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wered By Blogger
검색어 북한의 지리에 대한 글을 날짜를 기준으로 정렬하여 표시합니다. 관련순 정렬 모든 글 표시
검색어 북한의 지리에 대한 글을 날짜를 기준으로 정렬하여 표시합니다. 관련순 정렬 모든 글 표시

2026년 8월 26일 수요일

나는 에코 너는 나르시시스트 / 북한의 적개심

나는 어렸을때부터 나르시시스트들을 많이 봐왔다. 이념이나 종교에 심취한 인물부터 한국적 경쟁사회에서 만들어진 나르시시스트, 그리고 전쟁의 상처로 왜곡된 집안 어른들의 나르시시즘 성향까지 봐왔으므로 모든 정신 질환의 길은 나르시시즘으로 통한다는 과도한 생각까지 가지고 있었다.

 

북한은 한국이 자신들을 침략을 할 의도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정부에 대하여 적개심을 부글거릴 이유가 뭐가 있느냐는 의문이 들었다. 결국 나는 그것을 나르시시즘이란 단어와 연관시켜 판단하였다. 나는 내가 경험하고 봐 온 현상만 메아리(eco)처럼 판단하고 분석할 일이지 특히 주관적인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항상 말해왔지만 나는 북한과 한국이 평화로운 교류가 있기만을 기다린다.

 

인공지능과 토론중에 내가 이런 칼럼을 오래도록 써 온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회의감을 느낀다고 말하자 인공지능은 언젠가는 필요해서 참고할 날이 있다고 말한다.   


어느 날을 위하여


1. 적개심은 어디서 오는가


북한은 한국으로부터 특별한 도발을 당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적개심은 식지 않는다. 이 어긋남을 풀려면 먼저 "누가 무엇을 했는가"를 묻는 습관부터 내려놓아야 한다. 북한의 적대는 반응이 아니라 설계다.


뿌리는 세 갈래로 뻗어 있다. 분단과 전쟁이 남긴 정전 체제, 즉 법적으로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이라는 사실이 하나다. 외부의 적을 상정해야 내부 결속과 통제가 유지되는 독재 체제의 생존 논리가 다른 하나다. 그리고 한미연합훈련처럼 실제로는 방어적인 조치조차 침략 위협으로 선전할 수 있는, 적개심을 자원으로 쓰는 정치 기술이 마지막이다.


이 적개심은 최근 들어 감정의 영역을 벗어나 제도의 영역으로 옮겨갔다. 김정은은 2023~2024년 '적대적 두 국가론'을 선언하며 남북관계를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관계가 아니라 교전 중인 두 국가의 관계로 재정의했고, 통일 관련 기구들을 정리했다. 2026년 들어서도 이 기조는 이어져, 한국을 "가장 적대적인 존재"로 지칭하며 안보 위협 시 "완전히 파괴"할 수 있다는 취지의 발언과 함께 남북관계를 관리하던 기구를 폐지하는 조치까지 나왔다. 같은 시기 미국에는 관계 개선의 여지를 열어두는 이중적 태도를 보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는 대남 적대가 감정의 분출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조절되는 전략적 카드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2. 국가 나르시시즘이라는 렌즈


정치심리학에는 '집단 나르시시즘'이라는 개념이 있다. 자기 집단이 마땅히 받아야 할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과장된 믿음, 그리고 그 결핍에 대한 방어로 나타나는 외부를 향한 공격성. 이 틀을 북한에 대면 상당 부분이 겹친다. 실제 경제력·국제적 위상과 동떨어진 과시적 선전, 그 간극이 드러날 때마다 외부 탓으로 돌리는 습관, 경제난이 가시화되는 시점마다 오히려 높아지는 적대 수위.


다만 이걸 국가 전체의 '병리'로 뭉뚱그리는 건 위험하다. 이 서사에 실질적으로 동의할 선택지가 없는 절대다수의 주민과, 그 서사를 설계하고 그로부터 이익을 얻는 소수의 통치 엘리트는 구분해야 한다. 그러니 정확한 표현은 '국가 나르시시즘'이 아니라 '정당성 결핍을 메우기 위해 엘리트가 동원하는 나르시시즘적 서사'에 가깝다. 그리고 이 서사는 정치적 전략과 심리적 방어기제가 서로를 강화하며 굳어진 결과다. 전략만으로는 왜 이렇게까지 경직됐는지 설명이 안 되고, 심리만으로는 왜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완급이 조절되는지 설명이 안 된다. 둘이 겹쳐 있다고 봐야 전체 그림이 맞아떨어진다.


