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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 26일 토요일

논리실증의 중요성 / 마하

나는 왜 한반도를 풍비박산으로 만든 비합리적인 이념과 종교같은 관념의 세계를 비판하게 됬는지 생각해보니 그 세계를 너무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렵고 힘든 날 초합리성의 세계를 생각해 본 적이 있었던것 같다. 비합리성이 아니고 초합리성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의 이성과 의지가 기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잊지않았기 때문에 설령 내 의식이 종교적인 색체를 띈다고 해도 노력이라는 것을 중시하는 것은 변함이 없었던 것 같다. 중학시절 프랑스의 작가 앙드레지드의 '좁은문'을 읽다가 힘든 길을 의미하는 '좁은문'의 의미를 빨리 깨달았던것 같다.

현상은 관찰자와 관련되어 나타난다는 오스트리아 물리학자 마하(Emst Mach 1836 - 1916)의 말처럼 내가 그런 사람이 되지 않고서는 그런 세상을 이해못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런 사람이 되어 그런 세상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때로는 노동자로서, 때로는 학자처럼, 때로는 정치인처럼, 때로는 스포츠인으로서 변신을 시키면서 국가와 사회의 근본문제인 이념의 문제를 이해할려고 노력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아는게 참 많아진것 같다. 겸손과 오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르던때에 비교해서 그렇다는 의미다.

전 정부의 대통령을 보면서 소싯적의 고난을 이기고 성장하여 권력을 쟁취하는 과정에서 인간과 사회에 대한 공감보다는 수직적인 관점에서 비롯된 열등의식의 반동으로 대통령으로서의 중요한 목적을 잊어버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현 정부의 대통령을 보면서 굴러보지 않은 국민대다수 서민의 세계를 절대 공감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내 생각이 옳았던것 같다. 짧은 인생이지만 내가 간간히 경험한 세계이기 때문에 국가의 본질적인 문제를 생각하는 입장에서 정치지도자의 입장을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기도 하다. 이해하거나 옳다는 호의적인 입장이 아니고 스스로에게 냉철하지 못한 대통령들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 하층 서민이자 노동자인 내 삶이 너무 힘든 탓이기도 하다. 그리고 많은 국민들의 마음이 나와 같을 것이다.

마하는 이론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절대공간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사유의 가치가 없는 무의미한 것이므로 배제시켜야 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기독교철학으로 생각해보면 13세기 영국의 스콜라철학자 오컴은 복잡하거나 불필요하고 지지부리한 명제보다는 단순하고 간결한 명제가 진리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인간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무조건 인간은 원죄가 있으며 노력과는 상관없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교부철학과는 달리 스콜라철학은 의지와 이성을 중시하고 있다는 차이가 있는데, 신앙과 실증이 결합할 수 있는 여지를 스콜라철학에서 찾을 수 있을듯 하다. 어쨌든 오컴의 생각(오컴의 면도날)은 마하에게 받아들여져서 보이지 않는 것에 현혹되지 말라는 '현상주의로 발전하였다고 한다.

앞으로 한국의 정치지도자들은 이상한 세계에 의식의 발을 들여놔서 한반도를 풍비박산으로 만든 정치지도자들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할듯하다. 10여년전부터 주은래와 등소평의 노력을 통해서 매우 비현실적인 국가를 실증적인 과학강국으로 만들어가는 중국에 대해서 경이로운 생각이 들고 부러웠는데, 결과적으로 과학과 연계된 국방기술,산업과 경제, 모든 면에서 중국은 놀라운 발전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며 초라한 한반도의 자화상을 생각해보기도 한다. 그나마 산업과 과학기술분야에서 애쓰는 다수의 한국인들때문에 근근히 유지되고 있지만 '이념''종교''부패''비리,'권력'비선''공작'같은 이상한 말들이 주인이 된 정치판은 국가발전의 발목을 붙들고 늘어지는 원흉인듯 하다. 

2016년 11월 20일 일요일

정치 뒤의 정치 (Meta - politics)

공안검사는 왜 검사중에 속칭 끝발이 있었을까. 요즘 한국공안검사출신들의 권력에 대한 집착이나 실언(失言)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메카시즘의 잔상을 아주 오랫동안 가지고 있다가 그것이 소용없게 된 시대에 들어서서 방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냉전 시절의  공안 검사는 이념의 정점에 있는 권력가였다. 이념이나 종교와 같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는 이념이나 종교를 직관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자가 권력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 것들은 추상적이라서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될 수 있는 다재다능한 적용도구로서 사용되고 있었다. 마녀사냥이나 스탈린의 대규모 숙청, 메카시즘에서 보듯이 수틀리면 옭아맬 수 있는 '매우 나쁜 도구'가 됨을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사회주의 국가의 정치장교처럼 한국의 공안검사는 배후인물로서 작용할 수 있는 조건을 가졌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습성은 꽤 오래갔다.

