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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7월 5일 금요일

남도부(하준수) / 불의가 불의를 낳다.


남도부는 1921년 함양산이다. 공수도 고단자로서 전일본 대회에서 우승한 경력이 있는 그는 일본군 징집을 피해 지리산에서 '보광당'이란 독립군단체를, 부호였던 하씨집안의 가세(家勢)를 기반으로 이끌었다. 해방이 되자 이승만 전대통령의 경호대장역할을 하였는데, 친일파들이 득세하자 환멸을 느껴서 월북하게 된다.

남도부는 월북하여 오진우가 교장으로 있던 대남공작원 교육기관이자 인민군 장교교육기관인 강동정치학원에서 유격전을 교육시키다가 육이오 발발이후 인민군 유격부대 사단장으로 동부전선으로 남침을 하게 된다. 전세가 남한측의 우세로 기울자 대구 팔공산에 고립되어 빨치산활동을 하다가 부하의 배신으로 체포되어 사형당하였다.

남도부의 일생은 한국역사의 왜곡된 단면을 보여주곤 하는데, 사상이라는 것이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자리잡을 수 있다는 것도 보여준다. 독립군출신 경호대장으로서 친일파들과 함께 할 수 없는 상황이 이념적으로 변성(變性)되어 가는 과정을 겪은 대표적인 예가 되었기 때문이다.  

지리산의 경험과 개인적인 무골(武骨)성향으로 꽤 우수한 무장(武將)의 역할을 했는데, 체포되고 나서 국군쪽에서는 그의 재능을 아까워 해서 사형을 막을려는 의견도 있었다고 한다.

자유진영쪽에서 항상 경계의 대상이 되었던 공산주의의 인간을 경시하는 급진적인 유물사관은 남도부의 부하였던 인민군 소위 지춘란에 대한 사형집행과정에서 엿볼 수 있는데, 이념앞에 한 인간의 생명이 얼마나 무력한지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한것 같다.

대구 팔공산에서의 공작이 실패하자 책임추궁과정에서 남도부 사령관은 홍만식이라는 부관을 불러 첫임무가 실패로 돌아갔을때 실패한 동무에게 어떤 처벌을 내리게 되냐고 물었다. 홍만식은 생매장이라고 대답했고, 지춘란 소위는 파랗게 질렸다. 곧 남도부 사령관의 간이 군사재판이 열렸고, 마적단과 팔로군에서 총을 메고 10대시절을 보낸 지춘란 소위는 잘못을 인정하였다. 

사형은 집행되지 않고, 번복되어 지춘란소위에게는 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졌는데,친일파와의 헤게모니 싸움에서 밀려 인민군의 선봉에 섰던 남도부나 핍박받는 한민족의 운명을 몸소 체험하면서 이념투쟁앞에 생사의 갈림길에 수없이 서야하는 지춘란 소위의 운명이나 비숫하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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