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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8일 토요일

경쟁과 기여 그리고 통일 / 게잡는 노인

선의의 경쟁은 나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국지적이고 지엽적이고 이기적인 목적을 띄게되면 경쟁은 나쁜것이 된다. 시장경제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경쟁에서 이긴 승자의 태도가 생산물이나 세금을 통해서 사회공동체에 기여를 하기때문이다. 아마도 미국사회에서 기업경쟁의 최종승자인 MS나 구글같은 기업들과 기업주의 기부행위나 좋은 근로환경등의 기여가 없었다면 미국사회는 시장경제의 중심국가의 지위를 잃어버리고 다른 경제적 이념을 모색해야 할지 모른다. 한때 카네기는 기업경쟁에서 승리하고 나서 많은 비난을 받았고 미국사회가 자신의 승리에 그렇게 달가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고 한다. 결국 카네기 재단의 설립같은 많은 기부행위가 있고나서부터 평화로운 삶을 살게되었다고 한다. 자신의 성공이 무엇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는지를 깨닫는 기업인이 많은 미국사회는 빈부격차가 다소 있어도 승부에는 순응하는 성향이 있는 시민들덕에 그다지 격변적인 사태는 없는 편인듯 하다. 

후진국이나 신생국의 경쟁시스템이 제대로 발동하고 못하고 부정부패나 지하경제의 활성화로 왜곡되게 되는 이유는 국민각자가 승리의 바탕이 된 사회에 대한 인식과 기여에 대한 생각이 없기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러시아 같은 시장경제의 역사가 짧은 국가도 비숫한 상황을 겪는듯 한데, 정치적인 민주화와 더불어 경쟁보다 더 깊은 의미를 인식할 수 있는 시민이 많을수록 시장경제는 성공을 할 수 있는듯 하다. 핀란드와 같은 국가가 훌륭한 복지국가라고는 하지만 시장경제의 도덕을 완전히 내면화시킨 바탕위에서 이루어진 복지국가라는 점에서 세계적인 칭찬을 받는 사회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는듯 하다.

한 청년이 바닷가에서 게를 잡는 노인을 만났는데, 대바구니에 잡은 게를 집어넣고 뚜껑을 덥지 않고 내버려둔것을 보았다. 한 바구니에는 게가 한마리밖에 없었는데 뚜껑은 닫혀있고 한 바구니에는 게가 여러마리 있는데 뚜겅이 열려 있었다. 의아한 청년이 그 이유를 묻자 게가 바구니에 한마리만 있으면 기어나올려고 애쓰지만 여러마리가 있으면 나갈려고 애쓰는 게를 다른 게들이 끌어잡아 당긴다고 하였다.

시장경제의 도덕을 내면화시키지 못한 국가의 경쟁시스템은 게들의 견제와 같은듯 하다.

사실 혼자 있으면 할 일이 많아지고 아이디어도 많이 나오고 창조적인 태도를 유지 할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함께 있어서 힘든 사회라면 그 사회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레드오션적 경쟁심에 대해서 재고를 해봐야 할듯하다. 이곳 저곳 많은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쓸데없는 일로 경쟁을 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호의관계보다는 적대관계가 우월하다. 남보다 앞서는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기여를 하기 위해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한다면 능력은 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때가 많았다. 원래 모든 기업은 100퍼센트 글로벌기업을 꿈꾼다. 직원들 중에 쓸데없는 경쟁심으로 동료를 폄하하거나 권위주의적인 태도를 취하는 직원이 있다면 그 직원이 분명히 기업의 에너지를 분산시켜서 기업을 무너뜨리는 역할을 하게 될것이다.

국가도 마찬가지인듯 하다. 지역주의나 분파주의로 경쟁을 하는 정치인이나 권위주의적인 정치인이 있는 국가의 미래는 없는듯 하다. 한 편으로 세계적인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는 이가 어떤 지역의 민심을 얻기 위한 행보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갈길이 참으로 먼 땅에 살고 있다는 비관적인 마음이 들곤 했다. 어린 시절 시골에 살면서 다른 지역을 방문했다가 그 지역의 아이들과 싸움을 했던 생각이 난다. 우리 ㅇㅇ지역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길래 일어서서 생각하고 있다고 빈정거리다가 싸움이 붙었다.