아주 젊고 패기 넘치던 시절에 종교집단으로부터 '능멸'을 당한적이 있다. 이미 종교애 몰입하여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같은 지인과 다수의 신자들이 성직자의 지시에 따라서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처음에 분노하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념문제와 맞닥뜨릴려면 이 상황이 맷집을 키우는 좋은 훈련장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6개월을  참여했는데, 실제로 많이 유익했다. 이후 대단히 이념적이고 종교적인 정치지도자시절에 호사를 누렸다. 이념이나 종교는 상상하는데로 그림을 그리면 수많은 적과 동지를 자유자재로 만들어낼 수 있는 암상(暗想)을 떠는 좋은 도구가 됨을 여러번 입증해보았다.

한반도의 정치적문제의 근본은 그거였다. 정치 뒤의 정치를 장악할 수 있는 정치가가 없었던듯 하다. 오히려 야합하거나 종속되어 좋은 상황도 뭉개버리기 바빴으며 때로는 주체사상처럼 스스로 만들어놓고 종속당하는 괴이한 짓도 멈추지 않았던듯 하다. 항상 그래왔지만 내 자신이 물려들어간 한국의 지난 10여년을 회고해보면 주어진 일은 하지 않고 정치적 그림을 그리기 바쁜 정치판을 보면서 굉장한 문제가 있으며 더 큰 문제가 다가옴을 느꼈고 실제로 그 거대한 문제가 다가왔다. 이전 정부가 끝나면서 이런 정부가 한 차례 더 반복되면 한국의 국운은 내리막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한차례 더 반복되었다.

우파정부라서 문제가 있다는 것이 아니다. 정치 뒤에 작용하는 것들이 지나치다. 대통령이 정치를 못하거나 실수를 하면 그것을 바로잡아 줄 수 있는 시스템이나 인재가 있어야 하는데, 오히려 사익(私益)이 공익을 구축(毆逐)하면서 상황을 충분히 이용하여 개인의 이익을 챙기기에 바빴다. 이 번 기회에 이전 정부서부터 숨은 그 놈을 찾는데 전력을 다 해야 한국의 미래가 바로 설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2016년 11월 12일 토요일

주니어(Junior)

주니어가 통치자가 된 남북한이 모두 리더쉽의 부재(不在)를 앓고 있는듯 하다. 북한은 김정일 국방위원장때부터 한국은 전정부부터 리더쉽의 문제가 심화된 것으로 생각된다. 시니어와 주니어의 구분은 혈통적인 면에서도 그렇지만 시니어가 일으킨 조직이나 공동체에 편승한 주니어가 조직이나 집단 내부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져온 측면도 생각해볼때 국가나 재벌과 같은 기업경영모두에서 창조적인 입장에 있지 않았던 모두를 주니어라고 봐야할 것 같다.

주니어는 시니어보다 조직과 자신을 일체화시키는 능력이 부족한듯 하다. 시스템자체가 자신이었던 시니어의 각오와 인내심을 넘어설 수 없는듯 하다. 정치학자 골만(Goleman)은 조직의 효과나 업적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리더 개인의 능력함양과 원초적 감동 리더쉽(primal leadership)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리더가 될려고 하는 개인은 자신을 잘 파악하고 확신과 도전의식이 있어야 하며 자기관리를 철저히 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도전의식과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의미인데, 이들은 학문적인 연구활동이나 황태자교육등을 통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닌듯 하다. 그냥 불확실하고 위험한 공간에 내팽개쳐져 살아남는 가운데 터득해가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 도덕성이나 윤리성, 공감과 애정등이 성장해가는 리더의 마음에 뿌리를 내려야할듯 하다. 위험을 각오하거나 안일함이 가져다주는 나른한 행복을 거부하고 살았던 사람들의 마음은 나름 인간의 경지가 아니었던듯 하다.

