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일의 성질이나 종사하는 근로자의 연령대로 봐서 매우 침착(沈着/가라앉아 붙어버림)되어 있을 법한 모둠(group)에서 일을 한 적이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처음 만남의 시간은 절망에서 시작되었다. 마키아벨리즘의 전통이 뿌리깊은 북한과 한국사회에서 출세를 하였건 출세를 못했건 모든 모둠안에서의 인간관계는 갈등과 경계로부터 시작된다.
한번은 인권상의 문제가 있을 법할 정도로 관리자와 근로자, 근로자 상호간에 심각한 갈등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잠시 오래 있다보면 보이지 않던 이면의 인간의 선하고 바른 모습들이 새록 새록 발견되었다. 문제는 활력을 끌어낼 수 있는 근거가 없었던 것 같다. 서로의 마음을 긍정적으로 유도하기 위해서 모두가 힘을 합쳤다. 심지어 나 자신도 몸의 컨디션이 안좋아 어두운 낮빛을 보일것 같으면 내가 어두우면 주변도 어두워지므로 조퇴를 하고 습관처럼 화진포 앞바다로 떠났다.
겨울의 바닷가, 바로 지척에 어두운 삶들이 대치하고 있지만 쌍쌍이 찾아 온 연인들, 혼자서 꽃을 들고 셀카를 찍고 있는 젊은이, 이런 활력들이 어떤 정치지도자의 우둔한 판단에 의해서 모두 무너져 버린다면 하는 비감한 생각도 들곤 했었다. 김일성 주석의 별장이었다가 이승만 전대통령의 별장으로 바뀐 화진포의 성을 보고 있자면 정치지도자의 판단이라는 것이 한올 한올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추측하게 하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지난 정치지도자들의 공이나 과실이 활력으로 척도 삼음을 알 수 있는듯 하다.
마르크스의 과학적사회주의는 원래 자본가와 노동자의 갈등관계를 전제로 한 이념이기 때문에 지구촌을 전란(戰亂)으로 몰아넣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이념인 것으로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담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경제가 움직인다는 자본주의 이념역시 만만치 않은 갈등요소를 지니고 있는듯 하다. 아담스미스는 경쟁들이 맞물려서 경제적세계가 돌아가고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경제적 원동력을 만드는 주된 힘은 활력이다. 아마 활력을 끌어내기 위해서 경쟁이 필요하다고 한 것이 경쟁에 촛점이 맞춰지는 후세인들의 오해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사회주의 체제는 자본주의에 대해서 많은 오해를 하고 있었던듯 하다.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서 경쟁을 하는 아비규환으로 자본주의 세계를 전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굉장히 오랫동안 사회주의는 떳떳했다. 그런데 북한도 그렇지만 한국도 자본주의의 진면목을 활력으로 보지 않고 경쟁으로 보았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북한이나 한국이나 활력에 촛점을 두어야 개혁의 답이 나올것 같다. 이념이 죽은 세계가 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방향을 잃고 헤매는 것 같은데, 활력에 방향의 지표를 설정해야 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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