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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월 28일 토요일

일본 정보기관의 변화


일본이 IS 인질사태에 대한 대처미흡을 구실로 일본판 CIA를 만든다는 기사다. 극우성향이 강한 산케이신문발 기사여서 그런지 기사자체가  정보기관을 강화하기 위한 여론조성목적도 겸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미국은 9.11 테러이후 정보기관이 방만하게 퍼져있어 제대로 된 조정과정을 거치지 않고 대통령에게 정보가 전달되는 문제점과 중앙정보부(CIA)가 관료집단화되어 융통성있는 정보활동을 하지 못하는 문제점등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온듯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정부조직부터 경제조직까지 또는 일본인들의 개인과 사회의식서부터 구조까지 관료화되기 쉬운 바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중앙정보부 형태의 집권화 된 정보기관을 만들겠다는 의지는 의문점이 있는듯 하다. 혹시나 정보기관의 효율성에 중점을 둔 개혁이 아니라 효율성과 협력,조정을 구실로 일본의 대외 군사적 영향력을 확보할려는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미국 중앙정보부는 신자유주의 이념과 결합하여 레이건대통령때와 부시대통령때 강화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조직의 효율성과 기능강화의 의지는 별로 상관이 없고 이념적 의지가 정보기관의 확대 강화를 위한 배경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듯 하다.

일본은 정보기관을 분산시켜서 집권적인 정보기관을 만들지 않는 전통을 취해 왔는데, 이는 과거 군국주의 성향이 있던 시절에 있었던 정보기관의 부작용을 방지할 뿐더러 군사정보가 아닌 경제정보등이 필요했던 일본의 시대적 특성을 반영해 온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일본은 다른 국가에 없는 '경제부'가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잘은 모르지만 오사카 대지진과 북한 미사일발사등에 자극받아 일본은 고이즈미 총리때부터 총리관저실에 정보상황실과 통제실을 마련하여 총리의 국정위기대처능력을 강화시키고,정보기관은  이때문에 미국보다 대응능력이 강력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번 산케이 신문의 기사는 뭔가 이제는 필요한 것이 '다른 것'이라는 일본 극우정부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는듯 하다.  

노인과 마음의 양극화


정신적인 도움을 많이 주었던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의 부모님이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어릴때부터 친구에게 "콩 심은데 콩 난다."고 가르침을 주었다고 한다. '나이가 꽤 들어서' 이 말을 듣고 머리를 한 대 맞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 자신을 다스리기 위한 좌우명으로 삼기로 했다. 그리고 늦게나마 단순하지만 깊이 있는 노인분들의 지혜를 느껴 보기도 했다.

한 편으로는 '노욕'(老慾)을 조심해야 한다는 채현국 선생의 일갈(一喝)이 이해될 정도로 '하고자 하는 것보다 가지고자 하는 것'에 눈이 먼 노인분들을 보기도 하는데, 노인분들을 뵐때면 지혜로운 마음과 노욕에 눈 이 먼 마음으로 극명하게 갈라지는 '또 다른 양극화 현상이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 [은교]의 명 대사인 "너희 젊음이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벌이 아니다"라는 이적요 시인의 말 처럼 '노화'는 인간의 숙명이지만  노화의 과정을 대처해 온 오랜 시간들의 내공(內功)의 차이가 사람에 따라서는 크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사람들을 보면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스스로의 성장심에 도움을 주는 경우를 보는데,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없는 노인분들은 성장에 대한 기대를 접음으로써 과거 지향적이고 노욕과 고집으로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는 모습도 많이 본다.

지혜로운 노인의 모습은 권력과 명예와 부유함이 없는 곳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반면에 노욕에 찌든 노인의 모습은 권력과 부와 명예가 넘치는 곳에서도 많이 보는 것 같았다. 내려놓는 일에 대한 훈련이 안 되어 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더불어 살아가는 훈련이 안되어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어른와 꼰대의 차이는 성장할려는 마음이 있고 없고의 차이라고 한다. 그런데 모진 경쟁속에서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없이 살아 온 세대가 이제 곧 한국민들의 대다수를 구성하게 된다. 그런데 한 편으로는 동양문화속에서 노인의 세계는 외부자극에 의해서 변화할 수 없는 '성역'인듯 하다. 