2016년 11월 4일 금요일

숨은 그 놈 찾기 / 전문가

한창때 몸도 아프고 부친문제로 1년여를 세상과 단절되어 지낸적이 있었다. 좋은 것도 먹지 못하고 뛰고 운동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 후 부친은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나는 병이 치료된 엇갈린 운명이 되었다. 부친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은 이유로 이념문제에 대해서 한 소리 하겠다고 잠재의식속에 결심을 꼭꼭 담고 나왔다. 그런데 하필이면 종교랑 랑데뷰하는 사건이 생겼다. 굉장히 훌륭한 성직자를 본 적도 있었고, 사이비종교의 교주와 같은 행태를 보이는 자를 본 적도 있었는데, 아마 내 마음속의 허전함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의식이 맑아져 그쪽 사람들의 세계에 발을 디뎌놓았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원래 책을 좋아해서 다방면의 지식이 많았던 이유로 최대한 학리적(學理的)인 관점을 가지고 관찰하고 시험하며 분석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당시 이념이나 종교와 인간의 심리관계를 파악하는데 영향을 준 소설책은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나르치스와 골드문트][크눌프]와 같은 작품과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니코스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미칼레스대장][골육상잔][그리스도 최후의 유혹]같은 작품들이었다. 그런거 보면 어떤 종교에서 신자들을 외부의 교양서적과 완전히 단절시키려는 시도를 이해했다. 신자들이 아는 것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교세확장에 도움이 안될것이다.

이 세상에는 전문가들이 많다. 나는 실제로 초능력자들을 많이 보았던것 같다. 40년동안 지게차를 운전한 지게차의 달인, 모든 것을 상업적 마인드로 계산하여 그 분야의 귀재가 된 상인, 고시3관왕, 쪽집게학원강사, 천재시인, 힙합을 끝내주게 추는 청년, 하루 20시간 알바로 년봉 5천만원을 번 사람, 턱걸이 기네스북 기록자, 김연아 선수, 남극을 걸어서 횡단하는 사람, 그 중에 최고 나쁜 놈은 사이비교주인것 같다.

이들은 앉아서 남을 관찰하고 남을 움직이는 전문가다. 정신적인 허점을 보이면 치고 들어올줄 안다. 어차피 그 일만 한 숙련된 심리전문가이기 때문에 비숫한 능력이 없으면 말려들어가기 일쑤다. 그래서 시민들에게 인문학적이고 철학적인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고, 꼭 사이비종교가 아니더라도 강하고 객관적인 의지가 없으면 구원을 위한 종교조차도 의타적이고 맹목적으로 기대는 상황이 생긴다. 한반도에서는 이념이 그 이상의 교조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으니 이념과 종교로 풍비박산이 난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민들은 각자가 숨어있는 자신을 찾을 수 있어야 하고, 드러나지 않게 시민들의 의식을 지배할려는 심리전문가들을 엄정하게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협동과 공리(共利)에 의해서 움직이는 사회가 더욱 발전할 것같다.  

2016년 10월 29일 토요일

사회시스템의 건강

꽤 오랜 기간동안 주로 몸을 움직이는 일을 많이 했다. 그리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생각을 했다. 한때 사람들을 잘 모르는 정치인이 말했던 것처럼 사회안전망을 갖춘 복지국가가 사람들을 게으르게 만들까 하는 문제를 항상 화두삼아 보았다. 그런데 현실을 그렇지 않았다. 내 자신만해도 안일한 삶을 싫어하기에 격한 일터로 다니는걸 좋아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랬다. 많은 재산과 학벌을 가지고도 험한 일터를 다니는 사람들도 많았고, 어려운 사람들은 어려운 사람들데로 근로의 즐거움을 느낄 줄 알았다. 언젠가 창업을 하더라도 일을 즐거워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병들지 않은 다른 세계가 있다는 신뢰감을 주었다. 그리고 내수진작으로 경제를 활성화 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긴것도 물론이다,

이제 즐거운 이야기는 그만하고, 근로하다가 힘들면 지난 시간을 회고해보곤 한다. 아련히 떠오르는 불운한 기억들은 주로 종교와 이념에 관한 아주 불쾌한 기억들이다. 직관이라는 명분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에 제압당하여 갈길을 헤메고 다닌 많은 시간들이 후회스러웠다. 정확히 표현하면 그것들과 맞대응하느라고 허비한 시간이 안타까웠다는 의미다. 사회의 어느 한 부분이 골병이 들거나 정신이 골병든 정치지도자가 등장을 해도 사회시스템이 굳건하면 단기간에는 별로 문제 삼을 것이 없어보인다. 이런 굳건한 사회시스템은 사회시스템 자체가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형성된 것이어야 하고, 민주화가 제대로 되고 다양성을 인정 받아야 만들어지는 시스템이다. 권력이 한 부분에 집중되면 액튼의 말처럼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경험을 하게되는데, 그 이유는 시스템의 치유기능이 망가지기 때문이다.

