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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7월 31일 금요일

북한의 사회지능

우적(友敵)의 이념이 지배하는 사회의 문제점이라는 것은 우호감과 더불어 동전의 양면처럼 발생하는 상대방에 대한 적개심인듯 하다. 그런 사회는 마음의 여유가 없으며 다양한 가능성을 차단시키며 사고를 경직되게 만든다. 언젠가 서점에서 [9번째 지능]이란 책을 잠깐 펼쳐봤는데, 원대하고 이타적인 목표는 이제껏 '지능'이라고 불려왔던 것과는 또 다른 지적인 능력을 향상시킨다는 내용인 것 같았다. 생각을 해보면 적대감, 경쟁심, 욕망의 충족을 위해 급해지는 마음등은 두뇌회전에 별로 도움이 안되는 경험을 하는 이들이 많을듯 하다.

몇일전 북한은 한국의 대통령의 이름을 언급하며 "재봉틀로 어쩌구"하는 별로 이익이 안되는 욕설을 북한의 공영방송(어차피 북한은 모두가 공영방송이지만)을 통하여 언급한 적이 있다. 물론 한국을 향한 방송이 아니라 북한 내부 인민들이 한국정치지도자에 대한 적대감을 갖도록 하는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북한이념의 잣대로서는 한국의 정치지도자는 국민과 일체감을 가진 존재가 아니고 국민을 핍박하는 상위계급의 정점에 있는 존재라는 개념이고, 그러므로 남조선 인민을 해방시키기 위해 적개심을 가지고 공격해야 할 대상으로 국민감정을 조정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물론 한국에서 정치지도자가 국민에게 비판받을 일이 생길수 있는 것 이상으로 북한체제에서 북한정치지도자는 북한의 상위계급의 극한 정점으로 행세한다는 사실들을 우격다짐으로 뒤틀어버린 모순이 있다. 논리를 따지기엔 이미 막장이 되어버린 한반도의 이념세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행태이기도 하다.

지나간 날과 오늘의 현실은 그렇다고 하지만 계속 부정적인 적대감을 강화시켜온 사회의 구성원들이 미래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어떤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북한은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먼 옛날 말 위에서 무거운 철퇴를 휘두르던 영웅을 그리워 하던 시절과는 너무 변해버린 시대에 와 있는 것을 망각해버린 탓인지도 모르겠다. 선군정치, 북한군부의 권력, 적대적인 대남관계등을 더 부드럽게 향상시키지 않고서는 북한은 어떤 발전도 기대할 수 없을 것 같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 몇일 후 심리학자 매슬로우(Abraham Maslow 1908 - 1970)는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미국국가를 어설프게 연주하며 성조기를 펄럭이며 걸어가는 스카우트단원들과 제복의 노병들의 애처로운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 순간 심리학을 연구해서 평화에 기여하겠다는 결심도 하였다고 한다. 어느 날 한국에서 제복의 노병들이 성마른 모습으로 나서다가 아주머님들과 싸우는 장면을 보고는 부끄러웠다는 특별한 군대를 나온 친구의 고백이 생각났다.

개인이나 사회는 자기만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은 자유지만 타(他)에 대한 배려는 절대 소홀히 할 수 없는 부분인듯 하다. 서로와 각자의 발전을 위해서 그런것 같다.   

2015년 7월 25일 토요일

미래를 이끄는 분위기를 찾아서

덴마크의 전설적인 양자물리학자 닐스 보어(Niels Bohr)는 예측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었다. "특히 미래에 대해 예측하기란 무척 어렵잖아."그가 말편자를 집 문위에 걸어놓은 모습을 보고 친구가 그런 부적이 행운을 안겨준다고 정말 믿는지 궁금해하자 그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내가 안 믿는다고 해도 그게 통한다고들 하잖아."라고 덧붙였다. 사회적 분위기에 근거한 추세의 전개 과정과 경우에 따라서는 구체적인 사건까지 설명하려는 우리의 시도에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당신이 믿지 않는다 해도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니까!

