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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30일 토요일

루소의 역사공부


나는 언제부터인가 좋은 사람이 되어간다. 누군가 싸움을 걸어오면 그 싸움에 응대하기보다는 그 누군가가 왜 싸움을 걸었는지, 배경에는 어떤 생각이 있는지, 나아가서는 저런 기질을 만든 것은 가정사탓인지, 아니면 동류집단에서 유행하고 있는 분위기의 탓인지를 생각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원인없는 결과는 없으며, 반대로 결과를 보며 원인을 유추할 수도 있고, 어떤 열악한 지위나 장소에서도 인간이 있는 곳이라면 무한한 생각의 꺼리를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이 인간사(人間事)라는 사실을 조금씩 깨달으며 삶의 풍요로움을 느끼기도 하는 것 같다. 배움이란 인간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존재하며, 사회는 내속에 있는  다른 욕망들이 배움의 열망으로 대체될때는 비싼 학비를 내는 어떤 학교도 가르쳐주지 않는 것들을  가르쳐주는듯 하다.

루소는 특히 인간을 읽는 방법으로 역사의 도움을 강조하고 있는데, 개인과 사회, 그리고 국가가 어떻게 유기적으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오밀조밀한 피조물들의 세계를  형성해나가는지를 한 눈에 통찰할 수 있는 방법으로 역사공부를 권하고 있다. 방금 '피조물'이란 창조주의 관점에서 표현한 종교적인 단어를 인용한 까닭은 역사공부는 관점을 그만큼 넓혀줄 수 있다는 과장된 표현으로 인용해 본 것인데, 그만큼 넓은 관점을 약속해준다는 확신이 떠오를때가 종종 있는듯 하다.

역사의 도움을 얻으면 철학의 교훈 없이도 인간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이 도움을 얻으면 그는 냉정하고 편견없는 방청자로서 그것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원조자나 그들의 비난자로서가 아닌 그들의 비판자로서 말이다.

- 중략 - 

더구나 역사에 그려진 사실은 진실로 있었던 것의 정확한 기술이기는 커녕 역사가의 머릿속에서 변형되어 그의 이해에 따라 빚어지고 그의 편견에 물들여진다. 청년에 대해서 가장 나쁜 역사가는 그에게 자신의 의견을 가르치는 역사가이다. 사실 그 다음은 만사를 그 자신에게 판단시키는 것이 좋다. 그래서 그는 인간을 배우는 것이다. 만일 그가 항상 작가의 입장에서만 지도하게 된다면 결국 그는 다른 사람의 눈으로서 보는 셈이되어 눈이 없어지게 되면 그는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된다. 

- 중략 -

역사에는 결점이 있다. 그것은 사람과 때와 장소에 따라 확정할 수 있는 명백하고 현저한 사실만을 기록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에 대한 완만하고 점진적인 원인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으므로 언제나 모르고 있다. 역사가는 한 정치가를 그리는데 있어서 그가 보아도 좋도록 그린다. 역사가가 그리는 것은 그 자신보다도 그의 의상을 그릴 뿐이다. 나는 차라리 개인의 전기를 읽어서 인간 마음의 연구를 시작하려고 한다. 

- 루소[에밀]-

제도권 밖에서 인간과 사회를 공부하여 한때 에밀을 저술하고 나서 수배자 신세가 되었던 루소의 자율적인 학습관이 잘 나타나 있는듯 하다. 자연으로 돌아가길 강조했던 루소는 구속받지 않는 생각의 가치를 말하고 있으며 본인이 그 가치를 실증하여 인류역사상 사상의 발전에 가장 큰 변화와 공헌을 한 인물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는듯 하다.

루소의 생각이 현재 내가 속한 사회와 그 구성원들에게 좀 더 가치있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괜한 마음이 아닌것 같다. 이곳은 세뇌 시킬려는 마음과 세뇌 당하는 마음만 만연하고 있는듯 하다. 루소는 독립적인 사고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는듯 하다.

