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케인즈가 [확률론]을 출간하자 케임브리지의 지식인들이 열렬히 환영했다고 한다. 케인즈는 집필과정에서 수리철학자인 버트런드 러셀의 도움을 받았는데, 곧 17살짜리 케임브리지 대학생인 렘지에게 비판을 받았다. 렘지의 말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확률관계를 인지하지 못하기때문에 케인즈가 중시하는 확률의 세계는 의미가 없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즉 과학성과 합리성을 중시하는 시대적 분위기를 타고 환영받기 시작한 케인즈의 [확률론]에 '주관성'을 중시하면서 찬물을 끼얹었다. 그리고 램지는 알려진 천재들의 운명대로 26세에 사망했다.
나중에 케인즈는 1929년의 대공황을 겪고 확신과 확률같은 기계적인 판단장치가 별로 유용하지 않다는 판단이 들었는데, 또 자신이 [확률론]을 스스로 투기등으로 임상실험을 해보고 그 경험을 토대로 [일반이론]을 집필했다.
세상에 확실한 것은 없고 움직여나가는 동태성(movement)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동양철학적 관념을 독일의 헌법학자인 루돌프 스멘트(R. Smend)도 국가와 헌법을 해석하는데 적용한적이 있지만 변화라는 것은 인정하고 봐야할 문제인듯 하다.
그런 불확실한 세상에서 누구를 현명하다고 할 수 있을까. 아마 문제의 인과관계를 잘 파악하고 있거나 새로운 길을 찾아내는 사람일 것이다. 결국 천재청년인 램지도 세계경제의 위대한 석학인 케인즈도 변화와 그 변화를 이끌어내야 하는 인간의 주관성에는 무기력한 순종자(follower)였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할것같다.
변화할려고 하는 움직임을 물고 늘어지는 이들은 더 큰 불확실성에 시달리게 될 것같다. 그나마 꿈틀거리는게 그중에 확실한 길인듯 하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