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사회가 낙후되어 가거나 한국사회가 정체되어 가는 원인은 복합적인 사회구조를 인정하지 않는 철학(이념)이 바탕이 되었음을 항상 토로하곤 하는데, 복합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문제는 정치철학인 이념뿐만 아니라 때로는 독단적인 성격의 종교철학에서도 보이는 문제점인 듯 하다. 특히 유일신을 믿는 종교일수록 배타적인 근본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은 숙명인 듯 하다. 그것은 유일신을 숭배하는 분위기로부터의 소극적 습관이기도 하고, 나아가서는 IS와 같이 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적 때문이기도 한 듯하다.
이념이나 종교, 또는 경제문제 등을 마르크스나 헤겔같은 철학자는 현상이냐 본질이냐 하는 이원적인 구도로 해석하지만 프랑스의 마르크스철학자인 알튀세(louis Althuser 1918 – 1990)는 사회는 복잡성과 다양성을 가지고 있으며,국가이념이나 법이념, 정치이념과 같은 상부구조에도 상대적인 자율성과 독자성이 있다고 한다.
좀 더 쉽고 구체적인 생활과 연관시켜 표현하면 흔히 한국사회에서 많은 이들이 지향하는 권력이나 재산증대욕구같은 것들은 헤겔과 마르크스 이념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헤겔이 말하는 변증법에 의한 새로운 정신의 출현, 마르크스가 말하는 물질생활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정신세계인 이념의 발생등은 모든 다양한 관심을 흡수하여 단조롭게 재편하고,공산주의나 자본주의 같은 이념대립의 색체를 더 선명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공산주의냐 자본주의냐 하는 단조로운 관심사는 정치권력이냐 재산이냐 하는 구체적인 성질을 띈 목적으로 변하여 한반도의 민중들의 관점을 붙들어 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훨씬 세련되고 다양한 철학이나 관점들이 홀대밭는 곳에서 지금까지의 단조로운 관심사는 운명의 끝을 볼 수 밖에 없는 듯 하다. 어떤 목표에 대한 성과를 상승시키는 역할은 더욱 폭넓은 바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민중이 없는 곳에서 권력자가 존재할 수 없고, 빈자(貧者)가 없는 곳에서 부자가 존재할 수 없다는 상대적인 이치를 생각해도 그런 듯 하다.
누구나가 다 그 길로 가서는 사회발전이 어찌 이루어지겠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조로움을 지향하는 노력은 한반도에서 계속되는 성향이 있는데, 국가나 사회가 변화를 바라지 않는 태도는 일반민중의 한 사람으로서 수동적으로 편승할 수 밖에 없는 추세지만 좀 더 장기적이고 더 큰 영역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정체(停滯)와 낙후(落後)의 결과로 수렴됨은 당연한 듯 하다.
가끔 배타적인 종교도 사회발전을 가로막는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사회의 다양한 모습을 포용하지 못하고, 이념의 잔여분자들과 부지런히 싸워봐도 제 3자적인 관점으로는 그 나물의 그 밥이라는 구태의연한 평가를 받을 수 밖에 없는 문제가 있는 듯 하다. 다양함과 혁신은 사회에 생명력을 주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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