2014년 8월 29일 금요일

북한의 시장경제 / 위로부터의 개혁이 필요


북한에서는 이미 정부의 배급체계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지 오래되어 각 가계의 단위로 '자생적 시장경제'의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북한정부는 시장경제의 인프라가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발생한 시장경제의 출현에 무척 당황한듯 하다. 그렇다고 이념으로 지탱하는 체제에서 혁명적인 변화는 체제유지를 위해서 적극 억제하고 있고, 점증적인 변화조차도 자신이 없는 곤란한 상태에 있는듯 하다. 화폐개혁도 시도해 보았지만 변하지 않는 정치체제는 변하지 않는 경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만 확인한듯 하다.

북한의 변화가 어려운 이유는 당연히 이념적인 체제때문이지만 변화의 모델로 삼을만한 사례가 없을 정도로 기이한 형태로 운영되어온 정체성의 혼란에 기인한듯 하다. 위로부터의 개혁으로 정치는 사회주의, 경제는 자본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중국과는 달리 정부주도로 조세제도나 법률제도와 같은 시장경제의 인프라를 갖추기도 전에 인민들이 시장경제의 좌판을 먼저 벌려버린 결과는 유럽에서 18세기 이전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산업자본주의가 아닌 상업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보여줄 것 같다.

18세기 이전의 유럽의 상업자본주의는 전근대적인 지주의 고리대나 특권상인들의 지배에 의해서 운영되며 전통적인 봉건제도에 기생하는 좋지않은 상황이 지속되었는데,북한의 시장경제도  체제에 적당히 기생하여 부패나 빈부격차문제를 발생시킬 것이라는 사실은 예정되어 있는듯 하다.   

경제시스템에는 손을 놓고, 체제수호에만 전력을 하는 북한 정부의 입장에서는 인천아시안게임에 응원단을 보내지 않는 방침같은, 어떤 이유를 들어서라도 인민들과 외부와의 소통을 단절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할듯 하다. 이천칠백만의 작은 시장규모에서는 식민지를 포함한 광대한 시장을 바탕으로 했던 18세기 이전 유럽의 상업자본주의만도 못한 여건을 가진 북한은 시장경제에서 발생하는 인민의 발산하는 경제적 자유에의 욕구를 막는것이 시급한 문제임을 생각하는듯 하다.

한 편으로는 정부주도로 산업을 발달시켜서 시장경제를 더욱 확대시키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예측되지 않는데, 산업자본주의 발달과 경제규모의 팽창,그리고 지금의 북한체제는 과거 유럽의 시민혁명과 산업혁명 당시를  생각하면 체제에 위협이 될것이라는 불안감을 주기에 충분한 듯 하다. 2000년이전에 중국 진나라에서도 있었던 왕도 옹립할 수 있는 자본가의 힘은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시장경제로의 항로는 닥쳐야 될 운명같은 사건으로 볼 수 밖에 없는데, 계속 방치하여 북한 정부가 붕괴되고 국가가 전체적으로 깊은 혼란에 빠지는 길 보다는 19세기 초의 프로이센의 슈타인 하르덴베르크(Stein . Hardenberg)개혁과 같이 위로부터의 개혁이나 위로부터의 자본주의화를 시도해보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 이전에 이념적인 편견을 벗어나서 경제적인 문제에 전력을 할 수 있는 인재를 육성하고,그 인재가 자신의 견해를 국정에 반영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주는 것이 필요한듯 하다.


2014년 8월 24일 일요일

사상적 놀이감 / 루소


여러분의 학생을 자연의 현상에 주의시켜라. 곧 그는 호기심을 일으킬 것이다. 그러나 그 호기심을 만족시키는데 너무 서둘지 말라. 그의 앞에 손이 닿는 문제를 주어서 그 자신에게 풀게하라. 여러분이 말해주어서 알게 하지 말고 그가 스스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에게 학문을 가르치지말고 그 자신이 그것을 발견하도록 만들어라. 만일 그의 마음속에 이성 대신 권위를 넣어 준다면 그는 추리하지 않을 것이며 타인의 사상적 놀잇감이 되고 말 것이다.  

-  루소 -

주입식 교육과 수동적인 학습습관이 어떻게 우민(愚民)을 만들어 내는지를 잘 표현한 글인듯 하다. 내 경험으로는 생각하기를 멈추고 반복학습을 시작한지 일주일이 되니까 두뇌회전이 느려지는걸 분명히 느끼곤한다. 그러나 살아가는 현실에서는 생각의 영토를 넓힐 기회가 그렇게 주어져있지 않는듯 하다. 타인의 영토를 빼앗지 않고도 영토를 넓힐 수 있는 창조적인 방법인데도 불구하고...... 