중략

아마도 어떤 사건이든 분위기가 긍정적이고 상승하는 기간과 더불어 정반대의 기간이 있다는 점에서 똑같은 주장을 뒤집을 수도 있다고 반박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구체적인 사건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면 이 주장이 사실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정치판의 선거유세에서 대게 한 후보의 운이 상승하는 기간과 하락하는 기간이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특정후보의 상승과 부침같이 아주 한정된 상황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그러한 상황은 더 강력하고 꾸준히 나타나는 근원적인 패턴에 덧붙여지는 무작위의 변동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소음이 아니라 신호, 즉 패턴에 관심이 있는 것이다.

지나친 반복이 될 수도 있지만 우리는 개개인이 관련된 로또 당첨이나 암살처럼 구체적인 사건이 아니라 집단적인 사회적 행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 다시 한 번 유의하기 바란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은 특정한 행동 유형의 특징인 규모에 따라 전개된다. 전쟁은 몇 시간이나 며칠만에 발발하지 않으며 실제로 일어나기까지는 여러 주와 여러 달, 심지어는 여러 해가 걸린다. 비숫하게 대중의 음악적 취향이 변하는 사건은 수백년에 걸쳐 나타나지 않는다. 이 현상의 자연스런 기간은 여러 주에서 기껏해야 여러 달이다. 따라서 다음의 질문을 평가할 때 이렇게 물어야 한다. "문제의 사건에 해당되는 자연스런 기간은 얼마인가?" 그 질문에 던지는 시점에 사회측정기로 이용할 수 있는 다우존스지수나 문제의 사건에 더 깊이 관련된 다른 금융 지수를 찾아 본 다음, 분위기가 상승하고 있는지 하락하고 있는지 평가하기 위해 사건에 맞는 기간을 검토해 볼 수 있다.

- John L. Casti (IIASA/응용시스템분석을 위한 국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의 From Rising Skirt Lengtts to the Collapse of World Powers 중에서 -

현재의 상태를 형성하는 대중의 힘과 미래를 전체적으로 전망하는 방법에 관한 내용인듯 하다. 사실 아니라 해도 누구나 그렇다고 믿음으로써 현실이 바뀔 수도 있고, 그런 변화는 일시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장기적으로 많은 사건들이 복합적으로 연계되어 결과로서 수렴하게 된다고 표현하면 좋을 듯 하다. 창조경제에는 변화가 수반되어야 하며, 그 변화란 대중적인 생각의 전환과 그 생각을 전환시키기 위한 계몽, 제도적 개혁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듯 하다.

생각을 해보면 구체적인 문제의 사건 한가지만 놓고 보면 그게 무슨 큰 문제로 비화되겠냐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아주 중요할때 상황을 무너뜨리는 신호탄 역할을 할 수 있는 일들이 꽤 되는듯 하다. 지난 정부에 있었던 국기문란의 행태는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도 대중적인 인식을 부정적으로 자리잡게 만들고, 청년기의 실업에 대한 고통은 개인적으로 장년기를 지나서 노년기까지 사회를 불신하는 심리적인 구속을 할 수 있는 점을 생각해봐야 할 듯하다.

특히 노령화시대는 전체가 노인이면 노인으로서 살아가는 시대로 순응하면 될 것 같다는 합리화는 받아들여서는 안될 듯 하다. 노인으로서 살아가는 사람들 당사자의 문제일뿐 아니라 학교에서 거리에서 가정에서 진취적인 기상과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좌절하지 말아야 할 청년들에게 나쁜 분위기를 선물하지 말아야 할 책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듯 하다. 언젠가 모 정치인이 아이들 급식문제에 대한 이슈로 복잡한 상황을 맞이하는 것을 보았는데, 어떤게 정당한지를 떠나서 일반적인 국민의 생각은 아이들 먹는 것을 가지고 저렇게 잔망스러운 상황을 만든다는 분위기가 꽤 있었던것 같다. 사회 지도층의 책무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는데, 나같은 사회 비지도층인 사람들 모두 진취적으로 밝은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상황을 최고의 행복으로 여길 수도 있을 것같다. 그런데 현실이 어두워서 전망도 어두우면 안될 것 같고, 더구나 그런 분위기를 솔선수범하여 만든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듯 하다.