3. 교육으로 고쳐질 문제였다면


자신을 객관화하는 능력, 즉 자국을 세계 속에서 상대화해서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이 서사는 유지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지리·심리학·경제학을 골고루 가르쳤다면 달라졌을까.


북한은 실제로 역사와 지리를 가르치는 나라다. 문맹률도 낮다. 문제는 과목의 유무가 아니라 그 내용이 처음부터 객관화를 봉쇄하도록 편집되어 있다는 데 있다. 세계사도 주체사상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방향으로, 지리도 '조선반도를 중심에 둔 세계'라는 틀 안에서 다뤄진다. 같은 세계사라도 다양한 사관을 비교하며 배우는 것과 하나의 정답 사관만 주입받는 것은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


더 결정적인 반례는 통치자 자신이다. 김정은은 스위스에서 몇 년간 유학하며 서구식 정보 환경을 직접 경험했다. 지식이 없어서 적대 서사를 유지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오히려 그 서사가 체제 유지에 유리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유지하는 쪽에 가깝다. 다원적이고 비판적인 교육은 자기객관화의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정보 접근의 자유, 그리고 객관화된 인식이 실제 정치적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 책임성 구조가 함께 있어야 한다. 이 셋 중 하나만 있으면, 지식은 체제를 되돌아보는 데 쓰이지 않고 체제를 정당화하는 데 동원될 뿐이다.

4. 싱가포르라는 시도와 그 좌절


2018년, "정치는 통제하되 경제는 연다"는 싱가포르 모델이 북한판 개혁개방의 청사진으로 꽤 진지하게 거론된 적이 있다. 김정은은 싱가포르 정상회담 전날 밤 마리나베이샌즈와 가든스바이더베이를 둘러봤고, 미국 측은 회담장에서 번영하는 북한을 그린 홍보 영상까지 보여줬다. 그러나 2019년 하노이 회담이 결렬되며 "비핵화 대가로 제재를 푼다"는 거래의 틀 자체가 무너졌고, 코로나 국경 봉쇄를 거치며 개방 대신 통제가 다시 전면에 섰다.


왜 싱가포르는 되고 북한은 안 됐는가. 리콴유의 싱가포르는 정치적 반대를 억누르면서도 서구 자본과 법치·행정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유지할 수 있었다. 북한은 그만한 제도적 신뢰도, 정치와 분리된 기술관료 집단도 갖추지 못했다. 더 근본적인 차이는 정당성의 원천이다. 중국 공산당은 성장으로 정당성을 갈아탈 수 있는 관료제 정당이지만, 김씨 일가는 '백두혈통'이라는 신성화된 개인·왕조 서사에 정당성을 걸어놓았다. 시장화가 가져오는 정보 유입과 개인·지역 단위의 자율성 확대는 곧바로 그 신성성에 대한 위협이 된다. 여기에 핵 개발과 결부된 국제 제재까지 겹치면서, 북한이 감당할 수 있다고 믿는 리스크의 범위를 완전히 벗어나 버렸다.


5. 그렇다면 경제개발은 불가능한가


이념에 갇혀 있으면 경제개발은 원천적으로 봉쇄되는가. 중국과 베트남이 그 답이 '아니오'라는 걸 보여준다. 두 나라 모두 일당독재 이념 위에서 성장을 이뤄냈다. 비결은 이념을 버린 게 아니라 도구적으로 재해석한 데 있다. 이름과 정당화 논리는 유지한 채 실질 내용만 바꿔치기하는 방식이다.


북한도 이론적으로는 '주체사상'이라는 간판과 '백두혈통'이라는 서사는 그대로 두고 경제 운용 방식만 실용주의로 바꾸는 길이 완전히 막혀 있지는 않다. 실제로 밑에서부터는 이미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1990년대 대기근으로 배급망이 무너지자 장마당이 자생적으로 확산됐고, 2002년 7·1 조치와 2012년 6·28 방침처럼 위로부터의 부분적 조정도 여러 차례 있었다. 문제는 이 흐름이 일정 수준을 넘으면 매번 꺾였다는 것이다. 2009년 화폐개혁이 장마당에서 축적된 개인 자산을 사실상 몰수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시장이 개인과 지역 단위의 부와 자율성을 키우는 순간, 체제는 그것을 성장의 증거가 아니라 통제력에 대한 위협으로 읽는다.