제대로 된 시민사회를 겪어본 역사가 없는 북한과 한국이 사회나 국제윤리를 내면화 시킬 시간이 없었기에 분단의 역사가 이렇게 오래가나 하는 생각이 든다. 통일을 지향하기는 하지만 냉정히 생각하면 장기간의 시회적 윤리를 개선시킬수 있는 기간이 없으면 급변 사태와 더불어 후유증이 엄청날 것으로 생각된다. 러시아처럼 공산쿠데타가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예상도 해봐야 한다. 고착화된 생각이 어디 가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통일보다 중요한 것은 북한의 안정적인 개혁과 남북협력인듯 하다. 그것을 위해 필요한 기간은 결코 짧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분단이 지속될 수도 있겠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남북협력이나 통일이나 뭐가 다를게 있겠느냐 하는 생각이 든다. 이념문제를 가지고 바구니속의 게들처럼 살다가 게잡이 노인같은 타국의 이익이 되는 행위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2016년 10월 7일 금요일

한국사회시스템의 위기

"보이지 않는 것들에 충실하다." 오랫동안 북한문제나 이념문제에 관한 언급을 하면서 한국사회에 대해서 느낀 점이다. 많은 것이 그랬다. 근로의 현장에서는 열심히 근로해도 경제적인 여유를 얻을 수 없는 현실이 그랬고, 창업의 길을 모색해봐도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삶의 태도가 미래를 안전하게 보장할수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알려지지 않는 범죄가 많고 부정부패가 만연되어 있다. 국정감사현장을 보면 과연 공부를 한 사람들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안알려져 있다가 밝혀진 사실들, 미성년자 운동선수성폭행 같은 사건들을 보면 한층 더 그렇다.

이런 한계에 부딪히게 된 이유는 한국사회가 합리성에 대해서 소홀히 한 결과인듯 하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자 노력한 바가 없었다는 의미다. 오랫동안 이념과 종교가 사회시스템을 유지하는 바탕이 되어왔기때문에 급변하는 세계에 좀 당황하는 면이 있는듯 하다. 북한은 아예 폐쇄시스템을 고수하기로 작정을 했다. 두렵기 때문이다. 정보통신의 발달로 사회시스템 자체가 개방적이고 합리적으로 자정(自定)해가는 과정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이념에만 충실했던 탓이다.

사회는 불합리한 점을 사회구성원들이 생각하고 개선의지를 가지고 협동적으로 애써 노력할때 발전을 한다. 그런데 그 과정을 뛰어넘었다. 기도하면 뭐든지 이루어질 일이 아니다. 형태는 다르지만 이념을 신앙삼아 기도하기는 북한은 한층 더 지독했다.

그러나 중국의 연결성은 불이익으로 작용하고 말았다. 어느 한 폭군의 결정은 당장 혁신을 중단시킬 수 있었고 또 실제로 그 같은 일들이 자주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와 대조적으로 유럽의 지리적 분할상태는 서로 경쟁하는 수십 또는 수백개의 독립 소국과 혁신의 중심지들을 만들어냈다. 그 중에 어떤 국가가 특정 혁신을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또 다른 국가가 그 일을 했고, 따라서 이웃 국가들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남에게 정복당하거나 경제적으로 뒤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유럽의 장애물들은 정치적 통일을 막기에는 충분한 것이었지만 기술과 아이디어의 전파를 중단시킬 수는 없었다. 그리고 중국에서처럼 유럽 전역의 유통망을 한꺼번에 차단할 수 있는 폭군은 존재하지 않았다. 

- Jared Diamond의 [GUNS,GERMS AND STEEL]중에서 -

중국의 과학기술이 유럽에 뒤쳐진 이유를 설명하는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분석이다. 한반도에도 이념이라는 폭군이 존재하고 있었고 권위주의적인 통치는 또 그 이념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합리적인 개선의지는 어디에도 없었다. 개선하고자 하면 이념논리로 귀착된다. 개선이란 명목으로 이념을 내세우는 일도 빈번했다. 실사구시의 정신을 갖고자 스포츠에 열중하고 공학공부를 하며 근로현장에서 일을 하다가 실소를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내가 처해 있는 특수성때문에 전선없는 싸움을 하는것 같은 생각이 들때가 한 두번이 아닌듯 하다. 이전 글에서도 밝혔지만 먼저 실용적인 개혁을 하지 않는 국가는 어떤 형태로도 정복당한다. 제래드 다이아몬드는 그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한반도에서는 어떻게 하면 협동과 권리와 의무를 국민과 정치인에게 합리적으로 납득시킬 수 있을까 하는 큰 과제가 있다. 