2015년 7월 24일 금요일

권력과 경계성 마인(魔人)

오래전 낮에는 노인분들과 일하고 밤에는 청년들과 일을 하면서 두 계층의 차이점을 선명하게 비교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적이 있었다. 그런데 불운하게도 가장 밀접하게 접촉했던 두 계층의 표본이 될 수 있는 인물들이 아주 나쁜 경우가 있었다. 부분적인 문제를 전체적인 문제로 오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나쁜 표본들의 공통점은 노인분이나 청년이나 부정적인 반사회적 심리상태나 경계성 인격장애를 앓고 있는 경우였는데, 특별한 문제가 없는듯 하면서도 특별히 문제가 있어서 주변인들을 보이지 않게 괴롭히고 있었다.

노인이 되면 신체적인 건강과 더불어 정신적인 건강을 보존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단련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갖게해준 인물들이 종종 있었다. 그 노인분들은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은 없고 경쟁사회에서 오랫동안 습관으로 자리잡은 투지만 살아있었던 것 같다. 더불어 연령이 가져다 줄 수 있는 권위를 챙기기 위한 투쟁이 한층 더 노욕(老慾)을 끓게 하고 있었다. 급기야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고 채워지지 않는 욕망과 노인으로서 나쁜 조건에 시달리면서 우울증세를 보이고 있었는데, 그 마음을 잊게 하여 디프레션(depression)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옆에서 노래를 하면서 주위를 환기시켜주는 고생을 하기도 했다.

청년들 중에는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불안한 교육이 빈곤한 심리를 갖게하여 우울증세를 보이는 경우도 있었는데, 가만히 보면 문제가 있던 노인분과 청년이 공통적으로 상당히 수직적 권력에 집착이 많았던 것 같다. 말하자면 남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끊임없이 시달리고 있었는데, 자신의 여러가지 정신적인 장애요소들을 권력적인 위치를 얻어냄으로서 치유시킬려는 성향이 있는듯 했다.자신의 나쁜 신체조건에 관한 열등감을 극복하고 심리학의 대가가 된 아들러(Alfred Adler 1870 -1937)와는 달리 스스로 치유하는 방법을 잘못 선택한 덕에 경계성 마인(魔人) 되어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문제는 이런 경계성 장애를 동전의 앞과 뒤를 판별하듯이 정확히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듯 하다. "경계성"이란 단어가 표현 하듯이 연속적인 개념으로 판단하여야 할듯하다. 그래서 생각해 보니 사회의 권력속에 포진해 있는 많은 이들이 어느 정도의 심리적인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듯 하다. 워낙 일반화 되어 있는 심리상태라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점에서 사회전체가 앓고 있는 문제로 봐야 할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인물들이 사회의 미래를 서서히 무너뜨리는 상황을 인지하는 이가 별로 없다는 것도 문제인듯 하다. 정치적 권력이라고 미화시켜 표현하지만 심각한 북한이나 어느 정도의 한국은 이런 심리적인 장애에 발목잡혀 있는듯 하다. 