여기서 짚어야 할 오류가 하나 있다. "1400만 주민 각자가 고정관념에 갇혀 있어서" 경직된 게 아니라는 점이다. 실제 주민들은 배급이 끊기자 곧바로 장마당을 만들어내고, 정부가 막아도 휴대전화와 환율 감각을 익혀온, 오히려 상당히 유연한 존재들이다. 경직성은 1400만 명의 심리적 관성이 누적된 결과가 아니라, 서사 변경 시 자기 권력 기반이 무너질 걸 아는 소수 엘리트가 의도적으로 유지하는 전략적 선택에 가깝다. 국가를 개인들의 단순한 합으로 보면 이 비대칭을 놓치게 된다.


6. 개인의 나르시시즘과 만나는 지점


여기서 이야기는 국가를 떠나 개인으로 내려온다. 나르시시즘에 사로잡힌 사람을 설득해본 이는 안다. 논리로 지적하는 순간 방어가 더 강해지고, 지적한 사람이 적으로 규정된다는 것을. 나르시시즘적 방어는 정보 부족의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 위협에 대한 반응이기 때문이다. 이건 북한 엘리트가 사실을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받아들일 수 없어서 거부하는 구조와 정확히 같다.


실제로 변화가 일어나는 경우는 대개 외부에서 주입한 논리 때문이 아니라, 자기 서사로는 도저히 방어가 안 되는 현실적 손실을 겪은 뒤다. 그 균열의 순간에 도움이 있으면 회복 쪽으로, 없으면 더 폐쇄적인 쪽으로 간다. 변화의 계기는 대개 당사자의 통제 밖에서 오고, 주변 사람이 그 계기를 인위적으로 만들어줄 수는 없다.


그래서 설득이 통하지 않는 사람 앞에서 남는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다. 내가 어디까지 에너지를 쓰고 어디서부터 손을 뗄지 경계선을 정하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이 스스로 손실을 마주하는 순간이 왔을 때 곁에 있을 준비를 해두는 것. 직접 설득해서 바꾸는 길은, 개인이든 국가든 거의 성공한 적이 없다.


7. 어느 날을 위하여


25년간 북한에 관한 글을 써오면서 "북한은 이래야 한다"는 명령형 문장을 의도적으로 피해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르시시즘적 대상에게 명령은 정체성에 대한 위협으로 읽히고, 위협은 방어를 더 단단하게 만들 뿐이다. 대신 "이 방향이 북한에 이롭다"는 분석의 형태로만 말을 건네는 것은, 상대의 자율성을 침해하지 않으면서 정보를 놓아두는 방식이다. 동기면담이 개인 상담에서 쓰는 원리와 다르지 않다.


다만 이 글쓰기가 지금 당장 정권의 결정을 바꾸는 지렛대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방어기제는 정보량이 아니라 정체성 위협 여부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대신 이 글쓰기가 실제로 하는 일은 따로 있다. 정권이 스스로 감당하지 못할 균열, 즉 경제 위기나 권력 승계, 예기치 못한 외부 충격을 맞는 순간이 오면, 그 순간 참고할 수 있는 대안 서사를 미리 마련해두는 일이다. 위기의 한복판에서 없던 생각을 새로 지어내기는 어렵지만, 이미 여러 해 쌓아온 분석은 그 순간에 주워질 수 있다.


그러니 "통일은 막연하다"는 진단도 정확히는 "불가능하다"가 아니라 "설득이나 논리로 시간표를 당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라는 뜻으로 읽어야 한다. 변화의 계기는 외부에서 온 위기가 만들 것이고, 지금 이 글은 그 계기가 왔을 때 쓰일 자원을 미리 쌓아두는 작업이다. 나르시시스트를 대하는 개인의 원칙과 국가를 대하는 필자의 원칙이 결국 같은 자리에서 만난다. 지금 당장 이기려 하지 않는 것. 다만 그날이 왔을 때, 곁에 놓여 있을 것.