2014년 8월 22일 금요일

영혼이 없는 사람들 / Meta-Mood


언젠가 스케이트마라톤 연습을 하기 위해서 지칠때까지 쉬지않고 무표정하게 스케이트를 타고 있는데, 누군가 "저 사람은 영혼이 없는 사람같아"하고 나를 평하는 소리가 들려 섬찟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통제할 수 있는 감정과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의 정체를 고민했던 시간이 있었다. 어찌 어찌 힘든 삶을 살다보니 자제심 하나는 있는 편인데, 이것이 다른 병리적인 모습으로 환원될까 걱정하는 심사도 있었던것 같다.

예일대학교의 심리학자 피터 셀로베이(Peter Saloery 1958 - )는 정서지능이란, 마음속의 정서적인 극장을 메타무드(Meta-Mood) 즉 정서를 느끼고 통제하는 정서를 이용하여 정서를 운영하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의 저자인 스티븐슨은 고향 에딘버러에서 독신이고 근엄한 신사로 존경받는 윌리엄 브로디라는 인물을 모델로 [지킬박사와 하이드씨]를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윌리엄 브로디는 남 몰래 두 사람의 정부(情婦)를 두고 있었고, 수십개의 열쇠를 가지고 도둑질을 하여 그 돈으로 도박을 하고, 불량배를 사귀다가 그 비밀이 발견되어 파멸했다고 한다.

항상 토로하는 내용이지만 한국사회는 정서발달에 상극된 환경을 가지고 있는듯 하다. 이념이나 종교적 광신(狂信)이 정서적 고민을 할 수 있는 여유를 주지 않는 것을 넘어서 경쟁적인 교육이나 빈부격차등의 여러가지 사회갈등등은 '투쟁'이란 개념에 모든 관점을 묶어놓고 있는 형국인것 같다.

더구나 초인적인 능력을 요구하는 수험생활을 거친 사람들의 삶의 궤적은 그다지 사회에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지킬박사와 하이드씨같은 상극된 이면성을 보여주는 경우도 있는데, 개인적인 일탈이나 조직의 병리현상의 범주를 넘어서 사회전체가 안고 있는 문제로 고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90년대 하버드대학교수이자 저널리스트인 다니엘 골먼이 쓴 유명한 [감성지능]이란 책에 이런 내용이 있다.

이러한 '감성적 질병'은 현대를 사는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치르는 댓가이다. 미국인들은 종종 자신들의 문제를 다른 문화에 비해 특히 나쁜 것처럼 비하하는 경향이 있지만, 전 세계적으로도 미국과 비숫하거나 오히려 더 나쁜 수치를 보이고 있다. 예를들면 1980년대의 네덜란드, 중국, 독일에 살던 교사및 부모들은 자국의 아이들이 1976년 미국 아이들이 보여준 것과 비숫한 수준의 문제점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현재 일부 국가의 아이들은 미국보다 더 악화 상태에 처해 있는데, 그 중에는 호주, 프랑스, 태국등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현상도 그리 오래 갈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현재 미국내에서 EQ(감성지능)능력의 하향 추세가 다른 모든 선진국들보다 가속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험에서는 부유하든 가난하든 그 어떤 아이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모든 종교, 인종, 소득 집단을 막론하고 보편적인 문제점들이 드러나고 있다. 비록 EQ능력의 지수에서는 가난한 아이들이 가장 악화된 수치를 보여주지만 수 십년간 그들이 타락한 비율은 중산층이나 부유한 아이들에 비해서 더 나쁜것도 아니었다. 한 마디로 모든 계층의 모든 아이들이 꾸준히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중략 -

아동복지의 국제적인 비교연구로 유명한 코넬대학교의 발달심리학자 유리 브론펜브레너 박사는 말한다.

'적절한 지원체계가 뒷받침되지 않는 오늘날과 같은 상황에서는 외부적 스트레스가 너무 커서 결속력이 강한 가정들을 분열시킨다. 일상적인 가정 생활의 소모성, 불안정성, 불일치성이 교육을 잘 받은 사람들이거나 부유한 사람들이거나를 막론하고 우리 사회 모든 영역에 만연해 있다.