아이를 보면 부모를 알 수 있고, 부모를 보면 아이를 알 수 있는 경우를 많이 본다. 경제적인 변화와는 달리 정신적인 변화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듯 하다. 

2015년 2월 27일 금요일

한국과 일본의 내수(內需)없는 경제


한국경제가 침체되는 가장 큰 원인은 경제적 이념(아니면 이념적 경제인지)이 배경이 된 이유로 국민을 구성하고 있는 대다수의 경제적 중저소득층의 소득이 너무 낮아져서 국내수요를 창출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중산층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중저소득층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한국에선 이미 중산층이 완전히 파괴된 것으로 생각된다. 흔히 정부정책의 척도로 삼는 '중산층'을 현실경제에서 만나기 힘들었을뿐만 아니라 주관적인 관점에 잡혀서 그런지 경제환경이 조악한 내 관점으로는 모든 시민들이 저소득층으로 보이고 '공식적'으로 중산층인 시민들은 '매우 부유한' 시민으로 보이는 착시현상이 생기는듯 했다. 현실이 아니라 착시현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한국민들의 삶이 희망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다.

대부분의 경제전문가들은 장기침체를 겪는 일본경제는 국민들의 소득대비 저축률이 높아서 수요를 창출하지 못하고 국민들이 저축한 돈은 투자처를 찾지 못하는데 경제적 침체의 원인이 있다고 말하는듯 하다.

프리스턴 대학교 경제학교수인 폴 크루그먼(Paul Krugman 1953 ~ )은 10여년전  The Accidenal Theorist 라는 저서에서 지나친 저축성향때문에 수요가 없는 일본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돈을 많이 찍으라(PRINT LOTS OF MONEY)는 제안을 한다. 돈을 많이 찍으면 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는게 일반적인 의견이지만 인플레이션은 지출이 생산능력을 초과하여 발생한다는 기본적인 사실에 근거해서 볼때 일본인들의 지나친 저축성향은 인플레이션이 일어날 정도로 과도한 지출을 상쇄시키고 소비수요를 적절하게 창출할 것이라고 명쾌하게 해결책을 내놓고 있다.

그런 명쾌한 해결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행이 돈을 더 찍어내어 통화량을 늘리지 못하는 이유는 1980년대후반의 거품경제가 꺼진데 대한 반동으로 1990년대부터 침체가 시작되었다는 일본은행과 대장성 관리들의 믿음때문이라고 크루그먼 교수는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일본은 과거의 경험으로 인한 트라우마때문에 통화량을 늘리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말하는데, 어쩌면 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하고 시기적 상황에 적절하고 순발력 있는 경제정책을 펴야 한다는게 크루그먼 교수의 논리인듯 하다.

한국은 일본과 비숫하게 내수침체의 상황을 겪고 있지만 과거의 나쁜 경험이 개선을 위한 노력에 발목을 잡는 일본과는 달리 '신자유주의 경제'라는 이념적이고 정치적인 가치관이 개선을 방해하고 있다는 점이 다른 것 같다. 한국경제는 소비수요가 생산과 공급, 나아가서는 투자까지 연결이 되며 기업가와 근로자를 비롯한 경제적 시민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지극한 진리를 배제시키고 해결책을 찾는듯 하다. 기업가나 노동자, 우파나 좌파라는 이분법적으로 나눈 관념에 맞추어서 한 편을 희생시켜야 다른 한 편을 살릴 수 있다는 제로섬적인 사고에 물들어 있는듯 하다.

어쩌면 일본과 같은 경제적 트라우마가 아닌 정치적 트라우마가 경제분야까지 우울하게 만드는 것이 한국경제가 침체되는 근본적 이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2015년 2월 22일 일요일

불법도청과 닉슨의 눈물


워터게이트 사건이 불거지자 닉슨은 "내가 무엇을 했단말인가?"하고 울면서 주저 앉았다는 이야기를 저번 글에서 히로나카 헤이스케의 글을 인용하여 쓴 적이 있다. 닉슨이 흘린 눈물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본적이 있다.