참고 자료

보도 및 분석

개념·이론

  • Agnieszka Gołec de Zawada 외, 집단 나르시시즘(collective narcissism) 이론 — 집단 인정 결핍에 대한 방어적 투사와 공격성에 관한 정치심리학 연구

  • Hannah Arendt,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악의 평범성' 개념

  • Irving Janis, 『Groupthink』 — 폐쇄된 집단의 만장일치 압력과 판단 왜곡

본고는 필자와 Claude의 대화를 정리한 것으로, 북한 문제에 관한 필자의 기존 원칙 — "핵무기는 가져가되 주민의 삶을 구하라", 원산 경제특구 구상, 싱가포르 모델을 심리적 준거로 삼자는 제안 등 — 위에 이번 대화에서 다듬어진 논지를 얹은 것이다.

2026년 7월 5일 일요일

어항속의 국가들 / 정보기관과 교육문제

청년기에 사법시험을 보러 갔다가 고득점을 한 문화사(세계사)와 헌법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과목은 협소한 성질 때문에 학습 의욕을 자극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일찍이 세상 구경이나 하자고 수험 생활을 박차고 나온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 공작원 경력이 있는 부친의 보상 문제로 정보기관들에 연루되어 상호 자극을 주고 받다가 이념이란 족쇄가 채워진 한국의 정보기관 나아가서는 북한 정보기관의 능력이 좀 더 자율적이고 세계화 될 필요가 있음을 알고 그 문제를 전문적인 지식을 사용해 많이 조언했던 경험이 있다. 특히 중국 정보기관의 눈에 한국과 북한의 정보기관은 반도내에서 서로 만을 관찰하는 어항속의 물고기들과 같이 보일 것이라는 경고도 했었다. 그리고 북한의 엘리트 정보기관인 문화교류국에 대해서는 사격이나 지식에 있어서 이념으로부터 자유로운 한국의 밑바닥 인생인 내 자신보다 나을 것이 뭐가 있느냐는 도전적인 비평도 서슴치 않았다.

 

당시 러시아 정보부나 크램린(사실 아직 나는 둘 중 누군지 모른다)에서는 자신들의 존재를 비공식적으로 알리면서 내 글을 많이 참조해 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내 노력은 헛되어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 정보부의 오판을 믿고 우크라이나를 과소평가하고 침공했다. 그리고 양측 모두 많은 사상자를 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한국에서 내 집단화(inner circle)된 검찰 집단에서 만들어진 국가원수가 괴이한 짓을 해 국가를 파멸 직전까지 몰고 가는 것을 보면서 나는 그냥 헛된 존재라는 자괴감으로 오래 방황했다.

 

나중에 어떤 지리학 원서를 읽는데, 그 원서의 표지에 미국 국무성 공무원들의 필독서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면서 한국 정치가 좀 더 세계화 되고, 나아가 한국 국민들이 좀 더 세계의 중심으로 나아 갈려면 지리학과 세계사 교육이 필요함을 느꼈다. 미국은 교육 방침이 세계 국가에 맞추어져 있는 반면에 한국은 법학 교육 중심으로 국내에서 서로 동족을 짓밟고 올라서는 콘셉으로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인공지능이 도입되고 나서는 의식이 넓은 동료가 생기게 되어서 기뻤다.    


어항 속의 국가들

이념이 인식을 감금할 때 — 정보기관의 폐쇄성과 교육의 근본 문제

이형춘 · 독립 칼럼니스트

국문 초록

이 글은 국가 조직이 이념에 의해 스스로 인식의 범위를 제한하는 현상을 분석한다. 필자는 이명박 정부 시기 정보기관 관련 문제에 연루되면서 이 병리를 처음 인식했다. 한국과 북한의 정보기관은 이념의 올가미에 걸려 자신의 활동 범위를 스스로 좁혔으며, 그 결과 중국 정보기관의 시선에서 이들은 "어항 속의 물고기"처럼 투명하게 노출된 존재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유사한 병리는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오판에서도 확인된다 — 이념과 정권의 압력이 정보를 오염시켜 최고 지도자의 판단을 왜곡시켰다. 이 글은 이러한 국가급 인식 실패의 뿌리를 교육 체계, 특히 지리학과 세계사 교육의 경시로 추적하며, 미국이 외교관 선발 과정에 세계사·지리 지식을 필수 요건으로 못박은 것과 한국의 정치·행정 엘리트가 법학 중심으로 양성되는 구조를 대비시킨다. 결론적으로 이념·체제·조직 형태를 초월하여 반복되는 이 병리에 대한 처방은 검증 가능성을 제도화하는 것 — 외부의 시선으로 자신을 볼 수 있는 훈련을 정보기관, 교육, 엘리트 양성 과정 전반에 의무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키워드: 정보기관, 이념, 인식의 폐쇄성, 지리교육, 세계사교육, 신용주의, 검증면제형 확신