위험한 것은 다음 세대, 특히 남성들로서, 이들은 자라면서 이혼, 가난, 실업등의 파국적 영향을 가져오는 파괴적인 세력앞에 무방비상태로 놓이게 된다. 현재 미국 아동과 가족의 위상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절망적이고, 우리들은 수많은 아이들에게서 그들의 능력과 도덕적 품성을 빼앗고 있다. "

이는 단지 미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노동 비용 감축을 통한 경쟁력 창출이라는 경쟁에 몰입한 곳이면 어디든지 나타나는 현상이다.

- 다니엘 골먼 [감성지능] -

2014년 8월 14일 목요일

자기통제 / 마쉬멜로 테스트


한국에 교황이 방문했다. 존경 받는다는 많은 성직자들이 있지만 유독 교황의 방문에 존경이 담긴 관심이 집중되는 이유는 무엇일까.감히 세속의 눈으로 판단해 보건데 그건 아마도 자기 통제의 실천에 있어서 모범을 보인 상징적 존재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뭔가 얻을 수 있다는 '비젼'도 중요하지만 현대인 특히 한국인에게는 뭔가 버릴 수 있다는 배리(排利)의 의지도 많이 아쉬웠던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컬럼비아대학교 교수인 윌터 미셀(Walter Mischel 1930 - )은 마시멜로 테스트라는것을 해보았다. 아이들에게 마시멜로과자 한 봉지씩을 주고 지금도 먹을 수 있지만 30분후에 먹으면 과자 한 봉지를 더 주겠다고 하였다. 30분을 더 기다린 아이들은 정서조절능력이 좋은것으로 평가되고, 훗날 학업성적부터 생활까지 모든 면에서 참지 못한 아이들과 비교해 현저한 우세를 보여주었다.  

영국의 청교도 혁명 당시에 의회파군을 이끌고 왕당파군을 무찌른 크롬웰은 자신의 금욕적인 생활을 국민에게 강요했지만 많은 저항을 받은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기 자신에 의한 자발적 통제와 타의에 의한 통제를 이해못한 까닭인듯 하다. 스스로 자신을 통제하는 노력은 자신의 능력으로 화(化)하지만 타의 강요로 인한 자기통제는 화(禍)의 결과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듯 하다. 한반도의 북쪽에도 강요로 인한 자기통제를 하면서 혼돈과 절망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일이 있다는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비젼만을 제시하고 자기통제를 소홀히 하면 어떨까. 순간 순간은 희망과 기대감이 지탱하겠지만 시간은 절망과 배신의 결과를 약속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노력없는 결과물이란 있을 수 없다는 가장 기본적인 법칙을 잊은 까닭인듯 하다. 정치인들이나 종교인들처럼 형이상학적인 부문을 다루는 이들은 비젼이나 강요를 강조하는 오류를 보여주기 쉬운듯 하다. 현대인들의 대중적인 성향과 인과(因果)를 주고 받으면서 이런 성향은 점점 증폭되어 가는듯 하다.  

항상 고민하고 있는 일인데, 내 자신이 내 뜻대로 안되는듯 하다. 영원히 그럴것 같지만 그런 인간의 한계를 극복할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참된 인간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한다. 시지프스와 같이 결과를 못보는 노력일지라도.......

2014년 8월 9일 토요일

필요와 욕망의 효용성 / 이 순신 장군


임진왜란 직전에 조선의 조정 대신이 꿈을 꿨다. "커다란 나무가 폭풍에 쓰러지고 있는데, 거기에는 백성이라고 하는 것이 주렁 주렁 매달려 있었다. 그런데 그 쓰러지는 나무를 등으로 버티고 있는 이가 있으니 이순신이라고 하였다." 그 시간에 일본의 전국을 통일한 토요토미히데요시는 조선과 중국을 아우르고 동남아까지 진출할 수 있는 대망을 꿈꾸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살기 위한 자와 가지기 위한 자의 투쟁이 시작되고 살기 위한 자의 저항이 가지기 위한 자의 욕망을 이겨낸 사태가 벌어졌다.  그리고 또 얼마후 가지기 위한 자는 쓰러지고 기다리던 자가 모든 것을 가져갔다. 고독한 성웅 이순신장군과 토요토미 히데요시 그리고 도꾸가와 이예야쓰 세사람의 이야기다.