한 때 어느 종교단체를 유심히 살펴보다가 성직자의 카리스마가 신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가를 생각해 보았는데, 신자들의 다양한 지식과 다양한 경험이 부족할수록 카리스마 있는 성직자의 정신에 포획 당하는 현상을 보았다. 아마 국가도 그러할 것이다. 보수든지 진보든지 '추종자'나 '빠'같은 맹목적인 신뢰가 있는 국가는 골병이 들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자주 언급했지만 이념과 종교가 지배하는 한국사회는 교육개혁부터 시작해야 한다. 요즘 젊은이들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고 말하지는 못한다. 사회가 흘러가는 모습을 보면 부정적인 사회교육의 역기능도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어른들의 영향을 받아서 이미 망가져 버린 젊은이들의 정신도 생각을 해봐야 한다. 비합리적이고 맹목적인 정신이 지배하는 사회시스템 안에서 이상의 날개를 펴는 일은 가당치도 않다.

불교나 기독교에서의 오랜 논쟁중의 하나는 구제나 은총을 받는 길이 '남의 힘을 빌어 이루느냐' 아니면 '자신의 힘으로 이루느냐'하는 문제인데, 아마 기독교에서 전자의 입장은 캘빈(Calvin)이나 루터(Luther)의 입장이고 후자의 입장은 카톨릭의 예수회입장으로 전해져 오고 있는듯 하다. 역사적인 종교사상가였던 파스칼은 프로테스탄트에 좀 가까우면서 구제받을 예정인 인간은 미리 신에 의해 정해져 있고 그 예정자가 정말로 구제받기 위한다면 노력을 해야 한다고 절충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만약 종교적인 입장에 있으면서도 노력이 없다면 어떤 문제가 생길까 하는 답은 이미 한반도에서 종교나 이념이 보여주는 현상으로 정확한 답이 나오는 듯 하다. 생각이 없는 맹목적인 종교적 세뇌속에서 사회시템 자체가 골병이 들어가고 있는 모습을 경험하고 있는듯 하다. 무조건 기도하면 될 일이 아니다. 특히 정치지도자는 홀로 설 수 있는 외로움을 견뎌야 한다.추종자가 있는 것은 비극이다. '빠'가 있는 곳에 '까'가 있다. 담백하고 객관적이며 중립적인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정신적인 균형이 필요한데, 많은 의지가 있어야 할 듯하다. 모범이 되는 정치지도자와 시민들, 그리고 건강한 사회시스템이 갖춰질 날을 기다려 본다. 

2016년 10월 28일 금요일

한반도의 종교와 이념의 미래 / 마빈해리스

몇 번 밝힌 바 있지만 종교와 이념은 상당히 유사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것들을 각자 믿는 이들에 의하면 상대방, 이념은 종교 종교는 이념이 대단히 적대적인 영역에 있을 것이다. 자신들이 믿어서 행복한 만족감에 기여하지 않고 오히려 방해하는 것이라면 배척해야 하는 것이 인간 본능상 당연한 것이다. 여기서 서로는 영역싸움과 세력싸움이 일어나게 되는데, 자본주의 이념은 좀 더 자유로운 영역속으로 종교를 포용하는 관대함이 있는 반면에 마르크시즘은 '과학적'이라는 명분으로 실증할 수 없는 종교적인 영역을 배척하게 된 것은 당연하다. 물론 상대성의 원칙에 따라서 종교를 포용하지 않는 마르크시즘을 종교가 배척하는 것도 당연한듯 싶다. 한반도는 이러한 대립구조가 뚜렷하게 표면으로 나타나는 공간이기 때문에 종교와 이념, 이 두 가지 문제가 해결해야 할 모든 이슈를 포식하는 부작용이 있었고 이런 문제로 국가가 발달장애를 일으킨 것은 유감이다.