도청과 감청은 근본적으로 '비열한 행위'임에 틀림없지만 긴급한 상황에서 정당성을 인정받는 경우가 있다. 규범적으로는 옳지 않지만 현실적으로 인정받는 일이라고 표현하면 적절할 것 같은데, 합법성과 불법성의 사이에서 미묘하게 줄타기 할 수 있는 문제인것 같다. 그 미묘한 부분은 정치적인 부분이라는 의미도 있고, 통치행위가 합법성위에 군림할 수 있다는 헌법이론도 있는 만큼 통치행위로서 합법성을 인정받을 수도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2차대전이 개전(開戰)하자 다급해진 영국수상 처칠은 루즈벨트에게 구축함을 건조할 차관을 비밀리에 요청했다. 그리고 루즈벨트의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주영 미국대사인 케네디를 불러 나치에 대한 굳건한 항전각오를 표현했다. 당시 주영 미국대사관에서 비밀전문을 담당하던 타일러 캔트는 처칠과 루즈벨트의 비밀통신이 죄없는 미국시민들을 전란속에 몰아넣는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치비밀요원인 애나 울코프에게 비밀전문을 건네주었다.

이 사건으로 루즈벨트는 영장없는 도청은 위법이라는 대법원판결(미국은 판례가 성문법의 역할을 하고 있다. 선례구속성의 원칙이 지켜진다고 표현하기도 한다.)에도 불구하고 영장없는 도청을 반대하는 법무장관 로버트 잭슨에게 인준할 것을 요청했다. FBI국장이었던 후버는 잭슨에게 도청에 관한 백지위임장을 받아 이후 30년동안 FBI는 도청을 통하여 정적들과 국가의 적들을 추적해왔다고 한다.

영장없는 도청이 인습처럼 전횡하던 시절에 대통령이 된 닉슨은 도청에 대해서 불법성이나 도덕성을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습관처럼 선임자들로부터 면면히 내려온 '전통'에 대한 책임을 왜 자신이 혼자 뒤집어 써야 하는지에 대한 억울한 심정으로 눈물을 흘렸을 것 같기도 하고, 좀 더 냉철하지 못하고 부적절한 환경에 동조해버린 자신의 경솔함에 대한 회한의 심정으로 흘린 눈물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옳다고 할 수 없는 일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누군가가 지게 되어있고, 옳다고 할 수 없는 전통은 언젠가는 깨지게 되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한듯하다. 도청뿐만 아니라 많은 비리들이 빙산의 일각처럼 일부분만 드러내고 숨어있다가 '운 없는 표적'이 된 누군가와 관련해서 드러나게 되는 것 같다.  

2015년 2월 20일 금요일

한국형비리와 초합리성


어느 날 아이가 엄마에게 아빠의 머리가 왜 대머리냐고 물었다. 엄마는 아빠가 머리를 많이 쓰기때문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아이가 엄마의 머리숯은 왜 많냐고 물었다. 한참 침묵이 흐른뒤에 나가 놀라는 엄마의 호통이 있었다.


한국에선 계속되는 국방비리로 국가의 안보가 흔들리고 있는듯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보를 중시해야 한다는 정치인사의 조바심어린 충언은 시기적절한 충언이지만 뭔가 불합리한 여운을 남겨주는듯 하다. 이쯤에서 뭐가 불합리한지를 설명했을때 엄마의 호통이 터져나올것 같은 경험을 이전 정치지도자 시절에 경험한 바 있었던것 같다.

한참 이념문제에 얽혀서 초합리성때문에 신경이 쓰인적이 있었다. 문제가 있으면 따박따박 증거를 확보해 놓는 성격이라서 웃으면서 지나가는 사건이 되었던것 같다. 하지만 이전 정치지도자의 초합리적인 성향에 대해서는 국가정책서부터 개인적인 성향, 심지어는 정보기관을 운영하는 스타일까지 다방면으로 초합리적인 성향을 보여주었던것 같다. 한반도에서 초합리적인 성향은 북한만으로도 넘치는듯 하다.