중국의 북한에 대한 자아도취

꽤 오래전 경황이 없던 시절에 도움을 준 신앙인이 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보는 앞에서 도움을 주고 나서 도움을 받는 사람 입장은 생각안하고 여기저기 소문을 내고 다니면서 자신의 우월감과 호의감을 과시하고 다녔다. 이후로 갚을래도 거절하고 다른 도움을 줄래도 거절하는 바람에 좀 헷갈린 적이 있었다. 때때로 어설프게 남의 일에 깊숙히 간섭을 하고 들어오는 오지랍도 있었는데, 그 순수한(?) 믿음과 자아도취적 속성을 은근히 한 번 더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다. 하필이면 얼마후 종교적인 정치지도자시절에 비릿한 음성행위로 정신적인 고생을 막심하게 했는데, 그 믿음과 자아도취적 속성은 오랫동안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는 중이다. 


중국이 북한의 김정은 암살계획을 거론하고 나섰다는 소식이다. 북한은 중국의 안전에 위협이 될만한 근거도 주지 않았는데 중국은 왜 북한의 통치자를 암살할려고 할까. 우월적 혈맹관계의 지위에서 북한을 내국(內國)으로 만들겠다는 의도가 보인다. 오랫동안 중국이 후견국가처럼 생각되도록 흘러온 현대사의 안좋은 뒤끝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왜 이런 소리가 안나오나 했다. 우려할만한 일이기도 하고, 중국의 병아리계획이 서서히 거론되기 시작하는듯 하다.

친중파였던 장성택을 이용해 북한을 연착륙시킬려고 했다는 중국 정부관계자의 말도 있었다고 하는데, 사실 무근한 이야기같다.장성택을 처형한 것은 '감히'중국의 자존심을 건드린 행위라는 의미일 것이다.  중국은 처음부터 그럴생각은 없었다. 연착륙은 정치적, 경제적으로 부드러운 예속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할 바에는 오랫동안 구상했던 중국의 북한통치를 실행으로 옮기겠다는 의도로 봐야할 것 같다. 

2016년 10월 1일 토요일

덕밍아웃 / 몰입의 즐거움

몇일전 전기요금에 포함된 시청료때문에 한국전력에 연락을 했다. 15년동안 티브이를 안봤는데, 몇개월전부터 시청료가 다시 부과되기 시작했다. 무심코 전기요금을 납부하다가 살펴봤더니 모르고 시청료를 꽤 납부했다. 시청료를 반환받았는데, 꽤나 특이한 사람으로 여기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티브이를 볼 시간이 없었다. 항상 경제적으로도 풍족하지 못했고 보통 사람들이 누리는 여러가지를 잊고 살지만 항상 바빴다. 무엇인가를 항상 생각하면서 살았다. 내가 '덕후'였기 때문이다.

쉬는게 나쁘다는 소리가 아니다. 누구에게나 긴장을 풀고 시시껄렁한 소설을 읽고 소파에 기대앉아서 허공을 쳐다보거나 티브이를 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인생의 다른 영역들과 마찬가지로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연 적정선에 머물 수 있느냐이다. 수동적 여가가 문제로 부각되는 것은 그것이 자유시간을 보내는 유일한 방편으로 쓰이는 순간부터다. 그런 습성이 뿌리내리면 생활 전반이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 중략 - 티브이를 남달이 많이 보는 사람은 좋은 직장에도 못 다니고 인간 관계도 원만치 못한 경향을 보인다. 이 문제를 독일에서 본격적으로 조사한 적이 있다. 이 연구에서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은 몰입경향을 많이 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티브이를 많이 보는 사람은 몰입 경험을 적게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 Mihaly Csikszentmihalyi의 [Finding Flow]중에서 -   

한국에서는 어떤 일에 열정을 넘어서 광(狂)적으로 열중하는 사람을 덕후라고 한다. 주로 취미생활과 관련해서 사용하는 말인데, 화성인 바이러스라는 티브이프로그램에 인형을 사람처럼 사랑하는 인물이 소개되고 나서부터 덕후라는 존재가 부각되기 시작했다.