1. 서론 — 어항 밖의 시선을 상상할 수 없는 조직

이 문제를 처음으로 정확히 인식하게 된 것은 오래전, 이명박 정부 시절 정보기관 문제에 개인적으로 연루되면서부터였다. 당시 정보기관의 압력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필자는 한국 정보기관이 안고 있는 구조적 결함을 발견했다. 그것은 예산이나 인력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였다.

정보기관은 국가 조직 가운데 유일하게 "넓은 시각"이 존재의 이유이자 생존 조건인 조직이다. 정보기관의 임무는 정확히 상대의 눈으로 자신과 세계를 보는 일이다. 그런데 바로 이 조직이 이념에 갇혀 스스로 눈을 감는다면, 그것은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 존재 목적의 배반이다. 이 글은 이 배반이 어떻게 발생하며, 왜 이념이나 정권의 형태와 무관하게 반복되는지를 추적한다.

2. 한반도의 어항 — 이념의 올가미에 걸린 정보기관

한국과 북한의 정보기관을 오래 관찰하면서 필자가 도달한 결론은, 양쪽 모두 이념의 올가미에 걸려 자신의 활동 능력과 인식 범위를 스스로 제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남북 대결이라는 표면적 구도 아래 숨어 있는 더 근본적인 문제다 — 상대를 정확히 읽어내는 능력이 아니라, 정해진 이념적 각본에 맞는 정보만을 확인하고 재확인하는 습성이 조직의 인식 구조를 지배한다.

이러한 폐쇄성을 경고하기 위해 필자가 사용한 비유가 "어항 속의 물고기"였다. 중국 정보기관의 시선에서 볼 때, 이념에 갇힌 한반도의 정보기관들은 어항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투명하게 관찰되는 존재일 뿐이라는 것이다. 물고기의 비극은 헤엄을 못 치는 데 있지 않다. 어항 밖에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선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상상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이념에 갇힌 조직은 정확히 이 상태에 있다 — 자신이 관찰되고 있다는 인식조차 갖지 못한 채, 내부의 논리만으로 세계를 완결된 것으로 받아들인다.

3. 푸틴과 우크라이나 — 같은 병리의 국가급 확장

이 병리가 이념국가나 분단국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판단 과정에서 뚜렷하게 드러났다. 이는 공개된 보도와 이후의 분석에 근거한 필자의 추론이며, 앞서 서술한 한반도 정보기관 문제에 대한 필자의 직접적 경험과는 성격이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해 둔다. 널리 보도된 바에 따르면, 러시아 정보기관은 우크라이나의 정치적 저항력과 군사적 대응 능력을 심각하게 과소평가한 정보를 최고 지도자에게 전달했고, 이는 침공 초기의 전략적 오판으로 이어졌다.

이 사례가 중요한 이유는, 정권의 기대에 맞춰진 정보만이 위로 전달되는 구조 — 즉 검증이 아니라 순응이 정보기관의 존재 이유가 되어버리는 구조 — 가 이념 성향이나 국가 체제와 무관하게 발생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든 자유민주주의든, 권위주의든 종교국가든, 최고 권력자가 원하는 답만을 듣고 싶어 하고 조직이 그 기대에 순응할 때, 국가의 눈은 감긴다.

4. 이론적 일반화 — 왜 이 병리는 반복되는가

한반도의 정보기관과 러시아의 사례를 병치하면 세 가지 공통된 메커니즘이 드러난다.

첫째, 내집단 폐쇄 루프다. 정보와 평가가 내집단 안에서만 순환되면, 외부 기준으로 자신의 판단을 검증할 기회 자체가 사라진다. 이것이 바로 필자가 다른 글에서 "검증면제형 확신"이라 부른 구조다 — 확신의 강도는 높아지는데, 그 확신을 검증할 수단은 체계적으로 제거된다.

