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일터에서 일의 귀천(貴賤)에 대한 의식과 임금격차, 건강을 지킬 수 없는 근로시간등에 좌절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일인당 국민소득이 두배로 상승하는 동안 노동력을 배치하기 위한 공공부문의 노력이라든가 교육시스템등은 현저하게 개선되고 있는데,개인 각자의 삶은 별로 나아지지 않는 문제는 정책결정자들의 노력과 국민의 현실이 평행선을 긋고 있다는 좋은 예가 되고 있는것 같다.
좌우 성향으로 양극화 되어있는 정치적 사고가 국민의 복지에 관한 제안을 좌파적인 의견으로 매도하는 동안 '세 모녀 자살사건'등이 발생하여 대중의 의식을 자극시켜야 대책을 서두르는 정치시스템의 사후적 개선조치는 근본적인 문제를 소홀히 하는 대중정치의 단점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경쟁과 복지는 한 배를 탈 수 없는 개념인듯 하다. 개인의 발전이 타인을 이기기 위한 승부욕으로 부터 얻어낸 에너지에 의존한다는 생각이 바탕이 되어 있으면 더욱 그런것 같다. 경쟁과 비교의 문제는 수직적인 사회구조속의 어떤 계층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노숙인들 사이에서도 우월한 자와 열등한자의 차별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 우리 사회에서 뿌리깊게 자리잡은 이데올로기인듯 하다.
복지가 되면 일을 소홀히 하여 영국병을 만들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는듯 하다. 영국이 복지국가의 시험대에 섰던 시절, 자유주의 이념의 개척자이며 산실(産室)로서 역할을 한 영국인에게는 복지라는 문제가 좀 당황스러운 면이 있었던듯 하다. 공동체 의식보다는개인주의적인 사고가 뿌리깊은 영국에 있어서 주어진 복지는 격렬했던 개척과 전쟁 이후에 '휴식'과도 같은 시간을 마련해 주었던듯 하다.
가난과 경제성장기의 고단한 삶을 살았던 한국인에게도 복지가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리라는 추측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제 경제의 주역이 되고 있는 세대들에게 어려운 시절에 만들어진 개인적인 경쟁 이데올로기를 강요해서 근면성을 끌어내는 방법은 '옛것'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가끔 신세대의 젊은이들에게 일이 없어도 돈이 주어진다면 일을 하겠느냐고 질문하면 일을 하겠다는 답변이 대부분이었던것 같다. 물론 그 일은 공무원과 같은 안정된 일자리를 원한다는 답변도 많이 돌아옴으로써 불완전한 사회 안전망에 대한 공포가 이면에 자리잡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사람에게도 우월한 자와 열등한 자가 있듯이 직업에도 귀천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을 느끼는데, 공동체에 필요한 직업에 그 만한 댓가가 주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경쟁과 우월감이 지배하는 사회시스템이 효율적이라는 생각을 할 수가 없는게, 패자의 능력은 사장(死欌)되어 버리는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인간의 개인적인 속성을 볼때, 타인의 에너지를 섭취하여 자신의 에너지를 생성하는 문제는 국가공동체 전체의 입장에서 보면 '절반의 실패'라는게 확실하기 때문이다.
500만의 인구로 어려운 여건에서 국가가 번영해 나가기 위해서는 열등한 국민의 능력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는 핀란드인들의 생각은 시사하는 바가 많은것 같다.
수정자본주의 정치학자인 홉 하우스(Leonard T, Hobhouse 1864 ~ 1929 )는 '적자생존의 논리'가 중심이 되는 사회적 진화론의 영향을 받은 고전적 자유주의 사상을 반대하여 개인의 발전이란 사회공동체 모든 구성원들의 복지를 동시에 추구할때 가능하다고 말했다. 개인의 운명을 사회구조적인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고 이야기한 홉하우스의 말대로 이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에 '복지와 기여'를 통하여 국가와 개인의 쌍방소통이 원활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어렸을때 누군가 "커서 출세하라"고 하면 모두가 출세 할 수는 없는데, 별로 좋은 일이 아닌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 마음들이 무엇이 옳고 그른건 이해하지만 내 자식은 우월하기를 바라는것 처럼, 국가를 이끌어가는 정책결자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가는 이해하지만 한국은 우월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세계화 시대에 최소한의 마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경쟁이 바탕이 되는 발전은 반드시 한계가 올것이고, 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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