신문이나 텔레비젼 등에서 매일같이 보도되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문제나 사건,크게는 국제분쟁에 이르기까지, 그 원인은 억측과 사실을 혼동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의 위기에 몰렸을 때, "내가 무엇을 했단 말이냐?"라고 울면서 주저앉았다고 한다. 그때 사건과 관련된 사실을 있는 그대로 공표하고 국민 앞에서 적절한 책임을 졌더라면 사임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통령의 권위라는 이미지에 안주한 희망적 관측이 판단을 흐리게 하고 사실을 은폐하고 왜곡하게 만들었다. 결국 닉슨은 무리하게 공작했기 때문에 은폐와 거짓이 쌓여서 사임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  필드상을 수상한  히로니카 헤이스케 - 

부패가 일상적인 환경에서 살아 온 사람들은 부패가 보여주는 인과관계를 합리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듯 하다.습관과 타성에 빠져 있거나 운좋으면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는 상상력, 심지어는 잘못된 일을 하고 있다는 도덕감조차도 상실하는 초합리적인 상황에 빠져드는듯 하다.

인과관계를 추적하여 설명하는 능력이 상실된 한국사회에서 초합리적인 상상력이 바탕이 된 부패는 점점 만연할 것이라는 불안한 예감이 들기도 한다. 물론 국민의식에 지도적 역할을 해야 할 이념이나 종교같은 관념들이 점차 파행으로 가고 있는 문제점도 있는듯 하다.

인간 사회의 다양성을 설명하려고 하는 문화인류학자들은 흔히 인간사회를 많게는 대여섯가지로 분류한다. 그러나 음악적 스타일이나 인생의 단계에 대한 것이든 어떤 연속적인 진화 또는 발전을 놓고 몇가지 단계를 설정하려는 이 같은 시도는두가지 이유 때문에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첫째, 각각의 단계는 그 전 단계에서 싹트는 것인데, 이 두 가지를 구분하는 경계선은 자의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19세인 사람은 미성년자일까 젊은 성인일까?). 둘째, 발전의 순서는 결코 확고부동한 것이 아니므로 같은 단계에 함께 분류되어 있는 표본들도 서로 이질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령 브람스와 리스트가 오늘 날 자신들이 낭만주의 시대 작곡가들로 한꺼번에 분류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무던 속에서 벌떡 일어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자의적으로 단계를 나누는 일은 음악이나 인간 사회처럼 천차만별인 대상에 대해 논의할 때 설명이 간단해진다는 유용성이 있다. 다만 위와 같은 두가지 단서가 달려 있다는 것만은 항상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 Jared Diamond [GUNS, GERMS,and STEEL]중에서 -

과학성이나 합리성같은 것이 더 본질적이지 못할 수 있지만 종교에 몰입하더라도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경제적바탕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자신을 비롯한 인간과 사회에 대해서 고민하고 설명하고 토론하면서 문제점을 교정해나가는 역할을 해주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2015년 2월 14일 토요일

한계소비성향과 낙수효과 / 한국경제의 수요자


오래전 지금은 고인이 되신 어느 대그룹의 왕회장이 양복은 한 벌만 있고, 구두는 뒷굽이 닳으면 다시 갈아 신기를 10년이상 한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었다. 아껴쓰는건 나와 같은데 돈버는 스케일에 있어서는 극과 극이며, 두 사람이 내수경제(內需經濟)에 전혀 도움을 못주는 비애국행위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웃기도 했다.

한계소비성향(marginal propensity to consume)은 추가소득 중에서 저축되지 않고 소비되는 금액의 비율을 말한다. 개인적인 소득의 한계소비성향을 말하자면 왕회장께서는 극히 낮고 나에게는 극히 높은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소비는 내수를 창출하지만 소비하고 남은 저축은 다시 투자가 되어 국민의 한계소비성향이 높던 시절에는 절대적으로 저축이 곧 애국행위였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매우 저렴한 삶을 사는 밑바닥의 현실경제를 보면서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낙수효과랑 관련해서 생각하는 바가 있었다.