2015년 7월 18일 토요일

정보요원들의 어려움과 정치적 파행

언젠가 정보요원들의 이념세계에 관해서 고민한 적이 있는데, 부정적 관점으로 보면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들이 북한과 한국의 정보기관들에게는 적대적인 방첩대상으로 간주될 수 있는 문제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북한의 정보기관원들의 정신세계에 이념적인 바탕이 크게 역할을 할수록 이념적인 문제를 거론하는 점은 중대한 문제가 될수도 있겠다 싶다. 게다가 인터넷이 활성화된 시대에 블러그글을 통해서 대중적인 이해심까지 얻어낼 수 있다면 모든 힘을 다해서 방어를 해야 하는 적으로 간주될 수도 있겠다 싶다. 몇 일전에 있었던 내 블러그 조회수의 급격한 변동은 인위적인 조작을 의심하게 한 사건이었는데, 이념을 이야기하는 이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내 블러그질의 특성상 대중적인 인기에 대해서 그렇게 민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항상 느끼는 점은 세상은 비숫한 관점을 가지는 사람들끼리의 싸움으로 엮여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국정원직원이 해킹관련유서를 남기고 자살한 사건이 벌어졌다. 틈틈이 이런 사건이 일어나는데, 국가를 위해서 헌신해야 하는 정보기관원들이 정치적인 분란에 휘말려 희생되는 모습이 안타깝기만 하다. 세상을 모두 적으로 또는 동지로 삼을 수 있는 다양한 세계를 마음대로 넘나들 수 있는 민간인인 나와는 달리 조직에 있음으로써 부당한 지시나 요구에 자긍심이 무너지는 상황을 감수해야 하는 정보요원들의 고충은 이만저만이 아닌듯 하다.

공작관은 항상 격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익명의 삶을 산다.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을 때조차 그는 대중의 인정을 받을 수 없다. 심지어 가족조차도 그의 업적을 알 수 없다. 비밀기관에 10년 내지 20년 몸 담은 후에 공작관은 머리가 희끗한 중년에 그가 속한 공동체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 버리며, 그의 자녀들에게도 존재감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이 직업이 요구하는 대로 인간의 에고(ego)를 억제하는 일은 쉽지 않다. 공작관은 오로지 그의 동료 비밀요원에 의해서만 업적을 인정받는다. 이러한 환경은 요원들 간에 동료애를 생성한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동료 요원에 대한 충성이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된다.원칙상 이러한 동료애는 공작의 효율성과 유용한 정보수집에 긍정적으로 작용해야 하지만,실제로는 비밀요원의 비공식적인 집단이해 때문에 정보공동체에 대한 비밀공작 임무와 국가안보 이익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

이러한 점은 비밀 공작조직에만 유일한 것은 아니다. 신호정보 및 영상정보기관, 그리고 분석조직도 외부 세계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일해야 한다. 이들의 업적을 인정해 주는 것은 동료들뿐이다. 이러한 사회성 문제는 기술정보 수집활동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한 개인에 대한 여러 동료들의 평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그를 '극비 유명인'(Top Secret Famous)이라 부른다. 즉, 그가 속한 부서 내 비밀취급인가를 받은 일부만이 그의 업적을 알고 있다.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억제하고, 비밀공유로 인한 결집력을 보유하게 되면 불가피하게 비공식적인 내부 응집력이 생긴다.그러나 자칫하면 이는 실수를 용인하고, 고위 관리자에에게 제대로 보고하지 않는 역효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인간정보기관에서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인간정보기관의 인력들은 그의 가치를 아는 동료로부터 떨어져 혼자 일하는 일이 빈번하다. 또한 그들을 성공적인 공작요원으로 만드는 기술은 그들의 상급자들을 대상으로 쓰이기 쉽다. 또한 자신들도 공작분야의 경험이 있기에 관리자들은 공작요원의 실수를 용인하는 경향이 있다.

- Fixing intelligence for a more secure America중에서 -

조직에 대한 충성이나 동료애로 정보요원들의 정신적인 입지가 좁아져서는 안되고 국가관이나 사회적인 기여에 대한 자부심이 정보요원들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야 하는데, 몰지각한 상부의 정치적인 파행은 정보요원들을 정신적으로 압살(壓殺)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급기야 자살하는 사태까지 벌어지는듯 하다. 공리(共利)와는 거리가 먼 이념정치를 하고 있는 남북한의 정치세계는 사회 하부구조에서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다양한 비극을 안겨주고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하는데, 심지어는 어원 그대로 인텔리젼트한 정보요원들에게도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못난 정치인과 헌신적인 첩보요원들의 불합리한 만남을 생각한적이 있었다. 10여년전 고 황장엽씨를 귀순시킨 민간공작원인 고 이연길선생을 직접 대면한적이 있는데,  검증도 하지 못하는 '주체사상'이란 것을 만들어서 북한을 엉망으로 만드는데 조력한 황장엽씨와 큰 위험을 감수하고 황장엽씨를 귀순시킨 이연길 선생의 에필로그는 매우 대조적이었던것 같다. 귀순후에도 거물로써 대접받은 황장엽씨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익명성'만 간직한체 쓸쓸히 세상을 떠난 이연길 선생의 뒷 이야기는 뭔가 정의롭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는 생각을 하게끔 한다.