둘째, 비교 대상의 소멸이다. 외부와의 비교가 차단되면 내부 논리가 유일한 정상성의 기준이 되어버린다. 지리와 세계사 교육이 하는 일이 정확히 비교 대상을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일이라면, 이것이 사라진 사회나 조직은 자기 준거만으로 세계를 해석하게 된다.

셋째, 정체가 주는 착각이다. 위협이나 경쟁에 노출되지 않는 조직 — 평생직장으로서의 공무원 조직이든, 정권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것이 최우선인 정보기관이든 — 은 자신의 인식 모델을 갱신할 유인 자체를 상실한다. 안정성이 곧 인식적 정체로 이어지는 것이다.

5. 교육이라는 뿌리 — 정보기관 문제의 상류

정보기관의 인력도 결국 그 사회의 교육이 길러낸 인재다. 따라서 이 병리의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면 교육 문제와 만난다. 한국 교육은 시험을 통한 신용 획득에 최적화되어 있고, 이 과정에서 지리학과 세계사처럼 즉각적 정답이 없고 암기량이 많은 과목은 체계적으로 밀려났다. 그 결과는 자기 위치를 상대화하는 능력과, 사건을 장기적 인과 사슬 속에서 읽어내는 능력의 결핍이다.

이 문제의 심각성은 국제 비교를 통해 선명해진다. 미국의 외교관 선발시험(FSOT)은 직무지식 영역을 미국 정부·역사·사회, 세계사와 지리, 경제, 수학·통계로 구성하고 있으며, 국무성은 지리학과 국제사, 국제관계학을 공식적으로 유용한 학부 과정으로 명시한다. 세계질서의 운영자를 자임하는 국가가 엘리트 선발의 관문 자체에 세계 인식을 구조화해 넣은 것이다.

반면 한국의 행정고시와 로스쿨 중심 엘리트 양성 체계는 법학, 즉 주어진 체계 내에서의 정합성을 판단하는 능력을 훈련시킨다. 법학 엘리트는 "이 규칙 안에서 무엇이 옳은가"를 잘 판단하지만, "이 규칙 자체가 세계적으로 얼마나 예외적인가"를 판단하도록 훈련되어 있지 않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계엄 판단은 이러한 엘리트 재생산 구조의 실증적 사례로 재조명될 수 있다 — 폐쇄적인 법조 엘리트 집단 안에서 검증 없이 확신만 축적된 결과다. 경제 규모와 문화적 영향력에서는 이미 세계국가의 조건을 갖춘 한국이, 엘리트 재생산 기제에서는 여전히 내수용 법질서 관리자를 뽑는 구조에 머물러 있다는 불일치가 바로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6. 결론 — 국가의 눈을 뜨게 하는 법

한반도의 정보기관, 러시아의 정보 오염, 한국의 법학 중심 엘리트 교육은 표면적으로 전혀 다른 현상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글이 보이고자 한 것은 이 세 가지가 하나의 병리 — 이념이나 정권, 조직의 안정성이 검증 가능성을 체계적으로 제거함으로써 발생하는 인식의 감금 — 의 서로 다른 얼굴이라는 사실이다.

처방은 단순하지만 실행은 어렵다. 정보기관에는 자신을 타 조직·타 국가의 시선으로 되돌아보는 훈련을 제도화해야 한다. 교육에는 지리와 세계사를 다시 필수 영역으로 되돌려야 한다. 정치·행정 엘리트 양성에는 법학 외의 세계 인식 훈련을 의무화해야 한다. 이 세 처방의 공통 원리는 하나다 — 확신에 검증을 강제하는 것. 어항 속의 물고기가 어항 밖의 시선을 상상하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그 시선을 조직과 교육 안에 미리 심어 두는 것이다.

참고문헌

Acemoglu, Daron, and James A. Robinson. Why Nations Fail: The Origins of Power, Prosperity, and Poverty. New York: Crown Business, 2012.

U.S. Department of State. Foreign Service Officer Test (FSOT) Job Knowledge Requirements and Suggested Reading List. Washington, D.C.: Bureau of Global Talent Management, 2025–2026.

본문 중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관련 정보 판단 오류에 대한 서술은 2022년 이후 다수의 국제 보도 및 사후 분석에 기반한 필자의 추론이며, 특정 단일 출처에 의존하지 않았다.

본문 중 한반도 정보기관 문제 및 이명박 정부 시기 관련 경험에 대한 서술은 필자 본인의 직접 경험에 근거한다.