우리는 욕망이라는 것에 너무 큰 가치를 두고 있는듯 하다. 그리고 욕망이 사회를 움직이는 동인(動引)이 된다고 말한다. 가진 자로부터 가지지 않은 자까지 모두 욕망의 정당성을 부르짖는다. 때로는 사회발전을 위해 촉진시키고자 하는 움직임도 있다.

그러나 욕망이 가져다 주는 효용은 필요가 가져다 주는 효용만 못하다. 의무감을 가진자의 노력은 성취감을 가진자의 노력을 이긴다. 살고자 하는 자는 배부르고자 하는 자를 이긴다. 그런데 기다리는 자는 더구나 '인생은 무거운 등딱지를 짊어지고 먼 길을 떠나는 것과 같다."고 말하는 거북이와 같이 걸어 간 자는 이겼는지 졌는지는 모르지만 모든 것을 가진다.

이순신 장군이 더 슬프고 고독해 보이는 것은 도구가와 이예야쓰의 존재 때문인듯 하다. 백성들이 이순신 장군에게 큰 빚을 졌다. 그런데 그 보다 이순신 장군을 더 고독하고 슬프게 보이도록 하는 것은 그렇게 힘들여 막아놓은 땅에서 서로를 이기고자 하는 아귀다툼이 있는 일이다.

독일과 한국의 철학과 통일


독일의 철학자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 -1969 )는 나치에 협력하기를 거부하고  유태계인 부인과의 이혼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교수직에서 쫒겨나면서 한계상황에 처한 자신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인간 이성의 한계를 인식하고 '포괄자'라고 하는 합리적인 이성으로서 해석할 수 없는 초월자를 인식함으로써 이성의 한계를 인식해야 한다고 말한다.

야스퍼스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배경에는 독일이 추구했던 지나친 이성과 합리성의 철학적인 세계가 합리성이란 명분으로 나치와 같은 비극적인 결과물을 초래한 것에 대한 저항감이 기반한 것이라고 한다.

잘은 모르지만 독일은 철학의 나라이며 대단히 합리적인듯 하다. 이성과 의무감을 중시하는 칸트의 철학이 독일에서 탄생했으며, 헤겔의 변증법이 독일에서 탄생했다. 유태인인 마르크스가 고안한 과학적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과학적 합리성이란 이름으로 탄생한 것도 독일이다.

독일의 합리적인 성향은 때로는 정직함과 고지식함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야스퍼스는 모든 것이 합리적으로 해결될 수는 없는 것이라고 이성의 한계를 말하고 있지만 여하튼 독일은 그 합리적인 성향을 이용해서 끊임없이 현실 세계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연구하며 개선해 나가는 노력을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는듯 하다. 아직도 독일의 철학과 과학은 세계 최고의 수준이며 독일인들은 교육과 같은 사회문제의 해결에 있어서도 합리적인 개선방안을 내놓고, 그것을 시행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듯 보인다. 심지어는 한국과 유사한 '통일문제'도 자발적으로 시원스럽게 해결하는 일에 있어서 조그만 땅덩어리 안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를 내부투쟁의 근거로  '활용'하고 있는  한국의 비합리적인 성향과는 많이 다르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차대전을 일으킨 독일은 분단의 사태도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발생시킨 반면에 한국은 원인과 결과가 주변정세에 의해서 수동적인듯 싶다. 아직도 총체적인 망상에 빠져있는 북한이나 통일을 한반도의 '사회문제'로 인식하지 않을뿐더러, 통일한국의 미래를 생각해보지 않는 한국은 독일의 합리성과 능동적이고 이성적인 문제해결의 방식을 많이 배워야 할 듯 싶다.

한국은 철학이 부족한 나라임은 항상 아쉬운듯 하다. 과학적이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만들어진 이념도 한국에서는 비합리적인 '망상'으로 변하는듯 싶다. 한국인들의 생각속에는 고려하지 않고 의지하기만 하는 종교적인 사고가 '철학적인 사고'를 위한 시간과 공간을 내어주지 않는듯 하다. 한국의 사회분위기는 욕망과 본능, 감정에 충실하라고 가르치는듯 하다.