도대체 이기적이고 무책임해서 이념적이었던 정치지도자의 파행적인 발자취는 언제까지 남겨질 것인지 궁금하다. 

2015년 7월 17일 금요일

책임과 결정 그리고 세뇌

오래전 미국국적의 한인 여교수가 평양의 김일성 대학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었다. 잠시 미국에서 만난 한국기자가 북한체제에 세뇌당할 것을 우려하는 질문을 하자 교수가 하는 말이 '세뇌는 우리의 일상생활 어디서나 있을 수 있으며 자신은 그럴 걱정을 안한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우문현답으로 생각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종교인이나 '위'에 서고자 하는 사람들이 카리스마를 가지고 타인을 세뇌시키고자 하는 노력을 하는 장면을 많이 보았는데, 사람들은 대체로 부지런히 세뇌당하고 있었고,나는 가는 곳마다 그 점을 못마땅해 하며 젊은 혈기로 그 장소를 뭉개기를 시도하곤 했던 기억이 난다.

10여년전 부친의 문제로 억한 심정이 되었던 나는 좌파와 우파의 첨예한 대립의 현장에서 양쪽에 입장을 알리고 직접 긴장감을 공감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는데, 쉴새없이 미행을 당하는 촌극도 벌어졌다. 그 문제는 지금도 별로 생각하지 않는데, 내가 어느 정도 자초한 면이 있기때문에 긴장감을 살려서 이념문제의 본질을 확실하게 이해하자는 결론만 내리고 말았다.

윗자리에서 카리스마를 부리곤 했던 사람들과 한바탕 충돌을 하면 "이래서 많이 배운 사람들은 힘들다"는 푸념을 듣기 일쑤였다. 여유나 유머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살벌한 이념대립만 있는 한국정치현장의 특성상(특수부대나 특수기관도 연루되는) 살벌한 긴장감을 가져야 하는 상황도 많이 맛보았는데, 그냥 이 지옥같은 곳에서 태어난 내 숙명이라고 생각을 하곤 항상 웃으면서 응대했던 기억도 난다.

지난 정부때 어느 날 공공도서관이나 공공기관의 컴퓨터에서 내 블러그를 열면 유해블러그로 지정이 되어 있는 내용을 볼 수 있었다.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인지 이념과 종교에 의지하던 정부에 이념과 종교를 비판하는 글을 올렸으니 그럴수도 있겠다 싶었다. 촬영을 해놓고 서버를 관리하는 기관에 연락을 해서 문제를 크게 만들겠다고 이야기 하니 그러지 말아달라고 비명을 지른다. 순간 그게 당신들 탓이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결정을 한 권력의 정점에 있는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고 더 이상 문제시하지 않았다.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국정원의 해킹프로그램 구입사안도 국정원조직 자체의 문제보다도 계선조직으로 관료화 되어 있던 국정원에 그런 결정을 지시한 책임자에게 관점을 집중시켜야 할것 같은 생각이 든다.그러니까 당시 각하말씀이나 원장님말씀을 듣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을 이해해야 할 것 같다. 호국기관(護國機館)으로서의 입지를 생각해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이 사안과 관련해서도 자발적인 국민의 결정능력과 책임능력이 부여되지 못하는 사회분위기나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권력자의 빈곤한 철학에 관해서 많은 이들이 각성해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2015년 7월 16일 목요일

