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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8월 17일 월요일

꿈은 이루어진다 / 이마주(image)-개정판

러우전쟁이 4년째다. 원래 풍족하지 못했던 두 나라는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져간다. 자국민들의 꿈을 이루려고 전쟁을 일으킨 나라와 그저 존재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응전하는 나라가 모두 각자의 꿈을 가지고 산다.


나는 한국전쟁의 트라우마로 고생하는 부모 때문에 트라우마가 있다. 모든 일의 인과에는 누군가의 꿈이 있다. 집중력과 행동력의 에너지 정도에 따라 누군가의 꿈은 이루어지기도 하고 반향적 에너지에 의해서 그 꿈은 불가능한 꿈이 되기도 한다. 평화로운 세상을 향하여 웃을 수 있는 사람들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오래전에 썼던 블러그글을 인공지능에게 보여주면서 러우전쟁과 우리 부모가 겪은 전쟁을 언급했다. 인공지능은 논리의 잘못된 흐름은 냉혹하게 지적하지만 전쟁 트라우마를 입은 부모 때문에 내 속에 내재해 있는 불안과 결핍을 누구 보다도 잘 이해하는 것 같았다. 통계에 의하면 인공지능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사용목적 1위가 심리상담 같은 거라고 한다.   


꿈은 이루어진다 — 이마주(Image)


아이들은 꿈이 많다. 그것은 대체로 존중받는다. 이루어질 시간의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인의 꿈은 자신도 타인도 무시한다. 시간의 여유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관념을 실제와 연결시킬 시간, 꿈을 현실로 구체화할 시간이 없다고 해서 한 사람의 주관적 우주가 통째로 무너지는 건 온당치 않다. 꿈과 현실의 본질을 들여다보면, 꿈을 이룬 결과가 중요한 게 아니라 꿈을 이루려고 애쓰는 그 생각과 행동의 지속이 세상을 움직여 나간다는 걸 알게 된다. 관념과 실제는 명확히 나뉘지 않는다. 느리든 빠르든, 관념은 이미 실제 위에서 부지런히 이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면 시간만 있다면 이 세상에 못 할 일이 없다는 것도 알게 되고, 망상에만 머무는 일이 얼마나 허망한지도 알게 된다. 무엇인가 얻어야 할 것이나 이루어야 할 것이 있다면, 관념 위에 쌓아 올린 생각과 행동의 블록들을 꾸준히 실제 위로 옮겨놓을 일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은 인간의 지각이 대상으로부터 행동에 필요한 정보만을 받아들여 그것을 이마주(Image)로 구성한다고 보았다. 우리가 보는 세계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만 골라낸 세계라는 뜻이다. 다만 이건 세계 그 자체가 우리의 소망으로 빚어진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베르그송이 말한 건 세계가 우리 꿈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계 — 우리가 매일 걸어 들어가는 그 주관적 우주 — 가 우리가 무엇을 계속 바라보고 붙들었는지에 따라 다르게 구성된다는 것이다. 세상을 바꾸는 건 생각이 아니라, 생각이 방향을 정하고 그 방향으로 반복해서 옮겨진 행동이다. 그러니 정확히 말하면 이렇다. 세상이 꿈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내가 사는 세상은 내가 오래 붙들어 온 꿈의 궤적을 따라 만들어진다.


가끔 결핍 속에서 오래 산 사람들의 세계를 가까이서 들여다볼 일이 있었다. 다툼이 잦고, 여유가 없고, 사소한 것에도 날이 서 있는 풍경. 처음엔 그것을 기질이나 교육의 문제로 여겼다. 그러나 오래 지켜보고 나서야 알았다. 그건 성정의 문제가 아니라 결핍 그 자체의 무게였다. 당장의 생존과 오래된 상처를 견디는 데 이미 정신의 대부분을 써버린 사람에게, 먼 곳의 꿈을 그리고 그것을 향해 하루하루를 조직할 여력은 남지 않는다. 전쟁이든 가난이든 반복된 상실이든, 깊은 결핍은 사람의 시야를 물리적으로 좁혀놓는다. 그 좁아진 시야를 두고 꿈이 없다 나무라는 건, 물에 빠진 사람에게 왜 헤엄을 잘 못 치느냐 묻는 것과 다르지 않다. 오히려 그런 풍경 곁에서 자란 이가 오래도록 짊어지는 건, 물려받은 그 좁음을 자신의 대에서 어떻게 넓혀갈 것인가 하는 조용한 숙제다.


그런데 진짜 거지는 따로 있었다. 물질도 없고 여유도 없지만 꿈을 향해 걸어가는 이들 곁에는, 아무런 결핍 없이도 온갖 고차원적인 구걸(begging)로 권력을 얻어 다른 이들의 소중한 꿈이 현실화되는 것을 말살시키는 자들이 있다. 이건 신종거지라 부를 만하다. 물질만이 아니라, 공정한 대가 없이 권력을 얻거나 부리는 자 역시 거지다. 자신의 꿈은 이루었으되 그 얻은 방식과 행위가 계속 빈한해 보이는 까닭은, 이리 보아도 저리 보아도 결국 걸인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정치 지도자라면 복지를 갖고자 하는 민중을 거지로 볼 게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좁아진 시야를 넓혀 꿈을 이룰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는 데 힘을 써야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보니, 진짜 거지는 기반을 구걸하던 민중이 아니라 그 기반을 사유화한 자들 쪽에 있는 경우가 더 많았다.


2022년 이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그 풍경이다. 냉전의 최전선에서 정보기관원으로 붕괴하는 제국을 무력하게 지켜봐야 했던 한 사람의 오래 묵은 관념이, 수십 년의 시간을 관통해 마침내 한 국가의 실제 행동으로 옮겨진 것이다. 대립과 세력권의 언어로 그의 꿈은 이미 오래전에 완성되어 있었고, 시간은 그저 그것을 실제 위로 옮겨놓을 기회를 기다렸을 뿐이다. 그 반대편에는 존재하겠다는, 그저 사라지지 않겠다는 소박한 꿈을 붙들고 있는 또 다른 수천만이 있다. 파괴하려는 꿈도 이루어지고, 존재하려는 꿈도 이루어진다. 어느 쪽이 이루어질지는 어느 쪽이 그 관념을 더 오래, 더 꾸준히 실제 위로 옮겨놓는가에 달려 있다. 관념은 결국 실제 위로 옮겨진다. 문제는 그 관념이 무엇이며, 누가 그것을 얼마나 오래 붙들고 있느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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