배우 출신이자 전 캘리포니아 주지사였던 로널드 레이건은 1981년 미국 대통령으로 선출된 뒤 마거릿 대처보다 한술 더 뜨는 정책들을 추진했다. 레이건 정부는 고소득자들에대한 세율을 공격적으로 깎으면서 이 조치로 부자들이 투자 이익 중 더 많은 부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투자의욕을 촉진해서 부의 창출을 독려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부자들이 부를 더 많이 축적하면 더 많이 소비할 것이고, 이로 인해 일자리가 더 늘어나 더 많은 사람들의 수입이 증가할 것이라는 논리였다. 이것을 낙수효과이론trickle-down theory이라고 부른다.

부자들의 세금을 깎는 동시에 레이건 정부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보조금을 삭감(특히 주택 보조 부문에서)하고 최소임금을 동결하면서,그것이 더 열심히 일할 동기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논리이다. 왜 일을 더 열심히 하도록 하기 위해 부자들을 더 부자로 만들고, 가난한 사람들은 더 가난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일까? 이해가 되든 안되는 이 논리는 공급 경제학 supply-side economics이라고 불리며 향후 30년 동안, 아니 그 이후까지도 미국 경제정책의 기본 신념으로 자리잡았다. 

- 장하준[경제학강의] -

반공주의자였던 레이건대통령의 정치적인 이념과 공급경제학자들의 이념이 결합하여 미국의 빈부격차를 확대시켰던, 그래서 오바마행정부에서 수정되고 있는, 경제정책이 한국에서는 더 강한 이념적인 성향과 결부되어 꽤 오래 여운을 남기는듯 하다. 심지어 어떤 유명정치인은 복지는 한국인들을 게을르게 만들어서 그리스와 같은 파국을 만든다는 한국인들의 심성에 대한 지극한 오해심까지 보여주고 있었다.

사실 그리스는 농업과 관광업을 주된 산업으로 하고 있는 국가라서 제조업과 첨단산업 위주로 경제가 운영되는 한국과는 다르게 국민들이 낙천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긴 하다. 그러나 그것이 직업의 특성상 그렇지 그리스국민의 게으름과는 상관없는 일인듯 하다. 그리스에서 관광을 하고 있을때 업소마다 딱딱하고 경직된 기계적 능률성으로 고객을 대하면 얼마나 우스울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된다. 아니면 올리브밭에서 천삽뜨고 허리 안펴기 운동을 하고 있는 그리스 농부를 생각하면 얼마나 우스울 것인지를 생각해봐도 그렇다.

좀 더 합리적으로 접근해보면 그리스의 문제는 해결책을 공급경제학적으로 해결하여, 문제가 발생했을때 재정지원같은 것이 일반수요자들인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촛점이 맞춰져 있지 않고, 금융분야 같은 '영향력은 크나 대단히 소수의 이기적인'분야에 집중되어 있음이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사실 복지가 한국인 뿐만 아니라 세계인류의 목적임을 인식한다면 게으른 국민성을 바꿔서라도 복지정책을 달성해야 하는데, 정치적인 전문가와 경제적인 전문가들이 대다수의 서민들과 함께 생활해 본적이 없어서 그런지 공감과 연대감을 가지고 있지 않는듯 하다.

한국사람은 게을르지도 않을뿐더러, 일은 기계적 능률성에 쫓기지 말고 행복하게 해야 하며, 정부는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줘야 하는 사명이 있는듯 하다.

과연 부자감세를 해서 부자들의 소비를 촉진시킬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생각해 봤는데,한계소비성향을 생각해보면 그렇지 못할 것이라는 답이 나온다. 예를 들면 이렇다. 월 소득이 100만원인 빈돌이가 소득중 90만원을 소비에 지출할때 월 소득이 1000만원인 부순이가 900만원을 소비에 지출하지는 않을 것이다. 부순이와 같은 고소득자가 절대적으로 많지 않다는 현실을 볼때 한계소비성향이 큰 빈돌이에 가까운 국민들이 내수경제를 살린다는 결론이 나온다.