http://zum.com/#!/v=2&tab=home&p=0&cm=newsbox&news=0682016100133354636

시간이 나면 운동에 열중하곤 하는데, 하는 짓을 누군가가 보면 거의 덕후수준이라고 할 만하다. 건강과 집중력을 키우기 위해서, 즉 진짜 덕후질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운동이기 때문에 운동을 덕후질 하듯이 열중한다. 나는 이념문제나 남북한 문제에 관해서 덕후다. 수십년동안 생각이 떠나 있다가도 돌아오는 문제이며 그 문제가 인생의 가장 큰 목적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없어도 항상 바쁘다. 희생과 고민이라기 보다는 몰입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과제를 가졌다는 생각도 들기 때문에 목적 자체도 실용적이지만 개인적인 계산속도 실용적인 면이 있는듯 하다. 그래서 갈등보다는 조화와 협력을 많이 이야기 하곤한다.

여가 기회를 충분히 제공하여 공동체의 붕괴를 모면하려는 현상은 로마 제국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서양 최초의 역사가인 그리스의 헤로도투스는 [페르시아전쟁사]에서 소아시아의 리디아 왕인 아티스가 잇따른 흉년으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백성의 관심을 호도하기 위해 이미 삼천 년 전에 구기(球技)를 도입했다고 전한다. "기근에 대처하기 위해 마련한 전략은 하루 종일 경기에 몰두하게 하여 식욕조차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먹을 것은 시합이 없는 그 다음날에야 나왔다. 이런 식으로 십팔년을 끌었다."

 - Mihaly Csikszentmihalyi의 [Finding Flow]중에서 -   

북한정부는 이런 식으로 60년을 끌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철 지난 스포츠강국 운운하는 것에 대해서 말을 많이 했던것 같다. 언젠가 북한의 사격선수와 스스로 여가시간에 몰입하여 연습하는 나와 사격경기가 이루어진다면,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서 자신할 수 없다면 북한의 집단 논리는 내 자신의 개인 논리를 극복할 수 없는 사태가 올 수 있는듯 하다. 그래서 자발적인 몰입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중이다. 아마 그래서 북한은  내 구글 블러그를 방문했을듯 하다.  

사실 덕후의 길은 어렵다. 몰입의 즐거움을 위해서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 그렇지만 포기하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으면 됬다고 생각한다. 물론 한국도 덕후들의 몰입을 활용할 수 있는 사회시템으로 빨리 개혁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2016년 9월 30일 금요일

신문스크랩

20대의 아주 어려운 날에 신문스크랩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다. 신문에 유익한 부분을 오려서 일기장에 붙여놓곤 했다. 특히 지금도 자주 들춰보는 내용은 혼자서 썰매를 끌고 남극점을 다녀온 프랑스의 로랑스 드 라 페리에트라는 여성에 관한 기사였다. 당시 허약한 몸과 마음을 한 번도 극복해 본 적이 없는 내 자신을 몸시 부끄럽게 만든 기사였다. 그날 이후로 남극을 혼자 횡단한 다른 여성의 체험기나 남극을 횡단한 육십대 후반의 노익장을 과시한 탐험가의 기사를 보면서 마음을 추스리기도 했는데, 아마 육체적인 강인함에 매료되었던 것보다 고독함을 극복한 인간승리에 매료되었던 것 같다.

경구의 대가인 리히텐베르크(1742 - 1799)도 어느 해 그 해의 신문을 모아서 스크랩하여서 책처럼 읽어보려고 하였는데, 1년을 그렇게 하고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이제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것이다. 애쓴 보람이 없다. 그 속에는 50퍼센트의 잘못된 희망과 47퍼센트의 틀린 예언과 3퍼센트의 진실밖에 없었다."

무려 1700년대에 언론의 진실성을 문제삼은 이 말이 꽤나 오랫동안 인용이 되곤 하는데, 같은 기사를 놓고서 좌파적 시각과 우파적 시각의 상반된 시각으로 신문기사를 쓴 것을 양쪽 성향의 신문을 비교해가면서 읽으면 신문기사와 진실의 정체를 알게 되는듯 하다. 가치가 담긴 기사가 진실이기는 어려운 듯 하다. 그런데 남극을 다녀왔다는 기사는 100퍼센트 진실이었다. 

