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한국에서 고시열풍이 불었다. 권위적인 정치환경에서 사회의 수직적차별에 민감했던 젊은 인재들이 너도 나도 고시에 뛰어들었다. 심지어 명문공대생의 많은 수가 법과목을 수강하고 고시에 뛰어들었으며 재학중에 3대고시를 합격한 어느 수재의 합격기는 그런 추세에 기름을 부었다. 어린시절 공학자가 꿈이었음에도 개인적인 상황때문에 수직적 또는 권력적 차별관계에 무척 민감했던 시절이라 2년정도 공부를 해보았다.그리고 오랫동안 그로인해 생계를 유지했는데, 직업의 사회공헌도에 대한 고려나 개인적인 적성과 관련해서 시행착오를 크게 겪었음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는 시절이었던것 같다.
90년대에는 미국에서 어려운 여건에서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얻은 어떤 공학자는 대덕연구단지에서의 열악한 환경과 열악한 처우로 공학박사학위를 얻는데 들어간 만큼의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 사법시험을 합격한 기사가 신문에 실린것을 보았다.
세월이흘러 많은 시민들이 '교양인'이되고 수직적인 사회관계가 점차 수평적인 관계로 바뀌며, 정보통신의 발달로 젊은이들의 불같은 열정을 끌어낼수 없을정도로 '고시'의 가치는 평범해진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제는 안정된 직업인 '공무원'이란 직업에 관한 열풍이 생겨나 많은 젊은이들을 공무원시험공부에 열중하도록 만들고 있다.
아담스미스의 자유주의 경제사상,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케인즈의 큰정부주의 경제사상, 프리드먼의 신자유주의 경제사상이 경제학의 이념적 틀을 짜주면서 사회를 경제와 관련하여 이념적인 관점으로 견인했던것 처럼 고전학파와 신고전학파경제사상은 인간의 가치보다는 '생산성'과 '비용편익'의 계량적인 관점으로 견인했다.
노벨상수상자인 경제학자 베커(1930~ )는 '인적자본이론'을 내세워 시행착오를 겪는 경제학적 연구의 오류 이면에는 일을 하는 노동자인 '인간'에 대한 관심이 소홀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마르크스의 '노동자'를 위한 경제이론도 비판하고 있는데, 당위에만 그쳤지 실제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지 않은 면을 지적하고 있다. 내가 생각하기도 특히 한국에서는 '노동자'의 존재가치나 처우개선을 위한 여론이 마르크스의 계급주의 경제사상에 연루되어 '좌파적인 의견'으로 왜곡되기 쉬운 문제가 있는듯 하다.
한국에서 인적자원배분이 장기적으로 왜곡되는 문제의 이면에는 다양한 직능집단이 국회에 진출하거나 또는 정당등을 구성하는 정치적 투입기능을 상실한 면이 있다는 생각이다. 대체로 법률이나 이념적인 사상학습을 받은 인문학적 인재들은 정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어서 여론형성의 역할을 하기쉬운데 공학자나 기술인 또는 그밖에 여러 직능집단의 인재들은 정치적 센스와는 거리가 먼 인재로 취급당하는 면이 있다는 생각이다.
한국에서 '현업'과 관련된 인재들(흔히 이야기하는 노동자)들의 처우나 근무환경에 대한 요구는 '좌파'라는 누명을 쓰기 쉬운 이념적 프레임에 갇힌 정치환경이 한국의 인적자원 배분을 왜곡시키는 주범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매번 현업의 현장에서 심각한 문제를 느끼면서 살고 있지만 개선의 길은 한없이 먼 현실을 느낀다.
인적자원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기 위한 노력등이 국회를 비롯한 정치권내에서 정치인의 개인적인 이익과 연루된다면 더욱 개선의 여지가 없을듯 하다. 정치인은 한 시대의 주목받는 직업군들로 구성되어있기 때문이다. 사실 근원을 캐어보면 경제의 바탕은 '적재적소에서 일을 하는 인간'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은 진리인듯하다.
미국의 꺼지지 않는 성장동력을 본받고자 하는 한국내의 견해는 미국의 경제가 오랫동안 탄탄하게 구축되어온 과학기술인적자원들로 지탱하고 있음을 잊은것 같다. 미국의 자유주의 경제의 모습을 말하기전에 햄버거와 콜라를 먹고 티브이를 보며 여가를 보내는 뚱뚱한 주민들의 이면에는 치열하게 노력하여 뛰어나게 성장하는 미국의 과학기술인력이 있다는 사실을 잊은듯 하다. 미국은 완전한 자유방임주의 경제라서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는것이 아니라 많은 자원과 실속있는 인적자원배분, 국방과학기술이 견인하고 있는 기술력등이 미국경제를 지켜주고 있는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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