부순이의 한계소비성향이 높아져서 고가의 사치품소비나 고급주택과 같은 건축물이 빈돌이의 일자리를 만들어 주기도 하지만 결국 빈돌이의 소비수요가 가장 중요한 바탕이라는 표현이기도 하다. 부순이가 소비하고 남은 잉여소득을 투자한다고 했을때 투자는 공급에 의존하고, 공급은 수요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알면 전체적인 경제시스템안에서 대다수인 빈돌이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고 봐야 한다. 모든 수요의 저점에는 부자가 아닌 대다수의 일반 수요자들이 있으며 그들이 경제의 바탕이 되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부자들의 소비를 위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더 가난하게 만든다는 논리가 기상천외한 발상이라는 장하준 교수의 표현도 공감하지만 한계소비성향과 국민경제시스템의 바탕을 생각해보면 다수의 평범한 국민들에게 맞춰져 있지 않은 경제정책은 국가경제를 곤란에 빠뜨리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북한과 종교 / 심리학적 반발과 투사(psychological reactance and projection)


한국도 조직문화가 서서히 수평적이고 개방적으로 진행되어 가지만 아직까지도 상명하복의 수직적인 직장문화는 '통제와 반발'이라는 비협동적인 이유로  비효율적인 부작용을 보여주는 일이 많은것 같다. '시키면 안하겠다  자발적으로 하고싶다' 라는 항명은 나름대로 권력이 없는 자의 저항의지를 보여주고 있는듯 하다.

한국의 이전 정부에서 '통일정책'은 '이념과 종교'의 헤게모니 싸움을 보여주는듯한 파행을 겪은듯 하다. 이념국가인 북한과 종교적인 마인드가 정책결정의 배후에서 메타결정(meta decision - 정책결정을 결정하는 결정)의 역할을 한듯한 한국정부와는 통일문제에 관해서 근본적으로 합의점을 내놓을 수 없었다는 생각이다.

북한은 종교를 강력하게 거부하는듯 하다. 북한에 종교를 포교하는 행위는 최고의 반역행위로 생각하며 종교적인 믿음은 이념적인 정치지도자에 대한 믿음과 함께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듯 하다. 북한에서 이념과 종교는 심리적인 제로섬관계로서 어느 하나가 북한주민들에게 자리를 잡게되면 한 가지가 심각하게 손상됨을 예측하는듯 하다. 아마도 북한정부에서 이념은 정치지도자에 대한 우상숭배와 결합하여 종교화되었다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는듯 하다.

이념과 종교가 맹목적이고 강력한 세력확장을 의도하게 되면 상대방의 '심리학적 반발'을 불러일으키게 되는듯 한데, 억압과 핍박을 받을수록 강력한 믿음으로 무장하게 되는 종교나 한때 세계에 혁명사상을 전파하겠다는 의지를 가졌던 이념의 '절대 함께할 수 없는 관계'는 종교에 대한 북한의 태도가 잘 보여주고 있는듯 하다. 물론 한국에서 종교적인 마인드를 가진 정부가 북한에 대해서 적대적인 태도를 심하게 보여주는것도 당연하다는 생각이다.

사실은 통일과 같은 거국적인 정책방향이 지극히 세심하거나, 부정적으로 표현하면 졸렬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심리적인 동기에 의해서 좌우되는 현실이 상당히 비합리적인듯 하다. 게다가 한반도에서 이념과 종교는 서로 상대방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다는, 그래서 자신의 결점을 상대의 결점으로 '투사'해서 공격하고 있다는 심리학적인 왜곡상태를 보여주기도 하는듯 하다.