'생각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는 태만함은  댓가가 큰듯 하다. 북한사회는 그 폐해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듯 싶다. '생각하지 않는 작위(作爲)'가 사회발전의 발목을 잡은 인류역사상 두고 두고 사회과학 연구의 대상이 될 기이한 일들이 북한에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한국도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없는듯 하다. 자유주의 시장경제시스템이란 명분하에 이기심이 공동체의 생존에 위협이 되고 있는 현실은 사회정체나 후퇴의 위기감을 자극하고 있는듯 싶다.


2014년 8월 8일 금요일

좋은 책과 등소평


몇일전 티브이에 장애가 있으면서도 신문배달을 하고, 책과 더불어 살아가는 이의 이야기가 나왔다. 고전을 비롯한 양서들을 많이 읽은 사람이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지만 상당히 인상이 깊었다.특히 요즘 시대 그 중에서도 한국사회는 속도감 있는 변화와 물질적 성취욕구, 감각적이거나 감정적인 사고등에 밀려 깊이 있는 책 읽기가 참 힘든 사회인 것 같다.
 
 
다음은 등소평이 외우고 다녔던 맹자의 한 구절이라고 한다.
 
 
하늘이 장차 이 사람에게 큰 임무를 내리려 할 때에는
반드시 그 심지를 지치게 하고, 벼마디가 걲어지는 고난을 당하게 하며
 
그 몸은 굶주리게 하고, 그 생활은 빈궁에 빠뜨려
하는 일 마다 어지럽게 하느니라
 
이는 그의 마음을 두들겨서 참을성을 길러주어
지금까지 할 수 없었던 일도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니라

1967년 문화혁명 당시에 홍위병에게 심문받을 때 반혁명분자임을 인정하고 모택동주석 만세와 문화대혁명 만세를 외친 등소평은 잘못을 인정하면 살려주겠다는 회유를 거절하고 대쪽같은 자존심을 지키고 생명을 잃은 유소기와는 달리 ‘변절의 유연성’을 보여주었다.
 
결국 확고한 목적의식을 인정받아 73년 복권되어 중국을 새로운 국가로 만든 실용주의 정책노선을 실천해 나가게 되는데, 어려운 상황들을 맹자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이겨나간 등소평의 이야기는 이천년전의 맹자가 이천년후의 중국을 바꾸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 형국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한 편으로는 많은 고전의 가르침들이 교조화 되거나 신앙화 되어 저자 본래의 의도와는 다르게 고전 자체가 숭배를 받는 불상사도 있고, 한권의 책만 읽은 이에 의해서 독선과 아집의 수단이 되기도 하지만 이천년을 읽혀지는 고전은 이천년의 가치가 있는 것은 사실인듯 하다.
 
책을 읽고 사색한다는 것이 무엇을 가져다 준다는 오해를 해서는 안될 것 같다. 읽고 사색하는 과정은 세상의 일부분인 자신을 형성해 나가고, 더불어 세상을 형성해 나가는 과정인 듯 하다. 어느 날 떠오른 생각에 붓을 든 맹자는 죽간에 옮겨진 자신의 생각이 이천년이 지나 십오억이 넘는 후손들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다 주리라는 예상을 했을까 의문이다.
 



2014년 8월 4일 월요일

드워킨의 평등


언젠가 민주화 운동을 했던 정치인이 국민들에게 정치적 권리를 찾아 주었더니 막상 선거때 되니 기존의 권력에 투표권을 행사하더라며 낙담했다고 하던 언론기사가 생각난다.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사람들을 만나보면 사회적 약자라고 모두 선한 것이 아니고 사회적 강자라고 모두 악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때가 많은데, 그래도 사회적 약자편을 들려고 하는 사람들은 사실 '공정성'의 편에 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좀 더 다양하기도 하고, 좀더 포괄적이지 못한 것일 수도 있고, 좀 더 정의롭지 못한 것일 수도 있고, 무엇보다 기득권을 가진 자나 그렇지 못한 자가 '이기심'이라고 하는 당연하면서도 꼬인 심사로 취급받는 마음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음을 알게되면 '누군가'를 위해서 투쟁하는 노력의 허무한 결론을 예상하고 기대하는 마음이 좀 덜할 것도 같다. 사실상 상대는 '불공정성'이라고 하는 보이지 않는  존재임을 알게되면 더욱 그럴듯 싶다.  

