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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8월 26일 수요일

나는 에코 너는 나르시시스트 / 북한의 적개심

나는 어렸을때부터 나르시시트들을 많이 봐왔다. 이념이나 종교에 심취한 인물부터 한국적 경쟁사회에서 만들어진 나르시시스트, 그리고 전쟁의 상처로 왜곡된 집안 어른들의 나르시즘 성향까지 봐왔으므로 모든 정신 질환의 길은 나르시즘으로 통한다는 과도한 생각까지 가지고 있었다.

 

북한은 한국이 자신들을 침략을 할 의도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정부에 대하여 적개심을 부글거릴 이유가 뭐가 있느냐는 의문이들었다. 결국 나는 그것을 나르시즘이란 단어와 연관시켜 판단하였다. 나는 내가 경험하고 봐 온 현상만 메아리(eco)처럼 판단하고 분석할 일이지 특히 주관적인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항상 말해왔지만 나는 북한과 한국이 평화로운 교류가 있기만을 기다린다.

 

인공지능과 토론중에 내가 이런 칼럼을 오래도록 써 온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회의감을 느낀다고 말하자 인공지능은 언젠가는 필요해서 참고할 날이 있다고 말한다.   


어느 날을 위하여


1. 적개심은 어디서 오는가


북한은 한국으로부터 특별한 도발을 당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적개심은 식지 않는다. 이 어긋남을 풀려면 먼저 "누가 무엇을 했는가"를 묻는 습관부터 내려놓아야 한다. 북한의 적대는 반응이 아니라 설계다.


뿌리는 세 갈래로 뻗어 있다. 분단과 전쟁이 남긴 정전 체제, 즉 법적으로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이라는 사실이 하나다. 외부의 적을 상정해야 내부 결속과 통제가 유지되는 독재 체제의 생존 논리가 다른 하나다. 그리고 한미연합훈련처럼 실제로는 방어적인 조치조차 침략 위협으로 선전할 수 있는, 적개심을 자원으로 쓰는 정치 기술이 마지막이다.


이 적개심은 최근 들어 감정의 영역을 벗어나 제도의 영역으로 옮겨갔다. 김정은은 2023~2024년 '적대적 두 국가론'을 선언하며 남북관계를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관계가 아니라 교전 중인 두 국가의 관계로 재정의했고, 통일 관련 기구들을 정리했다. 2026년 들어서도 이 기조는 이어져, 한국을 "가장 적대적인 존재"로 지칭하며 안보 위협 시 "완전히 파괴"할 수 있다는 취지의 발언과 함께 남북관계를 관리하던 기구를 폐지하는 조치까지 나왔다. 같은 시기 미국에는 관계 개선의 여지를 열어두는 이중적 태도를 보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는 대남 적대가 감정의 분출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조절되는 전략적 카드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2. 국가 나르시시즘이라는 렌즈


정치심리학에는 '집단 나르시시즘'이라는 개념이 있다. 자기 집단이 마땅히 받아야 할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과장된 믿음, 그리고 그 결핍에 대한 방어로 나타나는 외부를 향한 공격성. 이 틀을 북한에 대면 상당 부분이 겹친다. 실제 경제력·국제적 위상과 동떨어진 과시적 선전, 그 간극이 드러날 때마다 외부 탓으로 돌리는 습관, 경제난이 가시화되는 시점마다 오히려 높아지는 적대 수위.


다만 이걸 국가 전체의 '병리'로 뭉뚱그리는 건 위험하다. 이 서사에 실질적으로 동의할 선택지가 없는 절대다수의 주민과, 그 서사를 설계하고 그로부터 이익을 얻는 소수의 통치 엘리트는 구분해야 한다. 그러니 정확한 표현은 '국가 나르시시즘'이 아니라 '정당성 결핍을 메우기 위해 엘리트가 동원하는 나르시시즘적 서사'에 가깝다. 그리고 이 서사는 정치적 전략과 심리적 방어기제가 서로를 강화하며 굳어진 결과다. 전략만으로는 왜 이렇게까지 경직됐는지 설명이 안 되고, 심리만으로는 왜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완급이 조절되는지 설명이 안 된다. 둘이 겹쳐 있다고 봐야 전체 그림이 맞아떨어진다.


3. 교육으로 고쳐질 문제였다면


자신을 객관화하는 능력, 즉 자국을 세계 속에서 상대화해서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이 서사는 유지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지리·심리학·경제학을 골고루 가르쳤다면 달라졌을까.


