다
르네상스 시대의 플로렌스 영주 로렌조 일 마니피코의 노래다. 목숨이 붙어있는 한은 최대한 향락을 누릴것을 결심한다.
한 편으로는 현세의 불안과 고통을 인정하며 내세를 생각하는 많은 종교사상들은 인간의 짧은 생명의 시간을 우주 시간의 영속성속으로 몰입시켜 주기때문에 끝없는 희망과 자기성찰의 여유를 줄 수 있는 것 같다.
오스트레일리아의 92세 할머니가 노력해서 박사학위를 땄다는 내용이다. 마니피코와 같은 삶의 자세라면 이처럼 덧없는 일도 없을 것 같다. 쓰디쓴 인내의 노력에서 달디단 열매를 얻겠다고 했을때 무엇을 얻었을까를 잠시 생각해볼만한 삶이다.
가끔 팔자좋은 친구들이나 팔자가 억센 친구들이 공통적으로 행복과 희망을 찾아서 방황한다. 그런데 언젠가 스케이트를 타다가 잘 탈려고 하는 것 보다 속절없이 타는 것이 스케이트 실력을 늘려준다는 것을 알고 좀 감동했다. 혼자있는 시간에 알게된 사실을 함께 있는 시간에 망각해 버리는 문제가 있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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