뉴욕대 법대학장인 드워킨(Ronald Dworkin 1931 - )은 기존의 좌파 우파개념은 과거의 자유권과 같은 권리의 평등한 분배나 경제적 자원의 평등한 분배에 촛점을 맞춘 개념이라고 말한다. 20세기 후반에는 여성이나 각종 소수권리자들을 위한 평등같은 문제는 좌파나 우파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다만 모든 다양한 대상의 평등성을 포괄할 수 있는 개념으로 '인간의 평등(treating peoples as equals)'이 현대의 정치이론에서 핵심적으로 조명받아야 할 평등의 개념이라고 말한다.

한국의 정치환경은 이와같은 포괄적이고 다양한 '인간의 평등' 을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엽기토끼와 공감거북이


무더운 여름낮에 토끼와 거북이가 경주를 가고 있었다. 승부욕이 강한 토끼는 거북이보다 빨리 도착하기 위해 서둘렀다. 서둘러서 달리던 토끼는 피로해서 휴식을 취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깨지 못해 거북이에게 졌다. 그날 이후 패배한 토끼는 성질이 아주 나빠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믿거나 말거나.........

거북이는 '어차피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없으니 서두를 필요없다."는 명언을 남기고 오래 오래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거북이가 장수하는 이유가 있다. 믿거나 말거나......

요즘 계속되는 엽기적인 사건들의 이면에는 비교와 승부와 경쟁심이 있는것 같다. 생각해보면 비교와 승부와 욕망은 양면적인 가치를 지닌듯 하다. 승자에게는 행복을 패자에게는 불행을 확실하게 보장해준다. 욕망은 강한데 패하면 아주 나빠진다. 사회에서 상류층이냐 하류층이냐 따질것 없다. 승부는 어디서든지 존재하기 때문이다.

잘난 사람은 잘난대로 못난 사람은 못난대로 살면 되는데, 한국사회는 비교의 잣대를 확실하게 쥐어준다. 학창시절부터 성적경쟁이라는 승부와 경쟁의 습관을 들여논다. 1등만 빼고 모두 패자다. 그렇다고 나머지가 1등을 하기위해서 노력하면 사회가 발전한다고는 하는데,(그렇다고 해도 그게 무슨 발전인가 싶지만......)어차피 1등이 한명이라는걸 아는 나머지는 에너지를 다른 곳에 쓴다. (에너지를 다른 곳에 써도 좋은데 쓰면 좋겠지만......)경주를 못간 토끼처럼 엽기적으로 변하는 사람도 있을듯 하다.

요즘 위로는 지도층 인사의 고난이도의 엽기행위부터 아래로 하층민들의 사납고 투박한 엽기행위까지 인간으로서의 따스한 정서와 공감능력을 잃어버린 공통점이 있는듯 하다. 죽어라고 노력해서 누구나 행복한, 특히 부우자가 될 수 있다는 신뢰감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마 천리마 운동이나 백삽뜨고 허리 안펴기 운동을 하던 북한도 지금쯤 진짜 강성대국이 되지 않았을까.(자기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 말고 남도 인정해주는......)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다. 좋은 정서는 진실된 노력의 동기가 된다. 인간성을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교육시스템과 사회시스템은 바뀌어야 할 것 같다. 좌파적인 의견이 아니라 거북파적인 의견이다.

2014년 8월 2일 토요일

백년동안의 고답(古踏) / 제한된 합리성


어느 날 연로하신 분과 논쟁이 있었다. 오랫동안의 경험으로 만들어진 직관에 승복하라는 주장이었는데, 세상은 변했으므로 경험으로 만들어진 직관도 수정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시는게 좋지 않겠냐고 제안을 드렸다. 운동장에서 운동을 하다가 새로운 스타일로  운동을 하고 있으니 '우리사람'으로 여긴 누군가가 일일이 운동스타일을 간섭하기 시작했다. 순간 젊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옛날 그 시절 그 스타일"의 연륜을 짐작하게 했다.

행태주의 이론을 내놓은 경영학자이며 심리학자인 사이먼(Herbert Simon 1916 ~ 2001)은 전통적 경제학의 핵심개념인 합리성과 비용편익분석등은 사람들의 주관적 가치관이나 심리적 요인같은 형 이상학적인 요인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고 말한다. 정보의 부족도 합리적인 판단을 그르치게 한다고 하는데, 사이먼은 이것을 '제한된 합리성(bounded rationality)'이라고 말한다.

