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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4월 10일 수요일

말/ 몽테뉴


사랑과 온기대신 이익과 승부가 담겨있는 말은 비록 정의롭고 합당한 말이라도 있는 것 보다 없는 것이 나을때가 많은 것 같다. 말을 많이하는 정치인들서부터 가까운 이웃들의 말을 듣고 있으면 옳기는 하고 공감은 하지만 웬지 듣고 나면 불쾌한 기분이 드는 말을 듣고는 상심과 앙심을 품는때가 누구나 있을 법하다.

신속 응변의 재주를 발휘함은 기지에 더욱 알맞는 일이고, 완만 침착하게 처리해 나감은 판단력에 더욱 알맞는 일인가 싶다. 그러나 준비할 여유가 없으면 완전히 벙어리 구실을 하는 사람과, 여유가 있어도 말을 더 잘하는 데에 보탬을 얻지 못하는 사람은 다 같을 정도로 비정상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카시우스는 미리 생각해 둔 바 없이도 말을 더 잘했고, 근면보다는 요행의 덕을 많이 보았으며, 말하다가 흥분하게 되면 도리어 그것이 그에 이롭게 되었다고 한다. - 중략 - 또 이런 일도 있다. - 나는 내가 찾을때에는 나를 발견하지 못하고, 나의 판단력의 탐구에 의해서보다도 우연에 의해서 더 많은 나를 발견하곤한다. 

나는 이렇게 써 나가다가 어떤 뿌리깊은 생각을 말해 놓을지도 모른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는 지지리 못났고 나에게만 깎고 다듬어진 것임을 각오한다. 겸손의 말은 그만하기로 하고. 이런 말은 각자 그 힘에 의해 따라 나오기 마련이다.) 나는 그것을 까맣게 잊어 버려서 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했는지를 모르고, 오히려 남이 나보다도 먼저 발견해 주는 일이 가끔 있었다.  

- 몽테뉴 -

가까운 지인이 겸손할려고 애쓰기도 하고, 베풀려고 애쓰는 의도와는 다르게 남들이 자신을 시기하고 투기하며 미워한다고 하소연을 한다. 고등학교 시절 구제 불능의 말썽꾸러기 급우가 있었다. 언젠가 지역 기관장의 인격적이고 고매한 연설끝에 "겸손의 개소리는 반상회나 가서 하시지"하는 촌철의 일타(一打)를 혼잣말로 날린적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아이들도 마음이 없는 가식의 말에 저항하고 싶을때가 있지 않나 싶다.

말은 마음의 증거로서 표현되기도 하지만 탈레랑의 표현처럼 자신의 마음을 숨기는 도구로서 작용하기도 한다. 때로는 마음보다 부풀려지기도 하고, 마음보다 축소되기도 하며 왜곡되기 쉬운게 말이 아닌가 싶다. 때문에 말이 많으면 본의 아니게 그 말을 듣는 이를 진실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사기로운 세계'로 인도하는 불상사가 생기기도 한다.

몽테뉴는 정념과 실천주의, 극기주의 사상을 품었다고 한다. 후에 고대의 회의적인 사상에 심취했고, 인간의 한계를 생각하며 겸허하게 사실과 진리를 탐구해 내려고 애썼다고 한다. 말년에 그는 인간존중의 사상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의 사상은 루소, 데카르트, 파스칼등의 사상가에게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나이가 들면서 자신이 자신을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이 어느 정도 생길때가 되서야 말도 진실에 가까워지고, 부끄러움이 없으며, 또 그런 그의 말은 점차 이익과 승부를 떠나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말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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