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급진 좌파적 이데올로기 단체와 그것에 대응하는 정보기관들의 행태를 부정적으로 본 적이 있다. 양편이 적대적인 공생관계처럼 본질에 집중을 하지 않고 서로에게 끌려 다니거나 짝사랑하는 행태를 보이는 것 같아서였다. 물론 이데올로기 싸움에만 매몰되어 있다는 표현이다. 세월이 흘러도 그 문제를 붙들고 생존의 양식으로 삼을 것 같았다.
한 번은 친한 지인들이 경쟁적인 시비를 걸어왔다. 자신들과 내가 누가 출세할 것이며 누가 누가 잘 먹고 사는지 두고 보자는 시비였다. 나는 댁과 댁의 가족들이 모두 걱정없이 알콩 달콩 잘 살기를 바라는 사회가 되기를 원한다는 말로 관점을 뭉개버렸던 적이 있다.
실존주의자인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 - 1980 )는 인간의 삶의 방식은 공통된 기준이 없으며 개인은 민족과 사회의 영향을 받으면서 아니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그때마다 스스로 자신의 삶의 방식을 결정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사르트르는 국가를 국민의 동화적 통합체로 보는 독일의 헌법학자 루돌프 스멘트와 같이 진행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듯 하다. 국가와 역사를 객관적인 변증법적으로 설명할려고 했던 헤겔의 주장을 반박하기도 했는데, 세월이 흘러 사상계에서 실존주의가 대접받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어도 실존주의는 더 근본적이거나 본질적으로 삶과 역사를 설명하는 사실적인 철학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북한은 '세계화'란 단어와 많이 안 친한듯 하다. 그런면은 이웃 선진국인 일본도 그런 성향이 있는 것 같다. 전 세계를 향하여 서로 주고 받는 관계, 표현하자면 소통의 관계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는 의미다. 그 소통 속에는 경쟁도 있을 것이며 협력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양성적(+)이고 발전적인 방향으로 진행하면서 서로 발전하고 있는것 이다.
한국의 보수가 이데올로기에 치중하면서 사회를 서서히 붕괴시키는 과정이 그렇다. 원래 북한과 한국이 국력이 비숫한 대척 상황에 있을때에는 서로에게 이데올로기가 중요한 동일성의 표현이며 경쟁적 도구로서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국이 상대적으로 커지면서 새로운 목표를 찾아서 이데올로기를 포괄하는 넓은 관점을 가진 새로운 사상으로 대체해야 하는 수순을 겪어야 했는데, 그 시기를 놓친것 같다.
국가공동체와 그 속에 살고 있는 개개인은 항상 발전적이고 움직이는 양성적인 목표를 찾을 필요가 있는듯 하다. 그것은 당위가 아니고 실존에 가까운 명제이며 더 본질적인 삶의 형태인듯 하다. 언젠가 대양해군을 지향했던 적이 있는데, 대양해군이 북한의 침략을 막아낼 능력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쉽게 납득이 가는 문제다. 공산주의와 대립하는 자본주의라는 명분으로 의식의 세계를 고착화 시켜놓고 사리사욕을 탐하는 엘리트들의 정신세계는 크게 개혁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듯 하다. 역시 단순암기식 교육의 폐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일본이 퇴락의 길을 걷고 있고, 북한이 이미 퇴락했고, 한국이 끝이 보이는듯 하는 길로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 배경에는 새로운 목표를 찾지 못하는 과거 지향적인 이데올로기적인 사고가 큰 역할을 하였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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