충동과 의지

히틀러는 꽤나 채식에 열중하였고 동물을 사랑하였다. 처칠은 꽤나 말썽꾸러기인 학창시절을 보냈다. 폭풍전의 고요함과 폭풍후의 고요함을 경험한 두 사람의 인생행보는 역사적으로 크게 다른 결과를 보여줬다. 가끔은 선행을 이야기하고 선행을 행하고 있으나 불안한 사람이 보이고, 충동적이고 악해보이나 비련의 동정심이 보이는 사람이 있는데, 되도록 깊이 간파하여 상대를 하곤 하였다.

의지력이 강한 인간은 자신을 선(善)과 악(惡)의 주체로 끌고가는 능력이 뛰어난듯 하다. 아마 에너지와 열정이라는 도구를 마음대로 휘두를수 있는 능력이 있는듯 하다. 반면에 뜻밖에 유약한 인간이 문제를 일으키고 여론의 돌을 맞는 장면은 많이 볼 수 있는듯 하다. 엘리트범죄가 심각한 결과를 불러오는데도 장기적이고 지능적이며 냉철하고 강한 의지의 콩껍질에 쌓인 악이기 때문에 평가하기 매우 어려운 면이 있는듯 하다.

2016년 9월 26일 월요일

이성과 정치적 자율성 / 칸트

언젠가 가능한 사람을 상대하지 않는 일을 할려고 의도했던 적이 있다. 그래서 엔지니어일을 할려고 노력하고 공학공부를 할려고 노력했다. 이런 저런 이유로 타인과 자신에게서 무엇인가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기계나 육체적인 일과 대화하는 것보다 불합리한 인간과 대화하는 것은 다소 곤혹스러운 면이 있었던것 같다. 그런 모순이 가장 두드러진 사회가 이념문제에서 비롯된 분단된 한반도의 현실이라는 사실에 많이 놀랐던 적이 있었다. 예를들면 평등을 지향하는 공산주의 이념으로 건국된 북한이 매우 불평등한 사회라는 사실, 가장 안보를 중시하는 현실에서 안보를 가장 저해하는 내부의 적, 방산비리같은 문제가 뜻밖에 일사분란하게 척결되지않는 한국사회는 건국기반과 국가의 입지가 그렇게 튼튼하지 않다는 점과, 그런 문제로 외세에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국가임을 스스로 용인하고 있는 불합리성이 있다는 문제가 보인듯 하다. 

도대체 북한은 핵을 통하여 강성대국을 건설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선후를 바꾸어서 생각해보면 국가존립의 최저조건에서 꺼내든 비장의 카드라는 생각, 부패를 저지르는 한국의 엘리트들은 생존조건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심약한 사람들이라는 불합리성이 해석되기도 한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본의아니게 관찰해본 경험에 의하면 안일함을 구하는 나약한 심성을 가진 사람들이 쉴새없이 작은 이익들을 구하고 부패의 가능성을 많이 보여주었던 것 같다. 

칸트는 인간은 도덕적으로 자율적인 존재라고 말한다. 칸트는 모든 개인에게 이성이 있고, 그 이성을 토대로 도덕적인 결정을 한다고 말한다. 칸트는 국가생활에서 시민은 정치적 자율성을 발휘하게 되는데, 시민이 선출한 대표자들이 보편적 이성을 사용하여 만든 헌법이나 법률에 복종하는 자유를 정치적 자율성이라고 말한다.시민의 도덕적 자율성은 도덕적인 인간들이 제대로 된 대표자를 선출하여 국가 구성원들의 이익과 입장을 대변하는 헌법과 법률을 만듦으로서 도덕적 자율성과 정치적 자율성이 일체화 된다고 말한다. 

만약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서 이상한 정치방향을 몰고간 지도자를 선출했다면 그것은 국민의 도덕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듯 하다. 언젠가 준법보다 경제적인 성과의 우위를 염두에 둔 국민이 대국민 사기극에 걸려들었다는 사건들을 생각해본적이 있는데, 이성적이지 못하고 철학없는 국민이 주어진 정치적 자율성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다는 결론이 나왔다. 생각해보니 이 문제는 시민사회의 기본교육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듯 하다. 이성, 철학, 절제가 많이 필요한 사회에 살고 있는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