5163부대와 스포츠 그리고 요수도시

5163부대로 불려진 국정원이 이탈리아 해킹프로그램을 구입해서 사용한 것이 알려짐으로써 큰 파문이 일고 있다. 펜의 위력으로 미력이나마 이념문제를 해결해보겠다고 시도했던 입장으로서는 지난 10여년간의 골치 아프고 어지러웠던 일들이 생각나 하루 종일 두통에 시달리고 있는 중이다. 부친과 관련된 북파공작원 문제부터 비롯된 일을 전체적이고 근본적인, 심지어는 철학적인 문제까지 거론하면서 대응했는데, 이면에는 말 못할 고민이 있었다. 내 휴대폰이 내 것이 아닌듯 한 느낌, 공공도서관마다 막혀 있던 내 블러그, 특정통화내용에 개입하는 잡음등은 많은 고통과 훈련의 시간을 갖게 한듯 하다.

한 편으로는 과거지향적인 이념문제를 중시하는 한국정보기관 스타일로는 대응할 수 없는 더욱 근본적이고 폭넓은 문제로 대응한다는 것이 점점 마음을 담은 글만은 세계로 뻗어나가는 오지랍이 벌어졌는데, 그 어지러운 사건들의 정점에서 국기(國氣)를 어지럽히던 정치지도자는 마음은 아직도 마물(魔物)의 세계에서 뛰어노는듯 하고, 몸은 오지랍 넓게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는 중인듯 하다.

국정원의 해킹프로그램 구입이 공식적으로 알려지자 다시 한 번 이스라엘 정보기관인 모사드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열을 식히기도 하였다. 그 다큐멘터리 속에는 한국의 희망이 보였다고 하면 머나먼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왜 한국의 정보기관은 미래지향적이지 못하고 세계적이지도 못했을까. 나는 정보기관 자체의 문제보다는 당시 정치지도자의 인성, 그릇의 크기등에 문제가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국(大國)의 정치지도자나 대국을 지향하는 정치지도자의 노력은 찾아볼 수 없었던듯 하다.

다행히도 나는 정신적으로 힘든 일이 있으면 운동기구를 둘러메고 나설 수 있는 자유가 있었으며, 밑바닥 생활에서 힘든 생활을 하는 이들을 보며, 나는 그래도 행복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 여건도 갖추어져 있는듯 하다. 이런 자유는 없고, 출세와 탐욕의 정신적인 구속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사람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든다. 열심히 통신테러를 당하면서도 항상 웃고 있는 모습을 보는 누군가가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했는데, 증거로 확보할 수 있는 것들은 증거를 남겨놓기도 하지만 지금처럼 공식적이고 실증적인 협조가 있지 않으면 별 의미가 없는듯 하여 피할 수 없으면 즐기거나 훈련상태로 착각하기로 했던것 같다.

전체 국민을 위해 일하는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는 항상 부럽다. 그런 정보기관이 있는 나라에서 살았으면, 그리고 헌신적인 지도자가 정치하는 나라에서 살았으면 나도 아이들 웃음소리에 묻혀있는 행복을 느낄텐데, 가만히 생각하니 한반도에서는 나만 그런것이 아닌듯 하다. 내 인생에 가장 행복한 시간은 스포츠를 하는 시간이었는데, 이 곳에서 제정신으로 살기 위해서 정말 필요한 시간이었던 것 같다. 

2015년 7월 10일 금요일

단순한 사회의 결말 / 알튀세



북한사회가 낙후되어 가거나 한국사회가 정체되어 가는 원인은 복합적인 사회구조를 인정하지 않는 철학(이념)이 바탕이 되었음을 항상 토로하곤 하는데, 복합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문제는 정치철학인 이념뿐만 아니라 때로는 독단적인 성격의 종교철학에서도 보이는 문제점인 듯 하다. 특히 유일신을 믿는 종교일수록 배타적인 근본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은 숙명인 듯 하다. 그것은 유일신을 숭배하는 분위기로부터의 소극적 습관이기도 하고, 나아가서는 IS와 같이 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적 때문이기도 한 듯하다.
 