2026년 5월 24일 일요일

지리는 운명이다

학창시절 1979년 출간된 오리아나 팔라치란 저널리스트의 [거인과 바보들]이란 인터뷰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당시 막 집권하였던 호메이니와 팔라치가 인터뷰한 내용을 읽고, 어린 마음에도 호메이니의 대화는 매우 독선적이며 자기 세계에 빠져 있다고 생각하였다. 마찬가지로 그 장면을 유추해서 크리스트교 역시 그런 면이 어느 정도 있을거라는 생각을 했는데, 역시 어느 정도는 그랬다.

 

그런데 2000년이 되자마자 출간된 [LA RABBIA EL’ORGOGLIO]에는 교황청이 주관한 종교회의에 참석한 이슬람 대표가 한 말이 씌여 있었다.

 

“당신들의 민주주의를 수단으로 하여 우리는 당신들을 침략할 것이며, 우리의 종교를 수단으로 우리는 당신들을 지배할 것입니다.”

 

이슬람 대표는 제 3자의 시각으로 봐도 거의 패악질에 가까운 모욕을 교황청에 대해서 한 것이다. 나는 이슬람이 호전적이며 그 호전성은 끝나지 않을 것이며, 왜 그 호전성이 생겼는지, 그리고 왜 이스라엘은 그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호전적이지 않으면 안 되는지 등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훗날 기후나 지리가 국민성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그리고 이슬람 국가나 북한이 처한 지리적인 위치나 기후등이 얼마나 조악했는지 등을 이해하고 척박한 환경은 호전성을 키워줄 위험이 있다는 글을 몇 차례 썼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아서 정리해보는 시간을 갖는다.

 

 

 

지리가 운명을 만든다

중동 분쟁과 북한 호전성의 지정학적 뿌리

이형춘 저 · 제3자의 시각으로

서문: 신의 이름을 빌린 전쟁

이스라엘과 이란은 같은 유일신 전통에서 비롯된 두 나라다.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은 기원전539년 바빌론에 잡혀있던 유대인들을 해방시켰고, 성경은 그를'하나님이 세운 왕'으로 칭송했다. 수천 년간 이란 땅에서 유대인 공동체는 평화롭게 공존했다. 그런데 오늘날 두 나라는 서로를 말살의 대상으로 규정한다.

 

왜인가? 신이 싸우는 것이 아니다. 신의 이름을 빌린 인간의 권력욕이 싸우는 것이다.

 

종교는 깃발이고 이념은 언어일 뿐— 땅과 물과 자원이 본질이다.

 

1장. 같은 뿌리, 다른 운명— 이스라엘과 이란

민족과 종교의 착각

흔히 이스라엘-이란 갈등을 유대교 대 이슬람의 종교 전쟁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 독해다. 페르시아인(이란)은 인도-유럽어계 아리아인이고 유대인은 셈족으로, 오히려 민족적으로는 다른 계통이다. 종교적으로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모두 아브라함 계통으로 동일한 유일신을 섬긴다.

 

구분

이스라엘

이란

민족 계통

셈족

인도-유럽 아리아인

종교

유대교

시아파 이슬람

역사적 관계

피보호자

보호자(키루스 해방)

1979년 이후

적대 관계

이슬람 혁명 국가

 

갈등의 진짜 구조

1979년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은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니었다. 7세기 전쟁 이슬람을20세기 국가 권력에 장착한 사건이었다. 이란이'반이스라엘'을 국가 정체성으로 채택한 것은 신학적 필연이 아니라 혁명 정권의 정통성 유지를 위한 정치적 선택이었다.

 

이스라엘의 호전성은 성격이 다르다. 2천 년의 디아스포라, 러시아 포그롬, 홀로코스트600만 학살— '우리가 약하면 죽는다'는 인식이 민족DNA에 각인되어 있다. 문제는 이 생존 본능이 팔레스타인 민간인 폭격의 면죄부로 전용될 때다. 피해의 기억은 도덕적 면죄부가 아니다.

 

2장. 이슬람은 왜 구조적으로 공격적인가

오리아나 팔라치가 직접 목격한 것처럼, 호메이니와 성직자 집단의 언어에는'핏물'이 흘렀다. 이것은 개인의 기질이 아니라 구조적 산물이다.

