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대혁명과 4인방의 전횡으로 중국이 혼란에 빠지자 모택동은 등소평에게 중국을 전면적으로
개혁시킬것을 부탁했다. 모택동은 당시 정치적 세력을 가지고 있던 강청을 통찰하고 있었다. "장차 강청은 모든 사람들과 사이가 멀어질 것이야.
현재 사람들 또한 그녀를 무성의하게 대하고 있어. 내가 죽은 이후 그녀는 시끄러운 일을 일으킬 거야."
통찰력은 있지만 노쇄해서 중국을 개혁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던 모택동은 등소평에게 중국을
개혁시킬 소임을 맡겼는데, 주은래는 등소평을 "큰 일을 간단히 처리한다."는 표현으로 신뢰를 아끼지 않았다. 등소평은 파벌성이 강한 지도자집단과
투쟁해야하는 어려움과 대국의 개혁이라는 넘어야 할 산들이 이중으로 막혀 있었다. 등소평은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먼저 유효한 규칙과
제도를 확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등소평은 먼저 기간산업의 전위적인 역할을 하는 철도개혁부터 시작했는데,1975년3월
5일의 회의석상에서 공업체계의 문제점과 파벌성에 대해서 냉정하게 분석하고 해결책을 내놓았다. 특히 파벌성에 관한 선전포고는 문화혁명을 일으킨
극좌세력에 대한 선전포고이기도 했는데, 문화혁명기에 큰 시련을 겪은 등소평으로서는 개인적으로 문화혁명세력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기도 했겠지만
당장은 극좌이념으로 무장한 문혁세력이 중국개혁의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공식적으로는 연설문 속에서 제대로된 마르크스주의와
모택동주의를 표현하고 있었지만 수정주의 이념의 과격한 표현은 개혁에 도움이 안됨을 알고 점층적인 수정주의과정을 표현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결국 철도개혁은 크게 성공을 거두었고, 모택동은 김일성을 만난 자리에서 등소평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정치를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가 당신과 함께 이야기 할 것입니다. 이
사람은 등소평이라고 하는데 그는 전쟁을 할 줄도 알고, 반 수정주의자입니다. 홍위병이 그를 괴롭혔지만 현재는 무사합니다. 여러 해 동안
타도되었지만 그는 다시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그를 필요로 합니다.
모택동은 4월 23일 보고서에서 강청일당이 등소평을
공격하는 구실인 경험주의를 반대하거나 강청일당이 사로잡혀 있는 교조주의를 반대하는 것은 모두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수정하는 것이라고 사상적인 해결을
해 주기도 하였다. 4월 27일 회의에서 4인방은 자기비판을 할 수 밖에 없었지만 등소평의 개혁과 4인방의 극좌적 교조주의는 최후의 일전을
치룰수밖에 없었던 상황으로 내몰렸다.
40년후의 한국땅에서 해결이 안되는 파벌주의와 이념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쓰는 중국의
본태적(本胎的) 공산주의자들인 모택동과 등소평이 개혁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는 과정은 아이러니 하지만 이념문제를 떠나서 귀감이 될 만한 것
같다.
- 등소평의 딸 등용이 지은 등소평전기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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