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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3일 금요일

아웃소싱 / 폴 크루그먼

IMF구제금융을 받던 다음해부터 일자리가 없어서 방황하던 사람들에게는 역설적으로 좋은 일자리의 기회가 있었다. 바로 '공공근로'라는 것인데, 많지 않은 근로 시간에 많지 않은 임금을 받았지만 그래도 여유있는 모습으로 일을 하던 지인들이 생각난다. 그 즈음서부터 공무원준비생들의 시험과목인 행정학을 오랫동안 지도했는데, 구조조정으로 비롯된 아웃소싱에 대한 내용을 수업하면서 공공재의 아웃소싱과 정부규모 축소, 그리고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생각을 피상적으로 토로했던 생각이 난다. 아이러니하게도 보수진영에서 싫어하는 '좌파정부' 시절인데, 구제금융덕에 신자유주의 이념은 멀리 멀리 퍼져 나갔다.

시간이 흘러 실제로 공공재의 성격을 가졌으나 아웃소싱으로 민간에 맡겨진 분야에서 일을 한 적이 있었다. 근로자들은 저임금으로 힘든 일을 하고 있었고, 성과를 보는 생산업체와는 달리 저렴한 비용을 무기로 응찰하여 일을 수주 받은 아웃소싱업체는 장비 하나 풍족하게 쓸 수 없었다. 지방정부에서 마련하여 불하해준 기계장비가 부족하여 관리자들과 얼굴을 붉히는 경우도 있었는데, 우리집은 가난하여 정원사도 가난하고 가정부도 가난하고 그랜드 파아노밑에는 돈벌레가 먹을 것을 찾아서 방황하고 있다고 말하는듯한 어떤 재벌의 엄살과는 달리 정말 춥고 배고팠다. 근로자들과 관리자는 성과라는 공동목표가 없는 탓인지 어느때고 싸울 태세가 되어 있었고 조회시간은 관리자의 불평으로 시작하고 근로시간은 근로자들끼리의 의미없는 신경전으로 하루가 갔다. 나중에 근로자들의 노력과 최고관리자의 노력으로 자율적이고 행복한 근로환경을 만들자는 노력이 있어서 좋아지긴했지만 아웃소싱업체라는 서자의 태생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해 겨울 처음으로 따스한 실내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들을 스스로 내팽개치고 안전화를 신은 것에 대해서 처음으로 후회해본 것 같다. 하지만 그 고생이 어디 나뿐인가 하는 생각으로 견뎠던것 같다.

비용절감에 집중했던 수출주도형 경제구조가 낳은 문제점을 아웃소싱업체의 현실에서 볼 수 있었는데, Paul Krugma 교수의 [The Accidental Theorist]에 나와있는 내용이다.

세계화의 배후에서 작용하고 있는 추진력에 대해 내가 예로 들기를 즐겨하는 구체적 사례는 최근에 급성장하고 있는 짐바브웨의 야채수출 부문이다. 근래들어 하라레 인근의 채소 재배업자들이 런던시장에 신선한 야채를 공급하는 일에 뛰어들었다. 야채는 수확되자마자 즉각 공항으로 운송되고 비행기로 밤새 날아 히드로 공항에 도착해 다음날 아침이면 슈퍼마켓의 선반에 올라가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수출 산업의 성패 여부는 최소한 다음 세 가지 사항에 달려 있다. 첫째, 저렴한 항공운송이다. - 낡아빠진 구식 보잉 비행기라면 현대의 교역에서는 부정기로 다니는 증기 화물선이라고 할 것이다. 둘째, 현대적 통신이다. - 야채는 주문을 받고 공급된다. 그러니까 주문 메시지는 통신 체계가 잘 갖추어진 선진국들에서나 가능한 방식으로 재배 농부들에게 전달되지 않으면 안된다. 끝으로 당연한 일이지만 이 사업은 영국 시장의 개방성에 달려 있다. 만일 수입 쿼터제나 고율관세가 매매를 가로막고 있다면 거래는 있을 수도 없는 것이다.

이 모든 사항에 대한 소감이 어떠하신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을 보자 야채는 "고유 농법" - 즉 기계 사용은 거의 없이 손으로 재배되고 수확되는 노동 집약적 농법 - 으로 생산된다. 결과적으로 야채 재배농은 이 업종에 거의 전적으로 매달려 있는 짐바브웨 경제에 새로운 일자리를 별로 창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가격 경쟁력이 있다. 노동자들이 받는 임금이 낮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그래도 행복하다. 다른 일을 할 기회 자체가 거의 없는 것이다.

아, 하긴 그렇구나. 노동자들은 흑인이고, 그들의 영국인 고객들은 백인이지. 뿐만 아니라 흑인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있는 농장주들도 신생 독립국 정권하에서 그대로 눌러앉아 살기로 작정한 식민지 정착민 백인들이고 .      

수출주도형 경제의 문제점, 내수(內需)를 소홀히 한 문제, 비정규직의 저임금, 기계적능률성 추구로 인한 근로자경시등의 문제점을 일본이 먼저 겪었지만 일본은 그 문제를 개선할려는 노력이 있었던것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전통적으로 단체주의적 성격이 강한 일본 사회는 사회문제나 국가문제에 대한 대처도 공리(共利)를 우선시하는 성향이 있는것 같다. 지난 10년동안 보아온 한국보수정부의 경제운영을 되짚어보면 통계와 성과는 있었다고 강변하는데, 현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관념적 이념정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어디에서도 국민소득 30000달러의 위용을 찾아 볼 수 가 없었고, '국민의 삶'에 촛점을 두었다는 생각은 전혀 나지 않았다. 결국 피날래는 온갖 부패와 퇴락(頹落)으로 처참하게 장식했지만 많은 교훈이 될 법도 하다. 비싼 댓가를 치룬 교훈이지만.

이야기가 또 근본적이고 포괄적으로 어긋나고 있는데, 이제는 비용절감에 촛점을 두어 근로자들의 주머니를 털어 국가라는 거대기업의 성과를 보는 방식을 벗어나야 한다. '신자유주의'라는 이념보다는 근로자들의 일자리나 임금, 그리고 그에 따른 내수확장으로 인한 성장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지난 10년동안 내 자신에게도 정치적인 문제는 생계에  매우 음성적이고 나쁜 영향을 끼쳤는데, 일하여 임금을 받고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국민들이나 자영업자들에게는 정치가 마물(魔物)과 같은 존재였던 것 같다. 물론 이념문제는 그 첨병이었던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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