어떤 통찰력있는 미래학자가 한반도의 미래를 예측한다면 한반도는 '이념과 종교'라는 초합리성이 합리성을 구축(毆逐 - 때려서 내쫓음)하여 한반도의 미래를 망가뜨릴것이라는 예측도 할법하다. 한반도의 민중들은 강압적인 세뇌보다 합리적인 설득이 훨씬 유용하다는 경험을 해본적이 없어서 그런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2015년 2월 6일 금요일

근로소득의 중요성 / 토마 피케티



이념이 바탕이 된 정치적 가치에 의해서 쉽게 저평가 될 수 있는 것이 최저임금과 관련된 근로소득인것같다. 기업이냐 근로자냐 하는 양립된 가치를 힝상 생각하도록 교육받은 '이념세계'의 시민들은 기업의 이익과 근로자의 소득을 항상 '적대적인 관계'로 생각을 하는듯 하다.

언젠가 첨단의 IT회사가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끊임없이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나갈려고 R&D에 투자하는 모습을 보고 기업에 대해서 적대적인 편견을 갖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오래전 연구개발로 큰 성과를 거두었던 생산물이 시장에 판매되고 나서(생산물이 시장에서 더 이상 수요를 창출하기 힘든 상황까지)  다시 새로운 아이템개발에 전력하기 위해 비용인력(非用人力)을 구조조정하는 과정에 퇴직근로자가 발생한 것도 이해가 갔다. 기업과 근로자는 무조건 적대적인 관계로 봐야하는 관점은 언제나 무의미한듯 하다.

한국경제가 위축이 된 이유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 중에 가장 피부로 느끼는 심각한 문제가 최저임금과 관련된 근로소득문제인것 같다. 근로소득의 증가가 자본소득을 이길 수 없는 현실이 불평등을 악화 시킨다는 프랑스경제학자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의 충고를 생각해도 그렇지만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는듯 하다.

경제주체들이 부동산에 집중적으로 투자를 해서 집값이 높아졌다. 옛날 어른들은 집을 사기 위해서 10년을 저축을 해야 했는데, 현재 어른들은 집을 사기 위해서 20년을 저축을 하면서 다른 기회비용까지 막대한 희생을 치루게 되었다.사실 부동산을 사고 팔면서 부풀어가는 경제의 맨 밑바닥에는 최초의 부동산 구입을 위해서 희생하는 근로소득자의 '내집 마련에 대한 꿈'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듯 하다. 즉 모든 투기적 자본의 밑바닥에는 근로소득이 희생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면 이 사실을 인지한 모든 근로소득자가 현재의 삶을 중시하는 철학적 성찰에 의해서 집을 사기를 포기 한다면 국가경제는 일본이 당했던 부동산 거품의 붕괴보다 더 심한 환난을 각오해야 될 것인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듯 하다.

이야기가 조금 다른 곳으로 흘렀는데, 사실 근로소득은 내수(內需)랑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필연인듯 하다. 부동산을 사고파는 자본소득자와 같은 상위소득계층과 노동력을 사고 파는 하위소득계층이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서로 연관성이 없는 경제세계를 유지하고 있지 않는듯 하다. 근로소득을 부동산소득에 연결시켜주는, 20년동안 저축을 해서 집을 사고자 하는 근로소득자의 존재처럼 기업이 생산한 생산물을 구입해서 기업의 생산성을 활성화 시켜줘야 하는 소비자의 기능은 필연적인 공공선(共共善)의 과정인듯 하다.

단기적인 예측만 하는 경망스러운 사회, 특히 이념적인 관점으로 기업과 근로자를 양분하는 대립구조로 보는 사회는 미래가 없을 듯 하다.

미국에서는 프랑스보다 거의 20년이나 앞선 1933년에 연방 최저임금제가 도입되었다. 프랑스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국에서 최저임금의 변동은 임금불평등이 전개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놀랍게도 구매력으로 환산한 최저임금은 거의 반세기 전인 1969년에 최고 수준인 시간당 1.60달러(1968년에서 2013년 사이의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2013년도 화폐가치로는 10달러다)에 이르렀는데, 당시 실업률은 4퍼센트 이하였다.

