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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25일 토요일

중국군 93사단 / 이역

http://news.donga.com/NewsStand/3/all/20170225/83056131/1
http://hyeong-chun.blogspot.kr/2012/04/home-too-far.html

버려진 공작원들에 대한 관심이 많을때였는데, 자유중국의 반체제작가였던 백양의 넌픽션 소설인 [이역/A HOME TOO FAR]에 정서적인 도움을 많이 받았던 거 같다. 버려진 군대라는 이미지는 사라진 공작원들, 심지어는 정치적인 술수에 휩쓸려 자살하는 정보기관원이나 경찰요원들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갖게 만들기도 했다. 항상 북쪽의 고향을 그리던 나의 부친의 모습은 그런 고군(孤軍)의 모습이었던 것 같다.  

국공내전에서 국민당군은 연안전투에서 패배하자 공산군에게 밀려나 남으로 도주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때를 묘사하는 공산군측 넌픽션 소설인 두붕정의 [전사/연안을 보위하라]에는 공산군의 낙관적이고 패기 넘치는 분위기가 잘 묘사되어 있었다. 한 편으로는 국민당군이 남쪽으로 밀려나면서 대다수가 항복하고 항복하지 않은 윈난성에 바탕을 둔 이미 장군의 8군중 이국휘장군의 연대는 가족을 이끌고 뒤를 추격하던 중공군 진갱병단에 쫒겨서 굶주림과 학살에 가까운 손실을 입으며 남으로 남으로 쫒겨가는 과정이 영화로도 만들어져 눈물을 흘리면서 보았던 기억이 난다.  

남으로 패퇴하던 이국휘 장군의 부대는 미얀마와 태국접경의 정글을 거쳐서 미얀마북부에 터전을 마련하게 되었는데, 자국영토로 들어 온 침략자를 용납할 수 없었던 미얀마는 인도의 친부족 용병(이들은 포로를 잡으면 무조건 목을 자르고 본다)까지 고용해가면서 국민고군을 공격해왔다. 공산군의 진갱병단 역시 국경을 넘어 와 국민고군을 공격해 왔는데, 후퇴할 곳도 없이 가족을 지켜야 하는 고군(孤軍)의 노력은 정말 피눈물 나는 과정이였다.

이국휘 장군의 휘하에 등극보라는 사색적인 초급장교가 있었는데, 미얀마군이나 공산군과 전투를 하는 와중에 자신이 데리고 온 두 아이까지 희생(한 아이는 포탄에 죽고 한 아이는 충격으로 정신이상)되어 비감했던 군인이었다. 등극보는 그런 상황을 항상 일기에 적어놓고 있었는데, 훗날 등극보의 일기는 중국반체제작가 백양(柏楊)에게 전해져 이역(異域)이라는 처절한 일대기의 소설로 출판되게 된다. 백양은 이 소설로 인하여 대만의 국민당 정부에 반기를 든 반체제 작가로 낙인을 찍히게 되고 이 소설은 대만의 젊은이들에게 이념과 국가등에 관한 새로운 인식을 하게 만드는 바탕이 된다.

이국휘 장군의 연대가 공산군과 미얀마군을 상대로 싸우는 동안 태국에 있던  8군의 이미장군을 비롯한 국민군사령부는 이국휘와 등극보를 초청하여 대륙수복의 발판이 되어 달라고 부탁을 한다. 말하자면 싸우는 자와 지시하는 자의 격리감을 느끼는 장면이었는데, 등극보는 정글 가운데 남겨놓고온 가족과 동료들 생각에 이미 장군이 주최한 만찬의 음식에 손이 가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리 싸워도 절박한 고군을 이길 수 없자 미얀마정부는 유엔에 재소를 하게 되고 대만정부와 유엔의 결정에 따라서 철수작전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수송체계와 대만의 사정으로 모두 철수시킬 수가 없어 장교들 우선으로 비행기에 태우고 동료들과 큰 아이의 무덤을 버릴 수 없었던 등극보는 남아있게 되는데, 세력이 위축된 부대는 이리 저리 쫒겨서 정글 속에서 새소리로 대화를 대신하면서 살아갔다고 한다.

이들은 잔여분자라는 별명이 붙여졌는데, 아직도 이들의 후예를 수용하지 못하는 중국정부나 대만정부도 이념이라는 정신나간 관념때문에 오랫동안 비극을 만든 점에 있어서는 한반도와 막상막하인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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