북한은 실제로 역사와 지리를 가르치는 나라다. 문맹률도 낮다. 문제는 과목의 유무가 아니라 그 내용이 처음부터 객관화를 봉쇄하도록 편집되어 있다는 데 있다. 세계사도 주체사상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방향으로, 지리도 '조선반도를 중심에 둔 세계'라는 틀 안에서 다뤄진다. 같은 세계사라도 다양한 사관을 비교하며 배우는 것과 하나의 정답 사관만 주입받는 것은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


더 결정적인 반례는 통치자 자신이다. 김정은은 스위스에서 몇 년간 유학하며 서구식 정보 환경을 직접 경험했다. 지식이 없어서 적대 서사를 유지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오히려 그 서사가 체제 유지에 유리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유지하는 쪽에 가깝다. 다원적이고 비판적인 교육은 자기객관화의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정보 접근의 자유, 그리고 객관화된 인식이 실제 정치적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 책임성 구조가 함께 있어야 한다. 이 셋 중 하나만 있으면, 지식은 체제를 되돌아보는 데 쓰이지 않고 체제를 정당화하는 데 동원될 뿐이다.

4. 싱가포르라는 시도와 그 좌절


2018년, "정치는 통제하되 경제는 연다"는 싱가포르 모델이 북한판 개혁개방의 청사진으로 꽤 진지하게 거론된 적이 있다. 김정은은 싱가포르 정상회담 전날 밤 마리나베이샌즈와 가든스바이더베이를 둘러봤고, 미국 측은 회담장에서 번영하는 북한을 그린 홍보 영상까지 보여줬다. 그러나 2019년 하노이 회담이 결렬되며 "비핵화 대가로 제재를 푼다"는 거래의 틀 자체가 무너졌고, 코로나 국경 봉쇄를 거치며 개방 대신 통제가 다시 전면에 섰다.


왜 싱가포르는 되고 북한은 안 됐는가. 리콴유의 싱가포르는 정치적 반대를 억누르면서도 서구 자본과 법치·행정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유지할 수 있었다. 북한은 그만한 제도적 신뢰도, 정치와 분리된 기술관료 집단도 갖추지 못했다. 더 근본적인 차이는 정당성의 원천이다. 중국 공산당은 성장으로 정당성을 갈아탈 수 있는 관료제 정당이지만, 김씨 일가는 '백두혈통'이라는 신성화된 개인·왕조 서사에 정당성을 걸어놓았다. 시장화가 가져오는 정보 유입과 개인·지역 단위의 자율성 확대는 곧바로 그 신성성에 대한 위협이 된다. 여기에 핵 개발과 결부된 국제 제재까지 겹치면서, 북한이 감당할 수 있다고 믿는 리스크의 범위를 완전히 벗어나 버렸다.


5. 그렇다면 경제개발은 불가능한가


이념에 갇혀 있으면 경제개발은 원천적으로 봉쇄되는가. 중국과 베트남이 그 답이 '아니오'라는 걸 보여준다. 두 나라 모두 일당독재 이념 위에서 성장을 이뤄냈다. 비결은 이념을 버린 게 아니라 도구적으로 재해석한 데 있다. 이름과 정당화 논리는 유지한 채 실질 내용만 바꿔치기하는 방식이다.


북한도 이론적으로는 '주체사상'이라는 간판과 '백두혈통'이라는 서사는 그대로 두고 경제 운용 방식만 실용주의로 바꾸는 길이 완전히 막혀 있지는 않다. 실제로 밑에서부터는 이미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1990년대 대기근으로 배급망이 무너지자 장마당이 자생적으로 확산됐고, 2002년 7·1 조치와 2012년 6·28 방침처럼 위로부터의 부분적 조정도 여러 차례 있었다. 문제는 이 흐름이 일정 수준을 넘으면 매번 꺾였다는 것이다. 2009년 화폐개혁이 장마당에서 축적된 개인 자산을 사실상 몰수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시장이 개인과 지역 단위의 부와 자율성을 키우는 순간, 체제는 그것을 성장의 증거가 아니라 통제력에 대한 위협으로 읽는다.