사실상 완벽한 합리성이란 인간세계에서 존재할수 없는데, 합리성을 추구할려는 인간의 노력은 '현 상태의 개선을 위한 노력'임을 항상 주지(主知)해야 할 듯 하다. 개선의 의지가 망각된 합리성이란 과학적 합리성을 내세우면서도 퇴보해나가는 북한의 예에서도 보듯이 목적전치현상의 결과를 참혹하게 보여주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사회는 북한과는 반대로 합리성에 저항하는 스타일을 많이 보여주는듯 한데,대칭적 사회의 필연적인 모습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합리성이란 추구하냐 추구하지 않느냐 문제도 아니고, 합리적이냐 비합리적이냐의 상반되고 양극적인 문제도 아닌듯 하다. 어떻게 생각하면 움직여야 하는 인간의 숙명과도 같으며 결과 보다는 노력과 개선의지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개념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국사회의 비합리성의 역사적 뿌리는 참으로 깊은듯 하다. 조선왕조의 전근대적인 시기, 일제치하의 전체주의적인 억압, 이념대립등의 시기를 겪으면서 합리성을 계산하지 않는 습관조차 붙어버린 사회에서 비합리적인 분위기가 사회개선의 의지가 없이 불로소득처럼 한국사회에 뿌리내리기 좋은 조건을 갖추었음을 여러가지 사건을 겪으면서 자주 인식하곤 한다.

사회문제의 개선을 위한 노력이 습관이나 타성 또는 대칭사회인 북한에 대한 부정과 결부되어 관심을 집중시키지 못하는듯 한데 북한사회처럼 여러가지 요인과 결부되어 장기적으로 정체된 사회가 만들어질 가능성이 보여지기도 하는듯 하다.

'합리성의 추구'란 한국사회가 노력해야 할 '끝나지 않는 길'인듯 하다.


2014년 8월 1일 금요일

교주(敎主)와 무사(武士)


요즘 세간을 뒤흔든 어울리지 않는듯한 장면이 하나 있었다. 한국에서 일어난 대 참사와 관련된 어느 종교의 교주일가와 그 경호무사로 알려진 여성의  체포장면은 사건의 본질을 벗어나 대중적인 관심을 모았다. 궁극의 경지를 향해 타력(他力)에 의존하는 종교와 자력(自力)에 의존하는 무사도(武士道)의 합일(合一)된 장면을 보는것 같았는데, 인간을 이런 경지까지 교육시킬 수 있는 교주의 숨은 능력은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탄성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본에서는 극히 보통 사람들까지도 이 종류의 [연달]의 범위에 도달할려고 노력한다. 영국의 불교연구의 권위자인 찰스 엘리오트는 어느 여학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하고 있다.

"그녀는 토오쿄오의 어느 유명한 선교사를 찾아와서 크리스챤이 되고 싶다는 뜻을 알렸다. 이유를 묻자 그녀는 비행기의 승무원이 되고 싶어 견딜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였다. 비행기와 크리스트교와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가 설명해 보라고 하자 그녀는 비행기의 승무원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매우 침착하고 일함에 있어서 흐트러지지 않는 마음을 갖지 않으면 안되며, 그리고 그와 같은 마음은 종교적인 훈련에 의하여 의하여 비로소 획득된다는 것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들었다. 그런데 종교 중에서 가장 우수한 종교는 크리스트교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가르침을 받으러 왔다."고 답하였다는 것이다.   

- 루즈 베네딕트 저 [국화와 칼]중에서 -    

'무아(無我)를 획득하기 위한 길'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서양의 종교나 한국의 미륵신앙등은 외부에서 도래할 절대자의 존재를 기다리며 자아(自我)를 버려 나가는데, 일본인들은 철저하게 독립적으로 자아를 버려 나간다. 심지어는 '죽음'이라는 궁극의 경지를 이용하여 자아를 버려나가기도 한다. 이 두가지 방법이 모두 목적의 달성, 완성, 행복, 구원등의 인간적인 약점을 극복하지 못하는 '인간으로서의 애틋한 한계'를 보여주고 있지만 교주(敎主)의 지능과 배짱은 이런 인간의 한계를 철저하게 파악하고 이용함에 있어서 경탄할만한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