유명한 인류학자 마빈해리스(Marvin Harris)는 이런 문제를  [OUR KIND]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소련의 국가정책은 종교를 지배 계급이 대중을 혼미케 하기 위해 퍼뜨리는 값싼  아편이라고 보았던 마르크스의 견해에 입각해 있었다. - 중략 - 그렇다면 소련이 붕괴되기 직전까지도 스스로를 태연히 무신론자라고 공언하기를 거부한 이가 적어도 1억명이 되었던 것은 무슨 까닭일까? 무신론자들이 신자들에 비해 특별히 잘살도록 보장하는 데 소련 체제가 실패한 것도 그 해답이 될 것이다.  - 중략 - 소련 경제는 소비자의 생필품 생산에 관한한 극도로 비효율적이었다. 고기, 야채, 과일의 만성적 결핍, 적절한 주거의 고질적인 부족, 그리고 조잡한 재화와 서비스로 인해 소련 체제는 비신자들에게 무신론적 입장을 견지하는데 드는 심리적 비용을 보상할 만큼 충분히 배려하지 못했다. 

- 중략 -

소련과 달리 미국에서는 신자나 비신자나 모두 자유롭게 전향 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의 무신론은 오랫동안 <하느님을 믿지 않는 공산주의>와 연계되어 생각되어 왔고, 그래서 미국의 적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천명하는 적개심 비숫한 것이 함께 따라 다녔다. 미국에서 종교를 공공연히 비난하거나 비웃고 무신론적인 믿음을 대놓고 옹호하는 사람들은 고용주나 상사로부터 미움을 받고 사회적으로 소외될 각오를 해야 하며, 근본주의적 신앙이 우세한 지역에서는 심지어 신체적인 학대를 받을 위험도 무릅써야 한다. 동시에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천명하는 법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조세 제도는 종교기관을 간접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 중략 -

미국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과 무신론에 대한 두려움을 연계시키는 것이 틀리지 않다면 냉전의 종식은 미국과 소련에서 신자의 비율을 수렴 시킬 수 있을 것이다. 과거 소련이 자유 발언 운동의 일환으로 교회에게 선교의 권리를 부여했다면, 소련의 신자 수는 분명히 늘어날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공산주의자들이 집과 교회를 앗아가리라는 두려움이 미국인들을 더 이상 지배하지 않는다면, 신앙과 예배를 자유롭게 비판할 미국인들은 더 많아질 것이다.

- 중략 -

장기적으로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단 한가지 뿐이다. 종교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신앙과 불신앙 그 자체의 내적인 가치가 아니라, 컴퓨터 사회가 궁극적으로 발생시킬 특수한 정치 경제적 시스템과 관련된 신앙과 불신앙의 내적인 가치라는 점이다.

현대 사회가 다양성을 띄게 되면서 사람들에게 만족감을 주는 것들도 다양해진다. 하지만 냉전시대의 구태의연한 국가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한반도에서는 남북간의 이념대립이라는 문제와 연계되어 꽤 오랫동안 종교와 권력이 융합하여 사회발전을 가로막는 문제가 있었는데, 지난 10년은 그런 문제의 절정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든다. 단언컨데 시민들이 추구하는 다양한 가치에 호응하지 않는 이념이나 종교는 그 자체가 쇠망하든지 아니면 그것들이 지배하는 사회 자체가 쇠망하든지 하는 결과를 보게 될 것같다. 북한을 보고, 지금의 한국을 보면 답이 나오는 일이다. 

꽃 지는 팔도강산

어렸을때 흑백티브이로 본 드라마중에 [꽃 피는 팔도강산]이라는 프로가 있었다. 한참 경제가 용트림하던 시절에 희망과 웃음소리 가득한 드라마속 주인공들의 모습은 아직도 아련한 추억으로 남는다. 권위주의적 정치권력이라도 좋았다던 추억들은, 생각하기에는 너무  먼곳에 있는 정치적관점과는 전혀 다른, 상승하는 경제적인 현실이 좋은 추억으로 자리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그 인연이 꼬리를 문 곳에서 국가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러잖아도 10여년 전부터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정치가 아닌 이념적이고 종교적인 정치의 위험성에 대해서 많은 시간과 기회비용을 들여서 알리고 설득하는 중이었는데, 애쓴 보람이 없다. 10여년째 국기(國氣)를 흔드는 종교적인 손에 한국이 흔들리고 북쪽에서는 이런 상황을 좋다고 비난하고 웃고 있다. 누군가가 내 처지를 보고서 눈이 한개 달린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는 눈이 두개 달린 사람이 등신이라고 하더라.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내 눈에는 남북한이 제정신이 아닌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