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브라질올림픽무렵에 내 구글블러그에 북한의 함경남도 원산에서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었다. 원산항입구의 휴양시설인지 원산과 통천사이 시중호역근처의 별장시설인지 모르지만 중대사안과 연루되어 있음이 분명했다. 내가 난수방송에 대한 언급을 해서 그런지, 금메달획득에 실패한 북한선수단장을 질타하는 최용해의 불합리함을 생각하며 스포츠강국의 꿈을 접으라는 오지랍 넓은 참견을 해서 그런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상당히 진지하고 근본적인 문제가 얽혀있는 것은 사실인듯 하다.
오래전 사격훈련과 스케이팅훈련을 시작하면서 일본의 영향으로 북한과 한국사회를 오염시킨 사무라이방식을 도입해보았다. 일본 첩보원학교인 나까노학교의 지옥훈련방식을 모델로 뛰어보았는데, 별 실익이 없었던것 같다. 무엇보다 그렇게 훈련해서 금메달을 딴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 자신의 복지를 희생해서 타인의 복지까지 희생하는 것보다 나 자신과 타인의 복지까지 함께 챙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사상이 발전해가면서 지옥훈련은 덧없는 일이 되었다. 그리고 사격훈련은 조금 , 스케이팅훈련은 음악을 들어가면서 하였다.
아마 인간의 감정적 내면을 생각하지 않고 노력과 깡으로 뭐든지 될 일이면 북한은 세계적 강대국이 되었을 것이다. 일본도 그런 성향이 있고, 부작용이 서서히 어떤 결과를 얻어가는 중인듯 하다. 물론 한국도 그렇다. 일본의 인권의식은 경제적 선진국이라는 위상에 어울리지 않게 후진적이다. 위안부문제같은 과거사문제를 생각하는 수준을 봐서도 그렇다. 그 이면에는 인간을 기계적으로 보는 사무라이정신이 사회의식의 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3년동안 한국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나 노인분들이 많은 일터에서 일해보았는데, 기계적 인간관은 여전했다. 과거 군사문화의 영향인지 성마른 노인분들의 체질상의 문제점인지 모르지만 근로현장의 유연한 모습은 찾기 힘들었다. 젊은이들이 일하지 않을려는 이유는 당연했다. 육체적으로 힘든 문제가 아니라 경직된 지옥같은 세계가 두려운 것이다. 간혹 선지자같은 최고관리자나 동료연장자분들이 있기도 하지만 전통과 습관이 그렇게 쉽사리 개선되는 것은 아닌듯 하다.
우리가 왜 열심히 운동연습을 해야 하는지, 우리가 왜 열심히 일해야 하는지에 대한 철학적 근본을 탐구해봐야 한다. 언젠가 마윈의 평전속에 세상은 게으른 사람이 발전시킨다는 어구가 있었다. 물론 게으르게 살라는 의미가 아니고 생각으로서 쓸데없는 수고를 덜라는 의미인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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