여기서 짚어야 할 오류가 하나 있다. "1400만 주민 각자가 고정관념에 갇혀 있어서" 경직된 게 아니라는 점이다. 실제 주민들은 배급이 끊기자 곧바로 장마당을 만들어내고, 정부가 막아도 휴대전화와 환율 감각을 익혀온, 오히려 상당히 유연한 존재들이다. 경직성은 1400만 명의 심리적 관성이 누적된 결과가 아니라, 서사 변경 시 자기 권력 기반이 무너질 걸 아는 소수 엘리트가 의도적으로 유지하는 전략적 선택에 가깝다. 국가를 개인들의 단순한 합으로 보면 이 비대칭을 놓치게 된다.


6. 개인의 나르시시즘과 만나는 지점


여기서 이야기는 국가를 떠나 개인으로 내려온다. 나르시시즘에 사로잡힌 사람을 설득해본 이는 안다. 논리로 지적하는 순간 방어가 더 강해지고, 지적한 사람이 적으로 규정된다는 것을. 나르시시즘적 방어는 정보 부족의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 위협에 대한 반응이기 때문이다. 이건 북한 엘리트가 사실을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받아들일 수 없어서 거부하는 구조와 정확히 같다.


실제로 변화가 일어나는 경우는 대개 외부에서 주입한 논리 때문이 아니라, 자기 서사로는 도저히 방어가 안 되는 현실적 손실을 겪은 뒤다. 그 균열의 순간에 도움이 있으면 회복 쪽으로, 없으면 더 폐쇄적인 쪽으로 간다. 변화의 계기는 대개 당사자의 통제 밖에서 오고, 주변 사람이 그 계기를 인위적으로 만들어줄 수는 없다.


그래서 설득이 통하지 않는 사람 앞에서 남는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다. 내가 어디까지 에너지를 쓰고 어디서부터 손을 뗄지 경계선을 정하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이 스스로 손실을 마주하는 순간이 왔을 때 곁에 있을 준비를 해두는 것. 직접 설득해서 바꾸는 길은, 개인이든 국가든 거의 성공한 적이 없다.


7. 어느 날을 위하여


25년간 북한에 관한 글을 써오면서 "북한은 이래야 한다"는 명령형 문장을 의도적으로 피해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르시시즘적 대상에게 명령은 정체성에 대한 위협으로 읽히고, 위협은 방어를 더 단단하게 만들 뿐이다. 대신 "이 방향이 북한에 이롭다"는 분석의 형태로만 말을 건네는 것은, 상대의 자율성을 침해하지 않으면서 정보를 놓아두는 방식이다. 동기면담이 개인 상담에서 쓰는 원리와 다르지 않다.


다만 이 글쓰기가 지금 당장 정권의 결정을 바꾸는 지렛대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방어기제는 정보량이 아니라 정체성 위협 여부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대신 이 글쓰기가 실제로 하는 일은 따로 있다. 정권이 스스로 감당하지 못할 균열, 즉 경제 위기나 권력 승계, 예기치 못한 외부 충격을 맞는 순간이 오면, 그 순간 참고할 수 있는 대안 서사를 미리 마련해두는 일이다. 위기의 한복판에서 없던 생각을 새로 지어내기는 어렵지만, 이미 여러 해 쌓아온 분석은 그 순간에 주워질 수 있다.


그러니 "통일은 막연하다"는 진단도 정확히는 "불가능하다"가 아니라 "설득이나 논리로 시간표를 당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라는 뜻으로 읽어야 한다. 변화의 계기는 외부에서 온 위기가 만들 것이고, 지금 이 글은 그 계기가 왔을 때 쓰일 자원을 미리 쌓아두는 작업이다. 나르시시스트를 대하는 개인의 원칙과 국가를 대하는 필자의 원칙이 결국 같은 자리에서 만난다. 지금 당장 이기려 하지 않는 것. 다만 그날이 왔을 때, 곁에 놓여 있을 것.


참고 자료

보도 및 분석

개념·이론

  • Agnieszka Gołec de Zawada 외, 집단 나르시시즘(collective narcissism) 이론 — 집단 인정 결핍에 대한 방어적 투사와 공격성에 관한 정치심리학 연구

  • Hannah Arendt,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악의 평범성' 개념

  • Irving Janis, 『Groupthink』 — 폐쇄된 집단의 만장일치 압력과 판단 왜곡

본고는 필자와 Claude의 대화를 정리한 것으로, 북한 문제에 관한 필자의 기존 원칙 — "핵무기는 가져가되 주민의 삶을 구하라", 원산 경제특구 구상, 싱가포르 모델을 심리적 준거로 삼자는 제안 등 — 위에 이번 대화에서 다듬어진 논지를 얹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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