로널드 레이건과 조지 H.W.부시 대통령이 집권한 1980년에서 1990년까지는 연방최저임금이 3.35달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구매력이 상당히 낮아졌다. 이후 연방 최저 임금은 1990년대에 빌 클린턴 정부하에서 5.25달러로 올랐다가 조지 W.부시 대통령 시기에는 그 수준에서 동결되었다. 그리고 2008년 이후 버락 오바마 정부에서 몇 차례 인상 되었다. 2013년 초 미국의 연방 최저임금은 시간당 7.25달러,즉 겨우 6유로 정도로 프랑스 최저임금의 3분의 2수준이다. 이는 1980년대 초와는 반대되는 상황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2013년 2월의 신년 국정연설에서 2016년까지 최저임금을 시간당 약 9달러로 올릴 생각이라고 발표했다.

- Tomas Piketty [CAPITAL in the Twenty - Firsty Century] - 

이념적인 관점을 떠나서 근로소득은 존중받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개인과 기업,국가 모두의 미래를 위해서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2015년 2월 1일 일요일

서민의 시간 / 감정과 도덕성


오래전 끔직한 불행과 나쁜 건강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순간 직감적으로 감정을 보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나깨나 음악을 들었다. 잘못하면 감정이 파괴된 다른 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든 것은 참 다행한 일인듯 싶었다. 말을 줄이고, 술과 담배를 끊고, 육식도 끊고 조용히 근신하며 1년여의 시간을 보냈다. 주변은 나아지지 않았지만 적어도 내 자신은 회복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는데, 특정 종교를 믿는 친구가 내가 '도인'이 되서 나타났다고 깨방정을 떠는 바람에 공격적 전도의 대상이 되서 진땀을 흘렸던 기억이 난다.

친구와의 의리상 몇번 참석하면서 관찰했는데, 맹목적이고, 배타적인 믿음으로 사회적 공감능력이 현저하게 손상된 신자들을 보면서 사회문제화가 되겠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기도 했던것 같다.

세월이 흘러 이념과 종교에 맹목적인 정치인들을 보면서 나같은 서민들을 이해하는 사람은 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문제는 보수나 진보를 막론하고 적용되는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적어도 지금은 내 생각이 옳았다는 판단이 들기도 한다. 많이 어려워진 서민들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서점을 들렸더니 하얀 양장본으로 만들어진 전 대통령의 회고록이 보였는데, 또 진땀이 났다. 피가 거꾸로 솟았다고 하면 좌파나 반 종교인으로 매도 당할 것 같아서 진땀이 났다고만 표현했는데, 책임감없는 정치 지도자의 공감능력없는 결과물을 보았다는 생각에 많이 섭섭했다.

"저 종소리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알려고 하지마라: 그대를 위해 울리는 것이리니..."

이 글은 영국 문학 작품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작가 존돈의 감수성은 감정이입과 배려가 만나는 지점에 남의 고통을 내 것으로 받아들일려는 마음이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타인의 감정을 느끼는 것은 그 사람을 배려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감정이입의 반대는 '반감'이라고 할 수 있다.

감정이입적인 태도는 도덕적 가치판단을 내릴 때에 관여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윤리적인 딜레머에는 대부분 잠재적인 희생자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친구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옳은가? 아픈 친구를 방문하겠다는 약속을 지켜야 할 것인가, 아니면 급작스럽게 날아온 저녁식사 초대에 응하여야 할 것인가? 그것이 없으면 죽게 될 사람을 위해 생명 유지 장치를 언제까지 작동시켜야 할 것인가?

이러한 도덕적 질문들은 전문적으로 감정이입을 연구해 온 마틴 호프만 박사에 의해 제시된 것인데, 그는 도덕의 근원이 감정이입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로서 고통이나 위험, 궁핍등으로 고통받는 잠재적 희생자들에게 감정이입하고 그들의 고통을 공유함으로써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동기가 발생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 하버드 대학 심리학 박사 다니엘 골먼-

잘은 모르지만 작은 고생을 할때는 사회에 대해 도전심을 가지고 복수심이 섞인 야망을 품게 되는데, 고생이 지나치면 마음이 텅 비는 느낌이 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존경하는 정치지도자인 우루구아이 대통령 호세무히카의 자질은 우물바닥에 갇혀서 자신과 싸우는동안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