이념이나 종교, 또는 경제문제 등을 마르크스나 헤겔같은 철학자는 현상이냐 본질이냐 하는 이원적인 구도로 해석하지만 프랑스의 마르크스철학자인 알튀세(louis Althuser 1918 1990)는 사회는 복잡성과 다양성을 가지고 있으며,국가이념이나 법이념, 정치이념과 같은 상부구조에도 상대적인 자율성과 독자성이 있다고 한다.
 
좀 더 쉽고 구체적인 생활과 연관시켜 표현하면 흔히 한국사회에서 많은 이들이 지향하는 권력이나 재산증대욕구같은 것들은 헤겔과 마르크스 이념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헤겔이 말하는 변증법에 의한 새로운 정신의 출현, 마르크스가 말하는 물질생활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정신세계인 이념의 발생등은 모든 다양한 관심을 흡수하여 단조롭게 재편하고,공산주의나 자본주의 같은 이념대립의 색체를 더 선명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공산주의냐 자본주의냐 하는 단조로운 관심사는 정치권력이냐 재산이냐 하는 구체적인 성질을 띈 목적으로 변하여 한반도의 민중들의 관점을 붙들어 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훨씬 세련되고 다양한 철학이나 관점들이 홀대밭는 곳에서 지금까지의 단조로운 관심사는 운명의 끝을 볼 수 밖에 없는 듯 하다. 어떤 목표에 대한 성과를 상승시키는 역할은 더욱 폭넓은 바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민중이 없는 곳에서 권력자가 존재할 수 없고, 빈자(貧者)가 없는 곳에서 부자가 존재할 수 없다는 상대적인 이치를 생각해도 그런 듯 하다.
 
누구나가 다 그 길로 가서는 사회발전이 어찌 이루어지겠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조로움을 지향하는 노력은 한반도에서 계속되는 성향이 있는데, 국가나 사회가 변화를 바라지 않는 태도는 일반민중의 한 사람으로서 수동적으로 편승할 수 밖에 없는 추세지만 좀 더 장기적이고 더 큰 영역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정체(停滯)와 낙후(落後)의 결과로 수렴됨은 당연한 듯 하다.
 
가끔 배타적인 종교도 사회발전을 가로막는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사회의 다양한 모습을 포용하지 못하고, 이념의 잔여분자들과 부지런히 싸워봐도 제 3자적인 관점으로는 그 나물의 그 밥이라는 구태의연한 평가를 받을 수 밖에 없는 문제가 있는 듯 하다. 다양함과 혁신은 사회에 생명력을 주는 듯 하다.



2015년 7월 4일 토요일

거대하고 간편한 문제

이념적이거나 종교적인 사회에서 논쟁이란 것은 극단적인 싸움에 휘말린다는 의미랑 같은 것으로 해석된다. 매우 근본적이고 거대한 것의 정신을 지배받는 사람들이 양보할 수 없는 것들이 있기 때문인 듯 하다. 이런 사회에서는 비판과 대안을 표현하기가 불가능하다. 모든 문제가 근본으로부터 탄생했기 때문인 것을 아는 듯, 시민들의 비판도 더욱 근본적인 상황이 벌어진다. 그러니까 뭐가 문제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정치인들이 하는 일이 못마땅하다.’는 표현을 많이 본다.

생각해보니 어떤 정치지도자가 이념적인 편향성을 가지거나 종교적인 편향성을 가지면 비판하기가 가장 좋았다. 비판하기 위해서도 합리적인 생각, 다양한 지식과 정보등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사회는 서로서로 이렇게 상호부작용을 낳으며 망가져가는 듯하다.

다음은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Paul Krugman)The Accidental Theorist란 저서에 쓴 내용이다.