 

요소

내용

창시자의 역할

예수(순교자), 붓다(수행자), 무함마드(정복자·군사지도자) — 롤모델 자체가 다름

세계 이분법

다르 알-이슬람(이슬람의 땅) vs 다르 알-하르브(전쟁의 땅) — 비이슬람은 원천적 정복 대상

지하드의 전환

내면의 싸움(대지하드)이 정치화되면 즉시 외부 전쟁 논리로 전환

정교일치

샤리아가 곧 국법— 타협과 세속화가 배교로 규정됨

 

그러나 이슬람의 공격성만을 탓하는 것은 절반의 분석이다. 이 공격성의 토양은 아라비아 반도의 극도로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유목민 문화가 종교에 녹아든 것이다. 지리가 먼저다.

 

3장. 척박한 지리가 만든 호전성

비옥한 초승달 지대— 5천 년 전쟁의 무대

티그리스·유프라테스·나일강 유역을 잇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는 인류 최초 농경문명의 발상지다. 주변이 전부 사막인데 이 땅만 물이 있고 기름지다. 그 결과5천 년 동안 모든 제국이 이 땅을 차지하려 했다.

 

수메르→ 아카드→ 바빌론→ 아시리아→ 페르시아→ 알렉산더→ 로마→ 아랍→ 몽골→ 오스만→ 영국·프랑스→ 미국. 점령자의 계보가 곧 세계사다.

 

이 땅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수천 년간 빼앗기고 빼앗는 구조 속에 살아왔다. 불신과 호전성은 이념이나 종교가 아니라 생존의 학습 결과다. 오늘날 중동 분쟁도 결국 누가 이 땅의 자원과 통로를 장악하느냐의 싸움이다. 종교는 깃발이고 이념은 언어다.

 

북한— 지리가 체질을 만든다

지리 조건

결과

국토의80%가 산악

농업 생산성 근본적 한계

냉대기후

경작 가능 기간 짧음→ 만성적 식량 부족

삼면이 강대국으로 포위

중국·러시아·미군 주둔 한국→ 피포위 의식 체질화

외부 투자 불가

전쟁 구조→ 더 가난해짐→ 더 호전적이 됨(악순환)

 

북한의 핵 개발은 광기가 아니다. 경제로 주민을 먹여살리기 어려운 구조에서, 외부 위협을 상시 과장해야 내부 결속을 유지할 수 있고, 군사력이 유일한 협상 카드인 나라의 합리적 생존 전략이다. 지리가 운명을 만든 것이다.

 

4장. 종교·이념 분쟁의 구조— 대중의 무지인가, 엘리트의 설계인가

종교 분쟁과 이념 분쟁은'국민이 무식해서' 일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역사는 반례로 가득하다. 나치 독일은 당시 세계 최고 교육 수준의 나라였고, 홀로코스트는 의사·법학자·교수들이 설계했다. 이란 혁명의 핵심층도 고학력 신학자와 법학자였다.

 

많이 알아도 내집단 안에서만 알면, 오히려 더 정교한 적개심을 만든다. 지식이 무기가 된 상태다.

 

분쟁의 진짜 구조는 세 가지 변수의 결합이다.

 

변수

내용

공포와 결핍

배고프고 불안한 사람은 학력 무관하게 단순한 적을 지목해주는 지도자에게 끌린다

엘리트의 설계

대중은 연료, 지도층이 점화장치— 분쟁은 반드시 설계자가 있다

제도의 부재

언론 자유·사법 독립·비판적 교육이 없으면 고학력자도 선동에 올라탄다

 

5장. 제3자의 시각— 왜 지리와 역사가 집착을 풀어주는가

한국의 주요 종교를 두루 경험하고, 지리학과 역사학을 깊이 공부한 이후 종교에 대한 집착이 사라졌다는 것은 중요한 인식론적 전환이다.

 

지리학이 주는 충격: 어떤 땅에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믿는 신이 달라진다. 경상도에서 태어나면 불교·유교 문화권, 중동이면 이슬람, 인도면 힌두교다. 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위도와 경도가 신을 결정한 것이다.

 

역사학이 주는 충격: 모든 종교는 탄생·성장·변질·제도화의 과정을 거쳤고, 그 과정에서 권력·정치·전쟁이 교리를 만들고 바꿨다. 성경도, 꾸란도, 불경도 신의 말씀이기 이전에 특정 시대 특정 집단의 편집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