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한국은 식민지와 분단을 겪고, 내전의 참화까지 입은 상태에서 국제사회에서 어떤
비루한 대접을 받아도 감내해야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를 이끌었던 정치지도자의 모습은 많은 국민들의 머리속에 카리스마와 권위있는 모습으로
영상화되어갔다. 그 당시 국민들의 삶속에는 출세나 권력같은 수직적이고 상대적인 우열관계의 척도를 중시하는 관점들이 지배하고 있었던것 같았다.
군 장교복을 입으면 나이방(레이벤이라는 상표의 선글라스)을 쓰기 바빴고, 작은 기업의 경영주도 카리스마 있는 모습으로 옆으로 비낀 모습의
사진을 찍기 바빴다. 현실이 비루할수록 그런 이미지들은 강렬하게 국민들의 상상속을 자리잡기 마련인듯 하다. 그런데 이미테이션들이 너무
흔했다.
사회 초년생 시절 만난 보스가 많이 본 사람이었다. 눈으로 봤다는 의미가
아니고 한 시대를 만연했던 권위주의의 표상이었다. 신앙처럼 만연했던 그 상상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가는 곳,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의 위압감을
인식시키기 바빴다. 나중에 기업의 목적은 이윤창출이라는 사실을 잊어 버리고 하는 일 마다 CRUSH(뭉개다)해 버리는 모습에 마음이 언짢아서
속된 표현으로 적나라하게 들이 받았다. 신앙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은 보스는 이후로 삶의 지표를 잃어버리고 회사도 무너지고 많이 방황한 모습을
보였다. 생각하면 마음이 아픈 일이지만 나는 그런 어리석은 신앙조차도 갖지 못하고 한국사회의 밑바닥에서 내가 누군지도 모른채 방황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양심의 가책을 덜 느낄 수 있었다.
아직도 가는 곳마다 그 시절 그 추억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습관과
동조(alignment)의 위력이 대단하는 것을 느끼곤 한다. 보수와 진보, 죄파 우파 가릴것 없이 국민들의 정치적 관점은 '자신의 철학이 담긴
정견(政見)'이 아닌 '인물 중심의 의존적인 정견'이 우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한반도의 민중들이 신앙같은 이념이나 불통(不通)의 정치에
휘둘려야 하는 이유를 이해했다. 사회에 만연한 수직적인 관점이 깨지지 않으면 이제는 CRUSH의 시절이 올 것 같다. 가고자 하는 길과 살아야
할 이유도 모른채 기계처럼 먹고 살기에 바쁘고, 서로 상대적인 우월감을 갖기위해 싸우다가 기이한 정치지도자에 농락당하고 '멍'해진 시간을 갖게
된 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인듯 하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