이미 서유럽에서는 숙명론이 크게 강화되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의 문제가 우리보다 더 크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가 해결 할 수 없다는 생각을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서유럽의 국민들은 정책에 실패하고 있는 자국의 정치지도자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기 보다는 그냥 막연하게 세계 시장 때문에 경제적 공포에 시달린다고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이념적이거나 종교적인 편향성은 거대하고 간편한 문제인 듯 하다. 문제가 있으면 설명도 대안도 필요없다. 거기다 권력지향적인 관점까지 가세하면 거대하고 어두운 제국의 포스(스타워즈에 나오는)가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어질 것 같다.  

건강한 정신과 권력지향성


한국처럼 이념적인 분파성이 강한 사회에서 정치문제나 정치문제와 연관성을 단절시키기 불가능한 여러 가지 문제들, 예를 들면 경제문제나 사회문제 같은 일은 최소한의 의견을 표현하는 것도 불쾌한 상황에 부딪히는 일이 많은 듯하다. 우선 우군이냐 적군이냐를 생각하게 되고, 이익과 손해를 생각하며 시작부터 객관성을 잃어버리게 되는듯 하다. 물론 그 다음에 닥치는 감정이입의 파도는 자신(또는 자기집단)이 가지고 있는 권력적 역량을 모두 이용하여 승부를 내고야 만다.

그냥 생각해봅시다. 모두에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를........

이 정도로 문제에 대한 고려를 시작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 권력기관에 있거나 권력지향적인 사람들일수록 열린 대화를 하기 힘든 일을 많이 겪는다. 이미 승부에 대한 관점이 바탕에 깔려 있어서 어떤 객관적인 사실과 객관적인 고려도 생각하지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더 나쁜 것은 비용편익의 원칙에 의하여, 즉 투자한 것에 대해 상응한(정당하다는 것은 아니다)댓가를 얻어낸다는 원칙에 의하여 그런 사람들이 권력을 얻는 것이 문제다. 이런 문제는 일반 기업의 영향력과도 관련해서 문제가 된다. 근본적인 원칙보다는 여러 가지 이익과 승부를 생각하며 위력(威力)을 발휘할려고 한다.


불건전한 정신들이 투쟁하는 곳에서 함께 물려 들어가기도 하면서 생각해보건데, 권력관계같은 수직적인 관계가 바탕이 된 관점은 병든 관점이 틀림없는 듯 하다. 내 자신도 心身이 건강한 상태에 있으면 마음이 열리는 일을 많이 경험하기도 한다.

언젠가 한 번 글을 올린 적이 있지만 심리학자 올포트(Allport, Gordon Willard, 1897.11.11 ~ 1967.10.9.)는 건강한 사람은 1, 자아의식이 확대되어 있으며, 2, 타인들과 따뜻한 관계를 맺고, 3, 현실적이고 객관적이며, 4, 기술과 과업을 가지고 일에 몰두하며, 5, 자신을 객관화 시키고, 6,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으며, 7, 통일된 삶의 철학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권력지향적인 사회나 개인과 맞서다 보면 또 다른 권력이 필요하게 되는 불상사를 겪기도 하는데, 그런 악순환의 연결고리를 끊기는 누구나가 쉽지 않은 듯 하다. 심지어는 권력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오래전 신체적인 움직임만 있는 노동의 현장에서도 연배가 있는 고학력자가 성마른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보고, 정서를 안정시켜 줄려고 노력하거나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 시험에 합격한 최고 엘리트학벌의 직장동료가 갑자기 권위적으로 태도가 돌변하는 것을 다 이해한다는 미소로 제압하기도 했는데, 함께 어울려 맞서는 것은 매우 볼상 사나운 광경을 연출한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체득한적이 많아서 그런듯 하다.

정치권력이나 기업과 같은 경제권력이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하면 그것처럼 불행한 일도 없는 듯 하다. 권력을 가지고 있으니 병을 병이라고 말 할 수도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냉정하지 못하면 그런 사회의 일원으로서 함께 비극적인 삶을 살게 되는듯 하다. 북한과 같은 이념사회는 그런 모습을 뚜렷이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